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아일랜드 분쟁은
1170년 영국군이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 지방을 침략하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의 침공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 북부에 영국 개신교도(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를 집중적으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기존의 카톨릭 신자들을 밀어내고 인구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정치, 사회, 문화 등 영역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다.
1920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 연합왕국에서 독립할 당시 얼스터의 일부 지방은 영국에 남음으로써 비롯된 일련의 민족주의 분쟁을 가리킨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이 북아일랜드 문제로 분열되어 1922년 내전이 일어났고, 결국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국토로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된다. 얼스터 인구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임을 감안한 영국의 아일랜드 정보법에 따라 북아일랜드를 영국에 잔류시킨 것이다. 영국은 개신교도 대 카톨릭교도의 종교 분쟁이라 주장하고, 아일랜드인들은 식민 대 반식민의 이념 분쟁임을 주장한다. 영국이 북아일랜드를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영국군이 물러날 경우 이주 영국인 및 개신교도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독립으로 스코틀랜드에까지 영향이 파급되어 연합 왕국 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경계하는 속내도 없지 않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수백년 동안 영국 이주민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중세로부터 아일랜드 농민들은 영국 부재 지주로부터 수탈을 당했고, 산업사회 이후로는 영국 산업자본 아래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가 되었다. 이에 아일랜드 카톨릭교도들은 카톨릭을 신봉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고, 20세기 들어 아일랜드 연방군(IRA)을 창설하여 폭탄 테러, 게릴라전 등을 벌이며 격렬히 반대했다. 1969년부터 30년 간 양측의 유혈 충돌로 3,700여 명의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를 포함해 5만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1972년까지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있었으나, IRA와 영국군의 충돌로 해산되었고, 이후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였으나 종교적, 민족적 차원에서도 분쟁이 전개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북아일랜드의 입헌적 지위에 있다. 대부분 개신교도인 연합주의자 또는 왕당파는 연합 왕국으로 남기를 원한다. 대부분 카톨릭교도인 민족주의자 또는 공화파는 연합 왕국에서 탈퇴해 통일 아일랜드를 구성하기를 원한다.
또 다른 문제는 두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서 북아일랜드 정부와 경찰 조직은 개신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카톨릭교도와 민족주의자에 대한 차별이 발생했고, 이에 반대한 민권 운동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재판 없는 구류가 도입되고, 고문 수준의 5가지 방법의 심문이 영국 치안군에 의해 개발되어, 민족주의자들에게 사용되었다.
1968년 유혈 사태 이후 수도 벨파스트에서는 신, 구교도 거주 지역을 가르는 장벽이 한시적 용도로 세워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벽이 높아졌고, 벽면에는 상대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낙서가 새겨졌다. 모두 5km에 달하는 담장 99개는 한반도 DMZ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벽이라 평가된다. 분단 도시와 같은 느낌을 주며, 긴장된 분위기를 풍긴다.
1996년 6월부터 분쟁 종식을 위한 평화 협정 체결 협상이 개시되어 1998년 4월 북아일랜드 평화협정(벨파스트 협정)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협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산발적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1999년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에 따라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가 다시 출현했다. IRA는 2005년 9월 26일 무장해제 완료를 공식 선언했고, 현재는 무력 충돌은 중단된 상태다. 2007년 공동 자치정부가 출범하는 등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북아일랜드 공동 자치정부의 총리와 부총리는 이름은 달라도 법적으로 동등한 공동정부 수반이고, 자치의회 내 선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친영 진영과 아일랜드 민족진영에서 각각 한 명씩 맡게 되어 있다. 반 강제적으로 타협을 유도함으로써 양측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양 진영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식물 정부가 될 위험도 크다. 실제로 2002년 10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자치의회의 갈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고, 영국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한 적도 있다.
또한 2009년 북아일랜드에서는 IRA 강경파로 의심되는 괴한이 영국군에 총을 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고,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주장하는 RIRA가 영국군 기지 공격이 자신의 소행이라 주장했다. 평화 노선에 반대하는 새로운 IRA가 조직되는 등, 분쟁의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12, 2016년 아일랜드 합병 투표를 하겠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관련된 움직임은 이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관련 여론 조사 결과는 15% 대 66%로 통합에 부정적이었다.
아일랜드 교회에서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같은 기독교인끼리의 분쟁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실례로 장로교와 카톨릭이 서로 강단 교류를 통해 마음을 열고 있다. 이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정말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는 믿음이라면 형제 교회를 배척하는 종교적 독선을 버릴 것을 충고하고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한반도의 1/3 면적에 인구 370만. 수출액은 한국의 절반에 달한다.
19세기 중엽 800만이었던 인구가 심한 기근으로 600만으로 줄었고, 현재 그에도 못미치지만, 전 세계 영어권 국가에서 아일랜드계 인구는 4천만에 이른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BC 6천년 경, 이후 9세기 바이킹, 12세기 노르만족의 침략과 영국의 침입까지 많은 외침에 시달렸다. 이후 독실한 카톨릭 문화를 형성하고, 1801년 영국,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탄생했다.
아일랜드는 독립을 바라는 구교도와 영국 존속을 원하는 신교도 간의 대립으로 인해 분란을 겪어 왔다. 독립 추구 세력의 중심에 IRA가 있고, 이들의 정치 조직이 게리 아담스가 당수로 있는 신 페인 당(우리들 자신이란 뜻)이다.
IRA는 오랜 테러 활동 후 1994년 극적으로 휴전을 선언했으나, 이후 Real IRA, Continuity IRA 등의 테러 활동이 이어졌다. 1999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수립되기도 했으나, 테로 활동으로 2002년 2월 막을 내렸다가, 5월 IRA가 무기 사찰을 수용함으로써 부활하였다. 이에 따라 평화 협상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런 반골과 폭동의 나라라는 역사가 아일랜드 문화의 중심 사상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고, 많은 예술인들의 영감의 원동력이 되었다. 등 유명한 작가들이 많다.
이 작은 섬나라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만도 4명이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세이머스 히니, 사무엘 베케트다. 그밖에도 아일랜드를 빛내고, 더블린을 영미 문학의 성지로 만든 유명 작가들에 제임스 조이스, 조너던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브람스토커 등이 있다.
대서양의 진주라 불릴 만큼 자연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걸출한 작가들을 배출해 유럽 문화의 중심이자 세계 문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