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계시록!(31) :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 본 문 : 요한계시록 21장 1절 - 27절 (신약성경 419쪽)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자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번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아멘!
제가 어렸을 때 전 국민이 열창했던 합죽이 최희준 씨가 부른 “하숙생” 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생이라. 정을 줄 수도 없고 사랑을 나눌 수도 없고,
그래서 구름이 흘러가듯 그저 흘러가는 세월에 내 인생을 맡기고 살아간다. 이런 인생 살면 될까요?
성경속의 인물 중의 야곱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8절, 9절 말씀입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에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우리는 그의 고백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절대권력을 가졌던 솔로몬 왕도 그 나름대로의 인생의 허무를 노래했습니다.
구약성경 전도서 1장 2절, 3절, 14절 말씀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의한가...,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
그 종착점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경고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인생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착점을 모르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헛되고 헛된 허무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천국이라는 종착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멋진 인생을 살아 것인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3년 전인 2013년 5월에 영국에서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벌어졌던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한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등과 약간의 격차를 두고 2등으로 달려가던 선수가 길을 잘못 들어서 달려가자, 뒤따르던,
모든 선수들이 2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따라, 잘못된 길을 달렸기 때문에 전부 탈락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성공했다는 그 누군가를 따라 열심히 살아왔는데, 살다 보니까,
“어, 이게 아니네.” 하면서 되돌이 킬 수 없는 탈락한 인생살이가 되어버린 황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엉뚱한 길로 들어선 잘못 살아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확실한 인생을 산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고백하고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과 디모데후서 4장 7절 말씀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아멘! - 이 얼마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요. 분명한 선포입니까?
자기 인생길에 대해 전혀 주저함이 없습니다. “인생은 하숙생과 같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인생이라.” 고, “헛되고 헛되다.” 라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과 선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자기가 가야 할 인생의 종착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 이 길로 간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갈 길은 이 길이고, 이 길 끝에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아멘!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종착점에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도, 가장 확실한 안내자와 동행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8월 마지막 주일까지 11번에 걸쳐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했던 룻기를 통한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흉년 인생이 되자 하나님 없는 잘못된 길로 나아갔던 엘리멜렉 한 사람 때문에, 자기 자신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남은 나오미와 룻이 절망인생이 되고 말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전시켜 주십니다.
룻을 통해 다윗의 계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지는 놀라운 대역전극을 펼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에스더서를 통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선포하였습니다.
저는 룻기와 에스더의 말씀을 묵상해 가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으며, 마음이 뜨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이 직접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남은 제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나오미와 룻처럼, 에스더처럼, 사도 바울처럼,
확신에 찬 인생, 내 인생의 목적지에 서 계시는 주님을 만나 기뻐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계속 말씀드리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위로 격려를 주는 보배로운 성경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극심한 핍박으로 절망 상태에 빠져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성경입니다.
“너희가 지금 로마의 핍박으로 절망 기운데 고통하고 있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리스도인인 너의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나라와 그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라."
이러한 격려의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아멘!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알파는 헬라어의 첫 알파벳의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알파벳의 글자입니다.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을 뜻하는데, 주님이 스스로를 ‘알파와 오메가 – 시작과 끝’ 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너의 주님이다. 나는 시작한 일을 끝까지 완성하는 주님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이렇게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주님의 붙들어주심과 마지막까지 인도해 주심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알파로 찾아와주신 그 주님이, 내 인생의 오메가가 되어 끝까지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요한계시록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2절입니다.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 섬에 갇혀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현실 또한 로마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과,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현실만 바라보며 절망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하나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고난을 다 이겨냈을 때, 누리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몸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나라를 맛보고, 그 영광을 보게 된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 중에, 과연 어떤 것들이 변화되어야 할까요?
첫째는, 거룩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을 거룩한 성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탄의 도성인 바벨론은 ‘큰 성’ 으로 묘사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면,
지금의 내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큰 것, 세상적인 성공, 명예 등을 원한다면,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어린 신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정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큰 성이 아니라, 거룩한 성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성경이 말하는 정답이 디모데후서 2장 20절, 21절에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아멘!
세상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릇이 큰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들을 성공자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은, 사용하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이요. 거룩한 그릇입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큰 것을 원할 때 그것과 구별되는 삶이 거룩입니다.
한 목사님이 자기 딸아이의 행동에 대해 교육하려고 하면, 시춘기 딸이 자꾸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빠! everybody 가 다 그렇게 해요.” -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딸인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 중에 변화되어야 할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친밀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주님은 하나님나라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여기 나오는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물질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곧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인 저와 여러분은,
예배를 통해서, 기도생활을 통해서, 말씀생활을 통해서,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해져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라면,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과도 친해져야 합니다.
저는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꼭 이렇게 기도하며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설교를 할 때에,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혹 성도 중에 누가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오늘은 설교할 기분이 아니니 그만 두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짜증나도 설교해야 합니다. 그게 제가 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왕에 해야 하는 설교이니,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세상에서,
힘든 삶을 살았을 성도들에게 가장 유익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도 하나님은 물론 성도 여러분들과도 친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 중에 변화되어야 할 세 번째는, 성령님의 위로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위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내가 꼭 권면하고 싶은 것은 이 땅은 위로 받는 곳이 아니니,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위로는 이 땅에서 받는 게 아니라,
반드시 오게 될 하나님나라에서 받아야 진짜입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나도 인간인데” - 그러면서 자꾸 사람에게 기대고,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더 큰 상처만 받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주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살아가야 하지만,
100% 내 마음에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령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안개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지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요한이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 중에 변화되어야 할 첫 번째는,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 중에 변화되어야 할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친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 중에 변화되어야 할 세 번째는, 성령님의 위로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친밀하심, 그리고 성령님의 위로를 크게 받으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 -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