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기해보(1659년) 간행을 주도한 안응창(安應昌, 1603-1680)은 이보다 한 해 앞서 1658년(戊戌) 순흥안씨 추원록(追遠錄) 총8권을 간행하였다.추원록은 소수서원에 목판(일부?)이 보존되어 있고, 동국대 경주 도서관에 제5권과 제8권을 제외한 나머지 6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저자 미상, 무술( 戊戌) 소수서원(紹修書院) 간행],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 1冊(卷2 - 7冊缺)이 소장되어 있다. 책에 수록된 전체 내용은 제1권 서두에 실린 목차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아래는 추원록 제1권에 실린 안목(安牧) 및 안원숭(安元崇) 기록이다. (안목은 안응창의 12세조, 안원숭은 11세조이다,)
[p.140] 十二世祖考 高麗國 政堂文學 順興君 諡文淑公 諱牧
[p.141] 十二世祖妣 化平郡夫人金氏
生一子 元崇
[p.148] 十一世祖考 高麗國 政堂文學 順城君 諡文惠公 諱元崇
十一世祖妣 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
生三子 曰瑗留後 曰祖同副提學 一則譜不載名
[p.149] 李牧隱贊(撰) 文敬公 安輔墓誌 亦曰 文成之曾孫 政堂文學元崇生三子 皆登科云 而一則不書其名 無從考知
안응창이 기해보(1659)보다 1년 먼저 간행한 순흥안씨 추원록에는 안목의 아들로 안원숭 한 사람만 기록하고, 안원숭의 아들은 3형제이나 안원과 안조동 외의 막내 아들 안수의 이름은 족보에 실리지 않아 모른다고 하였다. 또 목은 이색이 지은 안보(安輔) 묘지명을 인용하여 문성공(안향)의 증손 정당문학 안원숭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했지만 한 사람(막내 아들)의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안응창이 1년 뒤에 간행한 순흥 기해보(1659)에서는 안보 묘지명이 아닌 목은의 죽계안씨3자등과시서를 인용하며, 안원숭 아닌 안목의 아들 3형제가 급제했다고 하면서 나머지 두 아들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아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안보 묘지명을 보고 안원숭의 세 아들이 급제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1년만에 안목의 아들 3형제 급제로 입장을 바꾸었는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기해보에서 처음으로 안원숭의 셋째 아들 이름을 안수(安隨, 一作垂)라고 밝히고 있는데도 잘못된 주장을 내놓아 후일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쉽다.
안응창(安應昌, 1603-1680)이 1648년에 지은 안원숭 묘지명에도 아들이 셋이나, 장남, 차남만 기록하고 셋째는 족보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 안원숭(安元崇) 묘지명 (안응창 찬, 1648년) : 순흥안씨 갑신보(1824)
(안원숭의 장남, 차남만 기록하고, 셋째 아들은 족보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함[譜失其名])
* 안목(安牧) 묘지명 (안응창 찬, 1648년) : 순흥안씨 갑신보(1824)
(아들은 안원숭 1명만 기록하고 있다.)
안응창이 지은 선대 묘지명들은 추원록(追遠錄, 1658) 제5권에도 실렸으나, 간행본을 구해보기가 쉽지 않다. 1925년 간행된 안응창의 문집 백암집(柏巖集)에 실린 묘지명들에는 안목의 아들로 안원숭(安元崇) 외에도 안원형(安元衡)과 안원린 (安元璘)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는 원래 없던 내용으로 문집 간행할 때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 순흥안씨 기해보(已亥譜, 1659년)의 안원숭 기록을 보아도 백암집 묘지명의 내용이 변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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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창(安應昌, 1603-1680)은 순흥안씨 참판공파(안종신 후손)로 안목의 12대손, 안원숭의 11대손이다.
목 (牧) - 원숭 (元崇) - 원 (瑗) - 종신 (從信) - 진 (進) - 희 (희, 才+羲) - 계송 (繼松) - 광수 (光晬) - 경률 (景嵂) - 종도 (宗道) - 세복 (世復) - 몽윤 (夢尹) - 응창 (應昌)
희( 才+羲 ) : 𢹍, 㩬의 이체자 : https://dict.variants.moe.edu.tw/dictView.jsp?ID=86780
아래는 이봉징(李鳳徵, 1640~1705)이 지은 안응창(安應昌, 1603~1680)의 묘지(墓誌) 원문과 번역문이다.
* 이봉징 찬(李鳳徵撰), 안응창(安應昌) 묘지(墓誌) : 용인 금석문 / 경기도메모리
안응창의 호는 우졸재(愚拙齋) 또는 백암(柏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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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추원록(追遠錄, 1658) 제1권의 안목(12세조고), 안원숭(11세조고) 기록의 원본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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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추원록 1권에서 14세조고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관련 기록에 나오는 3자 등과 관련 부분이다.
[p.79] (목은 이색의 안보 묘지명 인용) 문성공 증손 정당문학 원숭의 세 아들 급제(文成之曾孫政堂文學元崇生子三人。皆登科。)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1302~1357)가 작고한지 22년 되는 해인 1378년에 지은 묘지명으로 당시 안원숭은 현직 정당문학이었으며, 문성공(안향)의 증손이라고 분명히 밝혀져 있다.
[p.80] (목은 이색의 죽계안씨3자등과시서 인용) ...文成公之孫政堂公有三子又登科...
여기서는 3자등과시서 원문을 그대로 인용만 하였고, 정당공이 안목인지 안원숭인지에 대한 판단은 없다. 그러나 1376년 문과에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과 안원숭의 아들 안조동이 동방 급제하여 같은 해에 안종원의 아들 3형제와 안원숭의 아들 3형제가 급제하게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므로 文成公之孫政堂公은 안원숭을 가리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文成公之孫은 "문성공의 손자"가 아니라 "문성공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목은이 이 글을 지은 것은 1378년이고, 안보 묘지명도 같은 해에 지었는데, 당시 안원숭은 현직 정당문학이었다. 안목(安牧, 1290~1360)은 이미 18년 전에 타계했으므로 그를 지칭하려면 정당공이 아니라 시호 문숙공(文淑公)이나 겸재(謙齋) 선생 등으로 했어야 한다. 이미 타계한 안향(安珦, 1243~1306)은 문성공(文成公), 안축(安軸, 1282~1348)은 근재(謹齋) 선생이라 칭하고 생전의 관직명으로 칭하지는 않는 반면에 현직 밀직첨서(密直簽書)인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은 밀직(첨서)공이라 칭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안원숭의 아들들이 안종원의 아들들과 동시에 3형제 급제를 달성한 것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않고, 수십년 전에 있었다는 안목의 아들 3형제 급제를 이야기한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다. 어느모로 보나 여기의 정당공은 안목이 아니라 안원숭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참고:
순흥안씨 병오보(1546)의 상계 및 안목 - 안원숭 기록
순흥안씨족보 병오보(丙午 1546년) 초보(草譜) 서(敍) - 안응창
병오보 초보(草譜 1638년) 서문 - 순원군(應昌) 친필
순흥 병오보(1546)의 광주 및 죽산안씨 시조와 상계 기록
순흥안씨 기해보(己亥譜, 1659)의 안원숭(安元崇) 기록
순흥안씨 기해보(已亥譜, 1659년)의 안원숭 기록 : 다른 이미지
순흥안씨 기해보(己亥譜, 1659) 안원숭(安元崇)의 장남 안원(安瑗)이 나오는 페이지
순흥안씨 기해보(1659)의 안원숭(安元崇) 자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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