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훈
벌써 데뷔 2 년을 훌쩍 넘어서 신인 시절을 돌아보며 책까지 내게 되다니...
데뷔 초기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가슴 벅찬 일이 아닐수 없다.
책을 내면서 문뜩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데뷔전 연습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금 신인때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언제나 내편인 엄마 그리고 깊은 사랑을 아끼지 않는 팬들의 사랑에 정말 감사한다
생크림 범벅이 된 생일파티
오늘도 녹음을 끝내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
여전히 팬들이 동부이촌동 아파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핏보니 지방에서 함께
올라온 팬들까지 30명도 넘는 것 같다.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회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아는 척을 해주면 다른 팬들에게도 늘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순간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가벼운 눈인사만 하고 집안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그런 내 마음도 편하지 않기는 마찬가지. 동생 같은 팬들이 집앞이나 녹음실 앞에서 새우잠을 자며
나를 기다리는 것이 몹시 안쓰럽다.
입에 가면 남부럽지 않은 '공주' 들일 텐데, 나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안
한 마음이 앞선다. 대부분의 팬들은 중고생이 많지만 때로는 유치원생이 사무실 앞에서 기
다리기도 한다. 반대로 어머니 연배쯤 되는 분들도 나를 위해 쓴 팬레터를 손에 꼭 쥐어주
시고는 총총히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 딸애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나도 좋아하게 됐어요. 우리 딸아이와 함께 쓴 편지랍니다."
나를 아들처럼 예뻐해주시는 마음이리라.
얼마 전에도 아들처럼 나를 대해주셨던 팬의 부모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 아버님이 중
학생 정도 돼 보이는 팬을 데리고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셨다.
"위 애가 중학생인데, 잠깐 말 좀 할 수 있을까 하고····."
굉장히 연세가 많으신 분이셨는데, 하도 수줍어하셔서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얼른 아버님
과 함께 온 그 팬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사인도 해주고 잠깐 동안이지만 그 친구와 얘
기도 나누었다.
"누구나 젊었을 때 가수나 배우 한번씩 안 따라다닌 사람이 있나 내 딸이지만 나쁜 길로
나가지 않고 그냥 좋아하는 오빠처럼 따르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요즘 부모님들은 신세대인 것 같았다. 그런 부모님을 둔 그 친구가 참 행운아라는 생
각이 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팬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자리는 팬클럽과의 공식모임에서이다. 그
런 행사가 있을 때면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우쭐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서 생일축하를 받은 행운아가 또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라고 소
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2월 22일, 스무 살 생일을 맞아 나는 수처
명의 팬들로부터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성훈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나머지 다섯 멤버와 수천 명의 팬들의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퍼졌다.
나는 "후우∼" 하고 촛불을 껐다. 그러나 그만 우당탕 그 큰 케이크의 맨 윗단이 바닥으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때는 지금이다' 싶었는지 장난기가 발동한 다섯멤버들이 마구 케이크
조각을 내게 던졌다. 나도 질세라 다섯 멤버들에게 생크림 조각을 던지고, 서로들 생크림 범
벅이 된 얼굴을 보면서 실컷 웃었다. 우리들의 이런 자유로운 모습에 팬들도 재미있어 했던
것 같다.
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왕자가 된다.
타고난 무대 체질
"한 마리 커다란 뱀이 가운데 있고 수없이 많은 뱀들이 큰 뱀 주위에서 노는 그런 꿈을 꾸
었단다."
어머니는 작은 뱀은 팬들이고 가운데 있던 큰뱀은 내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의
미 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그런 태몽 탓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연예인다운 끼가 다분했던 아이였다. 세 살짜리 꼬마
가 뭘 안다고, 팝송만 들으면 어디서나 춤을 추곤 해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런 끼
가 가득한 꼬마 아이를 주위 어른들도 가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나를 한번이라도 안아보려
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왔다. 특히 부모님 못지
않은 사랑을 쏟아 주신 분이 할아버지셨다.
"우리 성훈이를 하루라도 못 보면 이 할아버지가 회사 일을 못하겠구나."
내가 갓난 아기였을 때 할아버지는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나를 보기위해 꼭 집에 들르셨
다. 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되자, 새로 나왔다는 장난감은 모두 사다주신 덕에 온
집안이 장난감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그런 끼 많은 나의 첫무대는 할아버지의 환갑잔치였다. 유치원생인 내가 그 당시 유행하는
가요를 불러 주위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거기다 한번 잡은 마이크를 놓지 않고 사회까
지 볼 정도로 나는 확실한 무대 체질(?)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춤솜씨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나의 유연한 춤솜씨는 초등학교 때
배운 태권도 탓이 아닐까 싶다. 태권도와 춤이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몸의 유연성을 기르는
데 태권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게다가 땀이 나도록 몸을 움직인다는 것
의 기쁨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관장 선생님께서는 어머
니께 국가대표로 키워보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셨을 정도였다.
내친 김에 나는 축구나 야구는 물론이고 스케이트보드, 롤러스케이트, 싀 들 운동이란 운동
은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내게 있던 천부적인 운동신경을 마음것 발휘한 것은 초등학교 5,6
학년때. 나는 학교 대표로 또 교육청 대표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늘 맨 마지막 주자였던 나
는 팀을 승리로 이끄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곤 했다. 교육청 대표로 나간 단거리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는가 하면, 내가 속해있는 조가 꼴찌로 달리더라도 기필코 일등으로 만들어내
고 말았다. 운동신경뿐 아니라, 승부욕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육상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달리기 잘하는 것은 집안 내력인지 여동
생 윤지도 워낙 달리기를 잘해, 백팀이었던 윤지가 팀을 승리로 이끌어 으면 청팀을 승리
로 이끌곤했던 것이다. 동생은 그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며 나를 냉정한 오빠라고 놀리곤
한다.
미국에 가서 공부할래요
어릴 때부터 나는 또래들에 비해 조숙한 편이었다. 한참 게으름이나 치우고 장난이나 칠
나이에도 준비물을 스스로 챙기고, 아침에 어머니가 깨우기 전에 스스로 일어났다. 어릴때부
터 웬만한 일은 알아서 해서인지 어머니도 내가 하는 일은 늘 믿고 밀어주시는 편이다.
그런 나였으니, 동생 윤지에 대해서도 아버지처럼 어른스럽게 군 것은 당연지사. 윤지가 동
네에서 친구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날은 온 동네가 난리가 날 정도로 끔찍이 동생을 챙겼다.
다음날 가져갈 준비물이 있으면 문방구에 함께 가서 꼭 사주고, 어릴 때는 윤지 목욕까지
시켜주는 자상한 오빠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받으러 일본에 가있는 윤지를 자주
보지 못하지만 오빠로서 동생이 걱정이 된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가 있어도 네가 먼저 프로포즈 하지마. 알았지?"
대체로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나이지만 동생문제에 있어서만은 아버지 못지 않게 보수
적인 면을 보이게 된다. 그럴 때마다 활달한 윤지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지만, 그런 윤지가
나를 대단하게 보는 순간도 있다. 같은 학생인데 동생에게 용돈을 줄 수 있는 오빠는 별로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오빠, 대단한데……."
내가 용돈을 주면서 좋아서 이렇게 말하는 윤지는 아직도 내가 보기엔 어리기만 하다. 어
릴 때부터 다른 애들에 비해 조숙했던 탓일까?
초등학교 5학년이란 어린 나이에 나는 나의 인생을 바꿔놓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게 되었
다. 학교 대표로 우주소년단에 가입해 다른 학교 우주소년 단원들과 함께 미국으로 견학을
가게 되 것이다. 그때 받은 문화적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학교 집밖의 다른 세상을 전혀
몰랐던 초등학생에게 넓디넓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충격이 었다.
미국에 다녀온 후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한국이 왠지 답답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외국
에 나가서 그곳의 문화를 접하고 보다 색다른 환경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저 미국가서 공부할래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조금더 큰 다음에 다시 생각
해보자."
겨우 초등학생이 당돌하게 이런 말을 하니 어머니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처음에는 그저
'미국에 또 가고 싶어 그러나 보다' 고 생각하셨지만 어림도 없는 일. 나의 결심은 완강했고,
끈질기게 어머니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안되는 일로 여기셨던 어머니도 반신반의하
며 고민하시는 눈치였다. 결국 나는 3년을 졸라 미국행을 허락받아 내고야 말았다.
내가 유학간 곳은 하와이의 미션 스쿨이었다. 바로 꿈에 그리던 미국이었다.
얼떨결에 본 오디션
나는 내가 한 결정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해가며 감행한 미국행이었
기 때문에 적응도 빨랐고 최선을 다해 생활했다. 자유로운 하와이의 공기를 실컷 만끽하면
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전과목 올A를 받기도 했다.
공부만 전념하던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지원이형과의 우연한 만남이
었다. 늘 말없이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형에게 처음에는 별관심이 없었다.그저 같은 반에
있는 한국인 학생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말이 없던 형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 사니?"
아주 사소한 말로 시작된 형과의 만남. 우리는 서로가 말을 하면 할수록 잘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음악과 춤에 빠져있다는 사실이 서로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이모집에서 학교까지는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지원이형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를 비롯해 하와이에 계신 이모 모두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나쁜길로 빠지면 어쩌나, 꽤나 노심초사하셨다.
비록 어리지만 남에게 간섭받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독립적인 생
활을 잘 꾸려나간다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공부는 물론이고, 화장실 청소
며 빨래며 집안일도 깨끗이 하려고 늘 노력했다.
형이 없는 내게 지원이 형은 친형 이상으로 나를 배려해주었다. 춤 잘추고 노래도 잘 부르
던 지원이형과 함께 있다보니 다양한 춤과 음악을 접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러던 나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하와이의 '줄리아
나' 라는 클럽에서 아는 선배형의 생일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그 선배형은 옆방에 음반기획
사 사장님과 PD 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있으니 들어가서 노래를 한번 해보라는 것이었
다.
지원이 형과 나는 "잘 부탁합니다" 혹은 "처음 뵙겠습니다" 같은 말 한마디 없이 그 당시
유행하는 터보의 '나 어릴 적 꿈'을 춤추며 불렀다. 연달아 몇 곡인가를 더 불렀는데, 차피
해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자리에 계셨던 분이 DSP 이호
연 사장님과 은경표 PD였다.
춤을 다 추고 나자, 사장님은 "너릐들 가수가 되고 싶니?"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오디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춤과 노래를 선보였던 나는 엉겁결에 "네!" 하고
크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곧 연락하마."
연락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다음날 선배형으로부터 사장님께서 우리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우리 한번 열심히 해보자."
호텔 로비에서 만난 사장님의 따듯한 그 한마디에 나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멤버들과의 운명적인 만남
"가수? 절대 안된다."
서울에 계셨던 어머니는 나의 갑작스런 국제전화에 펄쩍 뛰셨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 타
국에 보낸 것만으로도 늘 불안했는데, 가수라니!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
의 마음은 이미 가수를 해보겠다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사람은 하와이에 사는 이
모였다.
"내가 하와이에서 지켜본 성훈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기도 하지만 끼가 넘치는 아이였다.
오르긴 해도 꼭 성공할 거야. 한번 시켜보렴."
왕년에 영화배우였던 이모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결국 나는 한 달 뒤였던 1997
년 8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창 5명에서 6명 정도의 댄스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멤버의 수가 6
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사장님,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멤버가 그렇게 많은 그룹에서는 노래부르기 싫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튀어나왔는지 겁도 없이 사장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
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수의 꿈을 접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사장님은 나를 설득하시는
한편, 어머니를 만나 내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품은 가수의 꿈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나의 마음을 돌려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성훈아, 비록 어리지만 사장님과 이미 한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쉽게 네 꿈
을 접을 수 있겠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어머니, 한번 해볼게요. 그 대신, 열심히 할 게요."
그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은 지금의 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부터였다. 착하고
세련된 느낌의 수원이, 워낙 춤을 잘 추는 재덕이형과 재진이형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한 지용이. 지용이는 전교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때부터 나와 붙어다니던 춤꾼 중에 춤꾼이었다.
이렇게 여섯 명이 모이자,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잘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
고 함께 눈물나는 연습시간을 거치는 동안, 처음의 나의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판소리 연습에 기계체조 훈련까지
벌써 2시간 이상 계속된 춤연습이었지만 누구 하나 쉬자고 말하는 멤버들이 없었다. 이때
매니저형이 음악을 멈추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좀 쉬었다 하자."
하지만 또 눈군가가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다른 그룹의 음악을 틀었다. 재덕이 형이 일
어나서 그 그룹의 안무를 똑같이 구사했다. 나도 재덕이 형을 따라하며 기분전환을 하려고
노력했다.
데뷔 전 연습시절, 누군가잠깐 쉬자고 음악을 끄면 잠깐 앉아 있다가도 다시 누군가 음악
을 틀고, 힘들만도 한데 쉬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학교수업 때문에 오후가 돼서
야 모두 모이는 멤버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춤과 노래연습에 미친 사람들처럼 매달렸다.
우리의 열성 덕에 노래와 춤실력이 나날이 늘어간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거기다 우리의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우리가 배우기 시작한 것은 판소리였다. 판소리가
목청을 틔워주고 발성을 좋게 한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우리들은
명창(?)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시작했다. '학원별곡'은 내지르는 소리가 많기 때문에 창
연습은 많이 도움이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익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기계체조. 좀더 남성적이고 격렬한 춤을 보여주
겠다고 생각하니 우선 기계체조로 기초를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힘든 노력의 결과 였을까? KMTV의 '쇼! 뮤직탱크'에 나온 첫방송은 대성공이었다.
방송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칭찬, 앨범 선 주문 20만 장에 발표 한 달 만에 가요순위 10권
랭크, 그리고 동시에 4곡의 히트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리는 서서히 가요계를 평정해나가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2집 앨범을 내고 KMTV의 방송이 있던 날. 내가 좋아하는 곡인 '기사도'의 전주 부분이 시
작되고 있었다. 팬들은 내 이름이 적힌 플랭카드를 흔들며 열광했다. 하지만 나는 온몸에 식
은땀이 흐르고, 배가 너무 아파서 주저앉고만 싶었다.
'혹시 맹장인가? 참아야해, 곧 괜찮겠지. 무대에서 쓰러질 수는없잖아.'
아무리 참으려 해도 배의 통증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노래가 거의 끝나가고 있을
즈음, 시야가 흐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왔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나는 장간막 임파선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불규
칙척인 식사, 무리한 스케줄, 피로가 쌓인 탓이란다.
"성훈아 괜찮아?"
거의 울 듯이 합창을 하는 젝키의 얼굴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병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나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액
땜을 한 탓일까. '기사도'는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젝키는 처음으로 인기 순위 프로
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난 한여자를 알고 한 여자를 믿고 너 하나만을 사랑해 왔어, 하지만 사랑밖에 줄 것이 없
어 날 떠나가 버렸지. 차라리 잘된 것 같아. 날 잊어도 되니 행복한 니가 돼야해. 그렇게 떠
나는 너를 내 가슴에 묻었어. 내겐."
2집 '기사도'를 부를 당시, 나의 의상은 광택이 나는 인조가죽으로 된 긴 코트와 제킷이었
다. 무광택 금속장식으로 '정의의 기사' 이미지를 한껏 낸 것이다. 특히 공작처럼 넓게 펴 세
운 나의 머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개성이 강한 옷차림과 헤어스탈일로 인기
를 한 몸에 받았었다.
게다가 딥하우스 장르로 멜로디 라인의 느낌이 좋은 신나는 댄스음악이었던 '기사도'. 우리
가 처음으로 '기사도'로 1위 영광을 안았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가수가 되면 1위
를 한번 해보겠다'는 내 마음속의 꿈을 이룬 순간이기 때문이다.
데뷔하고 몸이 아팠을 때만큼 힘들었던 때가 한번 더 있었다. 2집의 반응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우리는 3집 앨범을 내고 팬들이 2집만큼 3집을 사랑해줄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3
집은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한 곡이 많이 들어 있었고, 고난위도의 안무도 많았다.
하지만 2집의 활동기간이 길었고 공백기간 동안 뮤지컬과 영화 등으로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낸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곡을 녹음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었다. 타이틀곡인 '무모한 사랑'은 팬들의 전폭적인 사랑
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 '커플'로 우리는 재기했다. 연말 가요대상에서 HOT와 나란
히 가요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기사도' 그리고 젝키의 건재를 보여준 '커플'은 나에게는 잊지못할
곡들이다.
가슴이 아팠던 무대
1997년 12월 세종문화회관에는 우리의 첫 콘서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나는 분장실에서 그들의 함성을 들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최선을 다하자!"
눈이 마주친 지원이형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형의 그 한 마디가 힘이 되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힘이 되는 눈짓을 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대에 올라
섰다. 무대의 시작과 끝까지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한순간 엄습해왔
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우리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와준 수많은 팬들의 무한한 사람을 느
낄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콘서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몸에 탄력이 붙고,
관객의 환호하는 얼굴이 또렷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멤버들과 함께 아카펠라를 부를 때, 나는 눈시울을 붉힐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첫콘서트는
내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콘서트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건강해야 공여
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이브 공연을 위해서는 열심히 체력을 쌓고 폐활량도 늘리
고 목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첫콘서트만큼 의미가 있었던 또하나의 무대가 있었다. 바로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했을 때이다. 천사 같은 아이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있는 모
습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한 줌 밖에 안되는 아이들을 안아줄 수도 없었다. 그 아이들을 안
았다가는 마음이 여린 나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카메라 뒤에서 그냥 아이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노래부르는 것 말고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무척 마음이 아픈 무대였다.
영화면 영화, 뮤지컬이면 뮤지컬 모두 OK!
1998년 우리는 영화 '세븐틴'의 주연을 밭았다. 3억 원이라는 국내영화 사상 최고의 개런티
로 출연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한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영화 찍
기를 망설였었다. 노래하기에도 벅찬 스케줄인데 영화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만약 영화가 실패한다면? 하는 생각까지 들다 아찔했다.
하지만 이미 하기로 결정한 일인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성격이 아닌가? 게다가 영화 속
나의 대사나 비중이 막중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젝키의 이미지에 큰 영
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레디∼액션!!"
1998년 4월, 서울 보광동에 있는 오산고교 앞에서 역사적인 첫촬형이 시작되었다. 우리를
태운 미니 밴과 제작 스태프의 촬영버스가 도착하자,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하교길의 여학생
팬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장할 수 있을까?"
팬들까지 촬영장에 모여 어수선해지자, 인물에 몰입해 연기를 잘할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났다. 모범생 반장역을 맡았던 내가 여자 주인공이었던 김지혜씨와 나란히 교문에 들어서는
장면이 첫촬영 장면이었다. 대사 하나 없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김지혜씨와 다정히
교문을 들어가는 장면은 팬들의 야유와 함성으로 몇 번이나 NG가 나고 말았다.
나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지만 정병각 감독님은 의외로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젝키가 인기가 얼만데…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라며 허허 웃고만 계셨다.
어쨌든 우리의 첫촬영은 무사히 끝마쳤고, 생각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별로 떨지 않고 연기
하는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감독님도 내가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을 해주셨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긴장하지 않고 잘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영화 '세븐틴'을 찍을 때 감독님과 호
흡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영화 찍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오늘 저희가 시사회를 보니 참 어색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우리 10대들의 고
민과 방황이 충분히 전달됐으면 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은 기억해주세요."
시사회날, 우리들은 흥행과 관계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서로를 격려했다. 하지만 영화
개봉날인 7월17일 대한극장에 도착한 우리는 주위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젝키의
전국 팬들이 모두 모였나?' 싶을 정도로 극장 주변이 중고생 인파로 가득 했다.
내가 그렇게 걱정하던 영화 '세븐틴' 은 비디오로 출시돼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우리가 영화 이외에 또 한번의 외도를 감행한 것은 뮤지컬이었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은
바도 있었지만,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뮤지컬 장르에도 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
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알리바바.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성대가
부어오르고 목이 쉬어서 연습을 더 이상 못할 지경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하루 종일
노래만 부르다 어느 때는 너무 힘들어서 울었던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게 연습했던 탓일까. 관객의 반응은 너무 좋았다. 연일 매진 사례에다 젝키가
굉장히 열심히 하는 그룹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웃지 못할 팬래터
나는 지금의 젝키를 있게 한 것은 다 팬들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가끔씩 나는
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늘 웃고 다녀서 방글이라는 별명을 가진나. 하지만 알
고 보면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편에 속하는 마음 약한 사나이가 바로 나 강성훈이다.
그런 내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수많은 팬레터 중에서 나는 한 소녀가 보낸 편지에 유독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골수암을
앓고 있는 한 소녀의 편지는 나의 마음을 늘 아프게 했다. 방송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어
머니에게 그 소녀로부터 편지가 왔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일이었을 정도였다.
"오빠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통증을 잊을 수 있어요. 오빠의 노래만이 내 인생의 희망이니
까요."
그 소녀는 자신의 자세하게 병의 증세와 어려운 가정환경을 늘 편지에 담아왔다. 나는 바
쁜 일정 속에서도 그 소녀의 편지만은 꼬박꼬박 읽어보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
다.
그래서 콘서트장에서 그 소녀를 위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결국 나는 그 소녀를 수소문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주소에 서대문이라는 것만 써서 보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녀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이 편지에 써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그 소녀를 돕고 싶은 마음에 병원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암병동에
는 그런 소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설마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수소문한 끝에 나
는 그 소녀가 암병동에 있었던 소녀가 아니라 정신과 치료를 받던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다. 아무리 팬이지만 속았다는 생각이 느니 마음이 그렇게 언짢을 수
가 없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편지를 보낸 그 친구도 결국 마음이 아픈 친구가 아
닌가! 그런 친구에게 내 노래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나를 좋아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팬에게 고맙다. 가끔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자친구
첫사랑… 누구에게나 콩닥콩닥 가슴 설레는 세 그자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워낙 활돌한
성격 탓에 나는 여자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2 때 만난 그 친구는 그 전의 여자친구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아이에게는 말도 잘 못 걸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식, 눈은 높아서, 너 그 애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애잖아!"
사실 그 당시 나도 학교에서 '한 인기' 할 때였지만, 내가 마음에 둔 그 애가 우리 학교에
서 인기가 제일 좋은 친구인 줄은 몰랐었다. 거의 모든 전교생이 나의 경쟁자였던 셈이었다.
속만 끙끙 앓고 있을 즈음, 우연한 계기로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
누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의 새침해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 친구는 매우 명랑한 성격이
었다.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졌다. 다른 아이들처럼 함께 만나 공부도 하고 아이스크
림도 사먹으러 다니고, 서로의 장래 희망에 대해서도 진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3년여의 우
정을 나눌 즈음, 우리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하와이로 유학을 가게 되었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 친구도 싱가포르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 년 후, 좀더 열심히 공부한 후에 뉴욕에서 만나자."
그리고 1년 뒤 여름, 뉴욕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때의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였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 친구를 다시 본 적이 없
다. 풍문으로는 아직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가수가 된 것을 알고나 있는지, 나
의 음악을 그 친구가 들은 적이 있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 이후로 나는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여자친구 하나 없는 사람은 바보쯤으로 취급되
는 하와이에서조차 나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끔 곰곰히 생각해보지
만, 그 친구처럼 마음에 쏙 드는 이성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외에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아무하고나 사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후에 나는 젝키의 멤버가 되었기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귈 여유가 더욱 없었
다. 하루에 두 세 시간의 수면과 바쁜 스케줄을 비집고 여자친구가 들어올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내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크리스마스나 내 생일날, 착하고 예쁜 여자친구로부터 선물을 받는 상상을 하
는 보통 스무 살인 것만은 분명하다. 만약 내가 여자친구를 사귄다면? 지금의 내 특별한 입
장을 잘 이해해주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다. 내가 오래 전화통화를 못해줘도, 갑작스런 스
케줄로 약속을 어기더라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여자친구 말이다. 때로는 내가 가슴
이 뜨끔할 정도로 나를 혼내줄 수 있는 생각이 깊은 여자친구라면 더욱 좋겠다라는 야무진
상상도 해보곤 한다.
그런 친구라면 내가 방송활동으로 지쳐 있을 때 따듯한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인복이 많은 아이
"넌 인복이 많은 아이야."
어머니는 늘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어릴 때부터 어디를 가든 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란다. 나와 성격이나 외모가 거의 붕어빵인 어머니가 정이 많고 사람들을
좋아하시기 때문인지, 나도 어릴 때부터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며 문앞에 들어설 때는 친구 네다섯 명을 이끌고 오는 것은
기본. 냉장고를 뒤져 먹을 것을 챙겨먹고, 잠까지 자고 가는 일이 허다했다. 아이들 좋아하
는 어머니도 친구들 좋아하는 나만큼 내 친구들을 챙겨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성격이 밝은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인기가 많고 분위기를 이끄는 편
이었다. 학교에서도 친구를 한 부대씩은 끌고 다녔을 당도로 친구들에 휩싸여 지냈다.
그 중에서도 현재 젝키의 멤버인 지용이는 초등하교 때부터 꼭 붙어 다녔던 단짝친구이다.
초등학교 소풍 장기자랑 시간에 나는 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를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이때 함께 한 멤버도 지용이 었다.
우리는 아마 그때부터 젝키의 멤버가 되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지용이의 싹을 알아본(?) 나는 젝키의 멥버로 사장님께 지용이를 소개시켰다.
그렇다고 우리가 공부는 소홀히 하고 놀기만 했던 아이들은 아니었다.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이어서 초등학교 때 지용이와 나는 늘 반에서 일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5학년 때는 부
회장 후보에 나란히 올라 내가 부회장이 되기도 했다. 또 6학년 때는 나란히 전교 회장 후
보로 올라 지용이가 회장이 되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한 셈이었지
만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은 절대 없었다. 선의의 경쟁 속에서 오히려 우리 둘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던 것 같다.
늘 자신만만하고 여유있는 모습의 지용이가 무척이나 안타까웠던 때가 있었다. 바로 내 소
개로 젝키 멤버로 들어왔을 때였다. 젝키 멤버 중 가장 늦게 들어온 지용이는 안무나 노래
익히기도 벅찬 데다가 개성이 서로 다른 멤버들과 분위기를 익히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
때 나는 지용이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에게 지용이에 대한 좋은 얘기들
도 많이 해주고 지용이에게도 춤과 노래에 대해 얘기를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게 소중한 또 한 명의 친구는 중학교 친구인 광중이다. 광중이는 외모로 보나 성
격으로 보나 나와는 정반대의 면모를 가진 친구다. 예쁘장하게 생기고 체구가 작은 나에 비
해 덩치가 큰 광중이는 남자답게 생겼다. 그래서 내가 깡패 같은 친구들에게 맞을 일이 있
으면 늘 나를 대신해 그 친구들을 막아주던 친구였다.
성격은 또 어떤가. 내가 활발하고 늘 생글거리며 웃고 다니는 것에 비해, 광중이는 과묵하
고 늘 무표정하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 못지 않게 따듯한 친구이다.
"성훈아, 나 매니저가 돼보면 어떨까."
"정말? 사실 내가 옆에서 보니까 매니저라는 직업이 쉬운게 아닌 것 같던데… 할 수 있겠
어?"
상황판단도 빠르고 약속을 잘 지키는 광중이가 매니저의 길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속으로
는 잘해낼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가 고생할 생각을 하니 일단은 말리고 싶었
다. 하지만 지금 광중이는 나와 함께 우리 집에서 생활을 하며 로드 매니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자칫 게을러지기 쉬운 내게 꼬박꼬박 운동을 하게 만드는 것도, 거르기 쉬운 식사
를 잘 챙겨먹는 것도 다 광중이의 덕이다.
어쩔 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행운아다. 이렇게 소중한 친구들과 늘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프로듀서가 될까 사업가 될까
"성훈아. 니 꿈이 뭐니?"
"난 가수가 되고 말 거예요."
어린 시절, 친구들의 꿈이 의사나 운동선수였을 때부터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운이 좋은 나는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그 꿈을 이루고 말았다. 그것도 많
은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소위 말하는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런 느낌을 사람들은 알까?
꿈을 이룬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도취
돼서 거만해 지거나 미래를 내팽개쳐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평생 댄스그룹을 할 수는 없을 텐데, 아무래도 생명이 짧지 않을까요?"
기자들이 조금은 망설이며 내게 던지는 질문 중 하나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처럼 열
심히 살면 미래의 내 모습도 아마 내가 좋아하게 될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아직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대단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무언가 열심히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다. 그리고 이제 내 나이 겨우
20살이지만 20년 후의 나의 미래를 꿈꿔본다.
가구가 된 이래, 음악에 더욱 미쳐 있는 나는 20년 후쯤엔 음악프로듀서가 되어 있는 모습
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데뷔 때의 나처럼 어리지만 음악에 깊은 사랑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음반을 제작하는 일은 보람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음악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꽉 차 있다. 그
만큼 피나는 노력이 필요 할 것이다. 내 머릿속 한 켠에는 또다른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다.
20년 후쯤엔 하와이에서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처럼 사업가로 변신해 있을 내 모습이다. 우
리 어머니처럼 예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하며 혼자 키득키
득 웃기도 하는 것이다.
워낙 황당한 생각을 많이 하는 나이기에 '꿈의 빌딩'을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다. 모든 것
을 한 빌딩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멀티빌딩.
나의 사업구상은 이미 머릿속에 끝났지만, 걱정이 한 가지 있다. 사업을 혀면 돈에 대해 지
독해야 하는데, 나는 돈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무언가 나
눠주길 너무 좋아하고 돈 귀한 줄 모르고 자란 탓이다. 게다가 '남자라면 돈 쓸 줄도 알아야
지'라는 생각을 가지신 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에 누가 나보다 먼저 계산을 하는 것을 잘 못
볼 정도이다. 어쨌든 20년 후에 내가 무엇이 되든 나는 지금의 강성훈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결국 나의 미래는 지금 내가 열심히 날아야만 이루어낼 수 있는 미래가 아닐까 싶
다.
나는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후 내게 주어진 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
는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어머니 정예금씨가 말하는 내 아들 성훈이
한참 부모님께 용돈 타 쓰고,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가수생활을 열심히 하는 성훈이를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참 안타깝기도 하다. 특히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는 엄마로
서 안쓰러운 마음이 더 많이 든다.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만 하는 평범한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성훈이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끼를 가진 아이였다. 옷 하나를 입어도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자기가 알아서 코디해 입을 줄 아는 꼬마 멋쟁이였다. 어디서 그런 걸 보고 배웠는
지,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부르던 아이가 바로 성훈이였다. 게다가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동네에서도 소문난 개구쟁이었다.
내 아들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긴 하지만 성훈이는 어려서부터 통솔력이 있었다.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또래 아이들 속에서도 늘 리더를 맡곤 했다. 그리고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숙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바로 인정하지
만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거나, 자존심을 꺾으면 며칠 밤을 분해하는 아이었다.
그런 성훈이를 나는 엄하게 키운 편이다. 세 번은 잘못한 것을 타이르고,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를 때는 따끔하게 매를 들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분하기도 했을 텐데, 그럴 때마다 짜
증 한번 내지 않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바로 인정하는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어느 날,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간 성훈이에게 나는 뜻밖의 국제전화를 받았다.
"저 가수가 될래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화에 나는 몹시도 당황했었다. 한국에 있어도 불안했을 텐데, 미국에
서 가수제의를 받았다는 말에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늘 아들을 믿었던 나는 무작정 반대만을 할 수는 없었다. 성훈이에게 가수가 될 것
을 제의했다는 기획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걱정과는 달리 DSP는 평판이 좋은 기획
사 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것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의 이호연 사장님을 만
나면서였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훈이는 재능이 많은 아이입니다. 키워보고 싶습니다."
한시름 놓긴 했지만, 사실 성훈이의 첫방송을 보기 전까지 마음속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
다.
'한참 공부해야 할 나이인데, 저러다 안되면 어쩌나.'
'정말 성훈이가 재능이 있기는 한 것일까? 내가 허락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하지만 성훈이의 첫공연을 보기 위해 다른 부모님들과 방송국에 갔을 때 나는 나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성훈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끼가 넘쳐흘렀다.
성훈이가 가수가 되면서, 나는 사실 아들을 볼 시간이 너무나 없어졌다. 그 대신 성훈이를
찾아오는 수많은 팬들이 우리집 앞에 늘 진을 치고 있다. 딸 자식 키우는 어미된 입장으로,
성훈이를 보려고 집앞에서 밤을 새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고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
니다. 처음에는 집에 가라고 차비도 쥐어주고, 음료수도 주면서 타일렀다. 하지만 팬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일일이 차비를 주면서 챙겨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젝키의 팬이라는 한 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입에 전화를
걸어왔다.
"성훈이 어머님, 친구가 다를 다쳐서 병원에 치료를 받았는데 돈이 만 원밖에 없어요. 도와
주세요."
내 아들의 팬이라는 사실 이전에,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어 나는 택시를 불러
병원비를 치러주고 아이들을 하나하나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 아이들은 며칠 뒤 고맙다는
예의바른 저화도 잊지 않았다.
4집을 준비하느라 요즘도 성훈이는 밤낮없이 연습에 매달리고 있다. 가족들과 한끼 식사조
차 마음놓고 할 수 없고, 늘 잠이 부족해 얼굴이 핼쑥하다. 자신이 정열을 다 받쳐 하는 일
이지만 몸을 돌보면서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늘 겸손하고 인사
성 바르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성훈이가 됐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