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사단과 싸움이고 죄와 육체와 싸움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안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샬롬 곧 평화라는 것은 싸움이 끝이 나야 오는 것이지
싸움 중엔 평화가 없습니다. 반드시 정복이 있고 난
다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샬롬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완성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기 때문에 이 둘이 서로
싸워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갈5:17)
그런 상태는 평화가 없습니다. 결국 신앙은 자기 스스로
싸움이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싸움입니다. 성령께서는
끝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와 하나가
되는 멍에 메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개혁신학,
청교도신학은 반복이라고 말합니다. 그 반복을 루터는
위대한 교환(great exchange)이라고 말했습니다. 또는
위대한 거래(great transaction)라 합니다. 로마서 7장과
같은 상태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도다' 항상 이러고 맙니다.
또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려고 하지만 내 속에
있는 한 법이 나를 죄의 법 아래로 끌고 가서(롬7:23) 나는
할 수 없구나 해야 할 텐데 안 되는구나, 기도해야 할
텐데,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할 텐데, 정직해야 할 텐데,
사람이 이렇게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롬7장은
선언합니다. 그래서 롬7장은 심리학입니다. 그러다가
합리적인 것은 자신이 행하고 불합리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 하는 자유의지를 앞 세운 신앙이 유통이 됩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이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올 땐 두 발이었지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한 다음에는 세 발로 걸었습니다.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발로 보무도 당당하던 사람이 주여 나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사오니 주님으로 인해 걷겠습니다.
고백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철저히 의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훈장이 아니고 자신의
안 된 치부를 드러내는 자기 부끄러움입니다. 결국 천국의
상이용사가 뭐냐? 내 마음대로 자행 자지하며 돌아다니는
의지의 다리가 부러지고 주님을 나의 지팡이로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야곱이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상황의 싸움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얍복강의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삶의 문제가 뭔가 그 요인만 분석하는 일만 계속하게 됩니다.
욥이 그렇잖아요? 엘리바스나 소발과 빌닷이 와서 철학적인
말을 욥에게 해 줄 때에 나는 너희들이 하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지만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사람을 번뇌케 하고
더 고민스럽게 하는 것일 뿐 해답이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곧 진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분석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나아갈 길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그 사람에 대하여 대안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해낼
해답이 없으면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 마세요. 그 사람의
안 된 부분을 지적하지 마세요. 그것은 빌닷이나 소발이나
엘리바스처럼 내가 판단했던 그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께 먼저
가고 그 사람에 의해서 내가 용서를 받아야만 주님의 용서를
받는 그런 비극에 들어갈 염려가 많습니다. 욥이란 사람이
고민을 하긴 많이 했습니다. 고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원천적인 고민, 즉 하나님과 관계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빨리 보여 주셨습니다.
그 똑똑한 빌닷이나 소발이나 엘리바스 보다는 욥에게
더 빨리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어찌하든지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을 하겠다는 마음이 욥에게는 있었고,
엘리바스나 빌닷 소발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지식으로
남에게 가르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과 욥의
친구들과는 격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에 그것은 성령님과 자신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요한일서까지 이루어지면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미 거듭난 땅, 거듭난 심령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 생명의 말씀이 자라고 이 생명의 말씀이 드디어 사랑화
되어 가는 건데 그 기본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의 성령 안에서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사귐이란 것은 한 멍에를 맨다,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상태가 되어야만
그 다음에 생명이 역사하고, 사랑이 역사합니다. 부디 주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 참으로 좋은 마음의 밭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때에 심령의 밭에 기쁨이란 열매가 계속 열리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날마다 죽노라 고백해도 남고 또 남는
지긋지긋한 나의 옛사람으로 심령이 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