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17일) 한 겨레의 내 불러그에 들어갔더니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의 담당 작가실로 온 쪽지가 와 있었다.
내용은 지난 10월에 허경영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11월 28일에 한 번 더 방영을 할 예정이란다. 자료 수집 차 온라인 서핑을 하다가 내 블러그에 있는 허경영 관련 내용을 읽고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 SBS 측과 이메일과 통화를 주고 받았는데 나를 인터뷰 하기 위해서 호주로 올 수도 있단다.
별스런 정보도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 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라서 사양을 하고 나서 생각을 하니까 시드니에서 현지 제작을 하는 방법이 생각났다. 10 년 전에 한국서 온 KBS PD들과 ‘추적 60분’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준비를 하면서 이메일이 오가는 과정에서 허경영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내가 분노의 오르가니즘을 맞보게 하는 내용이 있었다.
다음은 ‘그것이 알고 싶다’ 1회 방영 분의 대본이다.
허경영씨 인터뷰 때, 본인이 고 박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이었다는 부분을 강조하다가 월남 얘기를 꺼냈었는데요,
허: 내 군대생활기록부 봤습니까? 군대생활기록부 보세요. 청와대로 돼있어요.
피디: 월남전 가셨다고.
허: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월남에는 심부름갔지. 대통령이 보내서 간거고 월남 휴전때, 월남에있는 금괴.. 금괴를 월남의 대통령이 박대통령한테 아 이걸 좀 한국으로 옮겨 달라, 인천으로. 근데 그걸 LAT(?)를가져가서 청룡부대가 가서 그 금괴를 싣고 오라는데 대통령이 거기 응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단 내가 월남에 갔죠. 가서 전반적인 걸 봤는데, 사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노, 그래서 그냥 .헬리콥터 타고 돌아오고 말았는데.
세상에나? 저나 나나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징집된 일개 사병에 불과했는데 도저히 만화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제 멋대로 지어내다니?
연인원 30 만 이상이 파월 되고 5천여 전사자들을 발생한 월남전에서 백이 좋았던지 운이 좋았던지 편한 곳에서 근무하다 살아 돌아왔으면 감사하고 살아야지 월남전을 소재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는 것은 파병 전우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허경영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내가 관여 할 일이 아니지만 내 옆에서 총 들고 함께 보초를 서던 사람이 전우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쟁 상황을 자신의 인기몰이를 위해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전체 국민을 속이는 일은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일이고 생각되었다. 한국에 파월 전우회, 걸핏하면 가스통 들고 나오는 고엽제 피해자 단체 등이 있던데 허경영이 이렇게 월남전 팔아먹는데 왜 가만 있는지 모르겠다.
바로 이 내용 때문에 열 받아서 즉시 작업에 착수 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토요일까지 편집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빨리 찍어서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수요일에 시드니에서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목요일에 일도 못 나가고 우리 집에서 촬영을 했다. 30도의 찜통 더위 속에서 에어콘도 없는 내 서재에서 뒷마당의 시끄러운 새소리 때문에(요즘 우리 집 큰 나무에 피어 있는 꽃들 때문에 새들이 가장 많이 꼬일 때이다) 창문을 닫고 뜨거운 조명을 켜 놓고 촬영 기사, 오디오 기사와 땀을 뻘뻘 흘리며 1 시간 이상 작업을 해서 10분짜리 필름을 만들었다. 문제는 자료를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애초에 웹 하드 저장 방식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SBS 측에서 사용하는 웹 하드가 없다는 것이다. 부랴 부랴 SBS에서 웹 하드를 준비하고 자료 보내고 하느라고 촬영 팀에서 밤을 새웠다.
애초에 호주인들을 쓰려다가 장비가 좀 떨어지더라고 소통이 편한 한국사람을 쓰기로 한 일이 천만다행이었다. 호주사람들을 썼다면 절대 불가능한 무리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공은 SBS 측으로 넘어갔고 10분 인터뷰 중에서 과연 얼마나 방영할지 알 수 없으나 나로서는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방영 후 내 인터뷰에 대한 허경영 측의 반응에 대한 준비를 하는 일이 남았다.
그래서 온라인 상에 남아 있는 귀국 이후 일정, 숙박지, 연락처 등을 28일 방영 후 삭제할 생각이다.
상대가 워낙 정상을 넘어선 인물이니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귀찮은 일에 대비해서.
나는 인터뷰에서 한 마디도 사실과 다르거나 조금의 과장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내 삶의 일관된 원칙에 위배되기도 하고 관련되어 있는 일들에 대한 많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허경영과 나는 1972년도에 월남 전 참전 때 백마부대 본부중대에서 허는 법무부에 나는 군종부에 근무했다..
젊었을 때 그의 모습은 거창하게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웅지를 품은 모습은 아니었다. 큰 명분이나 대의나 공익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할까 하고 요령 피우는 보통 젊은이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허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기에게 유리하면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허 경영은 73년 2월 4일 미군 수송용 민간 항공기를 타고 함께 귀국했는데 헬리콥터는 무슨 공중에 날아가다 추락할 소리는 하고 있는지...
80년대 후반에 을지로 인쇄 골목 많은 국도극장 앞에서 우연히 만나서 차 한잔 했다.
자연스럽게 서로 뭐하냐고 근황을 주고 받게 되었는데 그는 개인사업 한다고 했고 나는 빈민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금도 기억 하는가 하면 그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은 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내 이야기를 들으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좋은 일 한다든지 아니면 그런 일을 왜 하냐든지 이다. 그런데 허경영의 반응은 마치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나서 끝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 반응을 흔히 경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런 반응을 흔히 경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허경영은 지금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은 것' 혹은 '알 필요도 없는 것'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을 보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능지처참(陵遲處斬) 형을 당할 인물이 아닐가?
세월이 좋아져서 혀를 교묘하게 경영을 해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하여간 허경영이 아닌 ‘혀 경영’ 때문에 졸지에 나같은 무명의 인간이 매스컴 타게 생겼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별 일이 다 있다.
첫댓글 역사에 남을만한 일을 하셨읍니다 .... 이번일들로 한국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계기가 되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설마 호주에서 빨리 사라져 버리라고 고사를 지내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허경영'을 세번만 외치면 신종플루도 고친다" 기도 차지않는 이런 이야기를 방송이 선두에 서서 혹세무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절대 믿지 않지만 대통령 선거 때도 적지 않은 표를 주었습니다 일종의 허무개그죠 목사님도 너무 열받지 마십시요 혀경영표 개그의 압권은 병에 대한 치유능력이 자신과 예수만있다고 하면서 동격시하려고 하는거죠
"혀경영" 와! 목사님 위트가 대단하십니다. 작품입니다. 비정규개그맨을 비정규목사님이 혼내주셔야 할 때입니다. 밑져야 본전이니 나도 혀경영을 세번 외쳐 볼까? ㅋㅋ
비정규 개그맨? 재미 있는 새업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