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뜨 꾸띄르 & 프레타 포르테 :::::
 오뜨 꾸띄르(Haute Couture 고급 주문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858년 프랑스 최초의 디자이너 찰스 프레드릭 워스가 파리 개인 의상실을 열면서부터이다. 오뜨 꾸띄르의 창시자인 워스는 직접 디자인한 옷을 인형이 아닌 여점원(후에 그의 아내가 된 마리 베르네)에게 입히고 자신의 고객들을 초청하여 그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패션쇼를 가졌다. 그는 1년에 두 번 정기적인 컬렉션을 가지며 지금의 스타 마케팅과 유사하게 자신의 옷을 왕족이나 상류층 여성들에게 입힘으로써 유행을 전파시켰다. 이렇게 워스에 의해 시작된 오뜨 꾸띄르는 이후 1세기 반 동안 시대의 흐름과 세계 경제의 변화에 따라 흥망을 거듭하면서도 오늘날 패션의 상징인 하나의 고귀한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바르텔레미 티모니가 1824년에 재봉틀을 창조한 이후 봉재 기술은 패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봉재의 발달로 옷 만들기가 대중화, 대량화되자 고객을은 보다 차별화된 옷을 원했고, 레디 투 웨어(ready-to-wear 기성복)를 변형해 달라는 주문에 부응하기 위해 드레스 메이킹과 테일러링의 특별한 기술이 활용됨으로써 오뜨 꾸띄르는 점차 패션 디자이너의 독창적인 컨셉을 갖는 독립적인 사업으로 발전한다.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가 기성복을 의미한다면 맞춤복을 뜻하는 오뜨 꾸띄르는 원래 고급 의상점이란 뜻이다. 원칙적으로는 파리의 고급 의상 조합(La Chambre Syndict de la Couture Parisienne)에 가입하여 조합 규정의 규모와 조건을 갖추어 운영하고 있는 고급 의상점을 말한다. 또 여기서 만들어지는 옷들은 점포주나 전속 디자이너의 창작으로 디자인되어야 하며 반드시 자기 점포의 재봉부에서 제작되어야 진정한 오뜨 꾸띄르의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뿐만 아니라 춘하용과 추동용의 작품을 제각기 만들되 패션 모델에게 입혀서 조합이 지정하는 시기인 1월 말과 7월 말에 발표해야하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
인류 역사에 있어 '패션 철학'을 변모시킨 꾸띄리에(오뜨 꾸띄르 디자이너)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폴 포아레는 오뜨 꾸띄르의 관습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며 샤넬보다 10년 이상 앞서고 랑방보다 15년 이나 앞선 1911년에 자신의 이름을 단 향수를 생산해 낸다. 이후 그는 옷과 향수뿐만 아니라 립스틱, 매니큐어, 크림 등의 화장품과 비누 등을 내놓아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의 뒤를 따라서 꾸띄리에들은 1940년까지 자기 브랜드를 단 다양한 상품들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뜨 꾸띄르는 2차대전 후에 꽃을 피웠다.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의 '뉴룩'이 대중적으로 어필하고 미국이 경제적 부흥기를 맞이하면서 오뜨 꾸띄르가 재탄생한다. 1960년대에는 패션의 주도적인 역할을 계속하다가 70년대 들어 대중문화와 맞물리면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궁핍해진 경제상황과 의상에 대한 소비가 줄어들어 오뜨 꾸띄르는 다시 한 번 쇠락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오뜨 꾸띄르를 프레타 포르테와 구별하는 것은 단순히 의상이 화려하다는 데 있지 않다. 의상의 고유한 기능인 수작업,즉 자수, 레이스, 깃털 등 과 같은 부수적인 장식물 조차도 오뜨 꾸띄르에서는 의상에 권능을 부여하는 창조적 요소들로 아름답게 연출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뜨 꾸띄르의 크리에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다. 오뜨 꾸띄르의 디자이너는 보통 세컨드 디자이너인 모델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옷을 만든다. 작업실의 각 파트에는 수석 팀장이 있는데 그들은 디자이너가 해 준 스케치나 옥양목으로 완성된 입체재단을 평면재단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 전통적으로 작업실에는 퍼스트 핸드, 세컨드 핸드 경습공이라는 엄숙한 계급제가 있고 관습상 새 디자인 작업은 퍼스트 핸드만이 할 수 있다. 그들은 갖자 자기 분야에 맞는 작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수작업한다.
오뜨 꾸띄르의 고객은 왕족 등 고귀한 태생의 여성 단골 고객들이 함께 발전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뜨 꾸띄르는 부를 지닌 그들을 고객으로 확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상류사회의 특수층 여성들이 오뜨 꾸뛰르의 고객들이다. 여기에서 실제로 옷을 사는 사람은 중동이나 미국의 상류층 여성과 일부 프랑스인이다. 그들의 컬렉션이 화려한 궁전과 같은 고급스러운 장소나 의상실에서 열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뜨 꾸띄르 디자이너들이 컬렉션을 찾는 유명인들의 사회적 명성과 자신의 작품 수준을 동일시하는 것도, 자신의 단골고객 이름을 자주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오뜨 꾸띄르 쇼 때마다 프레스들의 관심은 누가 쇼장의 맨 앞줄에 앉느냐 하는 것이다. 컬렉션에 초청된 유명인사가 많을수록 또 그 유명도가 높을수록 디자이너의 수준이 격상되기 때문이다. 미숙한 디자이너를 훈련시켜 온 교육적 기능과 장인 정신을 갖춘 숙련된 재봉사 배출을 통한 기술력 향상, 액세서리 제작과 직물의 발달 등 오뜨 꾸띄르가 패션 산업에 기여한 바는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패션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창작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의적 영감은 프레타 포르테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성복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패션의 미묘한 차이인 스커트의 길이, 옷깃의 선, 어깨의 넓이, 장식 단추의 배치 등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늘 새로운 타입을 창조해내며 그것을 유행시키기 때문이다.

 J. C. 웨인은 대중들에게 빈곤하다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하여 영어의 '기성복'인 레디 투 웨어(ready-to wear)라는 말에 상응하는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라는 용어를 프랑스어에 도입시켰다. 오뜨 꾸띄르와 달리 트렌드에 민감하며 모든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산업적으로 생산하는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에 입각애 제조해 만든 옷의 특징이 잘못된 재단, 부주의한 마무리, 나쁜 소재, 창의력의 빈곤으로 지적되는 반면, 프레타 포르테는 산업과 패션을 혼합시키려고 한 것이다. 1950년대 초 갤러리 라파예트, 프랭탕, 프리쉬닉 같은 파리의 백화점은 제조업자들을 설득하고 고객들에게 더 최근에 나온 물건들을 제공하기 위해 패션자문위원들과 조정업자들을 백화점에 소개시켜 주었다. 프레타 포르테는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미적인 가치를 덧붙이고 유행 제품들을 제공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7년 프랑스에서 최초의 여성용 기성복 살롱이 문을 열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출현하고 대량 생산기구가 바뀌면서 전면적인 패션제품이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프레타 포르테는 미적인 분야에서 별로 창조적이지 않았다. 그저 오뜨 꾸띄르가 도입한 새로운 모드들을 단순하게 모방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프레타 포르테는 과감하고 젊은이처럼 생기발랄한 것을 지향하고 고급스러움과 화려함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정신으로 옷을 창조함으로써 그 나름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제 2세대 디자이너들의 물결로 인해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이 일어났다. 1970년대 초 겐조가 색깔과 꽃들에 대한 취향, 동서양의 혼합, 기모노에서 가슴이 납작하게 보이도록 하는 재단법을 빌려와 패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뮈글러는 영화와 과학공상소설에 나오는 여성의 원형을 제공해 주었다. 몽타나는 볼륨있고 어깨가 넓은 의복을 창조했다. 장 폴 고티에는 유머와 조롱을 사용하고 장르와 시기를 뒤섞어 놓음으로써 패션의 악동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이세이 미아케와 레이 가와쿠보는 옷의 전통적인 구조를 뒤집어 놓았다. 프레타 포르테의 디자이너들은 꾸띄리에들과 차별성을 가지며 패션의 크리에이터들이라고 명명되었다.
프레타 포르테는 소수의 소비자들이나 누리던 벽 높은 패션을 대중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소비자들은 더이상 꾸띄리에들과 크리에이터들을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겐조가 테드 라피두, 가르뎅 옆에 나란히 서게 되었고 이브 생 로랑은 카사렐, 뉴 맨, 소니아 리키엘과 필적하게 되었다. 물론 재정확보를 위한 꾸띄리에들의 라이센스 남발 또한 프레타 포르테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를 하였다.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은 오뜨 꾸띄르 컬렉션이 끝난 다음 3월과 8월에 열린다.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발표하며 기성복 업체의 유행 경향과 생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레타 포르테 역시 디자이너들의 개성이 중심이 되지만 오뜨 꾸띄르 라인보다 소비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디자인과 가격을 제시한다.
오뜨 꾸띄르는 이제 3천여명의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패션 박물관이 되어버렸다. 독특한 크리에이터들의 탄생으로 인해 발전을 거듭하던 프레타 포르테 역시 밀라노와 뉴욕의 신인 크리에이터들의 등장으로 주춤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의 파리의 오뜨 꾸띄르를 존중하며 파리에서 패션을 배우고 프레타 포르테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구상에 '패션'이라는 용어가 존재하는 한 파리는 패션의 중심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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