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영 실
세종대왕이라는 책을 읽어보던 도중 장영실이라는 이름이 나와서, 헤밍웨이 테마 위인에서 장영실을 찾아 표지를 보았습니다. 벼슬옷을 입고 있는 장영실의 모습과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옆에는 장영실이 만든 발명품과 감탄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있었지요. 장영실의 어렸을 적, 만든 발명품, 어떤 도움은 주는지 궁금해 1장을 넘기었습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우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항아리 3개와 물톤 같은 것이 2개 나란히 있는 자격루......
장영실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와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영실의 어머니가 관아에 시중을 드는 천한 관기라 모두들 손가락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슬프고, 불쌍한 영실을 본 영실이의 어머니는 집에서 맘껏 하고싶은 것을 하라고 했지요. 영실이는 헛간에서 여러 가지를 고치며 영실의 손재주는 하루하루 늘어갔어요. 하지만 관기의 자식은 열 살이 되면 어머니처럼 관기의 노비가 되어야 해, 열 번째 생일날, 포졸 아저씨가 영실이를 끌고 나갔습니다. 어렸을 적, 10살 때부터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는 영실이가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관아에 간 영실이는 물건을 고치는 재주가 있어 귀여움을 받았지요. 어느 해는 가뭄이 들었는 날, 장영실은 꼴똘히 생각해 수차를 만들었지요.
땅을 파 도랑을 만들어 먼 곳에 있는 강물은 논으로 끌어왔지요. 사또 또한 장영실이 대견스러웠지요.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오른 세종대왕이 재주 또는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찾자, 이천이라는 사람이 세종대왕에게 장영실을 추천했지요. 마침내 장영실은 한성으로 올라와 대궐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장영실은 대궐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일을 했지요. 여러 해가 지나고, 장영실의 솜씨를 본 세종대왕은 높은 벼슬을 내렸지요. 별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안 장영실은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간의’를 만들었고, 글자를 찍을 수 있는 활자인 ‘갑인자‘도 만들었지요. 갑인자는 20만여자가 넘었다고 합니다.
또 농부의 이야기를 듣고, 물시계를 만들었는데, 그 물시계가 바로 ‘자격루’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철이나 금이 묻혀있는 곳을 찾아, 무기를 만들었으며, 가뭄과 홍수에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둥근 통 ‘측우기’를 만들었지요. 이것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측우기’였습니다. 하루는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불러 편한 가마를 만들으라는 소리에 몇 날 며칠을 보내 멋진 가마를 만들었지요. 장영실에게 상까지 내려주었어요. 그 가마를 다고 간 세종대와, 갑자기 세차게 바람이 불었습니다. 가마꾼 중 한사람 이 쓰러지며, 세종대왕도 떨어지며 난리가 났지요. 이로 인해 장영실은 신하들의 의견으로 감옥에 갇히고, 곤장 80대를 맞고 궁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뒤 장영실이 어디를 갔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발명품을 놓고, 이 발명품을 남긴 장영실이 어디로 갔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과학에 이바지한 장영실은 우리 민족의 크나큰 자랑이였습니다. 장영실의 발명품은 간의대(관천대), 수표, 자격루, 양부일구, 갑인가, 풍기대가 있었지요. 그 시대 사람들은 관노비 출신인 장영실이 벼슬을 오를 수 있는 것은 황당하고 못마땅했겠지만, 세종이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장영실이 우리 과학의 주춤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세종대왕이 아닌 다른 임금이였다면, 관노비로 인하여 우리과학 발전의 주춤돌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관노비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몰두한 장영실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