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화는 천여년에 걸쳐 모摹, 림臨, 방倣, 조造, 대代, 개관改款, 첨관添款 등의 모든 위조수단이 이용되어 무수한 가짜가 만들어졌으므로, 진위가 뒤섞어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을 알 수 없는 혼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감정가는 이러한 시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지만, 이러한 작품의 진위를 감정하려면 박식한 문학과 역사지식 이외에도 서화의 역사 및 서화이론과 미술지식을 숙지해야 하고, 아울러 시대별로 주요 화가와 유파 및 작품의 풍격에 대하여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규칙과 변위의 방법을 찾아내야, 비로소 진상을 밝힐 수가 있다. 이러한 규칙과 방법을 아래에 정리해 본다.
1. 필법筆法, 묵색墨色, 구도構圖는 중요한 감정근거이다. 1) 필법筆法 필법은 바로 규칙적으로 붓을 움직여 날카롭게 그리고(봉획鋒劃) 멈추었다가 움직이는(돈출頓出) 점과 선 및 준의 간칭으로서, 서화감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서화가書畵家마다 집필執筆하는 방법 즉 고저高低, 수립竪立, 측사側斜, 현비懸臂, 수완착지手腕着紙, 하필下筆할 때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에 따라 중봉中鋒, 측봉側鋒, 와필臥筆, 회봉回鋒, 순봉順鋒, 역봉逆鋒, 중정中正, 편측偏側, 원전圓轉, 방절方折, 허실虛實 등의 상이한 필법의 특징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화가가 몇 십년에 걸친 예술활동에서 형성한 고유한 필법의 특징이나 습관은,위조자가 짧은 시간 내에 전부 익히기는 불가능하며, 설령 아주 정교한 작품을 임모臨摹한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인 형사形似에는 도달할 수 있지만 영기靈氣와 신운神韻이 부족한 등의 여러 가지 약점이 나타나게 된다.
위조한 서법은 필획 사이의 견사처(牽絲處-운필이 끌리 듯하여 이어진 부위)와 비백세처(飛白細處-운필이 들려서 생긴 공백부위)가 부합되지 않으며, 필획이 제 자리에 위치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조자 자신의 풍격이 작품에 드러나기도 한다.
일부 대사의(大寫意-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와 초서草書는 위조자가 임모臨摹할 방법이 없으므로, 필법은 위조할 때 가장 돌파하기 어려운 난관이 된다. 이 밖에 한 개인의 필법에도 초기와 중기 및 말기의 변화가 존재하지만, 위조자가 이러한 규칙을 파악하지 못하여 초중말기의 풍격이 뒤집히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서화의 변위에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필법도 부단히 풍부해져서 인물화에는 '십팔묘(十八描-철선묘鐵線描, 유사묘遊絲描, 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 등)과 산수화에는 '이십사준(二十四준-부벽斧劈준, 피마披麻준, 귀면鬼面준 등) 및 점点, 찬, 탁擢, 척剔 등의 방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도 서화의 변위에 방증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묘법描法과 준법 및 점법点法은 전대前代의 작품에 만 적용할 수 있으며, 후대의 작품에는 적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후인이 전인의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위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법의 감별에는 반드시 '양판(樣版-견본)'이 있어야 한다. 한 화가의 초기, 중기, 말기의 서로 다른 필법의 특징을 파악하기만 하면, 작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정판교鄭板橋는 초년에 명성을 얻기 위하여 일찍이 중봉中鋒으로 관각체館閣體를 썼으며, 중년이후에는 예서와 해서를 뒤섞은 필법으로 '육분반서六分半書'를 썼다. 이러한 신서체는 가로가 평평하고 세로가 곧은 필획으로서 일사불란한 관각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 밖에 필법을 이용한 감정은 고증할 자료가 없는 고본孤本을 만나게 되면 필법으로 변위를 판단할 방법이 없게 되므로, 문헌과 인장 및 시대풍격을 통하여 감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법감정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필법은 또 붓의 재질 및 특성과 관련이 있다. 시대마다 낭호(狼毫-늑대털), 서호(鼠毫-쥐털), 겸호(兼毫-낭호와 양호의 혼합), 양호(羊毫-양털) 등의 붓이 사용되었으므로, 서화에 나타나는 풍모가 달라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낭호狼毫와 서호鼠毫를 이용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필법이 날카롭고 굳세며(첨경尖硬), 양호羊毫로 글자를 쓰면 대부분 풍만하고 통통하다고(풍비豊肥) 한다. 시대로 말하자면 청대淸代의 동치同治와 광서光緖 이전에는 산수화의 창작에 대부분 낭호狼毫와 서호鼠毫를 사용하여 그 필법이 비교적 굳건하였다. 청말이래로 육회陸恢 등이 비로소 순수한 양호로 그림을 그려 비교적 통통하고 부드러운 선을 구성하였다. 현존하는 건륭과 가경이전의 작품에 전부 양호로 그린 산수화는 위작의 혐의가 강하다.
2) 묵墨과 색色 서화작품에서 묵과 색에도 그 자신의 방법과 형식이 존재한다. 묵墨에는 훈暈, 쇄刷, 발潑, 삼渗 등의 방법과 파묵破墨, 발묵潑墨, 훈묵暈墨, 적묵積墨, 농묵濃墨, 초묵焦墨, 담묵淡墨, 고묵枯墨(건묵乾墨), 습묵濕墨 등의 형식이 있다.
서화가마다 묵의 사용에도 각자의 습관이 있다. 서법의 경우, 송대宋代의 소식蘇軾과 명대明代의 오관吳寬 및 청대淸代의 유용劉墉, 정판교鄭板橋, 조지겸趙之謙 등은 농묵濃墨을 애용하였다. 명대明代의 장필張弼, 청대淸代의 팔대산인八大山人, 왕문치王文治 등은 담묵淡墨을 애용하였다.
회화에서 원대元代의 예찬倪瓚, 청대淸代의 홍인弘仁, 왕지서汪之瑞는 건묵乾墨을 애용하였다. 원대元代의 오진吳鎭, 청대淸代의 석도石濤는 습묵濕墨 등을 애용하였다. 용색用色에는 훈염暈染, 발채潑彩, 몰골沒骨 등의 방법과 중채重彩, 담채淡彩, 천강淺絳, 청록설색靑綠設色 등의 방법이 있으며, 동일한 유형에도 각각 개인의 특색을 가지고 있어 손륭孫隆의 몰골과 혼수평渾壽平의 몰골 및 설색은 같지 않으므로,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서화의 변위에 근거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묵과 색은 인위적인 모방이 용이하므로, 묵과 색을 이용하여 서화를 감정하려면 반드시 필법과 결합시켜야 한다.
3) 결구結構와 구도構圖 전해오는 작품을 보면, 서화의 결구(結構-구조)와 구도는 서화가마다 각각의 습관이 있다. 서법의 경우, 글자의 구조와 글자간의 호응 및 기세는 작자에 따라 풍격이 천차만별이므로, 진위의 변별에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한 서화가의 초기, 중기, 말기의 서로 다른 상황을 잘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초년에 아직 성숙되지 않았으며 말년에 퇴락하여 나타나는 구조가 불안정하고 기세가 약한 일부의 작품을 위조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회화도 구도의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시대성과 개인풍격이 갖추어져 있다. 예를 들면, 북송北宋의 형호荊浩, 관동關仝, 동원董源, 거연巨然 등의 상하에 공백을 남겨두어 광활한 공간을 표현한 고두대권(高頭大卷-그림이 그려진 견絹의 폭이 당시에 서화에 사용하는 견백의 전체의 폭과 동일하게 약 50cm정도인 작품)의 구도, 남송南宋 마원馬遠의 '변각식邊角式'구도, 원대元代 왕몽王蒙의 번잡한 전경식全景式구도, 예찬倪瓚의 산수화에서 원산遠山이 화폭의 중상부 혹은 상단에 배치된 구도, 명대明代 구영仇英의 인물화에서 얼굴이 짧고 눈이 작은 표현, 이사달李士達의 얼굴을 공처럼 그리는 법, 청대淸代 왕원기王原祁의 삼첩식三疊式구도, 냉매冷梅《피서산장도避暑山莊圖》의 조감식鳥瞰式구도, 임백년任伯年의 각판괴식角板塊式구도, 오창석吳昌碩의 대각식對角式구도 등은 모두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서화의 감정에 방증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구도와 묵색은 모방이 용이하므로, 진위의 감정에는 반드시 필법과 함께 고찰해야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2. 제관題款과 인장印章의 보조작용 1) 서화가 본인의 제관題款 서화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제기題記와 서관署款은 해당 작품이 자신의 작품임을 표시하여 타인에게 신뢰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서화가 본인의 제관題款은 작품의 진위감정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서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북송이전北宋以前의 회화에는 대부분 제관題款이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후인이 첨가하거나 모방한 것이다. 동진東晉 고개지顧愷之의《여사잠도女史箴圖》와 남당南唐 조간趙干의《행강초설도江行初雪圖》의 제관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서법작품에는 대부분 서명과 낙관이 있다.
북송시기北宋時期에 이르러 회화작품 가운데 간단한 제관이 존재하지만 글자수는 매우 적었다. 남송南宋의 서화작품에는 제관題款이 많아지기 시작하였으며, 일부의 작품에는 장편의 시문詩文을 쓰기도 하였다.
원대元代에 이르러 문인화文人畵의 발전으로 시서화詩書畵가 결합되어 제관이 매우 성행하였으며 전선錢選, 조맹부, 이연李衍,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鎭, 예찬倪瓚 등의 그림에는 모두 제관題款이나 제시題詩가 있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대부분 원대元代의 관습을 계승하여 그림이 있으면 제題하였다. 청대淸代 강희이후康熙以後의 서화작품에는 제題하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었으며, 이러한 풍조는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므로, 서화감정의 근거가 된다. 제관에 의지하여 진위를 논하려면 반드시 필법과 결합해야 한다. 대필서화代筆書畵는 왕왕 제관은 진짜이지만 그림은 대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2) 서화가 본인의 인장 서화에 날인되어 있는 작가의 인장은 해당 작품이 친필에 속한다는 증거이며, 작자본인의 서명이 없는 상황에서는 인장이 왕왕 결정적인 작용을 하므로, 서화가 본인의 인장을 파악하면 서화감정에 크게 유리하다. 그러나 후인이 전인이 남겨놓은 인장을 이용하여 위조할 수 있으며, 일부 대필서화에서는 인장은 진짜이지만 그림은 대필한 특수상황도 출현한다. 이 밖에 인장은 또 번각할 수가 있으며, 특히 아연판이 출현한 이후에 번각한 인장은 진품과 거의 터럭만큼의 차이 밖에 없으므로 인장이 감정에 차지하는 비중을 감소시켰다.
인장의 진위를 감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교이다. 즉 인장을 인주의 질, 문자, 조각법, 인주의 색을 대비하여 진품인 인장에 부합되면 진품이고 부합하지 않으면 위조품으로 판정한다. 이 목적에 이르려면 감정가는 주요 화가의 중요한 인장을 기억하여 마음 속에 진품인장의 '견본'이 있어야 한다. 이 밖에 타인의 제발題跋과 감상인鑑賞印 및 수장인收藏印은 서화감정에 방증작용을 일으킨다.
인장의 경우,송대이전에는 대부분 동제銅製 인장印章을 사용하였으며 상아象牙나 우각牛角 등도 사용되었으나, 석제石製 인장印章은 명대明代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명대 중기이후에 '청전석靑田石', '수산석壽山石', '창화석昌化石' 등의 석질이 다른 인장이 나타났다. 동인과 석인으로 날인한 효과는 상이하므로 동인과 석인을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송대宋代의 서화에 석인이 찍혀 있다면 반드시 위작이다.
인주印朱의 색으로 진위를 판별할 수도 있다. 송대이전宋代以前에는 모두 수인水印이며, 남송이후南宋以後 봉밀蜂蜜로 조제한 밀인蜜印이 사용되었고, 원대元代에 풀을 기름기가 있는 주사朱砂와 혼합한 주사인朱砂印이 나타났다. 인주의 색이 다른 점을 제외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떠한 인주도 색의 변화가 발생한다. 청대이전淸代以前의 인주의 색은 반드시 낡고 색이 연하다. 현대 인주의 색은 밝고 선명하다. 이것은 진위의 감정에 도움이 된다.
3. 피휘避諱를 파악 휘諱는 봉건시대에 죽은 황제 혹은 존장을 칭하는 명칭이다. 피휘는 그들의 이름이 어떠한 사람의 글에 언급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반드시 이를 피해야 한다. 피휘의 내용은 두 가지이며, 하나는 피조휘(避朝諱-당시의 황제 및 선제先帝의 이름자를 피휘)이고 , 다른 하나는 피가휘(避家諱-작자집안의 존장과 조상의 이름자를 피휘)이다. 이처럼 판본을 감정할 때 휘자諱字는 바로 하나의 감정근거가 된다. 이 방면의 전문서로는 진원陳垣의《사휘거례史諱擧例》라는 책이 있다. 그러나 피휘한 상황은 구체적으로 실시될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였다.
피휘의 방법에는 주로 세 가지가 있다. 하나, 피휘하려는 글자의 마지막 한 획을 줄여서 쓴다. 둘, 피휘하려는 글자를 의미가 비슷한 글자로 대체한다. 셋, 피휘하려는 글자를 빈 칸으로 두어 쓰지 않는다.
피휘는 대략 진대秦代부터 시작되었으며, 진시황秦始皇의 성명인 영정을 피휘하여 정월正月을 '진眞'월月이라고 읽었다. 묵적墨迹에서의 피휘는 당대唐代에 시작되었으며 당고조唐高朝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연淵'자를 고쳐서 '연淵'자의 내부를 빼고 쓰지않았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세世'자를 고쳐서 제일 아래의 가로획을 하나 쓰지 않았으며 '민民'자는 마지막의 한 획을 줄여서 썼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묵적에 '은殷'자를 고쳐 마지막 한 획을 쓰지 않았으며 '환桓'자도 마찬가지 였고, '광匡'자도 맨 아래의 가로획을 쓰지 않았다. 그 의미는 각각 송태조宋太祖 부친의 이름인 홍은弘殷과 송진종宋眞宗의 이름인 환桓 및 송태조宋太祖의 이름인 조광윤趙匡胤을 피휘한 것이다. 휘종徽宗의 이름이 조길趙佶이므로 서적에서 '길佶'자를 만나게 될 경우에는 길吉과 힐詰 등의 글자는 모두 피하여 사용하지 않아야 했다. 흠종欽宗 조환趙桓의 이름을 피휘하여 '환선紈扇'을 '단선團扇'으로 고쳤다. 남송南宋의 고종高宗 조구趙構《행서천자문권行書千字文卷》에서 인종仁宗의 이름인 '정禎'을 피휘하여 '청淸'으로 고쳤으며, 영종英宗의 이름인 '서曙'를 피휘하여 '죽竹'으로 고치고, 영종英宗의 생부의 이름인 윤양(允金+襄)을 피휘하여 '양'을 '손遜'으로 고쳤다.
원대元代에는 피휘하지 않았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문장에서 이름자를 피휘하지는 않았으나, 동음자同音字는 고쳤다. 명초明初에는 매우 느슨하였으나 만력萬曆이후 점차 엄격해졌다. 명희종明熹宗의 이름이 주유교朱由校이므로 '유由'자는 마지막의 가로 획을 빼서 쓰고, '교校'자는 '교較'자로 썼다. 화가 조원趙元은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피휘하여 '원元'을 '원原'으로 고쳤다.
청대淸代에는 또 이름자의 피휘를 부활시켜서, 청성조淸聖朝 강희제康熙帝의 이름이 현엽玄燁이으로 '현玄'자를 피휘하여 고궁의 '현무문玄武門'을 '신무문神武門'으로 고쳤다. 문장에서 현엽玄燁의 두 글자는 반드시 끝자를 빼야야만 했다. 청고종淸高宗 홍력弘歷을 피휘하여 '력曆'자에서 마지막 한 획을 줄여 썼다. 화가 왕감王鑑은 자字가 현소玄昭인데 강희황제의 현엽玄燁을 피휘하여 도조圖照로 개명하였다.
옹정사전雍正四年(1726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영을 내려 공자孔子를 피휘하여 공구孔丘의 '구丘'자를 '구邱'자로 고쳤다. 송대宋代의 화가인 이영구李營丘는 '구邱'자로 고쳐졌으며, '구丘'자에서 한 획을 줄여 쓴 것도 있다.
서법감정가가 피휘의 규율을 이해하면 작품의 진위판단에 정곡을 찌르는 작용을 할 수가 있으므로 , 진정으로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 할 만하다.
예를 들면, 당대唐代 장욱張旭의 작품이라고 전해오는 초서고시첩草書古詩帖에 대하여 역대의 감정가들의 진위와 시대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후에 계공啓功이 해당 첩에 본래 '현수玄水'인 두 글자가 '단수丹水'로 고쳐져 있으며 이것은 송진종宋眞宗 시조始祖의 이름인 '현랑玄朗'을 피휘한 것임을 발견하여, 이 서첩은 송대宋代의 모본으로 장욱의 작품이 아님을 밝혀내었다.
또 당대唐代 손과정孫過庭의《경복전부권景福殿賦卷》에는 북송北宋의 '서曙(송영종宋英宗)'와 '양(영종의 생부 윤양)' 및 남송南宋의 '구構(고종高宗)'을 피휘하였으므로, 이 작품은 송대宋代의 고종高宗시기 혹은 조금 뒤의 모본으로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피휘에 의지하여 진위를 감정하는 것은 영활하게 적용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송대宋代에 당대唐代의 작품을 베껴 쓰는 것처럼, 일부 모본은 전대前代의 피휘를 임본 내에 그대로 베껴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치면 진위감정은 피휘한 글자와 작품의 시대풍격 및 필법의 특징을 결합하여 관찰해야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
4.고문헌을 이용하여 감정 고대 서법의 감정법은 현재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목감目鑑으로 감정가의 안력에 의지하여 작품의 진위를 식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고증考證으로 주로 문헌을 조사하여 목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화가의 전기傳記와 저술과 필기筆記 및 척독尺牘 등을 숙지하는 것은 서화감정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조사에 따르면 현존하면서 비교적 믿을 만한 서화에 관한 전기문헌으로는 당대唐代 장언원張彦遠의《법서재록法書在錄》과《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북송北宋 곽약허郭若虛의《도화견문문지圖畵見文聞志》,남송南宋 등춘鄧椿의《화계畵繼》, 청대淸代 팽온찬彭蘊燦의《역대화사회록歷代畵史匯錄》등이 있다.
서화저술로는 당唐 배효원裴孝源의《정관공사화사貞觀公私畵史》, 미불의《화사畵史》와《서사書史》, 주밀周密의《운연과안록雲烟過眼錄》, 양옥휴楊玉休의《송중흥관장명화기宋中興館藏名畵記》등이 있다. 명청시대明淸時代에 이르러 서화에 대한 저술이 더욱 증가하여 이존리李存理의《철망현계단鐵網現階段》, 명明 장축張丑의《청하서화방淸河書畵舫》, 청淸 변수예卞水譽의《식고당서화회고式古堂書畵匯考》, 청淸 오승吳升의《대관록大觀錄》, 안기安岐의《묵연회관墨緣匯觀》, 오기정吳其貞의《서화록書畵錄》, 손승택孫承澤의《경자소하기庚子消夏記》, 고복顧復의《평생장관平生壯觀》등 모두 67종이나 된다. 필기로는 6,7종이 있다.
이러한 전해오는 서화에 관한 문헌자료는 서화가의 생애, 관적貫籍, 사상, 작품의 진위에 대한 연구와 고증에 중요한 자료이다. 예를 들면,《동관여론東觀餘論》의 기록으로 유공권柳公權이 쓴《난정시권蘭亭詩卷》의 시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고복顧復의《평생장관平生壯觀》을 통하여 이른바 송대宋代 이건중李建中의 '서시혈書詩頁(낙관이 없으며 원래 남송南宋 홍흥조洪興祖의 제발이 붙어 있다)'라고 전해오는 작품은 이건중의 작품이 아니라 채양蔡襄의《십선시十扇詩》의 하나임이 밝혀졌다.
조맹부의《촉산가권蜀山歌卷》은 지본紙本이 본래 청대淸代 나언성那彦成의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으며, 아울러 보정保定 연지서원蓮池書院의 장벽墻壁에 각석刻石되어 조맹부의 진적眞迹으로 널리 유전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계공啓功이 문헌을 조사하여 조맹부는 일평생 사천四川에 간 일이 없음을 밝혀내고, 작품의 내용에 '내가 옛날 서천에서 배를 띄웠었다我昔西川曾泛舟'라는 귀절이 있음을 통하여 조맹부의 작품이 아님이 드러났으며, 다시 후에 유구암劉九庵이 진일보 고증하여 철저하게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을 드러내었다. 즉 이 작품은 본래 명초明初에 조맹부의 서체를 잘 쓰는 사람이 서천西川을 유람하며 지은 작품으로 서체가 조맹부와 흡사하므로, 후대에 손을 대어 마지막 부분을 잘라내고 '송설도인松雪道人'이라는 위관僞款을 덧붙이고 '조씨자앙趙氏子昻'과 '천수군도서인天水郡圖書印'이라는 위조인僞造印을 찍어서, 원래 명대 누군가의 작품을 조맹부의 작품으로 둔갑시켜 세인을 속였음이 밝혀졌다.
이상에서 문헌이 서화감정에 중요한 작용을 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덧붙여 설명할 것은 문헌기록에도 진위의 문제가 존재하며 오기가 적지 않으므로 인용할 때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5. 지견紙絹과 장황(裝潢-표구) 1) 종이의 시대판단과 감정작용 고서화의 지견紙絹은 시기별로 특징이 다르므로, 지견은 서화의 감정과 단대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전해내려 오는 작품을 보면, 당대唐代와 당대이전唐代以前에는 마지麻紙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서진西晋 육기陸機의《평복첩平復帖》과 당唐 한황韓滉의《오우도五牛圖》등은 모두 마지麻紙를 사용하였다(고궁故宮소장).
북송초기北宋初期에 이르러 기술의 진보로 단피檀皮와 뽕나무껍질(상수피桑樹皮)로 종이를 만들었으며, 마지麻紙보다 품질이 우수하였다. 예를 들면, 송초宋初 이건중李建中의《동년첩同年帖》(고궁故宮소장)과《귀택첩貴宅帖》은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수피지樹皮紙)를 사용하였다. 북송초기北宋初期에 죽지竹紙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송대인宋代人이 모방한 왕희지王羲之의《우후첩雨後帖》과 왕헌지王獻之의《중추첩中秋帖》(사실은 미불의 임모) 등은 모두 죽지를 사용하였다. 종이의 명칭으로 말하자면, 오대五代에는 징심당지澄心堂紙가 있었으며, 송대宋代에는 고려경면지高麗鏡面紙, 아광지, 분전지粉箋紙, 장경지藏經紙 등이 있었다.
원대元代에 각종 종이의 명칭은 송대宋代와 비슷하며 명대초기明代初期에 이르러 안휘성安徽省 선성宣城에서 생산한 종이 즉 '선덕전宣德箋'이 출현하였다. 지면이 세밀하고 매끄러워 선덕제宣德帝는 이 종이를 이용하여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이 밖에 명말明末의 동기창董其昌과 청초淸初의 왕원기王原祁도 선덕전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으나, 다른 사람이 사용한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선덕황제, 동기창, 왕원기의 그림을 감정하는데 근거를 제공해준다.
명대明代에는 대부분 금선면金扇面을 이용하였다. 즉 쇄금선면灑金扇面 혹은 니금선면泥金扇面을 사용하였으며 백지소선면白紙素扇面은 명말청초明末淸初에 비로소 출현하였다. 청대 강희시기에는 금선면과 백지선면이 병용되었다. 옹정과 건륭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으로 백지선면白紙扇面을 사용하였다. 쇄금과 니금이 출현한 시대에 있어, 대편大片의 쇄금지灑金紙는 명대초기明代初期에 출현하였으며, 쇄금지선면灑金紙扇面은 명대중기에 출현하였고, 소금편小金片과 금성지金星紙는 명대후기에 출현하였다.
색깔로 말하자면, 명말청초에 출현한 니금지는 적황색赤黃色이며, 청대후기에 이르러 니금지는 담황색淡黃色으로 변하였다. 청대 강희康熙에서 가경嘉慶까지 분전粉箋과 납전지蠟箋紙가 출현하여 유용劉墉, 황역黃易, 양동서梁同書 등이 상용하였으며, 청말 오대징은 일본종이를 사용하였다.
이 밖에 종이에는 또 크기의 차이와 신구新舊의 차이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초기의 종이는 크기가 비교적 작으며, 후기로 갈수록 종이의 크기가 커졌다. 서진西晉 육기陸機의《평복첩平復帖》은 높이가 23.8cm이지만, 북송北宋 이건중李建中의《토모첩土母帖》은 종이의 높이가 31.2cm로서 차이가 7.4cm이다.
종이의 진위와 시대를 감별하려면 종이가 본래 오래된 것인지 작구처리作舊處理를 한 것인지, 원래 자연적으로 낡은 것인지, 작구처리하여 화기를 없앤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서화감정에 방증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종이를 이용하여 서화를 감정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종이는 이전의 시대만을 판단할 수 있을 뿐으로, 후대後代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인前人이 후대의 종이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는 없으나, 후인後人이 전대의 종이를 사용하여 위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견絹과 능(綾-얇은 비단의 한 가지. 단緞과 비슷하나 더 얇음) (1) 견(絹-얇고 성기게 짠 무늬 없는 깁)은 대략 당송唐宋의 서화에 모두 사용되었으며, 원대元代이후에 종이가 갈수록 많아졌다. 견絹과 능綾으로 서화를 감정할 경우, 제작규격만으로는 생산된 연대를 구별하기가 극히 어렵다. 즉 청대 강희시기의 '공견貢絹'과 남송시기의 원견院絹을 비교하면 신구新舊가 다른 점을 제외하고 형태상에서 거의 동일하다. 그러므로 견과 릉으로 단대斷代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견의 문면門面의 크기와 아광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전해오는 매 폭의 견의 문면을 보면 북송초北宋初에서 선화이전宣和以前은 견의 폭이 모두 60cm를 넘지 않는다. 선화이래宣和以來 점차로 넓어져서 한 폭 화축畵軸의 넓이가 80cm에 이르는 작품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조길趙佶의《부용금계도芙蓉錦鷄圖》는 한 폭이 81.5cm이다. 남송중기南宋中期에 이르러서는 이미 1m이상의 문면이 출현하였으며, 이적李迪의《풍응치계도楓鷹稚鷄圖》는 폭이 105cm에 이른다.
능綾에는 문면을 제외하고 또한 아광(광내기)의 문제가 있다. 연대를 말하자면, 아광견은 명말明末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바탕이 반짝이면서 얇다. 아광견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청대 함풍咸豊과 동치同治이래로서화에 바야흐로 나타나므로 단대斷代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2) 능綾의 전세품에는 화릉花綾과 소릉素綾의 두 종류가 있다. 화릉은 당唐 정원이후貞元以後에 사용되었다. 소릉은 명대明代 성화成化와 홍치弘治시기 심주沈周 등의 작품에 나타나며 천계天啓와 숭정崇禎시기에 이르러 널리 유전되었다. 왕탁王鐸과 부산傅山 등의 서법권축書法卷軸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청대淸代 강희중기이후康熙中期以後에 이르러서는 적게 나타난다.
견絹과 능綾의 단사單絲와 쌍사雙絲는 단대斷代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명확한 시대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릉絹綾의 정밀도와 굵기는 서화의 단대에 방증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송대宋代 궁정용宮廷用의 '공품貢品'은 대부분 정밀한 고급품으로 남송의 궁정화가宮廷畵家인 오병吳炳, 임춘林椿, 마원馬遠, 마린馬麟 등의 작품에 사용된 능綾은 모두 질이 우수하였다.
그러나 화원畵院 이외에 혹은 민간에서 사용한 견은 비교적 거칠었다. 즉 오대五代의 서희徐熙와 남송南宋의 마화지馬和之와 양해梁楷, 명대明代의 진홍수陳洪綏와 장서도張瑞圖 등이 사용한 견은 비교적 거칠었다. 시대로 말하자면 송대이전宋代以前의 견은 모두 비교적 세밀하며, 명대明代에는 비교적 거칠지만, 청대淸代의 궁정용견宮廷用絹은 또 매우 정치하였다.
종합하자면, 견絹과 능綾으로 감정하거나 단대斷代하는 것은 종이와 마찬가지로 전대前代의 작품만을 판단할 수 없으며, 후대의 작품을 판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대에 생산한 견과 릉은 후대에 계속 사용할 수 있거나, 혹은 위조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상황은 불가능하다.
3) 표구의 변위작용 고서화 표구의 형식에는 주로 5종류가 있다. (1) 수권手卷, 횡피橫披 : 서화를 가로로 긴 양식으로 표구하여 탁자에 놓고 펼치면서 감상하는 것으로 '권卷'이라 하며 '횡간橫看'이라고도 한다. 비교적 짧은 횡첩橫帖은 표구하여 괘폭掛幅으로 만들며, 횡피橫披라고 한다. 수권手卷으로는 서진西晉 육기陸機의《평복첩平復帖》과 왕순王珣의《백원첩伯遠帖》등이 있다. 횡피로는 청대淸代 정판교鄭板橋의《총죽도횡피叢竹圖橫披》가 있다. 현존하는 원래의 장정을 갖춘 권卷으로는 북송선화장北宋宣和裝과 남송南宋 소흥내부장紹興內府裝 및 금원명청金元明淸의 내부장內府裝이 있다.
(2) 축軸, 병조屛條 : 직폭直幅과 방폭方幅의 서화는 표구하여 괘폭으로 만들며 '축軸'이라 한다. 그러나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돈황석굴에서 이미 당대唐代의 불화佛畵 '정자幀子(괘축掛軸)'가 발견되었으며, 대략 북송시기에 이르러 작품이 비로소 많아지기 시작하였지만, 서축書軸으로는 남송 오거의 시축詩軸이 하나 존재한다. 명중엽이래明中葉以來 서축이 비로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병조屛條 : 화폭으로 조組를 구성하여 병풍으로 만드는 것으로, 통경병通景屛과 각자가 독립된 병풍의 두 종류가 있으며, 두 폭이 한 조가 되거나 4폭, 6폭, 8폭, 10폭, 12폭 등으로 구성된다.
(3) 책혈冊頁 : 소폭小幅의 서화는 표구하여 마주 접히는 딱딱한 판으로 만들어 봉면封面을 첨가한 것을 '책혈'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최초의 책혈은 당唐 노홍盧鴻의 그림인《초당실경도草堂實景圖》(사실은 송대宋代의 작품)가 있지만, 명대이전明代以前의 작품은 극히 적다.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는 남당南唐 이욱李煜의《각중집閣中集》과 북송北宋 조길趙佶의《선화상감집宣和賞鑑集》이 있다. 전해오는 작품으로는 남송南宋 장즉지張卽之의 글씨인《도인경度人經》과《화엄경華嚴經》등이 있다. 명청이래明淸以來 전해오는 책혈은 비교적 많다.
(4) 환선紈扇, 절선折扇 : 환선紈扇은 또 단선團扇이라고 하며 대부분 원형이나 타원형이다. 남송시기에 가장 많이 나타났으며, 북송北宋과 원대元代에는 극히 적게 나타난다. 명대에서 청대의 도광道光연간까지 환선은 거의 자취가 끊어졌다. 그러나 함풍咸豊, 동치同治, 광서연간光緖年間에 이르러 또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선면扇面에 금견金絹을 많이 사용하였다. 서화書畵에서의 절선折扇은 명明 성화成化연간에 시작되었으며, 선면에 금전金箋이나 운모전雲母箋을 사용하였다. 지질紙質이 매끄럽고 극히 잘 연마되어 먹을 먹지 않으므로 진위가 혼동된다.
(5) 대련對聯 : 명말明末에 처음 나타나며, 전해오는 최초의 대련은 청淸 강희시기康熙時期의 왕시민王時敏과 주이존朱彛尊 등의 작품이 있다. 명明 중엽이전中葉以前의 대련을 보게 되면, 위작이 틀림없다.
이상은 서화표구의 여러 가지 주요 형식으로, 고서화의 감정과 단대斷代의 근거가 된다. 원대元代의 수권手卷을 예로 들어 본다. 원대元代에 표구한 수권은 전면前面에 인수引首가 없으며 공백의 미지尾紙만 있다. 후대後代에 화면畵面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면에 일단의 인수를 첨가하였으며, 대부분 장경지藏經紙를 사용하였다. 원대元代의 수권手卷이지만 후대에 다시 표구된 작품에도 대부분 인수가 첨가되어 있으므로, 장정의 형식상 시대를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만약 원대에 표구한 서화작품이 출현하였는데, 전면前面에 인수지引首紙가 있거나 심지어 압봉장押縫章이 있으면 위작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종합하면, 서화의 감정은 비교적 어려운 하나의 학문으로서, 위에서 말한 내용을 장악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실물을 많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탁상공론이 되어 위조품에 당하기 쉽다. 이 밖에 또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는, 한 가지 사항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면 '땡'하고 종을 쳐야 한다. 감정학에서 이를 '경상硬傷'이라고 칭하며, 또 '일추정음一錘定音(한 번 두드려 음을 정한다)'이라고도 한다. 潘深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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