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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동학밥학교’를 마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올 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시골집을 나선 덕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읍내에 도착하고 보니 차 시간까지 제법 여유가 있었다. 편히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으려 비좁고 지저분한 터미널을 벗어난 지 몇 걸음 만에 큰길가에 제법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새로 문을 연 편의점을 발견,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편의점 안에는 손님들이 앉아서 음료나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도록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어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며 차 시간을 기다릴 요량에서였다. 여덟 시가 조금 지난 이른 아침 시간의 편의점 계산대 앞은 잠이 덜 깬 채 교복을 차려입고 가방을 둘러매고 등교 길에 나선 앳된 얼굴의 청소년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대개 컵라면이나 빵, 우유 또는 삼각김밥 등과 같은 인스턴트식품들이었다.
0교시에 늦지 않기 위해,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침을 거르고 쫓기듯 집을 나선 학생들이 호주머니 속, 적은 용돈을 털어 손쉽게 끼니를 해결하기에 학교 앞 편의점의 값싼 식품들이 제격인지는 모르겠으나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 고른 음식물들을, 아니 GMO 농산물을 비롯한 질 낮은 수입 식재료에 온갖 첨가물과 방부제로 범벅이 되어 가축용 사료보다 나을 게 없는 ‘못된 먹이’를 허겁지겁 우겨넣고 있는 모습을 뜻하지 않게 보게 된 내 마음은 자리 값을 하려고 진열대에서 마지못해 골라와 내 앞에 놓아둔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 맛 못잖게 영 씁쓸하기만 했다.
아주 잠깐 우연히 엿본 광경에 불과하나 이런 풍속이 이미 학생들의 일상으로 굳은 채 월요일은 컵라면, 화요일은 삼각김밥, 수요일은 햄버거 하는 식으로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대장장이 제 집 칼 녹스는지 모른다.’고 대개 농업에 종사하는 부모를 두었을 게 분명한 농촌지역 청소년들의 식생활 실태조차 이러할진대 도시는 물론이요 우리나라 대다수 청소년들의 급식실태가 어떠할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정이나 교육계나 우리 사회에서 바른 먹거리가 건강과 인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잔소리로 여길 만큼 모르고 있지 않음에도, 청소년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이라 추켜세우고 있음에도, 막상 현실은 그들이 무얼 먹는지 개선하려는 노력을 뒤로 하고는 먹은 대로 되고 먹는 대로 행동하기 마련인 그들의 건강과 급하고 폭력적으로 되어가는 인성에 대해서만 혀를 차며 염려하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과 이천식천 한울밥상의 거리가 아직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밥은 하늘’이라는 믿음을 가진 신앙으로서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울연대가 지난 7월21일부터 22일에 열었던 청소년 동학밥학교는 바로 이런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동학만이 갖고 있는 이천식천의 훌륭한 가르침을 청소년들의 식생활 뿐 아니라, 우리 밥상과 먹거리 대부분이 이윤만을 쫓는 부도덕한 자본에 종속된 채 심각하게 오염, 종내는 우리의 목숨 줄까지 위태롭게 된 오늘의 현실 안에서 절실한 생명운동으로 펼쳐내고 싶다는 활동가로서 지닌 파릇한 꿈이 문광부가 종교계를 통해 후원하는 2013년 청소년인성교육 지원사업과 만나 ‘청소년동학밥학교’라는 프로그램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북부안의 변산반도 인근 한적한 펜션에서 1박2일 동안 진행한 동학밥학교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2곳의 청소년들과 지도교사 등 40여명이 단체로 참여하였다. 다양한 체험학습이나 장거리 여행 등을 경험할 기회가 비교적 적었던 지역아동센터 친구들에게 우선 기회가 주어진 것 또한 한울의 조화요 은혜로 여긴다.
참가 단체를 섭외하고 성경신으로 준비하는 와중에 행사를 이틀 남겨두고서 때마침 태안에서 벌어진 모 청소년 캠프의 사고소식을 접하게 되어 참가단체를 이끄는 시설장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보낼 결심을 한 학부모들의 우려가 잠깐 빚어지기도 했지만 한울님 모시듯이 정성을 다해 준비하며, 분명한 감응을 믿으며 진행을 감행한 덕분에 아무 탈 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
행사를 처음 기획할 때만 해도 동학 천도를 알리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 많이 담고자 욕심껏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집어넣었는데, 기획안을 넘겨받은 참가단체 지도교사들의 의견은 달랐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시키지 않는 캠프를 더 좋아한다, 아이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이후부터는 어떤 프로그램도 참여시키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몇 달을 애쓰고 만든 기획안이 의도와 달리 보기 좋게 거부당하며 든 낭패감에 이어 기획자로서, 실무자로서 생각을 신속히 바꾸기에 이르렀다. 하지 않는 듯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무위이화라는 말씀을 떠올리고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뭘 가르치겠다는 욕심일랑 던져버리고 마음을 비운 채 사치스러운 장식들을 떼어내듯 프로그램을 최대한 간결히 하였다.
‘천도교 종지인 인내천(人乃天)을 바탕으로 청소년들로 하여금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이천식천의 가르침에 따라 밥이 하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바른 먹거리를 늘상 감사하며 먹을 때 몸이 건강함은 물론, 올바른 인성을 지닐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자연재배 농장체험을 통해 바른 먹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앞에 놓이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기획서와 자료집에 적어 넣은 공식 ‘취지’는 밥학교에서 1박2일 동안 삶을 살게 될 아이들이 그저 ‘맛있고 편하고 즐겁게’ 되기만을 바라는 기도로 바뀌었다.
집이 있는 장수에서 친환경 생협 매장이 있는 남원까지 두 번 씩이나 가서 아이들이 먹을거리를 장을 봐서 일부는 택배로 보내고 일부는 주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승용차로 변산 까지 실어 날랐다. 역시 스탶으로 온 지인의 도움을 받아 50여명이 먹을 매 끼 밥을 펜션의 열악한 주방시설 속에서 끓이고 삶고 지지고 볶아 해결하였다. 음식점에서 사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식비예산이 충분했지만 밥학교에서 먹는 밥은 달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늘에게 하늘을 먹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편의점이나 학교매점, 패스트푸드점에서 구하는 음식으로부터 아이들이 단 이틀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기 때문이었다.
사사천물물천의 가르침을 삶속에서 언제나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시며 나를 가르쳐주시는 존경하는 스승님께 밥학교의 유일한 이론강의인 ‘동학사상과 이천식천 이야기’ 강좌를 부탁드렸다. 우리나라 대안교육 활동의 원조이며 ‘사람이 하늘이다.’는 동학의 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은 청소년 대안학교를 설립해 오랫동안 운영한 경험을 가지신 선생님의 노련한 강의가 하마터면 ‘먹고 노는데’ 그칠 뻔한 밥학교의 체면과 위신을 살려주었다.
말 망아지 같은 10대 청소년들을 어찌 다뤄야하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 지혜를 축적하신 선생님께서 ‘이천식천’ 이라든가, ‘만사지식일완’같은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접근하기 쉽도록 ‘밥퍼즐’이라는 게임형식으로 준비를 해 오신 덕에 강의 시간 내내 끼리끼리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풀어낸 아이들은 밥이 어째서 하늘인지 눈치 정도 챌 수 있게 되었으며 밥 한 그릇에 담긴 세상을 온전히 알진 못해도 설핏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불혹이 훨씬 넘어 뒤늦게야 동학의 진리를 접했던 필자에 비하면 밥학교에 참여한 친구들은 겨우 십대의 어린 나이에 밥에 깃든 거룩한 진리와 일찌감치 조우하게 된 셈이니 그것이 삶에서 맞는 하늘의 축복인 줄을 아직 어린 그들이 알까 모르겠으나 성장해 가면서 언젠가는 그 의미를 알게 되어 청소년기에 밥학교에서 배운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싶다.
글이 더 길어지기 전에 이번 밥학교를 진행하면서 도움 주셨던 고마운 분들에 대한 인사를 챙겨야겠다. 부산에서 변산 까지 먼 길을 힘겹게 돌고 돌아 찾아오셔서는 아낌없는 격려를 해주고 가신 한울연대 임우남 상임대표님과 밥학교에 어울리는 기념품이 되었으면 한다며 몇 날 며칠을 아크릴 실로 하나하나 손뜨개해서 만든 친환경수세미를 참가자 수만큼 만들어 보내주신 박경희 집행위원님, 그리고 기름값과 수고를 따지지 않고 운반과 이동, 잔심부름 등 진행을 기꺼이 보조해 주신 주변의 여러 지인들께 감사드린다. 말 그대로 하늘이 하늘을 먹이고 살린다는 걸 실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동학밥학교가 일회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천도교 종단 차원에서건 한울연대 단체 차원에서건 누가 주체가 되건, 그 취지와 목적을 살려 지속되기를 심고한다. 먹거리가 형편없이 오염되고 우리 밥상이 보이지 않는 거대 세력(국제 곡물 자본)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이 통탄을 금치 못할 시대에 밥상(식량)을 지키고 살리는 일이야 말로 곧 주권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 믿기 때문에 밥에 관한 절대 진리를 물려받은 동학이, 천도교가 그 분명한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진리의 등불로써 세상을 구하고 살리는 일에 끝내 앞장설 수 있기를 바라며 심고 드린다.
글: 김혜정 (한울연대사무처장, 동학밥학교 기획·진행)
첫댓글 강 건너 반짝이는 불빛.
날이 밝아 찾아갔더니 거기에 이렇게 씌여있데요.
*** 뚜란 등불 *** ㅎ
부족한 제가 흐릿한 빛이나마 내어 비출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_()_
흐릿한 빛이라니요?
사무처장?
당신은 언제나 달덩이 같이 그 빛이 항상 크더이다...ㅋㅋㅋㅋㅋㅋ
단디/ 한솔님이 말씀하시길... ' 언제부터 단디님 댓글이 석줄이 넘기 시작했지?'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