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望鄕)의 노래, 임진강
2014 인천아시안게임이 끝났다. 남북전이 많았던 탓에 ‘분단’이 사뭇 가슴을 저린다. 분단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임진강>이란 노래가 생각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임진강〉은 1950년대에 유행가다. 이 노래는 196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2004년 재일 조선인 감독의 영화 <박치기>의 엔딩곡으로도 쓰일 만큼.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녘 땅 가고파도 못 가니 /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우에 춤추니 /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이 ‘망향(望鄕)’의 노래는 월북 시인 박세영의 글에 고종환이 곡을 붙였다. 월북시인 박세영(朴世永, 1902년 7월 7일 ~ 1989년 2월 28일)은 경기도 고양 출신의 시인이다. 대표작은 <산제비> <임진강> <밀림의 역사> <애국가>가 있다.
남쪽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는 1절 가사가 참으로 구슬프다. 헌데 2절 가사를 잘 보면 이승만 정권 당시 궁핍한 남쪽의 경제를 북쪽의 협동농장과 대조시키고 있다. 당시 이 노래가 유행하자 정부는 이 노래를 못부르게 하였다. <임진강>을 다시 부를 수 있게된 것은 1990년대가 되어서다. 재일교포 가수가 서울에서 이 노래를 부른후 양희은 등의 리메이크하여 불렀다.
이승만 정권 당시 금지곡은 남북경제상황이 역전된 40여년 후에 해금되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에서 금지곡은 뭘까? 궁금하면 노래방 기기에서 <아리랑>을 선곡해보라. <아리랑>을 선곡하면 국방부 요청으로 삭제된 곡이라 나온다.
국방부는 북한가수가 부른 곡이라며 삭제를 요청했다. 덕택에 민요부터 윤도현이 부른 아리랑까지 다 삭제됐다. 아리랑이 금지곡이었던 시절이 언젠가. 일제강점기 금지곡 1호 아리랑. 일제시대인지 군사독재시절인지. 참으로 웃픈일이다.
<산제비> 박세영 作, 1936년 11월 '낭만'에 실림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구나.
창(槍)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때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아 깃을 가다듬을 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너희는 맘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 것이요,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멧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때
너희는 별에 날아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렁거릴 때,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천리조(千里鳥)일 것이다.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날아라 너희들은 날아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날아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대표작 <산제비>다. 그의 시는 참 쉽다. 농민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멧돼지와 갈범으로 표현한 일제 식민지에 대한 비판도, 산제비처럼 나래를 펼수 없는 안타까운 지식인의 고뇌도 보인다.
그는 1937년 시집 <산제비>를 펴낸 이후 해방까지 절필했다. 이런 그가 절필을 하였다니 그 절망감은 어느정도 였을까.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국내 정세는 더욱 엄혹해졌다. 한글신문잡지는 폐간되고 검열은 강화되었다. 결국 그는 사회주의자가 시를 무기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다.
지나간 내 삶이란,
종이 쪽 한장이면 다 쓰겠거널,
몇 짐의 원고(原稿)를 쓰려는 내 마음,
오늘은 내일(來日), 내일(來日)은 모레, 빗진자와 같이
나는 때의 파산자(破産者)다.
나는 다만 때를 좀먹는 자다.
“박세영은 정상급 문인으로 활약하다가 국내에서의 ‘글’의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망명, 간도 또는 만주 등지에서 독립투쟁의 대열에 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이 실제로 당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다양하게 실험했다.”- 한만수 (동국대 교수)
위험한 인물, 박세영
박세영은 마흔 살이 다되어 안정된 직장과 문단에서 보장된 지위를 버리고 망명한다. 그리고 해방이 된 뒤 자신의 이상을 찾아 1946년 월북한다. 그는 곧바로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북한의 `애국가` 창작 작업에 참여했다. 북한 애국가 악보와 가사는 이적(利敵)표현물이다. 우리에게 보면 그는 꽤 위험한(?) 인물인 셈이다.
북한 문학전문지 `조선문학` 2002년 5월호는 그를 `우리나라 국가인 애국가와 더불어 영생하는 시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사후에 영화 `민족과 운명` 시리즈 중 `카프작가편`(제34-38부)에서 그의 생애는 재조명되었다. `조선문학`은 박세영에 대해 `낙천적이면서도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그러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잃지않은 열정적 시인`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세영은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에서 자신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적으나마 내가 배운 지식, 내가 본 조국강산, 내가 느낀 불합리한 사회, 이 모든 것이 호소의 의미를 띄면서 글에 담기었다. 즉 산에 올라도 산은 조선 소년의 기개를 안으라 속삭이는 듯, 들에 가도 가난한 농사꾼을 잊지 말라 외쳐주는 듯, 흘러가는 강물도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가나 소년아 조국을 잊지 말라 전하고 가는 듯 이런 감정을 작문에 담기에 애썼다.
엄혹한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긴 진보적인 시인인 박세영. 그의 시를 문학작품 그 자체로 오롯히 감상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