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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영화, 엉클 분미
이지현
씨네21에 영화평을 쓴다. 프랑스에서 영화학을 공부했고, 대학에서 ‘무용비평’ 등 공연예술에 관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예술 분야 전반에 관심이 많다. 미학을 사회에 유연하게 환원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오랜 만이야. 19년 만인가?”
“글쎄, 난 시간 개념이 사라져서 모르겠네요.”
병으로 죽어가는 남자(분미 씨)와 그의 죽은 부인이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재회한다. 부인은 예전과 같은 모습인데 반해, 분미는 많이 늙었다. 헌데 19년 만에 재회한 이들 부부가 처음 나누는 대화가 어째 좀 괴팍하다. 이런 게 아핏차퐁 감독의 유머감각일지 모르겠지만.
지난 달, 인터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씨네21 769호). 어떤 질문이라도 그는 길고 명료한 대답을 해주었고,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예술가다운 면모를 인지시켜 주어 놀랐다. 예술가다움, 그것이 무엇이기에? 물론 그가 스마트했던 것이 새삼스러웠던 탓은 아니고, 다만 자신의 삶을 영화에 반영하고, 또 천천히, 굉장히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을 영화화시키고 있다는 데 감동 받았다고나 해야 하나? 때문에 글을 쓰며 조금은 조심스럽다. 아핏차퐁에게 던진 몇 질문 덕에 영화에 대해 좀 더 깨끗한 감상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글이 <엉클 분미>에 대한 좋은 해설이 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영화 <엉클 분미> 속에는 두 가지의 전생 이야기가 등장한다.
① 묶인 소가 끈을 풀고 들판을 거닐다가, 어느 숲 속에서 다시 주인에게 불려가는 이야기
; 누군가의 전생이기도 한, 영화 전체의 인트로
② 못생긴 공주가 시중과 키스를 하다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 헤어지고,
대신 자신의 내면을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메기와 정사를 벌이는 이야기
그리고 두 명의 과거 인간이 등장한다.
① 19년 전 세상을 떠난 분미 씨의 부인 ; 그녀는 밤엔 밝은 곳이 잘 안보이고, 손은 매우 차갑다.
② 부인이 죽고 난 후 사진의 재미를 알게 되어 연습하던 중, 숲에서 실종된 분미의 아들 ; 아들이 숲으로 간 까닭은 원숭이 귀신이 찍힌 사진을 발견하고 그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원숭이 유령과의 잠자리 후 원숭이 모습이 되었다.
위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사이에 끼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플롯은 단순하다.
Synopsis
신장병으로 죽어가는 ‘분미’에게 살아있는 두 사람, 처제 ‘젠’과 조카쯤으로 보이는 ‘통’이 찾아온다. 그리고 죽은 아내 ‘후아이’와 실종된 아들 ‘분쏭’이 눈앞에 실체(혹은 원숭이)가 되어 나타난다. 이 넷에 둘러싸여 분미는 남은 생을 정리하는데, 그런 그에게 아내의 유령이 사후 영혼은 생명체에 깃들게 된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분미는 전생에 자신이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죽은 다음 자신의 영혼이 깃들 장소를 찾아 숲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마침내 그가 동굴에서 숨지자, 통은 승려가 되(려고 하)고 젠은 침착하게 분미의 장례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들은 시간과 죽음에 대해 (관객과 함께) 생각한다.
<엉클 분미>는 크게 두 가지의 측면에서 놀라운 작품이다.
우선 인트로의 끝부분에 나타나는 빨간 눈의 원숭이 쇼트에서 시작해 마지막 세 인물의 시퀀스까지, 영화 전반의 거의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화가의 눈으로 카메라를 댄 탓인지 이 장면들은 (어떻게 구도를 잡더라도 더 아름답긴 힘들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히 안정적인 균형감각을 보인다. (그런데 이를 비단 이 작품만의 특성이라 할 순 없다. 아핏차퐁의 2002년 작 <친애하는 당신에게>를 보라. 이 작품이 자연을 담은 방식은 32살의 아티스트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치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삶과 세상, 시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이점이 또한 좋다. 아핏차퐁은 이전에 보았던 영화의 틀에서 자신을 과감히 떼어내어 재구성하고, 그 시도가 신선하다. 고다르가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 기존 문법을 뛰어넘는 뉘앙스가 아니다. 차라리 많은 영화를 보고 느끼고, 그리고 그 느낌만을 가지고 다시 자신의 영화 문법을 생각해낸 듯 보인다. 만일 어느 관객이 이 작품을 보고 어렵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작품 자체가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판타지 작품이 가졌던 환상의 틀에서 이 영화의 환상성이 벗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 4가지의 환상 시퀀스가 영화에 나타날 때, 그 연결 부위가 좀 특이하다. 대개 판타지 장면에서 회상이나 특별한 존재의 등장부는 ‘문 혹은 물’같은 통로를 통해 연결되는데, 이 영화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마치 서구 영화의 집들은 항상 유리창을 통해 자연을 내다보는데, 아칫차퐁의 영화 속 태국 가옥은 매번 자연을 향해 열려있는 것과도 같다. <엉클 분미> 속 환상의 장치들은 마치 인물을 감싸는 영화 속의 모기장처럼, 애매하지만 그 실용성에 비해 대단히 아름답게 화면에 나타난다.
그리고 살펴야 할, 시간의 모양
영화를 감상하는 수많은 틀 중에서도 시간, 감독이 생각하는 시간의 모양을 생각하는 감상법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영화에서 이 방식은 유용하게 활용된다(바꾸어 말해 시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자가 더 창조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향수>의 타르코프스키처럼 몽타주를 통해 시간의 압력을 조작하는 감독을 발견할 수도 있고(대부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시간층은 마치 안개층처럼 명확한 지표 없이 이동한다),
로브그리예의 시나리오로 만든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는 서로 다른 세 개의 현재를 제시해 그들이 함께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며 ‘결국 세상은 설명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데, 이때 현재의 연속성은 존재조차하지 않아 시간은 한마디로 ‘끔찍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리 끔찍하진 않더라도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 속 시간 모형 역시 로브그리예와 비슷하다. 이창동의 <박하 사탕>에서 “나 이제 돌아갈래!”는 기차가 다가오는 동안 인물의 머릿속에서 압축되는 과거의 시간들이 폭발하는 순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렇듯 영화에서 시간은 압축되기도 하지만 반면 늘어나기도 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후 이명세의 작품에선 종종 시간은 감정만큼 길게 늘어나는데, 이들 영화 속 이미지의 운동은 운동 자체를 넘어 시간의 깊이를 시각화시킨다. 즉,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안 인물의 팔이 비일상적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그것을 보는 관객들도 자신의 안에서 주관적 시간을 체감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조금 변형된 방식이 <엉클 분미>에 사용된다.
아핏차퐁의 이 영화가 졸음을 유발하는 이유는 한 컷의 길이가 유독 다른 영화보다 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종종 시퀀스가 되어버리는 긴 컷들 속에서 인물들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잠을 자고 무언가 응시한다. 이 동작 없는 이미지의 지속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때론 작가의 의도에다 관객을 데려다주기에 중요하다.
Ⅰ) 주관화된 시간
전기파리채로 벌레를 잡는 젠 아줌마의 모습은 여러 심상을 끌어내지만, 이 장면에서 그녀의 동작이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 것은 유독 눈에 띈다. 윙윙거리는 사운드와 어우러져 생명체를 죽이는 이 슬로우 모션은 액션이 강조되었다기보다, 운동을 통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덮는 행위 자체’가 강조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즉, 천천히 벌레를 죽이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시간을 쪼개어 생각해야만 하는 부분과 일치한다. 시간이 추상화되는 관문 말이다.
Ⅱ) 그 주관화에 관객을 끌어들이면
이 파리채 장면을 보던 어느 관객은 나직이 “업보를 쌓는구나, 불쌍히도!”라고 탄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서구의 관객보다 한국 관객이 태국민의 마인드를 이해하기엔 더 좋은 상태일 거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가진 동양적 환생이나 전생의 개념이 새롭다거나, 이를 통해 이 작품이 21세기형 영화일 거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단지 삶의 싸이클에 대한 아핏차퐁 견해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를 과감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진취성은 인정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그가 내용을 전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에 우린 주목해야 한다. 몇 가지 방식을 통해 추상화되고 주관화된 영화 속 시간이 차후 관객에게로 확장되는 것을 살핀다면 더욱 그렇다.
<엉클 분미>는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라는 설치 미술의 마지막 단계이다. 전체 프로젝트를 통해 감독은 「시각예술과 시네마」의 구분을 발전시키려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전 프로젝트의 사진이 직접 영상에 삽입되는데, 이는 군인이었을 지도 모르는 분미의 전생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삽입을 통해 관객이 이 영화가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데 목표가 있다. 이 부분의 영상화가 매끄럽지 않아 아쉽지만 아무튼, 이 비슷한 과정이 이외에도 있었다. 유령과의 식사에서 잠시 물러난 젠은 단독 풀샷에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는데, 이는 이른바 브레이트식의 소격효과다. 그런데 이 방식이 묘하게도 효과적이다. 영화 속 전생과 환상의 이미지들이 이 소격의 과정에서 우리 삶에 훅 들어와 버린다. 작품 속 인물들의 믿음이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관객의 삶에 침투한다. 이가 도달하는 것은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로서의 영상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 위에서 교정된 환상이다.
Ⅲ) 우리를 둘러싼 멈추어 있는 세상
마치 숲을 찍은 것처럼, 그는 다만 길을 찍었다. 그러니 내가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는 답할 수 없다. 길의 이미지를 통해 아핏차퐁이 만들고자 했던 건 자신이 운전하는 동안 느꼈던 청량감일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의 이미지 속엔 지나가는 현재에 대한 어떠한 숭배도 없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수평적 연속을 통해 유일하고 단일한 공시대성을 남길 뿐. 나는 이 길 장면들이 그다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좋은 시도였다고 믿는다. 그의 말대로 아핏차퐁은 과도기에 있으며 젊으니까.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영화 속 세계가 흡사 들뢰즈가 일러준 시간의 모형과도 비슷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Ⅳ) 시간에 대한 어느 모델
세상에는 구별할 수는 있지만 식별은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어려서부터 시계에 표시되는 바처럼 흐르는 게 시간이라고 듣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사는 세계가 꼭 그렇지는 않다. 마감을 향해 달릴 때의 빠른 시계추, 아니면 인내하고 견뎌야 하는 슬픈 일에서의 느린 시계바늘처럼 여러 형태의 시간이 우린에겐 있다. 들르즈에 따르면 사유의 역사에서 시간은 진리(혹은 진리의 위기) 개념을 동반하는데, 이 참된 것에 대한 시간 이론이 <엉클 분미>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여 조금 복잡할 테지만 써보려 한다.
앞서 이야기한 로브그리예 말고도, 보르헤스 역시 이 불확실한 시간의 여정에 대한 재미있는 예시들을 제시했다. (가끔 홍상수의 영화가 보르헤스에 비견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소설집 <픽션들>을 통해 그는 ‘허구로부터 논쟁으로의 순환, 이미지로부터 형식으로의 순환, 시로부터 수학소로 순환되는 경우들’을 보였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이 존재의 일의성(=존재의 전체적인 현실성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일의성)에서 로브그리예와 보르헤스의 예는 빗나간다. 그래선지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 일의성 안에서도 주관적 시간을 표현한 영화들도 분명 있다. <지킬 박사와 미스 하이드>, <인셉션> 같은 작품처럼 물리적 도플갱어를 통해 주관적 시간을 이야기 할 수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처럼 시간의 물리성과 정신성을 반반씩 뒤섞을 수도 있다. 다만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분신들이 드러나는 장치가 다르고, 그 둘의 값어치에 관한 호불호가 다르다.
들뢰즈는 보르헤스를 이야기하기 위해 니체에게서 다음과 같은 몇 개념들을 빌려왔다. 비록 먼저 일어난 일(과거)라 해도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참’이라는 관념을 포기해야 한다(과거≠참). 왜냐하면 만약 역으로 이를 수긍(과거=참)한다면 “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할 때 이때의 이야긴즉슨 “그건 참일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순이다. 비록 시간과 진리 사이에 단순한 연결을 찾을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 어떠한 과거의 것들도 진리라 할 수 없다면 오히려 참진리는 ‘시간’일 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의 시간관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모름지기 시간이라는 범주는 모순적이고 또한 경험적이다. 예를 들어 뉴턴이 제시한 과학적 진리의 테두리에서 우리는 살아가며, 중세시대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인 엘로이즈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발견된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실질적인’ 동시대인들과 살고 있는 거다. 이 비연대기적인 시간의 모형은 결론적으로 시간이 ‘이중적인 창조’를 하고 있음을 알린다. 즉, 시간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관적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테두리(대전제)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주관적 지속’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지해야 할 것이, 아무리 시간을 주관적으로 느끼더라도 시간은 우리 안에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시간 속에 살며, 변화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시간은 주관적이고, 그런 우리가 창조하는 영화 속의 시간 또한 주관적이다. 모든 (인간이 만든) 영화는 그래서 이 시간성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틀 안에서 우리가 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정서affect이기 때문에, 영화 속 정서는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테고. 자주, 영화의 정서만을 논하게 되는 것은 따라서 대전제로서의 시간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모두에게 명확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모형이 다른 영화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와 <엉클분미>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듯 ‘참된 것’을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현상)이 아니라 잠재적인 정신에너지(=시간)라고 한다면, 우리가 인지하는 ‘진실의 문제’ 역시 같은 패턴임을 알게 될 것이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처럼 내가 사랑하는 여인(영화 속에서는 두 명이 연기한 동일인물인 이들)이 어떨 때는 캐롤 부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또 어떨 때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앙헬라 몰리나의 모습인 것처럼, 다양한 세계(서로 다른 각각의 객관적 세계)에서 현실의 동시성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모습이다.
Ⅴ) 분미 씨의 경우
이제 <엉클 분미>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할 차례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도식적이면서도 크고 단순한 동작이 반복되기 때문에, 한번 보면 쉬이 잊히질 않는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각자의 기억력을 동원해서!
분미의 장례식을 마친 후, 세 사람(젠과 그녀의 딸, 통)이 침대에서 TV를 보고 있다. 이윽고 젠과 통은 야식을 먹으러 나가는데 그들이 외출하기 직전 고개를 돌려 홀로 남은 딸을 봤을 때,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분신들이 TV를 보고 앉아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딸은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TV만 보고 있다. 그제야 젠이 통의 팔을 이끌어 두 사람은 밖으로 간다. 이윽고 다시 카메라가 방을 비추자, 거기엔 여전히 세 사람이 있다. 다만 바뀐 것은 딸의 자세뿐. 얼굴이 있던 자리엔 발이 놓여있고, 그녀는 잠들었다.
분미의 죽음을 지켜보며 젠과 통이 배운 것은 ‘진실, 그 시간의 모델’이었다. 아핏차퐁이 만약 플라톤이 제시한 존재의 일의성을 통해 이 장면을 찍었다면, 침대에 놓일 것은 세 사람이 아니라 자세가 바뀌어 잠이 든 딸의 모습만일 것이다. 그런데 분미의 죽음를 통해 특별한 시간의 모형을 설명한 아핏차퐁은 딸의(어쩌면 역사의) 관점에서 이 장면을 그려낸다. 이 도식적 설명을 통해 <엉클 분미>는 이전에 로브그리예가 했던 것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복수의 현재를 제시하고 그들이 함께 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리며 끝이 난다. 이해할 수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제시하는 데(사실주의 영화의 보편적 주제들)에서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아무리 자판을 오래 두드리더라도 영화를 통해 말하는 것보다 더 잘 설득할 수는 없을 걸 안다. 아핏차퐁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맑은 저녁 기분 좋은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이를 보는 기분으로 감상하길. 무어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설득당하고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