경천대 안내센터
1,자천대(自天臺)로 알려진 경천대(擎天臺)
경천대는 상주 낙강 경천대로서 고려. 조선을 거치며 낙강 700리의 제1경으로 알려진 명승고적지가 되었다. 경천대 입구의 조형물은 강화유리와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다섯 개의 유리 구조물은 하늘을 손으로 떠받드는 손가락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투명한 유리는 낙동강 맑은 물을 닮은 순순함을 의미한다. 또한 기울어진 방향이 화합을 소망하는 듯한, 정점을 향한 그리움을 의미한다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서 입구 바로 들어서면 왼쪽에 옛날 마을 입구를 지키던 무서운 장승과는 달리 미소 짓고 있는 해학적인 모습의 다양한 장승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 곳에서 벚나무의 가로수 길로 오르다 보면 높이 8.5m 폭 22m인 폭포가 보인다. 그 앞에 정기룡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는 동상이 있는데 때로는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그 동상 위에 올라타서 폼을 재는 관광객도 보인다. 여름에는 분수와 물이 흘러 내려 그 장엄함을 더해 시원함을, 겨울에는 얼음 꽃 빙벽으로 유명하다. 폭포 오른쪽에는 어린이 놀이시설과 수영장, 썰매장이 있고 폭포를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서면 경천대의 유래비가 있다.
그 맞은편으로 가면 돌탑거리(길이 300m)가 나온다. 돌탑은 16개월간 7명의 직원과 6명의 공공근로자가 경천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겠다고 땀 흘려 쌓은 돌탑길이다. 이 돌탑길은 333개의 계단과 108기의 돌탑이 있으며 계속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를 향하여 시원한 솔 숲길을 맨발로 걸어가면 건강에 좋고 따뜻한 햇살 아래 맨발로 황토를 밟으며 거닐면 기분이 더욱 상쾌해지는 황토길(길이 70m)도 나온다. 최고봉인 무지산(159m) 정상에 설치되어 있는 지상 3층의 전망대까지 올라가면 용소바위가 한 눈에 들어오며, 낙동강 1300리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경관인 우리나라 지도를 뒤집어 놓은 것과 똑같은 형체를 볼 수 있다. 또한 겨울에는 호맥을 재배하여 이것을<감 먹는 한우>사료로 활용하여 육질이 아주 좋은 한우고기로 유명한 약 100ha인 중동의 회상들과 저 멀리 활공랜드가 있는 덕암산(일명 밀개산 또는 건지산), 주흘산, 소백산, 청화산까지 보이고, 북쪽에는 우담 채득기선생이 주로 산책을 하며 글을 지은 곳으로 유명한 옥주봉과 안동의 학하산, 문경의 대야산, 상주의 갑장산, 노음산 등 주변의 유명한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제1의 전망대이다. 2층은 상주시의 농, 특산물 전시 및 유명한 관광지를 사진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사진찍기 좋은 곳’이라는 인지표가 붙어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경천대를 알리는 많은 홍보물 사진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이곳에서는 봉황(또는 오리)이 물을 먹고 있는 모습과 비슷한 바위. 즉, 정기룡장군이 용마를 얻었다는 설이 있는 용소바위와 낙동강의 신비를 간직한 천혜의 절경으로 당초에는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자천대(自天臺)’라 불렀던 경천대(擎天臺),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그리고 정기룡 장군이 맹활약하여 상주성을 탈환하고 60회 이상의 전투에서 승리 한 곳의 배경과 함께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여기서 철 계단을 타고 경천대 방향으로 내려오면 경천대 바로 앞에 조성되어 있는 맨발의 체험(길이 100m)을 할 수 있다. 이곳은 돌로 지압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만들어져 있고 입구에는 발 지압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어 지압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준다. 이곳을 체험하고 우담 채득기 선생이 1628부터 은거하면서 충절과 북벌의지를 다지며 공부하고 가뭄이 심할 때에는 악공과 무희를 동원하여 음악과 춤을 추며 기우제를 지냈다는 무우정(舞雩亭)에 올라 옆을 보면 조선 시대 부산에서 올라오는 소금을 싣고 다니는 배를 묶어 두었다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당시 낙동강의 수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곳에서 왼쪽을 보면 봉일정 세 바위를 두 손으로 떠받드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경천대가 보인다. 경천대에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남쪽의 중간에 우담 채득기(선조 37~효종, 1604~1647년)선생이 필요해서 만들어 썼던 돌그릇(石器) 세 개가 있다. 왼쪽에서 소연분(小蓮盆.연을 기르는 것)·관분(盥盆.세수대야)·약분(藥盆.약물을 제조하는 것)순으로 놓여 있다.
‘돌그릇에 대한 그 용처를 정확히 밝혀 놓은 것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상락문회기(上洛文會記)>(1697·숙종23)밖에 없다. 식산을 비롯한 각처의 선비가 도남서원에서 강회하고 이곳 자천대를 유람하여 다행히 자천대 사실 기록이 남게 된 것이다.
“아래가 제일 넓고 가운데에는 않을 수 있을 정도다. 전면에는 바위를 뚫어서 소연분(小蓮盆)·관분(盥盆. 세수대야)·약분(藥盆)을 각각 한 개씩 만들어 놓고 있었다.’ 출처:<식산선생문집>(권17),
경천대를 사랑하는 모임의 발표에는(2007.11.22)말구유가 아니라고 적혀 있다.
약분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만 떼어 낙동강 쪽으로 가면 절벽 중간쯤에 나뭇가지 사이로 동굴이 보인다. 이 동굴에 이무기가 살았는데 우담 선생이 무우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고부터(용소 쪽으로 도망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설도 있다. 그 곳에서 다시 연분 쪽으로 돌아와 좁은 길을 따라 위로 오르다보면 작은 비석이 보인다. 그 비석의 상단 가로에는 경천대(擎天臺), 세로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命天地 崇禎日月)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경천대의 봉일정에 세워진 비석은 1637년 1월 병자호란 후 나라에서 明나라의 숭정(崇禎)연호사용을 금지시키자 자천대(自天臺)의 봉일정(峰日亭)바위에 대명천지(大明天地)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씨를 새겨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케인 청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방청사상의 뜻”으로 우담 채득기 선생이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의 경천대비에 쓰인 글씨는 봉일정 바위가 아니라 비석에 쓰여 있어 이것은 후일 숙종대왕 때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출처: 제 3호 사벌! 사벌인! 2008, 5, 25)
그곳에서 또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봉일송(1945년경의 소나무), 경암송(1989년경의 소나무)이 봉일정 바위에 뿌리를 박고 꿋꿋히 서 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맑고 깨끗하여 물 밑의 모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며 강가에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가 보인다.
이 곳은 육지의 명장 충의공 정기룡장군(1592,명종 17년~1662)이 경천대 남쪽의 용소에서 용마 한 마리를 얻어 이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그는 이 용마를 타고 상주성을 탈환하였다고 하며 1592년 10월에는 상주 가판관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60회 이상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육지의 명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의 말의하면 용소에서 번개처럼 날쌘 말이 백사장에서 뛰어 나와 놀다가 물속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날개가 달렸다고도 하고, 때로는 날아다니다가 내려 오더라던 것이다. 그래서 정기룡이 ‘세상에 정말 그런 말이 있을까?’하면서 군침을 삼키며 그런 말이 있다면 꼭 한 번 타보고 싶어서 어느 날, 그가 경천대 위를 거닐고 있을 때 정말 회색 바탕에 검은 점이 큼직큼직하게 찍힌 아주 경쾌하게 생긴 말이 용소에서 번개같이 날쌔고 재빠르게 뛰어 나오더라는 것이다. ‘저 말을 얻어서 내 한 몸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백성들의 가슴에 평화를 되찾아 주고, 기쁨을 안겨 주리라.’ 어떻게 하면 저 말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궁리를 하여 백사장에다 꼭 사람처럼 생긴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는 말이 허수아비에 몸을 문지르며 장난을 칠 때 정기룡은 번개처럼 달려들어 갈기를 움켜쥐고 말 등에 뛰어 올라 날뛰는 말을 쓰다듬다가 채찍을 가했더니 말은 마치 구름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기룡을 싣고 강변 모래사장을 한 바퀴 휘 돌았다.고 한다.
‘과연 하늘이 내린 사람에 하늘이 내린 말이로구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감탄의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예부터 ‘성인이 나면 기린이 나고, 장군이 나면 용마가 난다’는 전설이 있듯, 훗날의 정기룡 장군을 위해 하늘이 보내준 용마가 어찌 주인을 몰라 보았으리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이 용마가 함께 산야을 달리면서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으니, 경사도엔 이 용마의 발굽이 아니 거친 데가 없을 것이다.
‘상주성 탈환은 상주성에 왜병이 많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1592년 11월 23일 정기룡 장군은 화공법으로 상주성을 되찾는 작전을 세웠다. 400여 명에게 횃불(사람이 많게 보이기 위해 양 손에 2개씩 횃불을 듬)을 준비시켜 남서북 삼면으로 둘러서게 했다. 그리고 세 문에 많은 나무를 쌓아 화구를 준비하고 장수들을 배치하여 동쪽문은 적의 퇴로를 열어 둔 것이다. 또 장정 100여명을 선발하여 세모난 몽둥이를 들고 동쪽문의 밤나무 숲 속에 숨겼다. 서쪽 병사들의 피리 부는 것을 신호로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횃불을 붙여 들었고, 정기룡은 장대에 큰 횃불을 붙여 들고 종횡으로 치달으니 불빛은 대낮같이 밝았다. 적의 막사에 불이 붙고, 화염이 마구 터지고, 군사들의 함성이 진동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왜적은 당황한 나머지 불빛과 함성이 없는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숨어있던 밤나무쪽 병사들이 일제히 내달아 몽둥이로 쳐서 수많은 왜적을 죽였다고 한다.’ (출처: 상주의 뿌리,2001년)
경천대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목교, 출렁다리, 상도 촬영지가 나온다. 상도 촬영지 뒤로 올라가면 구름다리와 팔각정이 나오고 경천대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우담 선생이 쓴 봉산곡의 시를 써 놓은 내용을 볼 수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문보각이 있었던 터를 볼 수 있다. 그곳에서 경천대 입구 쪽으로 나오다보면 우담선생이 살았던 집터였다고 기록해 놓은 내용을 볼 수 있고 그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MTB(자전거)도로, 오른쪽으로 가면 경천대 식당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야영장(배구 및 족구를 할 수 있는 미니 경기장고 캠프파이어와 양영을 할 수 있는 취사장 샤워장등 다양한 체련단련시설물이 나온다. 계속해서 올라 가다보면 전망대에 올라갈 때 보았던 유래비를 볼 수 있다. 유래비 근처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오고가면서 쌓아올린 돌탑들도 보인다.
유래비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嶺南文化의 脈이요 젖줄인 洛東江의 神秘를 안은 無知山 驚天臺는 天惠의 絶景이다.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自天臺로도 불리는 아름다운 28경의 勝地에 忠魂이 서려 있어 더욱 이름났다. 雩潭 蔡得沂先生이 舞雩亭을 짓고 捧日亭 바위에 大命天地崇禎日月 8字를 새기고 올 곧은 충절의 뜻을 키웠다. 1637年(仁祖 15)淸나라 審陽으로 볼모로 잡혀간 세 王子를 모시고 8年 만에 돌아와 鳳林大君(1649年 孝宗卽位)을 도와 北伐의 意志를 다졌으니 이때부터 驚天臺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壬亂때의 名將 鄭記龍 將軍이 이곳 龍沼에서 龍馬를 얻었다는 傳說이 서린 이곳의 배어난 景觀을 金常憲 柳疇睦등 많은 문사들이 節操와 自然을 讚美하는 名文을 남겼으니 그 風光 그 情趣가 洛江 푸른 물에 비치도다 우담선생의 天臺別曲,즉(鳳山曲)은 이곳의 景致와 나라 爲한 기개(氣槪)를 읊은 歌詞 이기에 그 한 句節을 뒤에 새겨 기리고자 한다. 이제 由緖깊은 이곳에 하나의 돌을 세우나니 自然을 배우고 人倫의 高貴한 精神을 이어받아 億萬年 이 땅에 길이 흐르고 흘러 빛나게 하리라. 1989년 6월 15일’
유래비에서 내려오면 경천대 벚나무 가로수 길을 오르면서 보았던 폭포와 정기룡장군 동상을 다시 볼 수 있다. 폭포 앞에 경천대 관리사무실이 나오는데 그 뒤에 토끼 관찰장이 있고 폭포 앞에는 제기차기, 팽이치기, 훌라우프, 투호던지기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그 옆에는 갑옷을 대여해 주는 곳(장군의 동상이나 백마, 갑옷, 칼 등의 시설 및 장비를 준비하여 보다 실감나는 장군의 용맹함을 체험하는 장소)이 나온다.
경천대 안내센터
경천대 하루에 3명씩 근무, 향청 안내센터는 2명씩 근무
상주 경천대 7월 30일 부터 주차비 무료입니다.
활동명단
12명중 7명
강경모, 김숙자, 김명균, 김현수, 노명희, 심평상, 조용권
새마을 관광과
과장 김용묵
계장 김동혁
담당 윤종연
안내센터
1,향청: 531-9645
2,경천대:536-1003
낙동강1300리 물길중 제1경
경천대
전국 스카우트 연맹(1,000여명 경천대 방문)
상주 성백영 시장님, 서원 과장님도 참석했지만 사진에는 없네요.
상주 탈환을 한 정기룡장군 동상 (인공폭포 앞에서)
소금 배를 묶어 놓던 소나무
4대강 사업이 한창입니다
고기배가 저 멀리로 통통 거리며 떠나가네요.
원추리
비비추
양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