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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대중을 위하여 우주만유 근원(根元)의 원인과, 어떻게 만유 성능이 발생하는지의 진리(불경에서는 원래 승의유勝義有라고 부르는데 자성 본체가 만유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을 가리킨다. 승의성勝義性이라고도 한다)를 명백하게 열어서 보이겠다. 그리고 이미 정성(定性)이 소승 성문과로 향하는 일반 사람과, 아직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얻은 적이 없는 일반 사람들, 그리고 소승과를 얻었더라도 또 마음을 상승(上乘)으로 돌린 아라한들이 오직 일승(一乘)의 적멸장지(寂滅場地: 불생불멸의 심지心地)를 얻고 진정한 적정(寂靜)에 도달하는 바른 수행처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 여러분들은 자세히 듣기 바란다. 이제 여러분들을 위하여 강해하겠다.”
부처님이 이 문제를 자세히 풀이하려고 또 만자자(滿慈子)에게 물으셨다. “네가 물은 대로, 자성 본체가 이미 본래부터 청정한 바에야,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 등의 만유의 세계 물상이 생겨났겠느냐? 너는 평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늘 듣지 않았느냐? ‘네가 자성의 묘하고 밝음[妙明]을 처음 깨달을 때 비로소, 자성은 원래 본각(本覺)이 어둡지 아니하여 영명(靈明)한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안다’고 말이다[性覺妙明, 本覺明妙].”
만자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강연하시는 것을 늘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말해보아라, 자성의 영명을 깨달았을 때, 자성이 본래 영명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각성(覺性)이라고 이름 하느냐, 아니면 본각 자성이 원래는 영명이 없었다가 자신이 이제 깨달으니 비로소 영명한 정각(正覺)을 얻었다고 이름 하느냐?”
만자자가 대답했다. “ 만약 각성이라고 불리는 이것이 본래 영명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밝혀 알 수 있는[明白] 무슨 까닭도 없게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만약 밝혀 알 수 있는 무슨 까닭이 없다면, 밝혀 알 수 있음과 깨달을 수 있음이 근본적으로 없다. 만약 밝혀 알 수 있는 까닭이 있다면, 원래 자성의 본각이 아니다. 또한 밝혀 알 수 있는 까닭이 없다면, 도리어 또 밝혀 알 수 있는 바가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저 무명(無明)으로서 혼탁한 것은 맑고 투명한 본각의 영명한 자성도 아니다. 반드시 알아야한다, 자성 본각은 원래 스스로 영명하다. 밝음이 극점에 이르러[明極] 망동(妄動)을 일으켰기 때문에 비로소 조명(照明)하고 감각하는 작용이 발생했다. 그러나 감각과 조명[覺照]은 결코 본래 각성의 성명(性明)이 아니다. 이 후천적인 망동의 감각과 조명이 유소위(有所爲)의 기능작용[功用]을 형성한다. 이 유소위의 망동 기능작용이 성립한 뒤에는 각종 허망한 성질[妄性]의 본능[本能]을 생겨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형이상의 체성이 형이하의 물리 기세간을 발생시키는 본능을 설명하는 것이다. 반드시 가장 깊고 고요하며 영명한 지혜로써 이해하고 체험해야 한다. 문자로는 설명하기 지극히 어렵다. 만약 선천과 후천이라는 두 개의 명사를 차용하면 또 사람들의 의식상에 뚜렷이 두 개로 나누어지게 하겠지만 잠시 차용하여 말하겠다. 선천의 자성 본능은 적연부동하고 영명하며 청허한 것이다. 영명하고 청허한 기능이 자연히 허망하게 변동을 일으키면, 곧 후천의 성능이 생겨나고 각종 작용이 발생하여 물질세계의 본능을 형성한다).
원래의 자성 본체 상에서는 본각의 영명과, 발생하여 나오는 망동 조명 작용은 본래 하나의 체[一體]에서 생겨난 것으로, 같음[同]과 다름[異]이 없다. 다만 망동 기능이 발생한 뒤에는 같지 않는[不同] 기능작용을 산생하기 때문에 같지 않는 변화가 있다. 다시 개별적으로 서로 다른[互異] 성능 안으로부터, 같지 않는[不同] 가운데 서로 같은[相同] 점을 갖추고 있다. 같음[同]과 다름[異]이 또 서로 변화하기 때문에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을 세운다
(논리상으로 보면 서로 상대적이지만 또 절대로 귀납할 수 있다. 절대 속에는 다시 서로 상대적인 존재가 있다. 모순은 통일될 수 있고 통일은 또 모순을 지니고 있다).
망동하여 상반상성(相反相成)하는, 같음과 다름[同異]이 대립하는 이런 변화들 가운데에서, 서로 교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리의 변태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변태의 힘도 상반상성 한다).
물리적인 변태는 기나긴 시간을 지나면 물질 본능인 진로(塵勞)의 운동이 발생하고 자연히 서로 혼돈(渾沌)되어 혼돈(昏沌), 혼탁(混濁)의 상태를 형성한다.
이로 인해 물리 본능의 변태 작용을 일으키는 동시에 심리의 지각 감각상의 진로 번뇌를 일으켜서 세계를 형성한다
(부처님이 말씀한 자성 본체는 티 없이 맑고 밝은 각[湛然明覺]이다. 티 없이 맑고 밝은 각의 동성動性으로 인해 상반상성이라는 두 가지 기능이 발생한다. 서로 뒤섞여 교란함[混擾]은 물리세계 형성의 본능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자성 기능을 떠나지 않으므로 그 근본은 동일한 체성이다. 상반상성의 동력기능[動能]이 서로 오래 충돌하면 두 힘이 폭발하기 때문에 다시 상대적인 본능이 발생한다. 구심력이 수축하여 극점에 이르면 원심력이 발생하고, 원심력이 방사하여 극점에 이르면 다시 구심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능력의 분화ㆍ수축 작용은 모두 자성 기능이 그 중심점이 된다. 그 중심점은 진공真空 무형의 진성眞性 기능으로서 절대적으로 영명하면서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같음과 다름이 없는 가운데 또 같음과 다름이 있고, 같음과 다름 가운데 또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이 부분에서 자주 말하는 진로塵勞라는 두 글자는 바로 우주간의 물질운동 현상으로서 물리 본능이 발생하려 하면서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힘이요, 다하려고 하면서도 다하지 않는 유형변화 현상이다. 그 형용이 지극히 절묘하여 사실 다른 글자로 대신할 수 없으므로 우선 이상과 같이 나름대로 말함으로써 설명해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경전 원문에 따르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역경易經의 원리와 완전히 일치한다. 동양의 성인이나 서양의 성인이나 이 마음은 동일하고 그 이치도 같아서, 정말 서로 속이지 않는다. 역경은 태극太極으로써 본체를 표시한다. 태극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다가 일단 감응하면 천하의 모든 이치에 통한다[感而遂通]. 태극 자체는 음양이라는 두 가지 상생상극相生相剋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음양 역시 동력기능을 말하는 일종의 대명사이다. 생生과 극剋은 상반상성의 작용이다. 그리고 태극은 또 혼연한 일체이다. 음양이 움직인 다음에는 만물을 낳고, 하나의 일事 하나의 물物은 또 저마다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으며, 태극은 또 음양으로 나뉜다. 이렇게 겹겹으로 발전하여 무궁무진한 만물에 이르지만 총체總體는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그 속의 진리의 의미와 지취旨趣는 모두 서로 통하지만 간략히 그 논리를 끌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치에 대한 참고로 삼는다. 자성 본체가 망동妄動 변화의 기능을 일으킨 뒤에는 물리 본능의 작용이 발생하여 세계를 형성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정태적인 것은 허공 현상을 형성한다. 허공의 체성(體性)은 모두 동일하다. 세계 만유의 형상은 저마다 같지 않게 된다. 이 자성 본체만은 같음과 다름의 차별이 없다. 이 본체의 기능이야말로 진정으로 각종 만물 만상의 유위(有爲)의 법칙을 생겨나게 한다.
자성 본체는 본래 각성(覺性)과 광명 공허의 기능을 다 갖추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동요(動搖) 현상을 형성하기 때문에, 풍륜성(風輪性)인 대기층의 본능이 생겨나서 이 세계를 유지[執持]한다.
허공이 동요 현상을 형성하여 자성 본체 기능의 광명이 견고하게 응결되어 고체 물질을 성립하기 때문에 금속 성능의 물질 보장(寶藏)이 대지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대지의 중심과 지각(地殼)에는 금륜성(金輪性)의 고체가 국토를 유지한다.
각성의 공허의 기능[空能]이 응결하여 고체인 대지의 물질 보장으로 변하고, 또 허공 광명중에서 동요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풍성(風性)인 공기가 생겨난다.
풍성의 공기와 고체인 지질(地質)이 서로 마찰하므로 화성(火性)인 빛과 열[光熱]이 온갖 변화의 본능을 발생시킨다.
대지 중심의 물질 보장과 빛과 열은 서로 어울려[相成] 습윤(濕潤)의 본능을 생겨나게 한다. 화성인 빛과 열이 위로 증발하므로 수륜(水輪)이 형성되어 시방세계 중에 에워싼다.
화성인 빛과 열이 위로 올라가고 수성인 습윤은 아래로 내려가서 교호(交互)함으로써 작용이 발생하여 견고성인 물질 세간을 성립시킨다. 습한 것은 큰 바다가 되고 건조한 것은 대륙[洲陸]의 토지로 변한다. 바로 이런 이치 때문에 큰 바다 가운데에서는 항상 화광(火光)이 폭발하고 대륙 토지 사이에는 또 강하(江河)가 있어 흐른다. 물의 세력이 부딪치는 힘이 강하고 화성인 열의 힘이 약하면 지각이 점점 응결 형성되어 높은 산이 된다. 그러므로 산의 돌을 힘껏 치면 불꽃이 발생하고 암석이 녹으면 물이 된다. 땅의 응결력이 크고 수성인 습기의 힘이 약하면 초목을 나서 자라게 한다. 그러므로 나무숲과 초목은 태울 경우 토질로 변하고 힘껏 비틀어 짤 경우 걸쭉한 물이 된다.
이런 물질 종성의 본능이 망동 교호(交互)하여 작용을 발생시킨다. 에너지[能量]가 번갈아 바뀌어 서로 종인(種因)이 되고, 이런 인연으로 물질세계는 부단히 상속 존재한다....
3. 기세간(器世間)과 유정세간(有情世間)의 형성
아뢰야식의 전변을 통해 우리가 사는 물리적 환경과 생명체가 만들어집니다.
4. 유식학(唯識) 전변설과의 결정적 차이점
구분일반 유식학 (구사론·성유식론 등)《능엄경》 (여래장·선종적 관점)
| 출발점 | 아뢰야식 자체를 만물의 근본 종자 저장소로 두고 생멸을 논함. | 아뢰야식의 바탕에 있는 여래장(진여의 성품)에서 출발함. |
| 전변의 성격 | 식(識)이 인과 법칙(종자생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주로 변화함. | 본래 청정한 자성이 착각(무명)에 의해 환영처럼 잘못 보이고 있는 것임. |
| 해결책 (수행) | 식의 성질을 바꾸는 전식득지(轉識得智)를 강조함. | 아뢰야식의 체성인 여래장을 깨달아 본래의 청정함으로 되돌아감(반망귀진, 返妄歸眞). |
5. 능엄경 전변설의 결론: "모든 것은 마음의 현현"
능엄경은 이러한 전변 과정을 상세히 밝힌 후, 결국 "본래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임을 깨닫게 합니다. 즉,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만물(산하대지)은 본래 청정한 진여의 바다일 뿐이며, 주객의 집착을 떠나면 전변된 망상(식)이 사라지고 본래의 지혜(성)로 되돌아간다(轉識成智)는 점을 역설합니다.
6. 수행적 결론: 생멸(식)을 돌이켜 불생멸(성품)로
《능엄경》에서 아뢰야식의 전변을 설명하는 목적은 세계의 구성 원리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생멸하는 아뢰야식의 흐름을 멈추고 생멸하지 않는 여래장의 본연(자성)을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 2]
경전에서는 이를 "흐르는 물의 거품만 보지 말고 바다 전체를 보라"거나, "눈병이 나사 공중에 헛꽃(환영)이 보이는 이치를 깨달아 눈병을 고치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즉,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만든 육근(감각기관)과 육경(대상)을 안으로 돌이켜 청정한 본성을 회복하는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의 이론적 배경이 됩니다.
능가경(楞伽經) ㅡ장식(藏識)과 여래장(如來藏)
대혜여, 시작 없는 헛된 악습에 훈습된 것을 장식(藏識)이라고 한다. 이 장식에서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제7식을 내고, 무명이 머무는 것이다. 비유하면 큰 바다에 파도가 이는 것과 같아서 그 체는 항상 계속되어 끊이지 않는다…
만일 여래장에 장식이 없으면 곧 생사가 없다. 여래장 장식의 본 성품은 청정하지만 객진(客塵)으로 물들어져 부정하게 된 것이다.…
여래장의 장식은 부처님의 경계이므로 너희들 같은 비구와 청정한 지혜의 보살들이 행할 바요, 외도와 소승이 행할 바가 아니니라.
✔ 장식은 업의 종자(種子)를 저장하는 식(識)으로 곧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능가경』의 특징은 여기에서 보듯이 아뢰야식이라는 업의 종자를 저장하는 장식을 곧 여래장과 같다고 설한다. 본래 마음은 청정하지만 어리석음이 훈습(薰習)되어 그 본래의 청정한 바탕을 덮어버린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을 바다라고 하고, 그 위를 뒤덮은 무명을 파도로 본 것이다.
청정한 마음이 법신이며 바다이고, 아뢰야식은 청정법신을 무명이 덮인 것으로 파도와 같다. 파도의 측면에서는 저장식인 아뢰야식이고, 바다의 측면에서 보면 여래장인 것이니, 그 둘은 결국 서로 다르지 않다. 여래장이 곧 아뢰야식인 것이다. 청정법신 여래가 미혹과 업장에 감추어져 있어서 여래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색즉시공, 번뇌즉보리처럼 아뢰야식 즉 여래장인 것이다.
이것이 『능가경』의 특징이다. 『승만경』이나 『열반경』 같은 경전에서는 아뢰야식이 아닌 불성이나 여래장을 설한다. 『해심밀경』 같은 유식사상에서는 아뢰야식을 설한다. 그러나 이 『능가경』에서는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통합하고 있다.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둘이 아닌 것으로 보아, 여래장이 무명에 덮이면 아뢰야식이고, 아뢰야식에서 무명이 벗겨지면 여래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 『대승기신론』에서 보다 정교하게 마무리된다.
여래장에 장식 즉 아뢰야식이라는 업식(業識)이 없으면 생사윤회의 업이 사라지니 생사가 없다. 여래장의 본 성품은 청정하지만 객진으로, 즉 업식의 때로 물들게 되면 허망한 생사윤회가 생겨난다.
대승기신론이 말하는 아뢰야식과 여래장
아뢰야식과 如來藏유식에서 아뢰야식에 의해서 온 세상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움직임을 잘 살펴서 깨달음의 길로 향하도록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아뢰야식 연기론 즉 아뢰야식의 인식이 존재를 일으키는 연기의 주체가 된다는 설명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전하는데 좀어렵게 느껴질 수가 있다.아뢰야식 연기론은 어떻게 미혹을 벗어나서 깨달음을 향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보다는, 미혹의 세계가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설명하는데 우선 순위를두기 때문이다. 모든 불교가 그러하듯이 아뢰야식 연기론도 해탈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사람들에게 부처가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보다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아뢰야식 뒤에 진여(眞如) 즉 존재의 실상을여실히 보는 참다운 인식을 내세우는 연기론이 있으니 그 대표적인 논서가기신론(起信論)이다. 아뢰야식 연기론이 진여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설명 체제에서 진여를 빠뜨렸을 뿐이다.
이에 비해 기신론은 진여를 강조하고, 그 진여로부터 아뢰야식과 세상이 벌어진다고 설명한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하듯이, 유식에 있어서 아뢰야식을 이해하는데도 각 논서, 종파, 사람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아뢰야식을 거짓된 인식 즉 망식(妄識), 참된 인식 즉 진식(眞識), 혹은 참과 거짓이합한 인식 즉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 보기도 한다.또 아뢰야식을 한자로 음사하는데 있어서도 아뢰야식(阿佶耶識) 외에 아리야식(阿梨耶識)이나 아려야식(阿黎耶識)이 있다. 기신론은 후자 두 가지를쓰고, 진망화합식을 의미한다. 아뢰야식 연기론과 구별하기 위해서 아리야식을 쓰기로 한다.
기신론은 마음의 흐름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눈다. 진여와 생멸이다. 진여의 세계, 즉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우주의 흐름에 맞추어 사는 세계에서는 일체의 상대와 차별이 없다.반면에 생멸의 세계 즉 나의 삶과 내 것을 전제로 사는 세계에서는 상대개념이 있고 필연적으로 죽음과 고통이 뒤따른다. 그런데 진여와 생멸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음의 양면이다. 진여의 마음이 무명에 의해 흔들리면 망념이 일어나고 여기서부터 생사가 벌어진다.진여와 무명은 각기 단독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상대의 동요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진여와 무명이 동조해서 기동할 때, 이 두 가지가 합해 있는것을 아리야식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여래장은 말 그대로 여래를자체에 품고 있다는 뜻이다. 여래가 중생의 복장을 하고 움직인다거나 중생은 여래의 임산부나 태아라는 뜻에서 사용된다.아리야식도 그 자체에 진여심과 생멸심을 동시에 갖고 있으므로 여래장과같지만, 연기하는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된다.
아리야식의 연기는 나쁜 쪽에서 좋은 쪽으로 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리야식이 진여에 의해서 움직이면 열반의 길로 가고 무명에 의해서 움직이면 윤회의 길로 간다. 기신론은 아리야식이 윤회의 길로 가는 과정을 삼세육추로 열거한다. 먼저 근본 무명의 업식이 일어나고 주관과 객관이 벌어진다.이 주관은 눈앞에 벌어지는 경계가 내부의 투영인 것을 알지 못하고 밖에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선악, 시비, 애증 고락을 일으키고, 이에 집착해서 아집을 만든다. 그 아집에 찬 분별은 더욱 심해지면서 다시 갖가지 업을일으키고, 그 업에 따라 고통을 받는다.
기신론에서는 여래장과 아리야식을 조화 융합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기신론 선구 경전 가운데 하나인 능가경(男伽經)에 나타난다. 그런데 기신론의 아리야식에는 아뢰야식 연기론에 나타나는 현실의 업과 그 종자와의관계, 종자식(種子識)의 개념, 그리고 잠재심리의 성격이 없다. 아리야식은바로 여래장이다.이렇고보니 기신론에서의 존재인식 연기에 아리야식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래장 연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