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29,205cm)은 지난해 2월 18일 치악체육관에서 대구 오리온스와 홈경기를 치르다 상대팀 가드 김승현(30,178cm)과 부딪치면서 왼쪽 허벅지를 다쳐 3주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무렵 동부는 5할 승률을 오르내리며 안양 KT&G, 서울 SK, 인천 전자랜드와 6위 경쟁을 하고 있었다.
김주성의 부상은 팀에 치명타였다.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동부는 시즌 마지막 3경기를 모두 져 23승31패로 2006-07시즌을 마감했다. 최종 순위는 8위였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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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은 때로는 강인한 이미지로 비춰지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김수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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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시즌 6라운드가 진행되고 있는 프로농구는 2월 24일 경기를 끝으로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3월 1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리는 올스타 전때문이다. 각 팀은 3월 4일 경기를 재개해 3월 23일 올 시즌을 마감한다.
지난 시즌 8위의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은 원주 동부는 2월 29일 현재 34승12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동부는 공동 2위 서울 삼성과 안양 KT&G(이상 28승19패), 4위 전주 KCC(27승19패), 5위 창원 LG(27승20패)에 여유있게 앞서 있다.
동부의 정규시즌 1위 매직 넘버는 2다. 남은 8경기에서 2승만 거두면 자력으로 1위를 차지한다. 2003-04, 2004-05시즌 2년 연속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이후 2년만에 1위가 눈앞에 다가왔다.
최근 팀 분위기도 상승세다. 동부는 2월 10일 울산 모비스전부터 2월 23일 KT&G전까지 5연승했다. 동부는 올 시즌 팀 최다인 7연승을 두 차례 기록했고 연패는 3연패가 유일하다. 동부가 지난 시즌 8위에서 올 시즌 1위로 순위가 껑충 뛰어오른 데에는 어떤 요인이 있었을까.
자유계약제도에서 트라이아웃을 통한 드래프트방식으로 바뀐 외국인선수 선발제도 아래서 레지 오코사(28,205cm)라는 실력 있는 선수를 데려온 것도 한 가지 요인이다. 표명일(33,182cm)과 강대협(31,188cm) 등 국내선수들의 물오른 득점력도 팀 성적 상승의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팀의 중심 선수인 김주성(29,205cm)이 부상으로 전열에서 빠지지 않고 계속 뛰고 있는 게 가장 큰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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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에서 블록슛 타이틀을 차지한 유일한 국내선수가 김주성이다.
사진 제공=KB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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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투혼김주성의 몸은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팀당 47~48경기를 치른 가운데 작은 부상 하나 없는 선수를 찾기는 힘들다. 크고 작은 부상이 선수들을 괴롭힌다. 김주성도 마찬가지다.
김주성은 지난 여름 체력훈련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에 뽑혀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린 제24회 FIBA(국제농구연맹)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다녀와 피로가 쌓였다.
동부 전창진(45) 감독은 “(김)주성이는 체력적으로 뛰어난 선수가 아니다. 그래서 여름에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해 근력을 키우고 체력을 보강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체력이 떨어지면 자세가 높아지고 높은 자세는 부상을 부른다.
김주성은 2월 15일 치악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전자랜드전에서 왼쪽 발에 통증을 느꼈다. 당시 두 팀의 경기는 연장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김주성은 45분 동안 교체 없이 뛰며 19득점 6리바운드 3블록슛을 기록했다. 동부는 전자랜드를 95-92로 꺾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컸다. 김주성의 몸상태가 나빠졌다.
통증이 다리 윗부분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김주성은 아픔을 참고 뛰었다.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점프를 하거나 슛을 던지기 위해 스텝을 밟을 때 무의식적으로 아픈 왼쪽보다 덜 아픈 오른쪽 다리를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오른쪽 발목에도 무리가 왔다.
김주성은 오른쪽 발목 통증이 심각했지만 2월 21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벌어진 SK전에 빠지지 않았다. SK는 전자랜드와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경쟁을 하는 처지라 경기마다 결승전이다. 원정팀 동부로서는 그런 SK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경기는 막상 뚜껑을 열자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었다.
동부는 거침없이 SK를 밀어붙였다. 1쿼터에서 벌써 26-19로 앞섰다. 동부는 경기 내내 한번도 리드를 내주지 않고 89-76으로 이겼다. 김주성은 15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 2블록슛을 기록하면서 공수에서 맹활약해 팀 승리에 이바지했다.
김주성은 경기가 끝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사실은 많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김주성이 통증을 참고 뛴 이유는 되도록 빨리 정규시즌 1위를 확정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휴식시간을 갖고 여유있게 플레이오프를 준비할 수 있다. 정규시즌 1, 2위팀은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해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 빡빡한 일정에 지친 선수들에게는 달콤한 재충전의 기회다.
지난 시즌 8위였는데 올 시즌은 선두를 달리고 있다. 팀분위기는 어떤가. 아주 좋다. 지난 시즌에는 우리 팀이 실력이 없어서 그런 성적을 낸 게 아니다.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올 시즌을 앞두고 각자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우리 팀 실력을 이번에는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 코칭스태프도 팀 플레이를 강조하고 선수들도 이를 잘 받아들인다. 수비와 리바운드 등 힘든 플레이도 모두 열심히 한다.
올 시즌 경기를 하면서 버거운 팀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가 있나. 각팀의 전력은 매시즌 바뀐다. 그래서 시즌마다 다르다. 외국인선수 영향도 있다. 올 시즌은 유독 팀간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만 빈틈을 보이고 집중력을 잃으면 경기의 흐름을 놓쳐 어렵게 경기한 경우가 많았다. 내가 뛰는 포워드와 센터 자리의 특성상 외국인선수나 국내 빅 맨을 상대한다. 외국인선수들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생각하고 코트에 들어간다. 그렇다고 외국인선수들을 나 혼자 수비하는 건 아니다. 동료들과 협력수비를 한다. 외국인선수들은 타고난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대부분 몸싸움을 즐겨한다. 상대하기 쉽지 않다.
지난 시즌까지 외국인선수로 자밀 왓킨스(31,204cm)와 뛰었다. 올 시즌 오코사와 비교한다면. 두 선수 모두 기량이 뛰어나다. 차이점이 있다면 왓킨스가 좀 더 정통 센터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비형 선수다. 공격 패턴이 그리 많지는 않다. 오코사는 골 밑을 공략하기보단 외곽으로 나와 미들슛을 시도한다. 자기 스스로 잘 움직여 득점 기회를 잡는다. 왓킨스와 오코사를 섞어 놓은 외국인선수와 뛰고 싶다(웃음).
2002-03시즌 프로에 데뷔한 뒤 두 차례 우승했다. 그때도 분업 농구가 잘됐다. 동부의 특징인 것 같다. 그때도 선수들이 각자 맡은 플레이에 충실했다. 올 시즌 (강)대협이 형과 (표)명일이 형 그리고 오코사가 득점력이 있어 나는 수비에 중점을 뒀다. 5라운드 때 명일이 형의 득점력이 떨어졌고 대협이 형이 다쳤다. 그때는 득점에 신경을 썼다. 수비에 치중하면서 공격까지 하면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이달의 선수부상 투혼을 보이고 있는 김주성은 2월 23일 치악체육관에서 열린 KT&G와의 경기에도 변함없이 선발로 나왔다. 동부와 KT&G는 올시즌 초반부터 선두를 다투고 있다. 동부와 KT&G 모두 이날 경기가 중요했다.
김주성은 동부의 중심 선수로 손색 없는 활약을 했다. 1,2쿼터에 득점을 집중해 17점을 뽑았다. 3쿼터에 숨을 고른 김주성은 리바운드와 블록슛 등 궂은 일을 맡았다.
그 사이 김주성과 트윈 타워를 구성하고 있는 오코사 그리고 카를로스 딕슨(27,193cm),신인 가드 이광재(24,189cm)가 공격에 집중했다. 딕슨은 4쿼터에서만 18점을 몰아 넣어 두 팀 합쳐 최다득점(23점) 선수가 됐다. 동부는 93-78로 여유 있게 KT&G를 물리쳤다.
김주성은 최근 활약에 힘입어 한국농구연맹(KBL) 출입기자단 투표에서 유효 투표수 75표 가운데 30표를 얻어 2월의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2월 한 달 팀이 치른 9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29분56초를 뛰면서 15.4득점 5.1리바운드 2.2블록슛을 기록했다. 블록슛은 전체 1위였고 득점과 리바운드는 팀 내 2위였다.
김주성이 이 달의 선수로 뽑힌 건 2003-04시즌 10월 이후 4년 3개월 만의 일이다. 신인 시절인 2002-03시즌 2월에도 이달의 MVP로 선정됐다. 당시 TG 엑써스(현 동부)는 32승22패로 정규시즌을 3위로 마감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모비스와 LG를 각각 2승과 3승2패로 따돌리고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TG는 대구 동양 오리온스(현 대구 오리온스)를 4승2패로 제치고 프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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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은 미들슛에 정확도를 높인 것을 선수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생각한다.
사진 제공=KB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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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즌 2월 28일 현재 경기당 평균 2.23블록슛으로 부문 1위다. 블록슛을 하기 위해 ‘저 선수의 슛을 꼭 막아내야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슛블록은 상대의 득점을 막고 우리 팀이 공격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한 명의 공격수를 놓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일종의 모험 수비다. 블록슛에 특별한 비법은 없다. 상대 공격수의 눈치를 잘 보는 편이다(웃음). 도움 수비를 많이 하다보면 상대 선수를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골 밑에서 블록슛을 성공하면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줄 수도 있다. 대학 때는 블록슛 몇 개를 하면 (골 밑으로)들어오는 선수가 거의 없었는데(웃음). 프로 무대는 확실히 다르다.
키가 큰 선수지만 미들슛이 정확하다. 스몰포워드로 자리를 바꿀 생각은 없나.스몰포워드로 뛸 생각은 전혀 없다. 대학 때 센터를 봤고 프로에 온 뒤 파워포워드로 뛰고 있다. 미들슛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프로에 오면서 하게 됐다. 대학 때는 골 밑에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됐기 때문에 솔직히 미들슛에 관심이 없었다. 프로 3년째를 맞은 2004-05시즌부터 미들슛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팀 연습이 끝난 뒤에도 슛 연습을 따로 했다. 코칭스태프도 미들슛을 던질 것을 요구했고 나도 실력이 늘길 원했다. 골 밑에서 빠져 나와 슛을 던지면 공격에서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 상대수비가 나를 막기 위해 밖으로 나오게 된다. 주로 외국인선수가 나를 막는데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오면 동료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상대 선수와 경기 도중 언쟁을 하는 등 이전과 달라진 자세를 보이고 있다. 경기 중에 서로 오해가 있었다. 농구는 몸싸움을 피할 수 없는 경기다. 몸싸움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1월 22일 KCC전이었는데 (서)장훈이 형이 상황을 오해한 것 같다. 코트에서는 장훈이 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숙소에서 녹화 테이프를 보고 오해가 풀렸다. 나는 상대 수비를 피해 돌아나가려고 했는데 장훈이 형이 나를 수비하기 위해 다가오다 내 팔꿈치에 얼굴을 부딪혔다. 서로 엉켜 넘어질 뻔 했는데 안 넘어지려고 중심을 잡다보니 큰 동작이 나왔다.
2월 6일 KT&G전에서는 상대팀 가드 주희정(31,180cm)과 함께 퇴장 당했다. 그때 상대팀 센터 T J 커밍스(27,201cm)와 먼저 신체 접촉이 있었다. 경기가 과열돼 나도 흥분을 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때 (주)희정이 형이 내게 와 뭐라고 말을 했다. 커밍스의 행동에 먼저 문제가 있었는데. 상황이 진정됐지만 잠시 뒤 희정이 형이 다시 내게 와 말을 했다. 당시에는 섭섭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 감정을 다 풀었다. 희정이 형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희정이 형도 팀 동료를 위해 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해한다.
서장훈은 상대 수비의 집중견제를 받는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가. 서장훈과 달리 비교적 조용해 순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장훈이 형만의 경기 스타일이 있다. 그런 스타일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선수나 자기가 당한 것만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경기 중에 의사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순한 이미지가 계속 되면 안좋을 것 같다. 특히 국제대회에서 그렇다. 국가를 대표해 뛴다는 생각이 들어 국내와 달리 심판 판정에 항의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순둥이로 본다(웃음). 경기 도중에는 격렬하게 맞서지만 선수들끼리 다 아는 사이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면 어차피 다 풀게 된다.
한국 농구의 현재김주성은 부산 동아고 시절부터 한국남자농구를 이끌 기대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농구를 늦게 시작했고 마른 체형 때문에 골 밑에서 밀리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운동부가 없는 부산 해운대중에 다닌 김주성은 길거리 농구대회에 참가하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김주성의 키는 168cm로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농구선수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초등학교 때 김주성은 육상을 했다. 높이뛰기선수였는데 체력이 약했다. 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앓아 누워 1,2주씩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김주성은 부모를 설득했다. 반드시 농구로 이름을 남기겠다고.
동아고에 입학했을 때 김주성의 키는 193cm였다. 키는 계속 자라 중앙대에 입학할 무렵 205cm가 됐다. 당시 서장훈에 이어 두번째로 키가 컸다. 농구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미완의 대기’였다.
김주성은 중앙대에서 서장훈의 뒤를 이을 장신 센터로 거듭났다. 송영진(30,198cm,부산 KTF)과 트윈 타워를 구축해 1980년대 한기범(44,207cm),김유택(45,198cm,엑스포츠 해설위원) 이후 최강의 더블 포스트로 위세를 떨쳤다.
대학을 졸업하던 200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김주성은 올해 하승진(23,221cm,KCC) 만큼이나 큰 관심을 끌었다. 김주성을 뽑는 팀은 ‘우승 보증 수표’를 얻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드래프트 지명 순위 추첨에서 ‘김주성 로또’에 당첨된 팀은 TG였다.
당시 TG의 플레잉코치였던 KCC 허재(43) 감독은 자기가 1순위 지명을 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TG는 김주성과 허재, 양경민(36,193cm)을 앞세워 그 시즌에 우승했다.
김주성은 그해를 잊을 수 없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서장훈과 함께 신구조화를 이루며 골 밑을 책임졌다. 한국은 2002년 10월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남자농구 결승전에서 중국과 연장까지가는 접전을 펼친 끝에 112-100으로 이겨 1982년 뉴델리대회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주성은 그 뒤 지금까지 대표팀에서 중심선수로 뛰고 있다.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 때는 대표팀에서 막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승진, 윤호영(24,198cm,동부) 김민수(26,202cm,SK) 등 후배들을 이끌어야 한다. 한국농구의 미래에서 현재가 된 것이다.
7월 아테네에서 열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세계예선에 출전하는데. 솔직히 본선행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마음 편하게 먹고 경기를 하다보면 강팀들을 상대로 의미있는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나중에라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대표팀에 뽑혀 세계예선에 나간다면 그런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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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 해마다 기량을 향상해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된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사진 김수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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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아시아경기대회가 지금도 기억나겠다. 그때 정말 좋았다. 역사의 현장에 형들과 함께 있다는 게 기뻤다. 솔직히 결승전에서 중국에게 이기리라고 예상 못했다. 4쿼터 종료 직전 자유투를 얻은 후웨이동(37,198cm)이 던진 슛이 림을 벗어났다. 그게 역전의 발판이 된 것 같다. 그때 코트에 있던 선수나 벤치에 있던 선수 모두 후웨이동의 자유투가 들어가지 않게 기를 모았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 같다(웃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 좋은 결과를 얻었다. 경기가 끝나고 ‘아, 정말 태극마크를 잘 달았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외국인선수가 뛰어 국내 정통 센터가 없다는 지적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외국인선수들이 골 밑에 들어가 있으니. 국내 프로농구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포지션을 바꿨다. 파워포워드로 뛰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다보니 후배들도 나를 따라했다. 정통 센터가 줄어들긴 하지만 선수들이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후배들도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해 6월 미국프로농구(NBA) 토론토 랩터스의 훈련 캠프에 다녀왔는데. 구단을 통해 선수신분 조회요청이 왔다. 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안 가려고 했지만 나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가기로 결정했다. 무리를 해서 출국했다. 비공개 트라이아웃이라 참가한 다른 선수들은 못 봤다. 메디컬 테스트조차 받지 못하고 귀국을 결정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는데 미련은 없다. NBA 캠프에 다녀왔다는 사실 자체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농구를 하면서 본보기로 삼은 선수가 있나. 케빈 가넷(32,211cm,보스턴 셀틱스)이다. 마른 체형이 나와 비슷하다(웃음). 그가 펼치는 미들 라인 플레이는 내가 배워야 할 점이다. 경기 장면을 많이 봤다. 나는 평소 국내에서도 다른 선수들이 하는 좋은 플레이를 눈여겨본다. 그리고 연습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실전에서 활용한다.
모기업 CF에도 출연했다. 부모님과 나는 한 번도 모델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 무척 부끄러웠다.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 부모님은 나를 위해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런 부모님과 함께 광고를 촬영할 수 있어 매우 기뻤다. 부모님께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광고를 보고 ‘정말 잘나왔다’고 격려해 주셨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처음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선수보다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 해마다 기량을 향상해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된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