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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사 법안 주지 스님께
관정 큰스님의 정토념불법문을 인연으로 대관령을 세 번째로 넘어 백운사를 처음 방문한 불초 속인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후덕하신 대접을 해주시어 송구스러울 정도로 감사합니다. 깊은 산속, 아늑하다 못해 때로는 적막하고 고즈넉할 도량에서 30년 이상 수도와 수덕 생활을 묵묵히 해 오신 법력이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괴롭고 힘든 수행은 극락왕생의 발판이 될 게 분명합니다.
천하에 어려운 인신, 출가, 정토법문의 수승한 인연을 차례로 다 만나고 큰 선지식까지 만나셨으니, 이제 만년 여생 차분히 념불 수행과 홍법에 전심 신경 전력하시어, 인연 있는 도반들과 다함께 극락왕생의 믿음과 발원을 실행 성취하시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그동안 지나친 심려와 고행으로 건강도 다소 쇠약해지신 듯하던데, 너무 세심하게 신경 쓰지 말고 좀 무심하게 내려놓으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모든 걸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내맡기고 마음 편히 지내시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관정 법사님께서 열흘 가량 머무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만큼 떠나신 뒤 텅 빈 허전함의 여운도 크리라 생각됩니다. 고독은 인생과 수행자의 본질일진대, 로스님의 마음에 무슨 새삼스런 물결이 일기야 하겠습니까?
밥값도 제대로 못했을 불청객 속인에게 려비까지 주셔서, 제가 몹시 송구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불광출판부에 가서 그 돈으로 「단박에 윤회를 끊는 가르침」을 좀 보내 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불광」에서 특별히 감사한 마음으로 20권을 보내고, 공항까지 차 태워준 김윤수 거사님께 드리라고 「화두 놓고 염불하세」 1권과 새로 나온 「료범사훈」 2권(주지 스님 1권, 김윤수 거사님 1권)을 함께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청련화 보살님께도 작은 책 1권 드리고, 감사의 말씀 전해 주십시오.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말씨와 분위기에서 청정한 념불 수행에 정진하시길 기원합니다.
서울 보적 거사 공경합장“
한편 강릉 백운사에서 돌아온 뒤 다시 관정 스님 법회를 찾아가며 지난 9월 22일 꿈에 본 장면이 현실로 나타났다. 정확한 날짜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10월 13일 당시 경찰대 교수이던 정기웅 거사와 함께 청화 스님을 친견하러 성륜사 내려가서 15일 금타 화상 탑비 제막식까지 머물렀으니, 10월 5일에서 12일 사이일 걸로 여겨진다. 먼저 우이동 조그만 가정집 같은 절에 유난히 비좁은 느낌의 방안에서 마정수기를 베푸시는 법회에 동참하였는데, 특히 스님께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꼬고 뒤집어서 우리는 도저히 흉내 내거나 따라할 수도 없는 기묘하고 특이한 밀교 수인을 지어 보여주신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지금 같았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록화해서 재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튿날인지 이어 대전 시내 2~3층 양옥 도량에서 마정수기 법회를 하는 데까지 따라가 잇따라 마정수기를 받았다. 근데 그 뒤에 꿈속에 보았던 험난한 마장이 드디어 나타났다. 굴곡사에선가 승가무술인지 선무술인지 한다는 름름한 무인 거사가 나를 한쪽으로 불러내더니, 자기가 관정 법사님의 법력을 관찰하기 위해 몇 군데 죽 따라다니면서 유심히 관찰했는데, 자기 눈에는 특별한 법이 없어 보인다고 잘라 말하면서, 내가 단정치도 못한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우이동서부터 마정수기 받으러 따라다니는 꼬락서니가 영판 눈에 거슬려 단단히 혼내주려고 별렀다며, 험상궂은 낯빛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한참 엄포속에 훈계를 듣고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물러나왔다. 그때 나는 관정 스님의 현신설법 무대에서 내 배역이 다 끝났으며, 바로 퇴장할 때라고 직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마정수기’라는 선법에 집착하는 내 마음을 불보살님께서 경책하시고자 보낸 금강력사한테 금강저로 몇 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인데, 도고마성을 실감케 하는 현실설법이었던 듯하다.
우이동에선지 대전에선지 분명하지 않으나, 내가 배역을 완성하고 퇴장할 무렵, 당시 통역으로 스님을 수행하던 조선족 강 거사님이 나 같은 불자한테 줘야한다면서, 내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님께 특별히 청해 “南無阿彌陀佛” 친필 휘호를 관세음보살 그림 한 폭씩을 얻어 기념으로 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표구해 서울 자친 댁에 모시고 있다.
7) 청화 스님과 관정 스님의 회통합일
10월 9일 한글날 「료범사훈」의 한글번역판 「운명을 뛰어넘는 길」이 불광출판부에서 ‘법공양’ 시리즈로 나와 성륜사와 변산 실상사 등에 널리 배포했다. 10월 13일엔 정기웅 교수와 성륜사 내려가서 예약도 없이 해거름에 청화 스님을 뵙겠다고 한바탕 소동과 우여곡절(주지 스님과 법거량?)을 치른 끝에, 큰스님께서 자비롭게 맞아주셔서 한참 친견 법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내가 며칠 전 백운사에서 전화로 관정 스님과 청화 스님의 회동을 권청한 일을 념두에 두신 듯, 당신께서 먼저 허운 화상과 관정 스님을 또 언급하셨다. 이에 내가 결례를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 청화 스님께서는 서너 차례 이어진 귀찮은 성가심에도 평정과 자비를 놓지 않고 당신의 뜻을 완곡한 어조로 간명히 말씀하셔서, 더 이상 말이나 뜻조차 필요 없음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그리고 금타 화상 탑비제막 및 만등불사 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이틀 밤을 성륜사에서 묵었는데, 14일 새벽꿈엔 관정 스님을 또 뵈었다.
지난번 선용 스님과 함께 친견한 때인지 이번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청화 스님 법담 중에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내용은, 극락정토의 념불방법이 어떻게 관정 스님의 념불가락(곡조) 하나로 정해져 있겠는가라는 지적과, 자칫 혹세무민할 우려가 있을 수 있다고 간곡히 타이르신 일깨움이다. 물론 나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두 분 법문의 시비나 법력의 고하우열을 가리거나 따지려고 한 적은 없다. 그냥 그런가 보다고 들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두 분 말씀과 경지 모두, 서로 어긋나거나 해치지 않고 함께 온전히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부처님의 도와 법은 상대 현상세계 잣대로 시비선악을 분별하고 재단하는 모순대립에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적 절대 경지이기 때문이다. 사구의 말장난이나 시비선악 희론에 빠지면 이미 궁극에 절대진리 제1의제가 아니지 않은가?
헌데, 불보살님의 가피인지, 참 희한한 법연이 펼쳐졌다. 11월 초순 동산반야회 초청 청화 스님 법회 소식을 전하려고 시립대 김창민 교수한테 전화했더니, 김재광이 솔과학에서 ‘청화 스님 외’ 명의로 편집한 「아미타불 수행법」 책이 나왔다고 알려왔다. 이에 ‘여시아문’ 책방에 가서 확인하니, 정가 7,500원에 11월 15일 자로 조금 앞당겨 펴냈는데, 맨 앞에 청화 스님 「정토삼부경」 해제를 싣고, 중간에 념불요문을 실은 다음, 관정 법사 「정토선정의」와 「극락세계유람기」 일부를 싣고, 마지막에 금타 화상 「보리방편문」과 「삼신일불 도표」 및 「극락왕생 발원문」을 실었다.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참으로 기묘한 시절인연이었다. 성륜사 본연 스님한테 전화해 소식 전하고 여쭈니, 사전 동의 없이 임의 출판한 뒤 법공양으로 몇 권 보내와서 주지 스님이 성질을 내셨는데, 한번 낸 거 어찌하겠냐고 자비로 용인했다고 한다. 백련사 선용 스님 전화거니 역시 비슷한 어조로 말하면서, 관정 스님도 판권독점을 원치 않고 인연따라 널리 펼쳐지길 바라셨으니, 이제 어쩌겠냐고 묵인하는 눈치다.
그때 나는 두 스님의 정토법문을 합친 편집본 발행이, 나를 비롯한 많은 불자들의 꾸준한 념원에 따라 불보살님의 가피로 나타난 감응일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두 분 스님이 미욱한 중생들의 분별망상을 저어하여 유형세계에서 몸으로 직접 만나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무형법계에서는 함께 회동하여 정토념불법문의 홍양 포교를 위해 마음과 뜻이 통한 결과로 느껴졌다. 화신의 상견회동이 끝내 무산한 뒤에, 법신의 회동 합일을 알리는 화현으로 찬란한 무지개가 뜬 것이었으리라!
8) 번역 물의와 마지막 만남
한편, 선용 스님은 그래서라도 얼른 정확한 번역이 나와야 한다며, 나한테 「극락세계유람기」 미번역 부분을 옮겨달라고 재삼 요청해왔다. 허나 관정 스님 법회를 대여섯 차례 따라다니며 동참하면서, 도가 높은 곳에 마장도 높아짐을 눈과 맘으로 직접 실감한지라, 시자 스님 사이에 팽팽히 긴장감 도는 줄다리기 위에서 외줄타기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 내 일기에 따르면, 그때 통역수행을 한 대주 스님과 나는 선용 스님이 보는 앞에서 번역 분담을 언약하였으며, 내 몫인 「정토선정의」는 이미 초역을 마쳐 선용 스님과 교정토론까지 해 넘긴 상태였다.
게다가 출판부 측이 불교서적은 필자가 재가거사보다는 스님일 때 훨씬 더 잘 나간다는 이유로, 스님과 공역 명의로 내기를 강력히 원했다. 정직과 정명을 중시하는 수행자의 본분에서 매우 난감한 문제였다. 관정 스님께 한글번역본의 공식출판에 대해 여쭙자, 역시 인광 대사처럼 불법은 영리나 독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널리 열려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확실히 말씀하셨던 사실을 상기하며, 나는 그 뜻을 선용 스님과 출판부에 전하고 공식출판 명의에서 빠지기로 했다. 세속법학은 전공하는 나로서는 번역자 명의(명예) 하나를 위해서, 아직 저자가 살아계신데 저자의 명백한 의사에 어긋나는 출판을 감행하여 저작권법을 위반하고 불법까지 어길 만용의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미 번역한 「정토선정의」 원고는 선용 스님한테 넘겨주고 알아서 하시라고 맡겼다. 「극락세계유람기」는 한동안 교수공채 응모 준비로 바빠 좀 쉬었다가, 12월 3일 번역을 시작해 2001년 1월 5일 초고를 일단 마쳤는데, 12월 27일엔 한해 인연을 결산하며 새해축하를 겸하여, 선용 스님께 장문에 서신으로 질직심의 수행도량을 진솔히 적어 올렸다.
언론의 영향력이 막강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맙게도 「불광」에 대담 기사가 나간 덕택에 다른 불교신문잡지도 잇따라 보도하면서, 불보살님의 가피로 2001년 이후 관정 스님은 렬화 같은 초청에 호응하여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로구를 이끌고 래한을 거듭하여, 전국을 누비며 순회법회를 절찬리에 성황리에 여신 모양이다. 헌데 아쉽고도 안타깝게도 나는 2001년 3월 1일 전남대 전임강사에 부임한 뒤로는, 교학 및 연구 업무가 바빠서 내 배역을 도저히 찾지 못하고, 4월 관정 스님 래한 때는 소식도 못 들어 뵙지도 못하였다.
그나마 그해 가을 래한 때는, 청주 강재원 선생이 10월 15일(월)에 ‘지금 관정 법사님이 강진 백련사로 가신다.’도 전화로 연락해 왔다. 강 선생은 내 책의 첫 애독자이시다. 나는 일찍이 1992년에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지남」을 써서 자비로 출판해 법공양으로 돌렸는데, 1997년에는 여기서 「료범가훈」 번역본을 합쳐 발행한 법공양판을 전국에 대학, 고등학교 및 국공립 도서관에 널리 배포 기증했었다. 강 선생이 그 책을 학교 도서관서 보고 연락해와, 나와 처음으로 애독자 법연을 맺은 것이다. 그 뒤 내가 「가언록」을 번역해 「불광」 정기구독을 권청했는데, 강 선생이 구독하다가 관정 법사님 대담 취재 기사를 보고 석문사 법회에 참석해 귀의하고 법명까지 받았으며, 그 부인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관정 법사 도량까지 다녀오기도 했단다.
그런 강 선생이 나한테 관정 법사님 래한 순회 소식을 제때 전해주어, 나는 바로 전주 승정 거사한테 연락했더니, 오후에 보살과 함께 내려와 여생 거사랑 동행해 백련사로 갔다. 먼저 저녁공양하고 기다려, 관정 법사님이 오셔서 잠시 친견하고 곧바로 귀가했다. 사흘 뒤 18일 새벽같이 나 혼자 버스를 타고 다시 백련사를 찾아갔으나, 관정 스님은 이미 떠나시고, 관정 스님 법문집 번역과 관련해 선용 스님 마음에 서린 서운함을 풀어드리러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오후 귀교했으니, 그때가 이생에서 관정 스님과 마지막 만남이었나 보다.
관정 스님께서 한국에 와서 현실설법을 펼친 장장 16막 100여장의 대하 연극에서, 나는 불과 2막 5장에 잠깐 조역으로 출연하였고, 막간에 중요한 대담 및 인사를 1번씩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배역은 참으로 귀중하고 보람찬 법연이었으며, 좀 더 진지하게 혼신의 정렬을 다 바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여운을 드리운다. 그때는 스님과 함께 너무도 천진스런 동심 미소로 마음과 말씀을 나누면서, 정작 스님이 백련사 첫 만남 때 선뜻 내주신 사진이며, 허운 화상한테 직접 전해 받으신 ‘조동종(동운종)’ 정법안장을 강릉 백운사 사석에서 마치 귀중한 보물을 꺼내듯 보여주신 것도 그냥 무심히 받고 보아 넘겼었다. 헌데, 81 도인행 가운데 으뜸이라는 영아행을 몸소 보여주신 스님의 뜻을 이제사 어렴풋이나마 조금은 느낄 것 같다. 아마도 스님께서 이러한 시절인연을 내다보고 짐짓 무심히 보여주시지 않았을까?!
그 뒤로 관정 스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간접 소식은 한두 번 더 들렸다. 「월간 불광」 1999년 8월호 ‘선지식 탐방’란에 소개한 정읍 석탄사 청소 스님이 매일 ‘阿彌陀佛’ 10만독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2000년 3월 5일 서신을 올린 적이 있었다. 교수가 된 뒤 여생 거사와 함께 직접 찾아뵙자, 청소 스님이 (대전 관음암 법회에 참석해) 관정 스님과 상견해 필담을 나누셨는데, 관정 스님이 청소 스님의 법력이 더 높다고 존경, 찬탄하셨다는 말씀을 하신 걸로 기억한다. 당사자 일방한테 전해 듣고, 구체 상황맥락이나 필담 문자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 관정 스님의 본의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료범사훈」 넷째 편 ‘겸덕의 효험’에도 자상히 나오듯이, 고래로 중국 고승대덕이나 홍유 명인들은 겸손이 일상생활 말과 글에 습관으로 배어 저절로 나오는지라, 초면에 외교상 언사일 수도 있으나, 청소 스님의 수행이 높다고 하니 진실한 담론일지도 모르겠다. 「관정 스님 일대기에도 자주 나오듯이, 관정 스님은 친필 휘호나 서신에서 제자들한테도 ‘현도’라고 존칭하고 자신은 ‘우사’라고 겸칭하심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종로3가 아미타사나 종로5가 위강원 한의원에 들러 법담을 나누던 인연인지(2003년), 아니면 아미타사서 개설한 아미타정토 불교대학 강의에 초청받은 인연인지(2006년), 관정 스님이 신촌 봉원사 만봉 스님을 례방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을까? 생각나고 말도 나온 김에 전병룡 거사와 함께 단 둘이 택시를 타고 만봉 스님을 찾아 뵙고, 탱화 작업 현장도 둘러보며 법담을 들었는데, 관정 스님이 만봉 스님한테 오래 사시겠다고 축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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