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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입구에 활짝핀 국화꽃 사진찍기에도 바쁘지만 성모동산에 잠깐 성모님께 엎드려본다 성모동산에서 아내와 찍은 사진 내 휴대폰 앞면이 닳아서 희미하게 나옴
신부님과 비를 맞으며 십자가의길 기도 바치고 성지 신부님 강론 듣고 5시 창원으로 출발 저녁 8시50분 성당 도착 성당 지하 강당에서 저녁식사 하고 귀가 황석두 루가성인의 안식처 연풍성지 연풍 성지 하면, 무엇보다 먼저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황석두 루가(1813-1866년) 성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정의 박해로부터 천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슴지 않고 작두 날에 목을 디밀었던 그분.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일생을 교회에 헌신했던 그분. 주교님과의 약속을 위해 동정 부부로 살면서 한때나마 사제의 길을 걸었던 그분. 비록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촌을 누비던 그분. 칼날 아래에서도 뛰어난 순교 용덕을 보여 주면서 천상 과거에 급제한 그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연풍 병방골(현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로 이주해 살던 평해 황씨 집안에서는 경사를 맞이하였다. 셋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부친은 이 셋째 아들이 벼슬에서 멀어져 있던 집안을 다시 일으킬 것으로 굳게 믿고는 과거 공부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리고 소년 황석두는 이러한 부친의 뜻에 부응하여 드물게 출중한 인재로 성장하였다. 일으켜 보겠다고 결심한 때문이리라. 그리고는 조용히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공부해 오던 유학의 윤리 도덕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하늘의 진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양에서 전해져 왔다고 이야기로만 듣던 바로 그 천주학이었다. 성인은 아주 놀랐지만, 스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주님의 섭리가 인도해 주신 길이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영달이 덧없는 것임을 확인한 성인은, 세속 과거가 아니라 만고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천상 과거에 합격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다. 성인의 마음이 이미 천주 신앙에 깊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충청도의 향시는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에서 치러졌는데, 1833년에는 백성들 가운데 재난으로 인해 굶주리는 이들이 많았으므로 다음해 봄에 향시를 실시하라는 하교가 내려졌었다. 그리고 과거를 보러간다고 하면서 집을 나서던 날, 다시 스승을 찾아가 밤을 새워가면서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를 성찰하였다. 그런 다음 복음사가 루가를 주보로 모시고 은총의 세례를 받았으니, 당시 성인의 나이 만 스물 한 살이었다.
성인은 지니고 있던 노잣돈으로 필요한 교리 서적들을 구입하였다. 그리고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노여워하는 부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세례의 은총은 이미 성인에게 진리에 대한 믿음과 함께 무엇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가득 부어주었다. 벌써 향시가 끝났단 말이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친은 노발대발하면서 집안을 말아먹을 놈이라고 꾸짖고는 벼룻집으로 마구 때렸다. 그러다가 이놈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하면서 하인들에게 작두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이윽고 하인들이 작두를 대령하자, 부친은 천주학을 당장 버리든지 목을 작두 날에 대든지 하라고 윽박질렀다. 서슬 퍼런 분위기에 아내는 울기만 했고, 다른 가족들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추상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은 차마 작두 날을 내리지 못했고, 부친은 이제부터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부친의 태도는 더욱 완강해졌다. 사실을 알게 된 집안 어른들까지도 찾아와서 집안을 망칠 천주학을 버리라고 강요했다. 다른 방도가 없던 성인은 그만 벙어리가 아닌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천주 교리를 깊이 깨우치는 데만 노력하였다. 네가 말을 하게 되었느냐? 병이 다 나은 것이냐?
순조 임금 재위 13년(1813년). 경상도 땅에서 충주 남창(현 충북 괴산군 불정면 창산리)으로 이주했다가
성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데다가 선량하여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열다섯 살 되던 해 그는 아내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자()를 재건이라 하였으니, 학문으로 집안을 다시
당시 성인은 근동에서 명망이 높던 낙하생 이학규(, 17701835년)의 문하에 출입하고 있었다. 스승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베드로)의 친척 조카로, 유명한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문을 외가로부터 이어받은 학자였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 화순, 경상도 김해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824년 유배에서 풀려나 충주에 새 터전을 잡은 지 여러 해였다. 그는 비록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했지만, 유배를 간 뒤부터 다시 신앙을 회복하여 남몰래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성인의 나이 만 열아홉 살이 되던 1832년 어느 날. 노 스승은 성인을 불러 낯선 서적들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천지 창조, 우주 만물의 움직임, 선과 악의 세계와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선행,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등등.
비밀리에 이루어진 교리 공부는 2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성인은 복음의 진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그 내용은 전통 학문만을 진리라고 믿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천주 교리는 먹구름 장막이 걷힌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이 성인의 마음에 다가왔다.
1834년 봄. 성인의 부친은 아들이 3년마다 돌아오는 향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얼마 전.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마음을 굳힌 성인은 스승을 찾아 자신의 세례식에 대해 의논하였다.
너무 놀라는 부친과 집안 사람들. 부친은 과거를 보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보면서 그 이유를 다그쳐 물었다.
- 아닙니다.
그럼 왜 돌아왔느냐? 무슨 연고가 있다는 말이냐?
- 다른 과시에 응시하려고 합니다.
또 무슨 과시가 있다는 말이냐?
- 천주 성교 도리를 열심히 배워 천당에 갈 과시를 보려고 합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 아버님께서도 천주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저는 그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성인은 아무 말도 없이 목을 작두 날에 디밀었다.
성인은 부친 모르게 아내를 입교시켰고, 일찍 과부가 된 처제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 사이에도 부친의 핍박은 그칠 줄 몰랐다. 게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로 천주학쟁이들이 여기 저기서
집안에서는 다시 한번 난리가 났다. 천주학에 미쳐 벙어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병을 고쳐준답시고 의원을 불러 침을 맞히거나 약을 다려 주는 등 법석을 떨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인은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자리에 누웠을 때나 밥을 먹을 때에도 주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날이 길수록 성인의 마음에는 미신에 빠져 있는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을 하루 빨리 주님의 품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내와 다른 가족들의 근심 속에서 그럭저럭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갔고, 어느 날부터인가 성인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리의 가르침이 희망과 용기로 다가온 것이다. 이에 성인은 부친의 방 앞으로 가서 아버님 하고 부친을 불렀다. 병이 나았다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날 수밖에 깜짝 놀란 부친이 성인에게 물었다.
- 저는 본래부터 벙어리가 아니었습니다. 부친께서 천주학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 그 도()가 대체 무엇이기에 벙어리 노릇까지 했단 말이냐? 그 책을 가져오너라. 나도 한번 살펴보자.
천주교 서적을 면밀하게 훑어보던 부친은 며칠 후 가족과 하인들을 불러모은 뒤 이렇게 말했다.
이 도는 참으로 올바른 도이다. 유학의 가르침은 여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모두 이를 받아들여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처럼 참된 도리에는 반드시 식견이 넓고 깊은 스승이 있을 터이니, 앞으로 그 스승을 찾아내 집에 모셔야 하겠다. 하면 확실하게 해야지, 몰래 배울 것이 아니다. 집이 좁더냐? 스승을 모시자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집안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했다. 아내도 적극적으로 그를 도왔다. 그 결과 얼마 뒤에는 부모님과 집안 사람 모두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로 성인의 신심과 열성은 날로 더해갔다. 또 그에 못지 않은 예의범절은 비신자들까지도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가 되었다.
1845년에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Ferrol, 고 요한) 주교와 성 다블뤼(St. A. Daveluy, 안돈이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 서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인은 수소문 끝에 주교를 만나 교회를 위해 앞으로의 생애를 바치겠다고 하느님께 서약했다. 동시에 페레올 주교의 가르침과 요청에 따라 아내와 수정 생활을 하겠다고 굳게 언약했다. 실제로 성인이 하느님께 드린 약속은 순교하는 날까지 그대로 지켜졌다. 또 그 날부터 성인은 평생을 아내와 동정 부부로 살았다.
페레올 주교가 이때 성인에게 요청한 것은 조선 교회를 이끌어나갈 사제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인은 가족을 떠나 다블뤼 신부가 세운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성인의 나이 마흔이 다되었지만,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면서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이에서 성인의 행실을 지켜보던 다블뤼 신부는 루가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경탄할 만한 열정을 가지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850년 10월 다블뤼 신부가 정식으로 조선교구 소신학교 교장에 임명되고, 교구 신학교가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한 뒤에도 성인은 얼마 동안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에서 페레올 주교의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조선에는 수도회가 없으므로 혼자 남게 될 루가의 아내가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성인은 아쉽게도 사제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증언 기록에 따르면, 루가가 방학 때 말미를 얻어 본가에 다니러왔다가 아내에게 등을 긁어달라고 했기 때문에 신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무렵 부친이 사망하자 성인의 형은 서투르게 재산을 관리했다가 가산을 탕진함으로써 온 가족이 곤궁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성인은 좀더 효과적으로 가족들을 도와 주려고 자본도 없이 여러 가지 불행한 투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험이 없었던 터라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파산시키는 일밖에 성공한 것이 없었다. 그러자 다블뤼 주교는, 성인이 선교사들 곁에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교우들이 의심 없이 돈을 빌려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성인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1858년에 페롱 신부는 조선어 공부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사목을 시작하면서 성인을 불러서 물었다. 세속의 모든 일을 포기하고 나를 돕겠는가? 그러자 성인은 다시 한번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페롱 신부는 성인을 자신의 한문 선생 겸 전교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성인은 가족들과 협의하여 홍산(현 충남 부여군 홍산면)으로 이주했고, 다시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인 서천 산막골(현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로 가서 회장의 본분을 다하였다.
성인은 하느님께 서약한 대로 온갖 정성을 다해 교회에 헌신하였다. 대신 형의 아들 요한을 양자로 맞이하여 혼자 있는 아내를 보살펴 주도록 했다. 그리고는 선교사 곁에 머물면서 아주 검소하게 살았으며, 절약해서 모은 돈은 모두 빚을 갚는 데 사용하였다. 얼마 안되어 성인은 모든 이들에게서 신용을 회복했고, 비신자인 채권자들조차도 그에게 많은 존경심을 나타낼 정도가 되었다. 페롱 신부는 훗날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황 루가 회장은 내가 공소에 다니며 성무를 수행하는 데도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그가 교구 전체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훌륭한 회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1861년 10월부터 루가 성인은 조안노(P. Joanno, 오 베드로) 신부의 회장 겸 복사가 되었고, 1863년 4월 조안노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회장 겸 복사가 되었다. 그런 다음 다블뤼 주교의 저술과 교정 작업을 돕도록 하라는 교구장의 명에 따라 다블뤼 주교와 함께 하게 되었으니, 그 동안 성인이 모신 사제는 모두 네 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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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이제 누구나 칭송하는 평신도의 모범이 되어 있었다. 열심한 기도와 묵상, 극기와 자선 행위는 그의 일상이 되었고, 날이 갈수록 성인의 마음에는 순교 원의가 굳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
황 루가 회장은 길을 갈 때에도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칼을 받고서 치명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얻어 마음대로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두 가지밖에는 다른 소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매일 닭이 울 때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와 묵상 속에서 대월 (, 지극한 정성으로 하느님을 높이 받드는 일)했습니다. |
다블뤼 주교를 돕게 된 뒤, 성인은 내포 방아사골(현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을 거쳐 신리 공소 (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박해가 따라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성인은 회죄직지, 성찰기략, 신명초행 등 수많은 교리서와 묵상서를 한글로 번역하거나 교정 출판하는 데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서울에서부터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지시한 1866년의 병인대박해였다. |
웬 미친놈이 죽을 길을 따라가려고 한단 말이냐? - 나도 천주학을 믿으니 함께 가겠소. 위에서 양인()만 체포해 오라고 명했으니 너는 어서 돌아가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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