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지만 따뜻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부산 지하철 1호선 좌천역 4번 출구로 나와 범오굴다리를 지나면 철로 육교가 나온다. ‘범일동 부루스’라 적힌 계단을 올라가니 육교 양쪽으로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포스터들이 전시돼 있다.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육교를 지나 내려가면 마을 지도를 그려놓은 입간판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부산 동구 범일5동.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은 분위기가 묘하다. 우뚝 솟은 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가운데 자리 잡은 낡을 대로 낡은 민가와 상가가 대조를 이룬다. ‘도심 속의 섬’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개발 붐을 타고 주변 시설은 현대화됐지만 이곳은 시간도 비켜갔나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없이 세월의 흔적만 안고 있다.
[전형적인 일본 가옥 그대로 남아 영화 촬영지로 인기]
범일5동이라는 행정구역보다는 매축지마을로 더 알려진 이곳은 지금도 부산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매축지는 일제강점기 때 바다를 메워 만든 곳으로, 부두에 내린 말과 마부·짐꾼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초량천 하구에 내려와 마을을 형성해 매축지마을이라 했다. 마을 홍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피란민들은 잠깐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하루하루 머물다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하류인생’ ‘친구’ ‘마더’ ‘아저씨’ 등 영화 촬영지로도 많이 소개돼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마을은 그대로지만 사람은 많이 떠났다.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인근 아파트로 이사해 현재는 3분의 1만 남아 빈집이 더 많다. 마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마당, 바람, 햇빛. 대신 세 가지가 많다. 노인과 공중화장실, 빈집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 사람들은 마구간을 개조해 살았는데 규모가 작다 보니 화장실을 낼 공간이 없어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현재도 마을에는 주민들이 이용하는 공중화장실이 90여 개나 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골목의 너비도 1m가 채 안 된다. 낡은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은 스산하지만, 한편으로 ‘이웃사촌’으로 지내던 정겨운 지난 시절을 짐작케 한다.
골목을 걷노라니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부르면 어디선가 금방 대답이 들려올 것 같다.
[다양한 문화활동으로 활기 넘치는 마을로]
마을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뿐 아니라 지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낡은 양장점과 방앗간, 상점들이 아직 그대로다. 특히 2층으로 된 양곡상회 옆 전봇대에는 매축지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이 한 번쯤 눈여겨보게 되는 종이 있다.
‘매축지 종’이라고 불리는 이 종은 1954년 4월 휘발유가 흘러내리는 광경을 보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성냥불을 붙였다가 큰 화재로 번져 엄청난 ?해를 입은 아픈 이야기가 배경에 깔려 있다.
집들이 붙어 있는 데다 당시 주로 살았던 조선방직과 국제고무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밤새 일하고 들어와 자느라 미처 불을 피하지 못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불이 나면 알려주기 위해 종을 달았지만 다행히 아직 한 번도 울린 적은 없다.
매축지마을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마을관리소인 ‘마실’이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책을 빌리기도 하고 취미 교육도 받는다. 관광객이 찾아가면 마을 안내를 받을 수 있고, 다양한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다.
골목을 사이에 둔 마실 맞은편 건물 벽에는 여러 가지 그림과 다양한 자개 소품이 전시돼 있다. 전시 공간인가 싶어 찬찬히 보는사이 주인 박영진 씨(61)가 버려진 장롱을 구해와 내려놓고 다듬기 시작했다.
“허름하고 낡은 마을이지만 희망이 솟고 있어요. 젊은이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활력이 넘칩니다. 어느 마을보다 이웃 간에 정도 무척 깊어요.” 통영칠기사로 유명한 박씨는 마을에 들어온 지 올해로 11년째다. 사업에 실패하고 찾은 이곳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는 박씨는 마을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이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지만 주위에 목욕탕이 없어 매축지마을로 다시 와야 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잠시나마 쉬었다 가라고 의자도 마련해두었다. 혹시 몰라 ‘잠시나마 쉬어 가세요 어머님’이라는 문구까지 친절하게 써놓았다. 마을에서는 박씨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매월 둘째 주 화요일마다 어르신들에게 국수를 대접한다.
민족의 아픔으로 세워진 곳이지만 마을은 정겹다. 영화 촬영 장소로도 이용돼 영화마을로,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어 벽화마을로도 꼽힌다. 영화 ‘마더’를 촬영하기도 한 약국 건물에서 한블럭 내려오면 만나는 벽화마을은 영화 ‘아저씨’, 패러디한 모나리자 등 벽화가 그려져 있어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단다.
[사람들 북적대던 매축지시장, 지금은 사진 찍는 이들만]
“장사가 안 돼 집에서도 하지 말라고 해. 그만둘까도 생각하지만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또 나오게 돼. 이곳이 없어져야 그만두지, 매일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게 쉽지 않거든….”
마을에서 가장 번화가였다는 매축지시장에서 만난 울산 할머니(84). 할머니는 서른일곱 살에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다리가 아파 평소에는 채소 가게 안쪽 공간에 소파를 두고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 채소도 팔고 과일도 팔고 그때그때 달리해서 팔았단다. 울산 할머니는 예전에는 연탄공장, 55 보급창이 있고 오부도 사부도에 배를 대곤 해 사람들이 북적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는 대단했지. 이 앞길에도 장이 서고, 사람들이 차고 넘쳤으니.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없어. 주말이나 돼야 사진 찍으러 오는 학생들이 있으려나….”
울산 할머니와 단짝이라는 이기자 할머니(67)가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매축 과일집’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40년 넘게 과일을 팔고 있다는 할머니는 결혼하면서 마을에 왔다. 새댁 시절부터 시어른과 함께 과일을 팔아 아?들도 키우고 이곳에 집도 지었단다. 지나는 이 없어 무료하던 할머니는 낯선 이의 호기심이 즐거운 모양이다.
“푼돈을 모아 매일 마을금고에 저축하는 재미로 살았어. 예전에야 고생은 말도 못했지. 그때는 집이 없어 바깥에서 자는 사람도 많았어. 없어도 어찌 그리 없었을까.”
그렇게 고생했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는 할머니. 징글징글한 기억은 잊어버려야 한다며,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며 웃었다.
마을 모습이 그때 그 시절을 간직하고 있듯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집처럼 지내던 그 시절의 따뜻함도 그대로다. 어려웠던 기억이라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는 좋았지’라며 추억하고 싶은 이야기들. 매축지마을에는 고달팠지만 정겨웠던 우리네 이야기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