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변절과 순절의 갈림길에서
1950년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가을시제(時祭) 날이 학교출근과 겹쳐 참사(參祀)를 못한 대신 성묘를 하러 고향선영을 찾아갔다. 가을시제는 대종묘사(大宗墓祀)가 음력 시월 보름날에 함안 봉산(蓬山)에 있는 봉산제(蓬山齊) 설단(設壇)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십육일에는 성만의 파종묘사(派宗墓祀)가 창녕에서 있으며 그 다음 날 17일에는 우리 집안의 시제가 있다. 그해는 공휴일과 겹치는 날이 없어서 아버지가 그날은 결근을 하고 숙부를 데리고 형제만 선영에 가셔서 우리 집안의 시제를 주재(主祭)하셨다. 할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6대 승손(承孫)이지만 고향에 가시다간 봉변을 당하실 염려가 있어 아버지가 할아버지 대신 주제(主祭)로 가셨다. 그래서 나는 방학이 되어 전쟁의 피난을 마치고 고향의 일가 할배, 할매에게 큰집이 무사함을 아뢰기도 할 겸 선산을 찾아 성묘하러 갔고, 밀양의 정세도 파악하여 할아버지께 보고드릴 일도 겸사해서 고향으로 간 것이다. 12월 하순의 어느 날인데 일찌감치 첫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다. 대신동 버스정류소에 도착했는데 9시 전이다. 그래서 전에 여기에서 차표를 부탁했던 그 아저씨가 생각나서 차표 파는 처녀에게 물었더니 전쟁이 나자 곧 초계에 있는 그의 고향으로 갔는데 그 후로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그 전쟁 통에 무사하기만 빌 뿐이다.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대구역으로 갔다. 차 시간을 보니 한 시간 쯤 여유가 있어서 ≪양키시장≫(요사이의 「교동시장」)에 가서 세종중학교에 계시는 김기화 선생님께 드릴 양주 「조니워커」 한 병을 사서 보따리에 쑤셔 넣고 역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전세가 한창 38선 넘어 이북으로 이남의 국방군이 진격하고 있는 때인지라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민간의 교통편도 안정을 되찾아 그리 심한 연착은 없었다. 차표도 쉽게 샀고 기차도 그리 혼잡하지 않아 큰 부담 없이 밀양역에 11시 좀 넘어 도착했다. 차표 받는 곳, 안쪽에 카빈총을 멘 검문경철관이 서있었는데 경찰관이 나를 세웠다. 나는 양복 위호주머니에서 교사신분증과 ≪전시요원증≫을 내주자, 경찰관이 거수경례를 하면서 “아이구, 선생님이시군요.” 라고 하면서 신분증을 주면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신사복 정장을 해서 좀...” “아 예. 수고하이소.” 역사를 나와 서쪽으로 난 도로로 내려왔더니 큰 도로 가에 「마산행」이라는 행선지 표찰을 붙인 버스가 털털 거리면서 손님들을 태우고 있다. 밀양 성내의 차부에서 이 시간에 맞추어 온 차인 것 같다. 승강구에서 차표를 끊고 있는 차장 처녀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생긋 웃는다. 아마 입은 신사복이 나이에 안 어울려 그런가 보다. 약 3,40분 걸려 수산 정류소에 도착했다. 일단 상설시장에 들러 종증조부이신, 이 가근방에서는 ≪참위어른≫으로 부르지만 우리들은 윗집할배, 이 윗집할배께 드릴 쇠고기 두어 근하고, 그리고 그 많은 코흘리개 아재비들에게 줄 과자를 사서 보따리를 하나 만들어 싸들고 한 5리 쯤 되는 길을 나섰다. 겨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논인 국농포(國農圃) 들판을 가로 질러 두암 동네를 안고 있는 산줄기 끝을 향해 제방으로, 논두렁으로 길을 찾아 나아갔다. 산줄기 끝에서 수리제방으로 올라 산줄기의 왼편 서쪽 자락으로 나아갔다. 길은 왼편에 흘러나온 또 한 자락의 산줄기와 함께 감싸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 그 안에 폭 안겨있다. 두암 마을이다. 수리제방 길은 바로 동구 앞에 가지가 잘 뻗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마을의 당상나무이다. 그 안쪽에는 향나무와 느티나무로 뒤를 받쳐주고 있는 샘터가 있는데 그 위에 윗집 큰할배가 계시는 초가집의 사랑방이 보인다. 높다란 축담 위에 두 간 두 줄의 사랑이 있고 그 넘어 마당이 있으며 또한 높다란 축담 위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초가 3간 정침이 있으며 방 앞에는 퇴청이 있어 방에 들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는 윗집큰할매와 우리들의 참위할배의 큰아들인 명례할배 내외분이 내가 찬이 아재라고 부르는 아들을 데리고 계셨다. 이 집을 향해 오른 편에는 둘째 아들인 이덤할배가 사남이녀를 데리고 살고 있고 오른편에는 넷째 아들인 월산할배가 보도연맹에 들어가 학살당하고, 이때 두 칠이 채 못되는 막 출생한 아이를 안고 누어있는 월산 할매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마저 나오지도 않았다. 다만 나를 보고 늘 말하던 “우리 장손, 우리 장손”이라고 말하던 할매의 손만 붙잡고 있을 뿐, 나는 할 말을 몰랐다. 거기에서 몇 집 건너 윗집큰할배의 셋째 아들 죽서할배의 집, 죽서할배는 전쟁이 일어나자 곧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해서 그 보도연맹의 학살을 모면했다. 그때 죽서할매는 후처로 오신 지 얼마 안 되었고 그 밑에 겨우 세 살 먹은 머슴애를 안고 있었다. 죽서할배가 가신 일본에서 다시는 안가겠다던 일본에서 살기가 어려우신 듯, 재일동포 북송귀환 때 이북으로 귀국하셨다고 전해왔다. 그 설하의 두 아들, 전처소생인 웅(熊)이 아재와 후처소생 관(爟)이 아재가 있었다. 이 웅이 아재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1990년에 죽었다. 이처럼 참위할배는 전쟁으로 가슴이 갈기갈기 짖겨지면서 사신 것이다. 그날 나는 아재들과 전쟁 직후 이 마을에 일어난 이야기와 금포.성만 우리 일가들에게 준 고통을 이야기하느라고 밤을 새웠다. 이덤할배의 맏아들 건이 아재도 붙잡혀갔다가 처갓집 다원 사람들의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고 한다. 처음 이들은 보도연맹에 든 사람은 전원, 그밖에 눈에 가시처럼 박힌 자들도 검속명단에 집어넣어 차제에 몽땅 없애자는 것이라고 했다. 구검 자들은 밀양읍내에 있는 『가타쿠라공장』(片倉工場)1) 창고에 가두었다. 여기에서 군경은 여러 급으로 분류하여 즉결 처분했다. 대부분은 A급이고 그래서 분류가 끝나면 7월 4일부터 트럭에 싣고 산골짝에 가서 총으로 난사해서 죽여 끌어 묻었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윗집할배 곁에서 잤다. 낮에 아재들에게 들은 학살의 이야기로 흥분이 되어 좀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에게 종남산 남쪽 어느 산골짝에 있는 방동 마을의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 그때 뵌 월산할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계엄 아재도 뵈었는데 아재는 조직의 책임자였습니다. 계엄 아재는 또 작년(1949년) 양력 정월이지 싶은데 또 한 번 보고 얼마 후에 전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방동에 있을 때 숙서 할배도 함께 계셨는데 그해 설날에 방동을 떠나셨는데 떠나고 나신 뒤에 소문은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의 끝에할배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네 끝에할애비 때문에 우리 집안은 우리 고을에 얼굴을 들고 나닐 수 없게 되었다. 죽으려거든 제 혼자 죽을 일이지 숱한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다가 「보도연맹」에 끌어들여서 숱하게 죽도록 했으니 그 많은 죽음을 어찌할꼬. 우리 집은 일제 때 그 극성스러운 왜놈의 전향공작을 물리치고 지조를 지켜온 집이다.” 할아버지는 이야기 도중 점점 흥분이 되시는지 마침내 일어나셔서 좀체 안 피우시는 담배를 담뱃대에 꾹꾹 눌러 담으시고 화로의 불을 헤치시어 담뱃대 물쭈리를 입에 넣고 화가 치솟는 만큼 힘을 들여 뻑뻑 소리가 나도록 빠셨다. “너도 알고 있는가 모르겠다만 그놈이(?) 거기서 훈련부장인가 뭔가를 했다는구나. 이기 환장을 해도 분수가 있지. 월산 애도 거기에 넘어가서 그 꼴 안되었나!” 나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었다. “글쎄, 그놈이 너그 할애비에게도 갔다는구나. 네 그것 알고 있나?” 그래서 나는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나의 끝에할배가 유독 월산할배, 죽서할배 그리고 건이아재(윗집할배 둘째아들 이덤할배 맏아들)에게만 「보도연맹」 가입을 권한 것만 아니라는 소극적인 나의 표현으로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불 밖으로 나와 일어났다. “할아버지, 제 할아버지가 구지로 옮기시고 얼마 안 되어, 아마 지난 4월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을 때인데요. 끝에할배가 오셔서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신지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의 화나신 큰 목소리가 밖으로 나왔어요.” 할아버지는 그때, “이눔아, 네가 「보도연맹」에 들어갔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조용히 있을 것이지, 이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내게 거기에 가입하라고, 이놈, 그런 소리 할라고, 그래, 조카가 박영세에게 갖다 주라는 솥값, 비누값을 떼먹고 밀양으로 갔다가 그 돈으로 한판 벌리다가 그만 붙잡혀, 이눔, 허리뼈가 부러지도록 맞고 전향했다면서. 그래 거기서 훈련부장 한다고? 그리고 온 일가 아이들, 찾아다니면서 「보도연맹」 가입시킨다면서.” 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이눔, 여기서 당장 나가! 이눔, 우리 집이 어떤 집이라고, 윗대 할아버지들 중에 지조 팔아먹고 살았던 사람 있었더냐. 이눔. 네가 내 아우라니. 이눔아 세상 부끄러워 못 살겠다! 이눔, 여기에서 시방 당장 나갓! 라고 하시고 방안의 빗자루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자 끝에할배는 그냥 신발을 들고 내뺐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말씀드리자. 윗집할아버지는 마침내 가슴에 차있던 울분을 탁 틘 홍소(哄笑)로 토해내시는 듯 했다.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를 말씀하셨다. “아무튼 그 네 할애비, 정말 속 시원하게 해 붙이지.” 실은, 그때 아버지가 구지로 오셔서 적은 월급으로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기가 힘드시었다. 때는 1949년 가을에 대구시 남산동 남문시장 안에 한의원을 하시던 박삼세 선생이 구지에 오셔서 아버지를 만났다. 박 선생님은 그 장형이 박영세라고 하는 분이신데 대구의 남문시장 안에 주물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두 분 형제는 비록 자본가이기는 하지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그 운동에 물질적으로 나의 할아버지를 지원해 오셨던 분이셨다. 우리 가족이 구지에 살고 있고 장차 할아버지도 세월이 허락되면 이곳으로 합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가족들의 생활도 지원할 겸 자기들의 사업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구지에다 판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에게 상당한 유리한 조건으로 그 지역 일대의 판매 분점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이를 수용하고 해 보니 상당한 이윤이 생기는지라 이를 받아드렸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이런 소문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끝에할배가 구지로 오셨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오진 숙부를 만나 그 동안의 회포도 풀고 고기를 사다가 대접을 하셨다. 며칠 동안 집에서 머물고 계시는 중 장날에 솥과 비누를 소상인에게 넘겨주고 그 가운데 아버지가 취할 이윤을 떼고 대구 본점격인 남산동 『삼세한의원』에 그 대금을 치러야 했다. 주로 이런 심부름은 내가 했다. 나는 당시 책을 사려고 자주 대구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대두에 가는 인편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 여느 날처럼 아버지는 나를 찾아 언제 대구에 갈 것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때 경상북도 학무과 장학시찰 대비 준비로 환경정리를 맡아 바빴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 요즘 학무과 시찰대비 준비로 이번 토, 일요일은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1주일 지나 다음 주일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부자간의 이런 대화를 듣고 있던 끝에할배는 말씀하셨다. “무슨 일인데 마침 내가 내일 대구에 가야 하는데 내가 그 심부름해줄 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야, 그럼 잘 되었네. 요즘 공부한다고 열심인 너를 심부름 보내기를 망설이다가 한 주일이 넘었네. 그쪽에선 기다릴 텐데. 『삼세의원』에 보낼 것인데, 그럼 끝에아버지가 대신 전해 주시겠는교?” “응, 내가 전해줄 게. 걱정 말아. 나도 거기에서 며칠 있다가 가려고 하네.” “봉투에 넣어 드릴 테니 그대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끝에할배가 심부름을 대신 맡았다. 그런데 이 심부름은 이행되지 못했다. 한 1주일 쯤 지나자 아버지는 구지지서 지서장의 연락을 받고 지서로 갔다. 거기에는 ≪남대구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찰계 형사가 몇 가지 조사할 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안병〇 씨를 아느냐?”부터 시작해서 실로 엄청난 일을 물었다. 결국 그 조사란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끝에할배는 그 돈을 가지고 삼세의원에 들리지 않고 밀양으로 바로 내려가서 친구들과 기생을 불러놓고 술판을 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말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간 것이다. 술판에서, 그 돈이 끝에할배의 활동자금으로 조카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경찰도 결국 그 말은 끝에할배가 친구에게 호기로 자랑한 말이라는 농담으로 판단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석해주는 데는 국회의원 석당할배의 그늘이었던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당장 입건되어 경을 쳤을 것이라고 그 형사가 말했다고 한다. 결국 끝에할배는 ≪남로당≫ 활동에 관해 지독한 고문으로 심문을 받아 허리를 숱하게 다쳤다고 했다. 끝에할배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면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게워내고 ‘전향서’를 제출하고 또 신문에 ‘탈당성명서’를 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남 당국의 정보.수사기관에 적극 협조를 해야 했고, 자기 주변의 일가친척 중에서 이른바 좌익운동을 한 사람들은 모조리 고발해야 하고 「보도연맹」에 끌어들여 가입시켜야 했던 것이다. 결국 그 변절활동의 대가는 6.25전쟁에서 가장 먼저 잡혀가서 가장 먼저 산골짝에서, 광산 폐광에서, 바닷가 절벽에서 무리로 묶여 학살당해야 했던 것이다. 끝에할배는 「보도연맹」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과거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을 팔아 전향시켰고, 이런 공으로 「보도연맹」 밀양군지부의 ≪훈련부장≫이라는 감투까지 얻어 썼다. 이런 일이 있고 반년 쯤 지나 1950년 4월경에 구지에 계신 자기의 형인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때는 밀양에서, 밀양에 계신 나의 조부모 양위와 숙부, 이 세 식구를 제가 뫼시고 와서 구지에서 외갓집의 그늘에 들어 보호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뻔뻔하게도 형을 찾아온 것이다. 나는 두 형제 사이의 격렬한 대화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들은 바는 다음과 같았다. 끝에할배 왈, “형님, 하루빨리 전향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합니다.” 나의 할아버지 답 왈, “네나 들어가서 잘 해보아라. 나는 어느 누구에게 보도를 받아야 할 병신은 아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결국 한탄을 하시면서 말씀했다. “이제 나는 너를 아우라고 보지 않는다. 어찌 한 부모 밑에 너와 같은 놈이 생겼단 말인가. 조상 님요. 의를 숭상해온 우리 조상님들요. 자손으로 어찌 저런 자손이 나왔는지, 이것이 형이 아우를 잘못 이끈 저의 죕니까!” 라고 하시면서 통곡을 하셨다. 피난을 끝내고 끝에할배의 학살을 전해 들으시고, “못난 내 아우로 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어 그들의 수많은 부모와 처자들의 천지에 가득한 그 숱한 유감을 어찌 다 풀고!” 라고 하시면서 또한번 통곡을 하셨다. 나 또한 나와 혈육을 함께 받은 끝에할배의 죄행을 이처럼 대신 고백함으로써 조금이라도 그들 피학살자 유족들에게 대속할 수 있을까 하고 주제넘은 기대라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두암에서 뒷집할배 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선산에 성묘를 마치고 오후 좀 늦게 밀양읍내에 들어왔다. 6.25전쟁 시작 직후 「백골대」에 붙잡혀 그 목이 잘려 걸려있었다는 밀양교의 성내 쪽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오래도록 눈을 감고 돌아가신 손기용 선생님을 추모하고 삼문동으로 가서 옛 「산업조합」 창고에 설립되어 있는 「세종중학교」 가교사에 가서 김기화(金基華)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그 사이 너무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디 그게 자네 탓인가. 자네 소문은 여러 갈래로 많이 듣고 있었네. 요사이 초등학교 선생을 한다지?” 라고 하시며 내 손을 잡으신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는 살아있으니 이처럼 만나지 않는가!” 김기화 선생님은 내가 1946년 9월에 「밀양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수학 선생님이셨다. 그 중학교에서 내가 퇴학을 맞을 때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던 하성호 선생님과 손기용 선생님과 더불어 안타까워하셨다. 손기용 선생님은, 「밀양중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셨고 나의 외조부께서 설립하신 「구지고등공민학교」의 화학 선생님으로 초빙하는 나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제가 구지로 모셔간 선생님이시다. 김기화 선생님은 그 엄청나게 변해버린 세월에 나를 만나니 할 말을 잊어버린 듯한 것 같았다. 선생님은 술을 정말 좋아 하신다. 그래서 ‘이때다.’ 하고 나는 보따리를 끌러 대구에서 사 가지고 온 양주병을 내어놓으면서 여쭈었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신다고 알고 술 한 병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안 그래도 자네가 자네 외갓집 곁으로 데리고 갔던 손기용 선생 생각이 나서 술 생각이 나던 데 마침 양주라, 그 좋은 술을 여기서는 안 되지. 자네 요즘 선생질 한다니 술도 좀 하겠제? 그럼 이 술병을 가지고 나감세.” 여기도 방학 중이고 시간도 오후에 한참이나 된지라 술 생각하시는 이들은 생각이 날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따라 가까이에 있는 술꾼들이 좋아할 듯한 조촐한 무슨 관이라는 술집으로 갔다. 술집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면서 어떤 방으로 안내되었다. 김기화 선생님은 술이 몇 순배 들어가자 손 선생님이 당하신 졸경을 내어놓으셨다. 김기화 선생님의 이야기와 손기용 선생님이 구지를 떠나게 된 경위를 보태어 이야기 하면 다음과 같다. 손 선생님은 1947년 9월에 「구지고등공민학교」 화학 선생님으로 오셔서 1948년 11월에 ≪대구 6연대 반란사건≫으로, 당시 구지 경찰지서장 김정구가 겁이 나서 돌아버려 나의 아버지와 밀양에서 오신 손 선생님과 김팔룡 선생님을 잡아다가 총살한다면서 설칠 때 그 미친놈의 졸경을 당하셨다. 이런 졸경을 당하신 손 선생님은 고향 밀양으로 돌아가셨다. 손 선생님은 고향에 가셔도 편할 날이 없으셨다. 아우 손기윤 형은 밀양에서 활동하다가 구지로 피신 온 일도 있었는데 고향에 가실 때 이 아우의 주선으로 가셨다. 고향으로 가셔서 아마 두 형제분이 당조직 활동을 하셨던 것 같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손 선생님은 밀양의 단장면.산내면 산중으로 피하셨다. 그러다가 7월 어느 날, 밀양에서는 우는 아이도 ‘백골대’라면 울음을 그친다는 그 ≪백골대≫에 붙잡혀 갖은 악형을 당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손 선생님을 체포한 그들은 시신을 끌고 손 선생님의 고향마을인 다원마을에까지 와서, 소여물을 써는 작두날 밑에 목을 걸쳐놓고 손 선생님의 숙부를 불러다가 발판을 밟으라고 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는지 그 목을 기다란 대창에 꽂아 밀양읍내의 남천강 밀양교의 다리기둥에 매달았다고 한다. 아버지이신 손주헌 선생님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신 이후 줄곧 이북에 계셔 통일운동을 하셨다. 6.25전쟁 때 참전하여 내려오시던 길에서 유격대에서 활동하던 막내아들 기윤 형을 만났다고 한다. 두 부자는 밀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창녕 고을 남지 다리까지 왔다가 밀양까지 못 오고 돌아갔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손기용 선생님은 구지에 계실 때 남매를 데리고 계셨던 사모님의 온유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은 지금 환갑이 넘었고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정말 한스러운 세월이다. 기윤이 형도 살아있을까. 정말 분단이 한스럽고 통일이 하루라도 급하다. 아! 분단의 조국이여! 김기화 선생님도 그날 나와 만난 일이 이승에서 마지막 날이 될 줄이야. 나는 이처럼 많은 스승이 계셨고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한 번도 따뜻한 한 끼니의 밥도 대접해보지 못했다. 감옥 살고 나오면 어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만 받았다. 그날 나는 선생님과 헤어져 밤차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했다. 내가 내 고향 밀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가 송구스럽고 부끄러워서였을까.
<주>
1) 『편창생사주식회사밀양공장』(片倉生絲株式會社密陽工場)인데 식민지 조선의 누에고치를 수탈해서 견사(絹絲)를 생산하는 공장인데 인본의 생사생산의 독점기업의 공장으로 조선의 각처에 공장을 지어놓고 조선 농촌에서 생산한 누에고치를 반강제적으로 독점 매수하여 견사 생산을 독점한 악질적인 식민지 수탈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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