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발원지인 검룡소를 품고 있는 강원도 태백 금대봉(1418m)에서 대덕산(1307m)으로 이어진 산자락은 가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곳이다. 여기는 그야말로 가을이 만발해있는 들꽃의 천국.나무도 거의 없는 초원지대 어디를 둘러봐도 꽃내음이요 꽃빛깔이다. 그래서 한국의 야생화 군락지를 말할 때 누구나 이곳을 첫손에 꼽는다.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가 날아다니고 꼬리치레도롱뇽이 집단 서식하는 자연생태계보전지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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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 금대봉과 대덕산은 한국에서 가장 빨리 가을 소식을 전하는 곳. 바람 불면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이 산길 거니는 관광객에게 일제히 손을 흔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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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단위 관광객이라면 자동차로 두문동재(1268m)까지 오른 뒤 가을 들꽃을 만나러 가보자. 두문동재에서 자줏빛 벌개미취의 마중을 받으며 금대봉으로 들어서는 길은 제법 널찍하다. 길 양쪽으로 노란 두메고들빼기가 하늘거리고, 연보랏빛 둥근이질풀이 앙증맞다.
넓은 임도를 버리고 금대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따른다. 키 작은 신갈나무가 들어찬 숲엔 들꽃이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응달서만 자라는 자주색 그늘돌쩌귀가 더욱 정답다. 금대봉 정상엔 ‘양강 발원봉’ 푯말이 서 있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낙동강 발원샘인 너덜샘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산불감시초소 뒤로 난 오른쪽 길은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등산로. 대덕산으로 가려면 왼쪽 길을 따라 내려서야 한다.
보랏빛 꽃송이에 벌과 나비가 번갈아 앉는다. 어떤 꽃인데 이리도 인기가 좋을까. “정선아리랑에도 나오는 곤드레 나물이죠. 정식명칭은 고려엉겅퀴랍니다.” 주변의 식생을 손금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태백의 숲전문가 김부래(63)씨의 친절한 설명이다. 곤드레는 나물만 맛있는 줄 알았더니 꽃도 예쁘다.
길은 다시 널찍해진다. 헬기장이 있는 초원엔 이름처럼 어여쁜 각시취, 개미취, 산솜방망이가 한창이다. 촛대승마 몇 송이가 미풍에 흔들린다. 여름엔 숲을 온통 새하얗게 뒤덮었다고 한다. 널찍한 임도를 뒤로하고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면 두문동재 옛길이다. 멧돼지들의 장난일까? 뚱딴지 뿌리가 파헤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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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너덜샘. 낙동강물이 시작되는 곳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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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를 넘어 습한 비탈길을 얼마쯤 내려서면 ‘고목나무샘’이 나온다. 아름드리 신갈나무 아래에서 솟아나는 이 샘물은 이내 땅속으로 흘러들었다가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난다. 검룡소로 내려서는 저 계곡 어딘가에 우리나라 산과 들에 자라는 식물 가운데 가장 큰 잎(지름 1m)을 가진 개병풍이 의연하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한강의 근원이 되는 첫 샘물로 목젖을 넉넉히 적시고 분주령으로 향한다. 한약방 냄새가 물씬 풍기는 회향 냄새 맡으면서 분주령 고갯길에 이르자 노랑물봉선과 물양지꽃이 반긴다.
들꽃 탐사의 백미인 대덕산으로 가려면 고갯마루 네 갈래길에서 곧장 오르면 된다. 분주령을 지나 오른쪽 이깔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제비난초, 수리취 군락이다. 대덕산 정상 직전의 초원을 벗어날 무렵엔 벌개미취들이 소매를 붙잡는다. 이어 어여쁜 단풍취와 눈 맞추다보면 드디어 대덕산 정상. 산마루를 따라 온갖 들꽃이 자라는 광활한 초원 지대다. 저 너머로는 장쾌한 백두대간 마루금이 산물결을 이뤘다.
들꽃 사이로 난 길은 외줄기. 초원의 여름을 붉게 수놓았을 하늘나리 대신 개미취, 각시취, 황금마타리 같은 가을꽃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녀린 꽃들이 다칠까봐 저절로 까치발이 된다. 들꽃 감상에 행복한 시간은 한없이 짧다. 평생 이런 들꽃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느덧 초원의 들꽃과 이별할 시간. 시큼한 돌배 하나 입에 물고 계곡길로 내려서는데, 물봉선이 배웅한다. 그런데 한두 송이가 아니라 계곡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숲은 초가을에 찾아든 손님을 위해 또 하나의 깜짝 선물을 준비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검룡소 물소리가 들려올 무렵에야 아리따운 물봉선의 배웅도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