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앨범
1905년생인 아버지의 대표적인 특색은 "과묵"이었다.
"과묵" 쪽으로 나는 이날 이때까지 아버지 이상 가는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다.
어릴 때 하루종일 같이 집에 있으면서도 나는 아버지 목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다.
아버지에게 칭얼거리며 응석을 부린다던지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점은 아버지의 천성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분히 의도적 이었던 것 같았다.
젊었을 적 뜨거운 향학열을 결연하게 짓뭉개버린 조부님에 대한 깊은 원망과 끈질긴
저항이 그런식으로 아버지의 안자락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1878년생으로 도산 안창호선생과 한 동갑이었고 만해 한용운이나 안중근의사보다 한 살 많으셨던
조부께서는 서울쪽 상류계층의 개화물결을 죄다 쓸개 빠진 (날라리판)쯤으로 여겨
사갈시(蛇蝎視)하셨다.
그 때문에 아버지 께서는 증조부님의 은밀한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보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조부님의 노발대발로 겨우 1학기만 마치고 하향, 시골에 주저 앉아야 했다.
신문학 꿈 좌절되자 깊은 침묵으로 부친에 저항
치렁치렁한 댕기머리 총각으로 집 떠났던 아버지가 몇달 뒤 빡빡머리로 집 마당에 들어서자,
조부와 증조부께서는 아버지의 머리를 같이 끌어안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터뜨렸다고 한다.
조부님이나 증조부님께서는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송두리채 망 한 것을 서울 쪽 소문으로만
들어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20년대 초에 댕기머리로 상경했던 외아들이 몇달만에
빡빡머리 모습으로 집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비로소 나라 망한 것과 (세상 망해가는 것)을
실감하지 않았나 싶다.
조부님께서는 서양풍(西洋風), 소위 박래(舶來) 쪽은 죄다 모조리 사갈시하였는데, 석유등잔에서
전등으로 옮아갈 무렵인 1940년대 초에는 조부님 증조부님도 어느새 슬그머니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쪽의 박래(舶來) 지식인들 판에 대해서는 거의 생득적인 혐오감을 그대로 견지하셨다.
바로 그 틈서리에 아버지는 계셨던 것이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뜨거운 향학열은 바로 서울쪽의
소위 잘난 사람들, 문화인들, 지식인들 셰계에 대한 뜨거운 동경에 다름 아니었고, 그 판에
껴들고 싶은 강한 욕구에 다름 아니었다.
그 욕구를 무참히도 가로막은 조부님에 대한 원망과 저항이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과묵)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를 지척으로 바라보는 오늘 1905년생 아버지와 1878년생 조부님을 떠올려보면
아버지의 그 끈질겼던 저항도 나름대로 이해는 되지만, 조부님의 그 단호했던 서양풍 혐오,
박래 것들에 대한 짙은 혐오는 오늘의 이 잡박한 세상을 꿰뚫어 보신 것이 아니었나 싶어지
기도 한다.
이호철
1932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625때 인민군에 동원되엇다가 포로가 됨.
주요 소설집,닳아지는 삶들,이단자,서울은 만원이다.등.ㅡ현재 대학에 국문과교수로 재직중.
ㅡ제가 20대 초반 때 쯤, 해놓았던 신문 스크랩 중 하나였습니다. 스크랩 종이들은 이미 황금색,
인상깊어서 옮겨 봅니다..
첫댓글 우리때만해두 아버지는 절대 군자였는데...
울 아들보니 좀 답답 ...
새롭고 정말 인상적입니다..
우리네 아버지 보다 전에 아버지상인거 같아요...
요즘은 아버지라는 단어 조차도 드믈게 듣는 세상이 되버렸지요...격세지감을 많이 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