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요로에 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 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懺)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 ·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 ·도안(道安) ·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 ·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고래의 사상과의 유사점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불타가 황제(黃帝) ·노자(老子)와 나란히 제향되는 예가 그것이며, 4세기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해석하려는 격의불교(格義佛敎)도 생겨났다. 401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대승경전의 번역을 시작한 때부터 중국불교는 제2기에 들어선다. 구마라습은 여러 경전의 뛰어난 한역(漢譯)을 행하여, 그 한문경전에 의한 불교 본래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그 문하생은 3,000여 명이라 하며 그 계통은 일대 교세를 이루고 제2기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구마라습 외에도 각현(覺賢) 담무참(曇無讖) ·보리류지[菩提流支] ·진제(眞諦) 등이 도래하여 경전의 한역을 행하고, 그 경전 연구에 따라 삼론(三論) ·사론(四論) ·성실(成實) ·법화(法華) 등 많은 학파가 발생하였다.
또 우발적으로 전래된 여러 경전을 본래의 역사적 발전의 순서로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기 위한 교판(敎判:敎相判釋)도 성행하게 되어 교학연구는 더욱 진전하였다. 수(隋) ·당(唐)시대에는 전대의 교학연구를 기초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에 의한 종파가 확립되어 국민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에 입각한 불교의 성립을 보았으며, 이 시대는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수나라 때는 우선 지의(智顗)가 《법화경》에 의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종(開宗)하고, 이어서 길장(吉藏)은 용수의 삼론(三論)에 의한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당대(唐代)에는 화엄종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밀교의 각 파가 성립하였다.
화엄종은 《화엄경》 소의(所依)의 종파로 법장(法藏)이 그 교학의 대성자이며, 선종은 이전부터 달마(達磨)에 의하여 전해져 오다가 5조(祖) 홍인(弘忍)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고, 다시 그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하여 남종 ·북종의 2대 분파가 생겼다. 특히 남종파는 임제(臨濟) ·위앙(潙仰)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法眼)과 임제에서 분파된 양기(楊岐) ·황룡(黃龍) 등 이른바 5가(家) 7종(宗)이 나와 크게 번영하였다. 정토종은 담란(曇鸞) ·도작(道綽) ·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부처의 명호(名號)를 외우며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라는 간단한 교의(敎義)로써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법상종은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가져온 유식론(唯識論) 관계의 경전을 기초로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개종하였고, 율종에서는 도선(道宣)의 계통, 즉 남산종(南山宗)이 번창하였다. 밀교도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 등에 의하여 인도에서 전래되었다. 수 ·당의 황금기를 지난 중국불교는 그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몇 차례의 파불(破佛)을 겪고 또 명(明)나라 때는 중앙에서 통제가 가해지는 등, 활발한 불교활동은 차차 자취를 감추고 다만 선종과 정토종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 본토에서는 불교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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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칭칭
전문분야 : 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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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백과사전
원문출처 : [카페] "중국어학회(HSK)"
중국의 불교 -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 후한시대였다. 당시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불교 승려들은 상인들을 따라 중앙 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코탄·소그디아·파르티아·쿠차 등)로부터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인들은 불상을 보면서 부처를 신으로 여겼으며 현세적 구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경전을 처음으로 한역한 사람은 파르티아인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람으로서 148년에 수도 뤄양[洛陽]에 와서 주로 선관(禪觀 dhyna)과 소승경전들을 번역했으며 비슷한 때에 지루가참(支婁迦讖)도 뤄양에 와서 대승경전인 〈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 등을 번역했다.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는 〈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정법화경 正法華經〉 등 약 150부 300권을 번역하여 중국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311년 장안이 북쪽 흉노족에게 정복당하자 한족들은 양쯔 강[揚子江] 이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317~419)을 세웠으며 많은 지성인들은 허탈감 속에서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불교의 이질적 세계관이 중국 지성인들 가운데 파고들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자연히 반야경전의 공(空) 사상을 노장의 무(無) 개념에 준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의도적으로 유교나 도가 사상의 술어들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경향을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화북지방에서는 서역 출신의 승려로서 주술에 능한 불도징(佛圖澄:232~348)이 눈부신 포교활동으로 많은 신자를 얻었으며 사찰들을 세웠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도안(道安:312~385)으로서 그는 반야경전을 강의했고 경전들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하는가 하면 외국 승려들을 초청하여 역경사업을 지원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여 중국 불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제자 혜원(慧遠:334~416)은 유교와 도가사상에 정통했던 승려로서 여산(廬山)에 거하면서 동진 불교를 주도했다. 그는 아미타불을 명상하는 염불결사(念佛結社)를 시작했으며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승가의 독립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도안과 혜원의 불교 이해는 아직도 토착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구자(龜玆 Kucha)국으로부터 온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334~413)의 역경활동에 의해 비로소 중국 승려들은 대승불교 철학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구마라집은 〈대품반야경〉·〈묘법연화경〉·〈아미타경〉·〈유마경〉·〈금강경〉, 용수의 〈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 등을 포함하여 35부 254권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 그의 번역은 그 이전의 것들에 비해 사상적 내용의 전달이나 문체의 미려함에서 뛰어나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374~414)는 공사상을 천명하는 논서들을 지어 공에 대한 성숙한 중국적 이해를 보였고 도생(道生)은 대승 〈열반경〉 연구와 불성사상·돈오(頓悟) 사상으로 유명했다.
한편 구마라집 이후 인도 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의 번역은 계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담무참(曇無讖:385~433)의 대승 〈열반경〉, 불타발타라(覺賢이라고도 함:359~429)의 〈화엄경〉,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394~468)의 〈능가경〉, 보리류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 진제(眞諦:Paramrtha 499~569)의 〈섭대승론 攝大乘論〉·〈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의 번역은 각각 중국 불교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북조에서는 융성하기는 했으나 남조에서처럼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심한 박해를 받는가 하면 대대적인 승가의 지원도 있어서 윈강[雲崗]의 석굴과 같은 거대한 불교유적을 남기고 있다. 남조에서는 왕실의 한결같은 지원 아래 불교가 번창했으며 특히 교학적 연구가 발달했다. 남북조시대는 아직도 인도 불교의 문헌들이 소개되고 있는 역경기로서 중국인들은 불교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인도 불교의 주요경전과 논서들이 번역될 때마다 한 특정한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주석적 학파들이 성립되었다. 〈열반경〉을 연구하는 열반종, 〈십지경론〉을 연구하는 지론종, 〈섭대승론〉을 전공하는 섭론종, 〈중론〉·〈십이문론〉·〈백론〉에 기초한 삼론종 등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능가경〉의 연구와 전수를 주로 하는 능가종도 형성되어 초기 선 불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토신앙 계통의 〈무량수경〉·〈아미타경〉·〈관무량수경〉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 정토신앙의 전통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는 중국은 수(隋)에 의해 통일(589)되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천태종(天台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등장하여 남북의 정치적·사회적 통합과 종교적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태종은 혜사(慧思)·혜문(慧文)을 거쳐 천태산의 지의(智:538~597)대사에 의해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所依) 경전으로 삼는 종파로서 당시 중국에 들어온 모든 주요 불교사상들을 석존의 설법 시기에 따라 다섯(五時)으로, 교설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8가지(八敎)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포괄적인 교상판석(敎相判釋:敎判이라고도 함)의 체계를 세웠다. 천태종은 또한 실천수행의 방법으로서 지관(止觀)의 명상법을 제시했다. 지(止)란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통일된 상태를 뜻하고, 관(觀)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사물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훈련이다.
당조(唐朝)에는 인도의 날란다(Nland)사에서 유식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현장법사(596~664)가 유식사상을 종합하여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저술했으며 그의 제자 규기(窺基)는 그 주석서를 써서 중국 유식학파인 법상종(法相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현장은 귀국할 때 많은 불교전적을 가지고 와서 일생을 역경사업에 바쳤으며 그의 번역은 종전의 것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한 것으로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법상종은 다분히 인도적인 교학적 종파로서 당 초기에는 선풍을 일으켰지만 곧 인기를 잃어버리고 화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에 자리를 내주었다. 화엄종은 천태종과 더불어 가장 포괄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했다. 〈화엄경〉의 진리를 최고의 가르침으로 간주하는 화엄종은 종래의 모든 불교사상을 5가지 가르침(五敎)으로 정리하는 교판체계를 제시했다. 두순(杜順)·지엄(智儼)을 거쳐 법장(法藏:643~712)에 의해 완성된 화엄사상은 징관(澄觀)·종밀(宗密)에 의해 계승·발전되다가 845년의 폐불(廢佛)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화엄사상의 핵심은 법계(法界) 사상으로서 화엄은 사(事) 법계, 이(理) 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 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의 4종 법계를 말하고 있다. 이 법계사상은 천태의 관법과 마찬가지로 공(理)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상계(事)와 진리가 불가분(色卽是空)이며 현상계의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연결되어 있음(事事無碍)을 말하고 있다.
천태·법상·화엄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실로 인도 불교를 능가할 만큼 정교하고 포괄적인 중국적 불교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이전의 여러 학파들은 모두 거기에 흡수되어버렸다. 즉 삼론종은 천태종, 섭론종은 법상종, 지론종은 화엄종, 열반종은 천태·화엄종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천태·법상·화엄이 제아무리 정교한 논리로서 포괄적 사상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대중적 종파가 되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권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했으며 결국 중국의 문화적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실천적 성격이 강한 선(禪)불교와 대중적 성격이 강한 정토(淨土) 신앙뿐이었다. 정토종은 이미 언급한 정토 삼부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담란(曇鸞), 도작(道綽)을 이은 선도(善道:613~681)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중적 성격을 띤 사상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본래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의 서원에 정토 왕생(往生)의 조건으로 언급된 염불을 통해 정토에 태어난 후 성불할 수 있다는 신앙으로서 염불(念佛)이란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을 명상하는 관상(觀想) 염불을 뜻했다. 그러나 쉬운 수행(易行)을 강조하는 중국 정토신앙에서는 염불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稱名) 염불(南無阿彌陀佛)로 해석되었으며 이것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정토왕생의 수행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정토신앙의 성립에는 6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법사상, 즉 불교가 정법(正法)·상법(像法) 시대를 지나 지금은 불타의 올바른 가르침과 수행이 모두 사라져버린 말법(末法)시대가 도래했다는 위기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선불교는 문자 그대로 선정(禪定)의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로서 초기 선불교는 〈능가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불성(佛性) 사상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는 점진적인 수행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행전통은 5세기 말엽에 인도로부터 온 승려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홍인(弘忍:601~674)·신수(神秀:606~706) 대사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선불교를 인도적 선과는 다른 독특한 중국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점진적 수행(漸修) 사상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순간, 혹은 자기 마음의 본 바탕이 곧 불이라는(心卽佛) 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성불한다는 돈오(頓悟) 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선사상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것은 홍인의 제자였던 혜능(慧能:638~713)과 그의 제자로 자처했던 신회(神會) 화상에 의해서였다. 그후로부터 선불교는 번뇌를 제거하여 마음을 닦아가는 행위(修)보다는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체험(悟)을 강조하는 이른바 남종선(南宗禪)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인도적 좌선이나 수행보다는 평범한 일상적 삶의 행위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중시하는 남종선의 추종자들은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며, 그들의 설법과 선문답을 담은 어록(語錄)들을 발간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보다도 오히려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더 중시하게까지 되었다.
이와 같은 선불교의 근본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말은, 진리는 경전의 문자보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마음에 갑자기 와닿는 체험을 통해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성불한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구절들이다. 이러한 선사상의 배후에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직관적 지혜를 강조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을 찬양하는 중국의 도가적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선불교는 인도적 공사상, 불성사상과 노장철학이 한데 어우러진 원숙한 중국적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선불교는 당 중엽부터 시작하여 당말·송초에 이르기까지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불교에 대항하여 사상적 재무장을 하고 나선 신유학사상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선도(善導) 이후 대중적 뿌리를 내린 정토신앙에도 선불교의 영향 아래 염불선이 유행했으며 선수행자들 가운데서도 염불과 정토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정(禪定) 융합적 불교가 송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문화적 자긍심이 강한 중국인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불교를 비판하는 배불론이 항상 존재해왔다. 배불론자들의 주요논지는 불교가 자연스러운 인륜을 무시하고 효(孝)에 어긋난다는 것, 경제적 낭비와 손실을 초래하며 초세간적 성격으로 인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당나라 말기부터 이러한 배불론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송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불교는 신유학에 사상적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고 그로부터 전반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정토신앙과 선불교는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으며 도교나 토착신앙과의 습합(習合)을 통해 불교는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종교로 유지되어왔다. 1930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약 73만 8,000명의 승려와 26만 7,000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는 전반적으로 역동성을 상실했으나 중국 대중들 사이에 꾸준히 종교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침체된 불교계를 사상적·제도적으로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변혁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1949년 이래 공산치하에서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전통불교는 심한 탄압을 받아 거의 명목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용출처 : 신지식
[중국불교의 전래와 역경 사업]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다소 전설적인 것으로는 ≪위략 魏略≫의 서융전(西戎傳)에 나타나며, 그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년에 대월지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이 불교를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65년에 후한 명제(明帝)의 이복동생인 초왕영(楚王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에서 불교는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북쪽 황하유역에 전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0년대에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이라는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시의 역경승(譯經僧)들은 인도·대월지국·안식국·강거국(康居國)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거꾸로 구도(求道)와 구법(求法)을 위하여 서역으로 향하였다. 위나라의 주자행(朱子行)을 비롯하여 많은 순례승들이 서역을 찾아나섰다.
처음 북부지역인 뤄양(洛陽)·장안(長安)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그 뒤 역경승 지겸(支謙)이 오나라의 서울 건업(建業)에서 포교하고, 월남에서 북상한 강승회(康僧會) 역시 오나라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함으로써 점차 남부중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불도징(佛圖澄)은 중앙아시아의 구자국인(龜玆國人)으로서 신통력과 주술로 사람들의 신앙을 얻었고 국왕의 고문을 지냈다.
그의 제자 도안(道安)은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신임을 받아 경전목록과 중국인 출가자를 위한 생활규범을 작성하였다. 또 도안의 제자 혜원(慧遠)은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寺)를 짓고 염불 중심의 결사운동(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은 불교의 보편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가 대립하면서 불교가 중국적 풍토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호교적 논설이다. 또한 서진시대(西晉時代)에는 축법호(竺法護)가 ≪정법화경 正法華經≫·≪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 등을 번역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일반 사상계에서는 노장 사상(老莊思想)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를 노장사상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풍조가 현저히 나타났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불교사상의 공(空)을 노장 사상의 무(無)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격의불교의 특징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에서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중국 사대부층이 불교에 접근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또 불교의 윤회사상이 도입되어 전생·현생·내세에 대한 인과응보 개념이 중국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때였다.
중국 불교의 역경사(譯經史)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다. 중앙 아시아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나중에는 대승불교를 공부했던 그는 ≪대품반야경≫·≪금강반야경≫·≪묘법연화경≫·≪유마경≫·≪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과 용수의 ≪중론≫·≪십이문론≫ 등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논서들을 번역하였다. 특히 중관사상은 그의 한역(漢譯)을 근거로 중국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는 ≪조론 肇論≫을 저술하여 중국인이 이해한 공사상을 피력하였다. 이 ≪조론≫의 영향은 당대 이후 중국불교사상계를 풍미하였고, 구마라습이 번역한 ≪중론≫·≪십이문론≫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전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동진 시대(東晉時代)의 역경승이었던 불타발타라(佛謁跋陀羅)는 후대 화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화엄경≫을 번역하였다.
담무참(曇無讖)은 ≪열반경≫을 번역해서 중국불교에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사상을 전래하여 불성설(佛性說)의 전개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역경승 진제삼장(眞諦三藏)은 ≪섭대승론 攝大乘論≫ 등의 유가학파 경전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의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기신론≫을 번역하여 당나라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경전들은 역경이 이루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또는 100∼200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우리 나라 고승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유포되었다. 이들 경전들은 우리 나라 불교의 여러 종파의 근본경전으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불교사상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펌-
현장스님
1. 현장(602~664) 스님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출신으로 그가 살았던 시기는 수당隨唐교체의 난세亂世였다. 장안성도長安成都 각지에서 스승을 구하고, 열반경涅槃經 섭대승론攝大乘論 소종小乘의 제론諸論에 통달通達했으나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2. 현장의 문제의식은 중국한역불교中國漢譯佛敎의 격의적格義的 특색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출발한다. 한마디로 그의 문제의식은 한역불교의 모호와 애매함에 대한 답답함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3. 쉽게 생각하면 이런 종류의 고민과 비슷하다.
日帝시대를 통해 일본교사 내지 그들에게 배운 사람들을 통하여 이해된 '서양철학', 데카르트가 어떻구 칸트가 어쩌구 쇼펜하우어가 저쩌구 하는데 도무지 모호하다. 그러지 말구, 직접 서양에 가서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 사상체계가 발생한 문화적 발생한 문화적 분위기를, 그 사람들을 알아보자! 4. 그래서 유학을 간다! 직접 가서 알아보자! 몸소 산스크리트 원전原典에 기초하여 그 뜻을 철저히 考究하고 싶은 학문적 열망으로 가득찬 27세의 청년, 독력獨力으로 만난萬難을 각오하고 長安을 출발하여 구도행의 걸음을 내친 것이 貞觀3년(629)! 5. 간난신고를 무릅쓰며 현재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 소련의 중앙 아시아 지역과 아프간을 거쳐 마침내 파키스탄과 인도에 도착했다. 6. 그는 지금의 파키스탄 네팔 인도북부에서 3년 간 유학하고, 이어서 당시 인도불교학술의 중심인 나란타사那爛陀寺에까지 이르렀다.
그 곳에서 계현戒賢(Silabhadra)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착無着 세친계世親系의 유가유식瑜伽唯識의 敎學을 배웠다. 7. 나란타사에서 5년 간 피나는 학습을 거친 후, 현장은 계속해서 인도와 파키스탄 각지를 순례하면서 배웠다. 5~6년이 지난 뒤, 또 나란타사로 돌아와 그 곳에서 <섭대승론>을 주로 강의했고, 중요한 논문인 '회론종會宗論'을 발표했으며, 아울러 변론과정에서 그의 반대자들을 논박했다. 8. 1642년 계일왕(戒日王)이 현장을 위하여 曲女城에서 1차 불교 경학 변론 대회를 거행했는데, 5인도 18국 국왕과 각파 승려 수천 명이 참가했다. 대회에서 현장은 최고 영예를 얻었다. 9. 현장은 불상 불사리를 비롯하여 梵本불경 657부를 수집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고 天山南路 南道를 통하여 장안에 도착한 것이 정관 19년(645)! 그의 나이 43세! 10. 그는 장안에서 불경을 번역하는 전문기구를 조직하여 20년 동안 75부 불경을 번역했는데 모두 1335권이었다. 그가 여행중에 얻은 풍부한 견문을 쓴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중국 신강 및 소련 중앙 아시아 지역, 아프간, 인도, 파키스탄, 네팔과 실론에 있는 138개 古國의 산천, 산물, 풍속, 종교와 종교경제 정황을 기재했는데, 이것은 이들지역과 국가를 연구하는 7세기 중엽 역사의 중요문헌이다. 11. 그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가 명대에 희곡화된 것이 바로 '서유기西遊記'!
인도여행기 '왕오천축국전' 쓴 신라 고승
통일 신라 시대의 고승 혜초(慧超). 그는 8세기 인도와 중앙 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겨 세계 문화 교류에 이바지한 특이한 인물이다.
- 소년한국일보 참조-
동아시아 역경사 수수께끼의 첫 한역 [사십이장경]
출처 http://cafe.daum.net/heainsabud/5ii/607
가섭마등과 축법란의 최초 번역설 분분
양계초-여징-탕용동 각각 다른 주장하고
번역원본 남아있지 않아
불교의 중국 전래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감몽구법설(感夢求法說)’로 불리는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의 본 모습은 동한(東漢) 때 모자(牟子)가 지은 [모자이혹론]에 보이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동한(東漢)의 황제 명제가 꿈에 금빛 나는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길몽이라 여기고는 그 다음날 신하들에게 그것이 누군가 물었더니 인도의 부처(佛)라고 하였다.
이에 명제는 대월씨국(大月氏國,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사신을 보내 [사십이장경]을 베껴 가져와서 난태(蘭台, 호북성 종상현)의 석실에 귀중하게 모셔놓았다. 그리고는 낙양(당시의 수도) 서문 밖에 절을 세우고 낙양 성문 위에 불상을 놓았더니 나라가 안팎으로 평안해졌다.”남북조 시대 때 양(梁) 나라 혜교는 [고승전]에서 이 전설에 몇 가지 말을 덧붙인다. 곧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사신과 함께 낙양에 왔으며, 명제가 세운 절 곧 백마사에서 기거하면서 [사십이장경]을 번역했다.” [위서]〈석노지〉에 따르면,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낙양에 도착한 때가 서기 67년(영평 10년)이고, 그 이듬해인 68년에 명제는 인도의 사원 건축 양식에 따라 절을 지으라고 칙령을 내린다. ‘백마사’의 유래에 관해서는, 혜교가 소개하는 다른 설도 있지만, 북위(北魏) 때 양현지(楊衒之)가 지은 [낙양가람기]의 설이 유력하다.
명제가 보낸 사신들이 불경과 불상을 백마에 싣고 가져왔다고 해서 절이름을 ‘백마사(白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백마사를 세운 이후에 동아시아에서는 절 ‘사(寺)’자를 붙여 불교 사원을 뜻하는 전통이 생겼으니, [낙양가람기]에서 백마사를 일컬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점(佛敎入中國之始)’이라 평가한 것도 일리 있는 말이라 하겠다.
혜교의 [고승전]이래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백마사에서 번역했다고 하는 [사십이장경]을 ‘첫 한역’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지만, 1920년대에 양계초(梁啓超)가 이러한 통설을 거짓이라고 폭로하면서 [사십이장경]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양계초는 [모자이혹론]의 그릇된 기술, 현존하는 [사십이장경]의 문체 및 구성 체재 등을 문제삼아, [사십이장경]이 빨리 잡아야 진(晋)나라 때 누군가 편집한 가짜 역경이라고 주장하였고, 심지어는 가섭마등과 축법란의 실재 여부도 믿을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양계초의 주장은 [사십이장경]의 현존 판본에 대한 주의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현 학계에서는 지금 아무도 현존 [사십이장경]이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한역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현존하는 한역대장경만을 검토 대상으로 삼을 때 ‘최초의 역경가’라는 영예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영예는 다음 주자인 안세고(安世高)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양계초의 뒤를 이어, 여징(呂 )은 현존 [사십이장경]을 [법구경]의 초록(抄錄)으로, 그것도 현존 [법구경](지겸 역)이 아닌 한(漢) 말에 있던 이역(異譯) 법구경의 초록으로 규정하고, 동진(東晋) 초(4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양계초의 견해에 대한 부분 수정도 이루어졌는데, 예컨대 중국의 학자 탕용동(湯用 )은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실제로 중국에서 [사십이장경]을 번역했지만 중간에 없어졌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탕용동은 동한 때 양해(襄楷)가 환제(桓帝)에게 보낸 상서문(166년)에서 [사십이장경]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음을 밝힌 뒤, 이를 근거로 166년 이전에 이미 누군가 [사십이장경]을 한역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탕용동은 [사십이장경]의 옛 한역에,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사람이 번역한 것과 3세기 전반에 지겸이 번역한 것, 이 두 가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는데, 이 견해를 밀고 나가면 고려대장경에 보존된 [사십이장경]은 지겸이 번역한 [사십이장경]이 원본이라는 말이 된다.
필자도 탕용동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인데,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번역했을 [사십이장경]이 단편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 앞으로도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을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동아시아 역경사 동아시아의 첫 역경가 안세고(상)
http://cafe.daum.net/heainsabud/5ii/608
아비다르마 불교에 정통 『안반수의경』 번역하여
중국에 전한 것은 불교적 사상과 수행의 물꼬 튼 최초의 쾌거
동한 때 유명한 역경가로 안세고와 지루가참(/지참) 두 사람이 있다.
안세고는 원래 안식국(지금 이란 북부)의 왕자였다. 안식국 출신이기 때문에 성을 안(安)이라 하였고, 이름은 청(淸), 자(字)는 세고(世高)이다. 부왕이 죽은 뒤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출가, 이후 여러 나라를 순력하다가 동한 환제 건화 초(147년)에 낙양(당시 동한의 수도)에 와서 그 이듬해부터 영제 건녕2년(169)까지 22여년간 역경 작업을 하였다. 지루가참이 환제 말(166년 경)에 낙양에 왔으니 지루가참보다 약 20년 앞선 셈이다. 동한 영제 말년에 중국 천하가 전란에 휩싸이고 삼국 정립시대의 조짐이 보이자 안세고는 난을 피해 강남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곧 안세고는 강남 지역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남에서 지낸 행적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여산, 예장(지금 강서성 남창), 심양(지금 강서성 구강)에서 지낸 적이 있으며 회계(지금 절강성 소흥)에서 임종했다고 한다. 안세고가 회계의 한 저자거리를 지나갈 때 한 옆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그 불똥이 잘못 튀어 죽었다고 하니 객사한 셈이다. 대략 180년 경에 일어난 일이다.
《출삼장기집》〈안세고전〉에 의하면, 안세고는 자신의 최후를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자신은 전생의 업보를 갚기 위해 강남길을 택한다‘고 말했다고 하니, 불교의 업 사상이 안세고의 생애를 소재로 중국인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것 같다. 안세고의 임종 후 50년 정도 지나 안식국도 멸망하게 되니 안세고는 안식국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었다.
안세고 당시에는 안식국에서 설일체유부 계통의 아비다르마 불교가 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인가 안세고는 아비다르마 불교, 선학(禪學)에 정통했다고 한다.(《출삼장기집》〈안세고전〉).
아비다르마 불교에 관해서는 《아비담오법행경》 등, 아함부에 관해서는 《인본욕생경》, 《사제경》, 《팔정도경》, 《전법륜경》 등, 선학에 관해서는 《안반수의경》, 《음지입경》, 《선행법상경》, 《도지경》 등을 번역하였다.
현상에 대한 분석적 고찰에 뛰어난 아비다르마 불교를 처음으로 중국에 전한 점, 수식관(數息觀)을 설하는 《안반수의경》을 번역함으로써 처음으로 중국에 아비다르마 불교의 선법을 전했다는 점에서, 안세고의 작업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불교적 사상과 수행의 물꼬를 튼 최초의 쾌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한 환제 때(재위 147-167) 황노도(黃老道: 도교의 전신으로 黃老學과 方仙術이 결합된 형태.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후에 태평도와 오두미도로 변모한다.)가 형성되어 지식인 계층에서도 영향력을 떨치게 된다. 안세고가 소개한 ‘수식관’은 황노도에서 말하는 ‘식기(食氣)’, ‘도기(導氣)’, ‘토납(吐納)’ 등 술수와 흡사한 것으로 당시 지식인 계층에 수용되었고, 이후 동진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200년간 《안반수의경》은 당시 지식인의 애독서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도안(道安 312-385)은 안세고의 번역을 평하기를, “안세고의 번역은 원본을 중히 여겨 인도의 옛 글을 꾸미지 않았다. 글은 주로 내용(質)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보지 않으면 그 뜻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출삼장기집》〈대십이문경서〉)고 하였다.
안세고는 범어와 중국어 양자에 능통했기 때문에 역문의 정확도, 역어 선택의 신중성 등 역문의 신뢰성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최초의 역경 작업인데도 후세의 현장에 비해서 거의 음역을 쓰지 않는 등 번역의 기본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단지 의역을 쓰지 않고 직역만을 고수한 탓에, 도안의 평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안세고가 번역한 경전에 후대 사람의 주석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안세고에 관해 자주 접하게 되는 견해 가운데 하나는 안식국이 소승불교 국가였으며 따라서 안세고도 소승 불교도였다는 판단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동아시아 역경사 대승경전의 첫 역경가 지루가참
http://cafe.daum.net/heainsabud/5ii/610
「도행반야경」과 「반주삼매경」중국어 번역 계기로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 유입돼 동아시아 사상사에 새로운 전환기 마련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인도의 대승불교 경전을 번역한 사람은 지루가참(흔히 약칭을 써서 ‘지참(支讖)’이라 한다)이다. 대월지국(大月支國/大月氏國, 지금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일대) 출신이기 때문에, 성을 ‘지(支)’로 붙였을 뿐, 실제 이름은 ‘루가참(樓迦讖/婁迦讖, Lokaks.ema)’이다. 동한 환제 말(167년)에 당시의 수도 낙양에 와서, 영제 때 광화, 중평 연간(178-189년)에 역경 일에 착수, 도행반야경(10권)(179년), 반주삼매경(3권)(179년), 수능엄삼매경(185년, 지금 없음) 등을 번역했다. 영제 말년에는 태평도, 오두미도가 횡행하고 황건적이 일어나 흉흉했던 시기였던 터라 어디서 임종했는지 기록이 없다. 지참의 학맥은 지량(支亮)을 거쳐 삼국 시대 오(吳) 나라 때의 지겸(支謙)으로 이어지니, 이로써 임종 사실을 전하지 못한데 대한 후인들의 미안함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일러 “천하에 박식하기로 三支를 따를 사람이 없다(天下博知, 不出三支)”(출삼장기집〈합수능엄경기〉)고 칭송했다 한다.
진(晋) 나라 때 지민도(支愍度)는 지참의 역풍(譯風)에 관해서 “질실(質實)을 중시하고 글을 꾸미지 않았다(貴尙實中, 不存文飾)”(출삼장기집〈합수능엄경기〉)고 평가한다. 안세고와 마찬가지로 지참도 번역에서 직역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지참이 번역한 경전의 범어 원본은 축삭불(竺朔佛/竺佛朔)이 가져온 것으로, 축삭불이 범어로 읽으면 지참이 그것을 받아서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번역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쳤을 것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두 사람 ‘공역’이라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양 언어에 정통한 지참이 핵심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경록(經錄)에서는 대부분 지참 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참의 번역도 말로만 전하는 구역(口譯)이었던 모양으로, 이를 다시 중국인 조수가 글로 기록함으로써 현재의 역본이 완성된다.(출삼장기집〈지참전〉; 〈도행경후기〉; 〈반주삼매경기〉). 필수(筆受) 역할을 한 맹원사 등의 재가 신자는 도술 방술을 아울러 좋아했다고 하니, 불교와 황노도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없었던 동한 시대의 불교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도행반야경은 소품반야경(범어본 팔천송반야경에 해당)의 이역(異譯)이니 반야경의 첫 번역인 셈이다. ‘반야(般若)’ 등 불교 고유의 전문 용어, 그 외에 ‘사리(舍利)’, ‘수미산(須彌山)’ 등 인도 문화에 관련된 용어, 그리고 ‘사리불(舍利弗)’, ‘수보리(須菩提)’, ‘아난(阿難)’ 등 부처님 제자 이름이 음역 형태로 소개된 것은 도행반야경이 그 시초이다. 반주삼매경에서 ‘반주삼매(般舟三昧)’는 ‘十方現在佛實在前立定’으로 의역되듯이, 서방 아미타불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이 이로 인해 현전하는 ‘염불삼매’를 뜻하는데, 이 말의 형성 과정에는 중국식의 생략 과정이 개입되는 것 같다. ‘반주’는 범어 ‘쁘라띠유뜨빤나(pratyutpanna ’현재(佛)‘의 뜻)’의 속어형인 ‘빳쭈??빤나(paccuppanna)’를 앞부분만 음역한 불완전한 형태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반주삼매’ 자체는 온전한 음역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생략형을 흔히 쓰는 중국인의 언어 관습에 따라 만들어진 ‘중국식 용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반주삼매경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아미타불에 관련된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는 영예를 안게 되며, 이 경전에서 피력한 ‘염불삼매’는 ‘수능엄삼매’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중요한 선학(禪學) 가운데 하나로 정착한다. 천태종의 수행 방법인 ‘상행삼매(常行三昧)’은 반주삼매경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도행반야경과 반주삼매경의 중국어 번역을 계기로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이 유입된다. 양 경전 모두 수행의 궁극적 지향점을 ‘본무(本無)’로 표현하고 있는데, ‘본무’란 바로 ‘공(空)’의 초기 번역어이다. 지참이 고안해 낸 번역어 ‘본무’는, 동진 시대에 형성된 소위 ‘육가칠종(六家七宗)’ 중 ‘본무종(本無宗)’에서 이 용어를 채택하고 있는 등 여러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위진 시대의 지배적 사상 조류였던 현학(玄學)과 어울어지면서 동아시아 사상사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한다
동아시아 역경사- - 손권의 오나라 왕실은 몰려드는 역경인들 후대했다
http://cafe.daum.net/heainsabud/5ii/613
삼국 시대 역경 작업의 배경
위나라, 미신 없애기 정책으로
삼국시대(220-256)에 불교의 중심지는 남과 북, 곧 오(吳)의 수도 건업(남경)과 위(魏)의 수도 낙양으로 양분된다. 북쪽에서는 위 조정의 지속적인 미신 없애기 정책으로 동한 시대 때 횡행하던 도교적 신앙은 한물 가고, 하안(何晏 190-249)과 왕필(王弼 226-249)로 대표되는 현학(玄學: 노자나 장자가 말하는 無를 세계의 근원이자 도의 근본으로 여기는 사상)이 새롭게 사상계에 자리잡는다. 가평(嘉平) 2년(250)에 중인도 출신의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마하승기율(동진 때 불타발타라와 법현이 함께 번역. 대중부의 근본계율)의 계본(戒本)인 승기계심을 낙양 백마사에서 번역하여 위 나라 승려에게 조석으로 독송케 하고 비구계를 전수한 것도 사회 기강을 다시 찾으려고 애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담가가라로 인해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불교의 율전이 번역되었고, 또 그로 인해 처음으로 수계의 전통이 세워졌으니, 율학 방면에서 그의 이름을 빼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위 나라에서 태동한 현학은 이후 진(晋) 나라 때까지 지식인 계층의 마음을 사로잡아, 학계에서는 흔히 ‘위진현학’이라 부를 정도로 지배적인 시대 사상으로 또아리를 틀게 된다.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이 위진 시대에 전폭적으로 중국의 지식인 계층에 수용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현학과 공(空)사상을 동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계율 쪽에 비중이 컸던 위 나라의 불교계 형편에 대비시켜 보면, 오 나라의 불교계 사정은 훨씬 좋아 보인다. 당시 오 나라의 수도였던 건업에는 남북 두 경로, 곧 중원 지방에서 내려오는 길과 교지(광서성 오주)나 광주에서 올라오는 길을 통해서 역경인이 모여들었고, 손권의 오 나라 왕실은 이들을 후대하였으니, 안팎으로 역경 작업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중원 지방에서 내려온 대표적인 역경가로는 지겸(支謙)이 있고, 교지에서 올라온 대표적인 역경가로는 강승회(康僧會)가 있다. 지겸은 동한 말 마지막 황제인 헌제(재위 190-220) 때 난을 피해 오 나라 건업에 왔는데 손권은 그를 박사(博士)로 모셔 태자의 교육을 맡겼다. 강승회는 적조10년(247)에 건업에 왔다. 그가 있었던 교지는 “동한 영제가 죽은 뒤 천하는 혼란에 빠졌으나 오직 교주만 평안해서 지방의 이역인들이 모두 교주에 모여들었다.”(홍명집 모자이혹론)는 기록에서 보듯이 비교적 평온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강승회는 난을 피해서가 아니라 불법을 펴기 위해서 건업에 왔다. 손권은 강승회를 위해서 건초사(建初寺)를 지어주고 건초사가 있는 마을을 불타리(佛陀里)라고 부르도록 했다(출삼장기집 강승회전) 하니, 손권이 강승회를 극진히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중원 지방에서 최초의 절이 백마사였다면 강남 지방에서는 건초사가 최초의 절이다. 담가가라가 백마사에서 역경 작업을 했다면 강승회는 건초사에서 역경 작업을 하였다.
지겸과 강승회 두 사람 모두 본적지가 외국이지만 중국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중국어와 범어 양자에 두루 능통했다. 게다가 지겸은 지량에게서 수학하여 지루가참의 학맥을 이었고, 강승회는 진혜에게서 수학하여 안세고의 학맥을 이었으니, 두 사람 모두 동한 시대의 역경 전통을 계승한 셈이다. 안세고와 지루가참을 소승대 대승 따위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도식을 지겸과 강승회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두 사람을 대비시키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좀더 연구가 필요한 문제로 지나친 도식화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안세고의 학맥에 관해서, “안세고, 안현, 엄불조만이 인도 말을 중국어로 옮길 때 제대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으니 뒷사람이 따르기 어려울(難繼) 정도였다. 그 이후의 번역자는 그들만큼 치밀하지는 못하지만 실질을 중시하여 조잡하나마 큰 줄거리를 잡을 수 있었다.”( 출삼장기집 법구경서)고 찬탄하는 사람은 바로 지겸 본인이기 때문이다. (*출삼장기집에는 작자미상으로 되어 있지만, 글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법구경서의 작자는 지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동아시아 역경사 오 나라의 ‘지혜주머니’지겸
http://cafe.daum.net/heainsabud/5ii/616
16세에 서역언어 정통
불경 운율에 맞춰 노래할 정도로 ‘다재다능’
지겸(支謙)은 재가거사로 자(字)가 공명(恭明)이며 일명 ‘월(越)’이라고 한다.
지겸의 할아버지 법도(法度)는 원래 대월씨국 출신으로 동한 영제(재위 168-186) 때 무리 수백명을 이끌고 중국에 귀화했다고 하니 역경사에서 지겸의 출신 성분은 별나다고 하겠다.
귀화인의 후손인 탓에 그 외모가 남달랐던 모양으로 “큰 키에 삐쩍 마른 몰골, 노랑색 눈동자”를 지녔다고 묘사된다.
16살에 이미 서역 지방의 여섯 가지 언어에 정통했고, 지참의 제자인 지량에게서 수학하며 뭇 전적에 두루 통하였는데, 음악 등 세간의 기예에도 능해서 불경의 말씀을 운율에 맞춰 노래했다고 하니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세상에서는 그의 재주를 흠모하여 ‘지랑(支郞)’이란 애칭과 함께 그를 ‘지혜주머니(智囊)’라고 칭송하였다 한다.(출삼장기집 지겸전).
동한 말 헌제(재위 190-220) 때 지겸은 난을 피해 오 나라 건업(남경)으로 건너간다. 다행스럽게도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박사(博士)의 신분으로 태자의 교육을 맡는 한편, 황무 원년에서 건흥 년간(222-253)에 걸쳐 역경 작업에 전념하여 법구경, 유마힐경, 대명도무극경, 대아미타경, 서응본기경 등을 번역하였다.
이 중 번역작업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일은 지겸이 요본생사경에 대해서 주석을 달았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경전에 대한 주석 작업이 동진(東晋) 시대의 도안(道安 312-385)에게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견해도 간혹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겸이 효시이다.
출삼장기집 요본생사경서을 보면, 도안도 이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더 나아가 지겸에 대해서 ‘한 소식 깨친 사람(入室者:논어에 나오는 표현)’으로 찬탄하고 있다.
지겸은 만년에 궁륭산에 은거하여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겸의 번역은 중국인의 입맛에 맞는 유려한 문체를 구사한 것으로 이름 높다.
이는 안세고나 지루가참과 달리 어릴 때부터 중국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출삼장기집 법구경서에는 당시의 역풍 및 지겸의 번역관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술이 보인다.
“[중략] 처음 인도출신의 유기난(維祇難 Vighna)이 황무3년(224)에 무창(武昌, 호북성 악성현)에 왔다.
나는 그에게서 오백게(五百偈)로 된 법구경을 받아 그와 함께 온 축장염(竺將炎/축율염 竺律炎)에게 번역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축장염은 범어에는 능통했지만 중국어에는 아직 밝지 못하였다. 그의 역어는 범어를 그대로 음역한 경우도 있고, 의역을 한 경우도 있지만, 거의 직역(質直)에 가까웠다.
나는 처음에는 그의 문장이 세련되지 못한 점(其辭不雅)을 싫어하였다. 그러자 유기난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은 그 진의(義)를 중시해야지 文飾(飾)을 써서는 안된다.
그 가르침(法)를 취해야지 말을 꾸며서는(嚴) 안된다. 경전을 번역하는 자는 이해하기 쉽게 해야 하지만 문식에 치우쳐 경전의 진의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노자는 ‘美言不信, 信言不美’라 하였고, 공자도 ‘書不盡言, 言不盡意’이라 하지 않았는가. 성인의 진의를 해명하는 일은 끝없이 심원한 일이다. 지금 범어로 쓰여진 경전의 진의를 옮기는데는 참으로 경전의 진의에 통달하도록 힘쓰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논의가 끝나고 역자가 말하는 대로 本旨에 따르고 文飾을 가하지 않았다.
번역하지 못한 곳은 그대로 두고 번역하지 않았다.
[중략]”
법구경은 지겸의 첫 번역으로 추정되며, 축장염(/축율염)과 공역한 것이다. 축장염의 한역에 대해 지겸은 ‘其辭不雅’로 불만을 토로하였지만 결국 지겸의 반감은 무시된다.
축장염과 지겸 두 사람 모두 원전의 진의를 전달하는 데 번역자의 임무를 설정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양자의 번역태도가 상충한다는 점, 즉 전자가 ‘質直’(질박한 직역)을 중시한데 반해 후자가 ‘文飾’(격조높은 문체)을 중시한다는 점에 있다.
축장염과 함께 법구경을 번역할 당시, 지겸은 범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단독적인 번역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주류적인 번역태도인 質實중시 경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30년에 걸쳐 유마힐경, 대명도무극경 등의 경전을 혼자 번역하면서 그가 보인 번역태도는 ‘文飾’ 중시였다.
동아시아 역경사 ,, ‘강남 불교의 흥륭자’강승회 (康僧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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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와 도가 용어 이용해 친숙하게 다가가 민심수습
불교 사상의 심오함 알리며 불법 홍포 앞장서
강승회(康僧會)의 선조는 본래 강거(康居, 중앙아시아 킬기스 평원 일대)인으로 인도에 살았었다.
‘강(康)’이란 성이 붙은 것은 강승회의 본적이 강거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상인이었던 부친이 교지(交趾, 광서성 오주 일대)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강승회도 소년 시절을 교지에서 보냈다.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린 나이에 불교의 삼장 및 유가의 육경(시, 서, 역, 예, 춘추, 악)을 두루 섭렵하였으니 중국인으로 성장한 셈이다.
10여세 때 부모를 여읜 후 출가 사문이 되어, 안세고의 학맥을 이은 한림(韓林), 피업(皮業), 진혜(陳慧)에게서 도를 배웠다.
(『출삼장기집』「안반수의경서」).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오 나라의 수도 건업(강소성 남경)으로 올라 온 것이 적조10년(247).
지겸보다 20년 정도 늦게 왔지만, 손권의 황실과 두터운 친분을 지닌 출가 사문이었기에 그 영향력은 훨씬 컸던 모양으로, 후대의 불교 사적은 이구동성으로 “강승회가 오고나서 비로소 오 나라에 불법이 흥성하게 되었다”(『출삼장기집』「강승회전」; 『양고승전』「강승회전」)고 전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구해오라는 손권의 일종의 사람 시험에 21일간의 기도력으로 이 시험을 통과한 이야기는 유명하거니와 아무튼 이 일로 인해서 손권은 강승회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건초사(建初寺)를 지어준다.
강승회의 역경 작업은 바로 이 건초사에서 이루어지는데, 280년에 임종했다고 전하니 거의 30년을 건초사에서 지낸 셈이다.
만년에 강승회는 신병을 기회로 삼아 오 나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폭군이었던 손호(孫皓)와 불교의 ‘인과응보’에 관해 일문일답을 나눈다.
이 과정에서 강승회는 『역경』의 “積善之家, 必有餘慶”(선행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기쁜 일이 생긴다), 『시경』「대아」의 “求福不回”(복을 구하는 것은 선조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을 거론하여 유가의 격언이 불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고, 인과응보의 도리에 승복한 손호는 폭정을 그치고 불제자로 되었다고 한다.(『출삼장기집』「강승회전」).
이는 유가의 용어로 불교의 업사상을 선양하는 강승회의 교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강승회의 대표적 번역으로 『육도집경』(‘육도(六度)’는 육바라밀을 뜻한다)이 손꼽힌다.
이 경전은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니고, 강승회가 오나라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려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육바라밀의 항목에 따라 의도적으로 배열·‘편역’한 것으로, 대승 불교의 육바라밀 사상을 담고 있다. 역경 작업 이외에도 『안반수의경』, 『법경경』, 『도수경』(지겸 역)에 주석을 달아, 안세고의 학맥과 지겸에 대한 친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육도집경』을 편역하면서 강승회는 도가와 유가의 용어를 빌리는 일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도가의 용어로 “도덕(道德), 무위(無爲), 무신(無身), 청정(淸靜)” 등, 유가의 용어로 “유동(儒童), 숭효(崇孝), 효순(孝順), 정심(正心)” 등을 차용하였다.
도가 및 유가의 중국 전통사상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불교 사상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 이는 강승회의 역풍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유가의 효 사상이나 유가의 정심치국(正心治國) 사상은 주로 민심을 수습하거나 위정자의 폭정을 계도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지만, 도가의 주요 사상은 아마도 불교 사상 내용의 심오함을 알리기 위해서 빌려 쓴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도가’라 하더라도 아직 동한 시대 때 황노도의 흔적이 말끔하게 가신 도가는 아니었던 모양으로, 『육도집경』에는 방선술(方仙術)의 영향 아래서나 형성될 법한 영혼불멸 관념이 보이기도 한다.
“‘식신(識神)’ 또는 ‘식령(識靈)’은 멸하지 않는(不死)” 실체로, 윤회 전생의 과정에서 업의 과보를 받는 당사자임을 주장하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강승회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 검토해 볼 여지는 아직 남아있지만, 불교 사상사의 흐름에서 볼 때 독자부(犢子部)의 '뿌드갈라(pudgala)설'이 이러한 견해와 흡사한데, 이에 대해서는 세친(世親)이 『구사론』「파아품」에서 철저하게 논파하고 있으니 함께 살펴보면 좋겠다
동아시아 역경사 양진 시대 불교의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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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사업 국가적 운영
승려의 승단(僧團) 등장하고
空 사상이 정신적 토양으로 자리
위(魏)의 재상이었던 사마염이 왕위를 찬탈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진(晋=西晋)을 세운 때가 265년이다.
이후 서진은 오 나라를 정복(280), 약 50여년간 지속되다 북방 호족(胡族: 흉노, 선비, 갈, 저, 강의 ‘五胡’)의 내침으로 멸망하고, 사마 씨 일족인 사마예는 강남으로 내려가 건강(建康,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동진을 세운다(317).
동진은 약 100여년간 지속되는데, 중국사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초점 차이에 따라 ‘동진 시대’ 또는 ‘오호십육국 시대’로 부른다.
한편, 서진(265-316)과 동진(317-420)을 함께 묶어 ‘양진(兩晋) 시대’(265-420)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학에서는 시대 구분과 연관해서 명칭 문제가 중요한 논란 거리가 되곤 한다.
민두기 선생이, ‘아편전쟁’이란 명칭은 역사의 진상을 호도한다는 이유로 이를 ‘제일차 중영전쟁’으로 부르는 게 좋다고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양진 시대’라는 명칭에는 다분히 한족 중심의 사관이 개입되어 중국사에서 북방 민족이 이룬 역할을 희석시키기 쉽다.
역경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호십육국 시대는 ‘번역의 황금 시대’라 부를 수 있을만큼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서진에서 동진에 걸치는 약 155년의 기간을 편의상 ‘양진 시대’라 부르겠지만, 세밀한 각론에 들어가서는 가능한 한 서진, 오호십육국, 동진의 세 묶음으로 나누어서 시대 별로 역경 문제를 다루기로 하겠다.
양진시대 불교사의 특징으로 대략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 한역 대장경에 수록된 중요한 경전의 역경 작업이 대부분 이 시기에 완료된다.
수, 당 시대의 역경 작업이, 밀교 분야의 경전을 제외할 때, 주로 논서의 번역에 치중되었던 이유도 양진 시대 때 이미 중요한 경전의 번역이 끝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역경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경 사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운영하였다는 점, 곧 ‘국가가 운영하는 역장(國營譯場)’의 출현에 있다.
양진 시대 이전에 역경이 대부분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과 대비시켜보면 양진 시대의 역경 환경은 훨씬 좋아졌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중국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중국인 승려의 승단(僧團)이 등장한다.
강북 양양(襄陽, 호북성 일대)에는 도안(道安 314-385)이 이끄는 승단이 자리잡았고, 강남 여산(廬山)에는 도안의 제자 혜원(慧遠 334-416)이 대규모의 승단을 형성한다.
세 번째, ‘위진 현학’과 공생 관계의 형국을 이끌며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이 지식인 계층에 파급된다.
위진 시대 때 중국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현학(玄學)’이었다.
삼국 시대 위 나라에서 불기 시작한 현학의 바람은 양진 시대에 절정에 달한다.
서진시대 때 향수(向秀 227-272), 곽상(郭象 ?-312)은 《장자》를 중시하여, 《장자》에 관해서 주석을 달면서 도가의 자연(自然)을 치켜세우는 한편, 유가의 명교(名敎)와 회통을 꾀한다.
특히 곽상의 《장자》해석은 이후 동진 시대의 지식인 계층에 널리 수용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이 《반야경》 및 《유마경》의 공사상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토양으로 자리잡는다.
양진 시대 때 불교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세 곳을 설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군데는 양주(凉州, 감숙성 난주일대)로, 이는 지리상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로 서역에서 온 역경승의 중국 진입로였다.
역경승들은 주로 여기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역경 작업의 기초를 다졌다.
두 번째 장소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인 장안(長安, 섬서성 서안)으로, 한 예를 들면 위대한 역경승인 구마라집이 대승불교의 공 사상을 선양하며 제자를 배출한 곳이 바로 이 장안이다.
세 번째로는, 강남 지방을 빠뜨릴 수 없는데, 혜원이 승단을 운영하던 여산(廬山)을 꼽을 수 있겠다.
삼국 시대와 대비시켜 보면 강북의 불교중심지는 낙양에서 장안으로, 강남의 불교중심지는 남경에서 여산으로 교체되는 셈이다.
양진 시대 불교계의 전체적인 조망은 이 쯤에서 그치고 역경사에 관련된 배경 지식으로 ‘위진현학’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동아시아 역경사 - 서진의 ‘돈황보살(敦煌菩薩)’ 축법호
//cafe.daum.net/heainsabud/5ii/628
36국 언어에 능통한 어학 천재 40년간 150만부 이상 번역
원문에 충실한 직역 방법 불경 번역의 새로운 장 구축
서진 시대를 대표하는 역경가로 축법호(竺法護)를 손꼽는다.
축법호의 선조는 본래 대월씨국 사람인데 몇 대에 걸쳐 돈황에 살았다.
본래 대월씨국 출신이기 때문에 ‘지(支)’를 성으로 삼는 것이 중국의 통례이지만, 축법호의 경우는 인도 출신인 스승 축고좌(竺高座)의 성에 따라 ‘축(竺)’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본 이름은 ‘다르마락샤(Dharmaraksa)’이다.
8살 때 출가하여 불법을 전하는데 뜻을 세워 스승을 따라 서역 각지를 유랑하며 서역 여러 나라에 흩어져있던 불경을 수집하여 돈황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서역의 36국 언어에 능통했다고 하니 가히 ‘어학의 천재’이다.
축법호는 일생동안 오직 역경작업에만 매달렸다.
돈황에서 장안, 낙양에 이르기까지 머무는 곳마다 거의 쉬지 않고 역경작업에 전념하여 진시 년간(265-274)에서 영가2년(308)까지 약 40년간 150부 이상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현존하는 경전만 계산해도, 정법화경, 광찬반야경, 유마힐소설법문경, 점비일체지덕경( 화엄경 십지품의 이역), 미륵하생경 등의 대승경전을 비롯해 보요경, 생경 등의 설화류에 이르기까지 70여종의 경전이 남아 있으니 공전의 역경 업적이다.
이 때문에 2세기 말의 지참, 5세기 초의 구마라집, 7세기의 현장과 나란히 ‘사대역경가’로 꼽히기도 한다.
승우는 “불교 경전의 가르침이 중국에 널리 퍼진 데는 축법호의 힘이 크다”고 평가하며, “당시의 사람들이 축법호를 ‘돈황보살’로 칭송하였다“(출삼장기집 축법호전)고 전한다.
말년에 장안 청문 밖에 절을 짓고 살다가, 서진 말엽 난을 피해 민지(繩池, 하남성 민지현)로 내려갔다가 병에 걸려 임종하니 세수 78살이었다(양고승전 축담마라찰전).
임종 시기에 관해서는 아직 이견이 분분하지만 양고승전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축법호의 생존연대는 236-313로 추정할 수 있겠다.
출삼장기집 합방광광찬약해서 에서 도안은 광찬반야경의 번역상황 및 유포경위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광찬반야경은 태강7년(286년) 11월 25일에 장안에서 번역되었는데, 이 때 우전(于門)국의 승려 기다라(祈多羅)가 가져온 범본을 축법호가 중국어로 구술 번역하고, 섭승원이 필수 노릇을 하였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번역본은 곧바로 양주로 흘러가 버렸고 따라서 중원지방에는 유포되지 않았다.
혜상(慧常), 혜변(慧辯) 등 도안의 제자 몇 사람이 인도로 가는 길에 양주에 들렀다가 우연히 광찬반야경을 발견하고는 사람을 시켜 태원 원년(376년) 5월에 양양에 있던 도안에게 보내니, 이 때에 비로소 중원 지방에 광찬반야경의 존재가 알려진다.
도안의 기록은 당시의 번역 상황에 관해서도 비교적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역경사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축법호가 범본을 읽으면서 이를 중국어로 구술 번역하였고, 이를 중국 측의 재가 거사인 섭승원이 받아서 필사하는 형식을 택하고 있으니 이것이 당시의 구체적인 번역 상황이었을 것이다.
출삼장기집의 정법화경기(작자 미상)도 정법화경의 번역 상황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정황 묘사를 한다.
정법화경의 역경 작업은 286년 8월 10일에 시작하여 9월 2일에 끝나니 가히 ‘초인적인’ 능력이라 하겠는데, 정법화경기의 기록에는, 인도의 승려 축력(竺力), 구자국(龜玆 Kucha)의 재가거사 백원신(帛元信)이 291년 2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교정을 본 일이 덧붙여져 있으니, 축법호의 역경 태도가 얼마나 치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축법호의 역풍에 관해서, 도안은 “방광반야경(축숙란 역)은 번역문이 간략해서 이해하기는 쉬우나 생략이 많은 탓에 따로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자주 있다.
광찬반야경은 중복되는 부분이라도 원문에 따라 하나도 생략함이 없이 전부 번역하였기 때문에 주도면밀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원문을 중시하는 직역이었기(辭質勝文)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앞 뒤 문맥의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두 한역본을 서로 보완해서 읽으면 깨닫는 바 많을 것이다.”(합방광광찬약해서에서 요지만 발췌)라고 평한다. ‘辭質勝文’이란 평가에서 축법호의 번역이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역경사 - 오호십육국 대화상 불도징
http://cafe.daum.net/heainsabud/5ii/636
불도징의 속성은 백(帛) 씨였다고 하니 실크로드 북도에 자리잡은 구자국 출신이다.
9살 때 오장국(烏 파키스탄 동북 지방)에서 출가하여 인도의 계빈(카쉬미르)에서 수학했으니 설일체유부의 학풍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절을 세워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낙양에 온 때가 서진 시대 영가4년이니 310년이다.
불도징은 그 때 이미 나이 79살이나 된 노인이었다.
불도징은 역경작업도 한 일이 없고 저술을 남긴 일도 없지만 초기 중국 불교계의 기반을 닦은 세 인물(불도징, 도안, 혜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성망이 높다.
이처럼 불도징에 대한 평가가 높은데는 도안의 스승이었다는 영예도 한몫 하겠지만 그보다는 불도징이 국가 권력을 활용하여 불교계의 현실적인 기반을 다졌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후조(後趙)의 왕 석륵(石勒)은 그 휘하에 곽흑략이란 장수를 두었는데 흑략은 출병할 때마다 길흉을 예언하여 족집게처럼 잘 맞았다고 한다.
그 연유를 물어본 즉슨 불도징의 말을 전한 것뿐이라 하길래, 석륵은 불도징을 만나 “불도에 무슨 영험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불도징이 보기에 석륵은 불법의 깊은 이치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인지라 신통력으로써 석륵을 감복시켰다. 불도징은 주술에 능통하였고 귀신을 부릴 줄도 알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도징의 전기는 진서『예술전』, 양고승전『신이편』 등에 실려있어, 당시 불도징이 ‘신이승(神異僧)’으로 분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석륵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불도징의 신통력은 상대편의 근기에 따른 교화방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불도징은 박학다식하여 경전의 깊은 뜻에 막힘이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오후불식을 지키는 등 계율을 준수하였으며 그 이전에 번역한 한역 율전을 고치기도 했다(출삼장기집『비구대계서』).
석륵 이후에 후조의 왕에 오른 석호(石虎)도 불도징을 ‘대화상’으로 칭송하며 의지했다.
석호는 이름난 폭군이어서 불도징은 때마다 석호에게 자비와 인과응보를 설하여 계를 잘 지킬 것을 권하였으나 인연이 안 닿았는지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불도징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국인도 출가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허락을 내렸으니 석호의 죄값이 어느정도는 감해졌는가? 후조 왕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며 불도징은 도안(道安), 법아(法雅), 법화(法和), 승랑(僧郞) 등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였고, 348년 후조의 수도 업(業, 하남성 안양현)에 있는 궁사(宮寺)에서 임종하니 세수 117세였다.
불도징과 석륵, 석호의 친밀한 관계를 불도징의 신통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판에 박힌듯한 말로 들린다. 이런 식의 질문은 어떨까? 왜 ‘북방호족’ 곧 소수민족의 정권이 그토록 불교에 우호적이었을까?
후조(後趙)의 건립자 석륵(石勒)은 갈(曷)족 출신이다.
갈족은 원래 서역의 소수민족인데 흉노족에 복속됨에 따라 흉노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서역 출신의 석륵과 구자국 출신의 불도징, 이 두 사람은 같은 서역 출신이라 더 깊은 애착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또 한 예를 들어보자. 전진(前秦)의 건립자 부건은 임위(臨渭, 감숙성 진안)의 저(低)족 출신이다. 저족의 근거지는 원래 무도(武都, 감숙성 성현) 지역이었다.
부건의 조카 부견은 왕위에 오른 뒤, 현학 및 도참 신앙을 금지하고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좋아했다.
부견은 378년 양양을 공략할 때 도안을 당시의 수도 장안으로 모셔갔고, 또 382년 구자국을 칠 때 휘하 장수 여광에게 구마라집을 모셔오도록 명령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구마라집이 중국에 온 것은 후진(後秦/姚秦) 때이다. 요장(姚姚)은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후진을 건립하는데, 강(羌)족 출신이었다.
중국인들이 ‘서융(西戎)’이라 불렀던 민족 가운데 대표적인 민족이 강족과 저족이었고, 강족의 일부분이 저족이었다고 하니, 강족은 원래 서역 지방의 소수민족이다. 요장의 후계자 요흥(姚興)은 구자국의 명승 구마라집을 청하여 장안으로 모셔와 역경 작업을 추진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오호십육국 시대에 불교를 선양한 왕조는 모두 실크로드 연변의 서역 지방 출신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불교의 확산과 민족 감정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역경사]
통일 신라의 고승 혜초
혜초는 신라 성덕왕 3년인 704년에 태어났다. 주로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20세가 되기 전에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의 한 갈래인 밀교를 연구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신라 때 중국 등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은 더문 일이 아니었다.>br> 불교가 번성하고 있던 당(唐)나라로 간 혜초는 인도인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됐다. 금강지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와 불교 중 밀교를 전파한 승려이다.
혜초는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인도행에 올랐다. 신라 성덕왕 3년(723년)쯤 중국 남부 광주(廣州)에서 바닷길로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인도 동해안에 이르렀다.
'왕오천축국전'이란 바로 중국에서 인도를 가리키던 말이 '천축국'을 여행했던 기록을 뜻한다.혜초가 동천축. 남천축 등 인도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지방인 오천축(五天竺)을 걸어서 여행하며 보고 득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혜초가 처음 들어간 곳은 중부 인도 갠지즈강 유역의 마가다국(현재 비하르 지방)이었다. 이 곳에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쿠쉬나가라, 탄생지 룸비니 등의 불교 유적을 돌아보고 인도 전역을 차례로 방문했다. 이어 카슈미르와 파키스탄 중북부 지역인 간다라 지방 등을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쯤 당나라로 돌아왔다.
그가 4년여 동안의 여행을 끝내고 기록한 이 기행문 중 남아 있는 것은 30여 쪽 6000여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상세한 역사적 사실들이 담겨 있어 세계적인 보물로 꼽힌다. 그는 인도국의 왕들이 코끼리와 병력을 얼마 만큼 갖고 있었으며, 아랍족이 얼마나 인도쪽으로 뻗쳤는가 등 8세기 이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불교의 성쇠. 음식. 의상. 관습. 산물. 기후. 법제 등을 각 지방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중국 돈황 천불동(千佛洞)에서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에 의해 앞부분과 뒷부분 일부가 없어진 채 발견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1943년 최남선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 중인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남긴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8세기 무렵의 인도. 중앙아시아 지방의 역사와 풍속, 종교와 정치 상황을 알려 주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고전으로 손꼽힌다. 서기 787년 83세를 일기로 당나라에서 생애를 마친 혜초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위대한 고승으로 꼽힌다. --여러 사이트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