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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에 썼던 글입니다. 목사이다보니 기독교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순수(純粹)에 이르고 싶다!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녹색평론사 엮음, 2008(개정판)
1. 어느 순간 기척도 없이 봄은 왔다가 약동하는 생명들의 춤사위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이제 그 뒷모습을 보이고서 서서히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다. 푸릇한 생명이 기지개를 켜며 갓난 아기와 같은 보드라운 싹을 밀어 올릴 때의 그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마냥 신명의 춤을 출 수는 없었다. 우리의 역사는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역설적이게도 무고한 생명이 이유 없이 죽어간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머금은 채 생명과 죽음을 함께 생각해야하는 얄궂은 운명을 우리에게 선사하고야 말았다. 제주4.3사건, 4.16 세월호 참사, 그리고 올해엔 코로나19 사태까지 이어져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이 모든 것이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참담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괴로운 마음뿐이다. 우리의 봄은 왜 이토록 잔인한가! 우리는 왜 이토록 변질되었는가! 우리에게 정녕 희망은 없는 걸까? 우리의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월은 그저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다. 봄은 가고 여름이 다가서고, 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겨울을 곧 맞이할테고 다시금 봄이 오겠지. 다시 아픔과 슬픔의 봄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린 반드시 생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다른 길이 없다.
2. 그런 마음을 안고 4월의 끝자락에 집어든 책이 바로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이었다. 난 권정생 선생님과 함께 5월을 맞이했다. 5월은 우리의 사랑의 키가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하는 달이다. 콩알 만한 사랑이 일순간에 옥수수대처럼 자랄 순 없지만 우리의 본연의 마음이 어떠한지,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지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하는 시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의 됨됨이는 얼마만큼 무르익었을까? 작년 이 맘 때 이후 1년이란 시간을 지나오면서 난 더욱 순수해졌을까? 더욱 성숙했을까? 나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이 불현 듯 들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나서 권정생 선생님 생가가 있는 안동 일직으로 향한다. 비단 어린이날이 있는 5월에만 기념일 챙기듯 가는 건 아니다. 언제든 마음이 허할 때면 버릇처럼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를 찾는다. 순수를 향한 동경이 아직 남아 있는 걸까? 난 권정생 선생님 생가 뒤편 빌뱅이 언덕에 올라 한참을 멍 하니 앉아있다 오곤 한다. 그렇다고 별 다른 해답을 찾는 건 아니지만 그냥 마음이 한결 가지런해지는 듯 하다. 이럴 땐 권정생 선생님의 평생의 흔적이 서려있는 곳과 지척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5월을 맞이하며 읽은 <우리들의 하느님>에는 점점 뒤틀어져 가는 세상, 본연의 모습에서 점차 변질되어 가는 세상에 대한 권정생 선생님의 걱정과 한탄이 가득 배어있다. 권정생 선생님의 눈에는 세상의 눈부신 발전이 순수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에서 쉽게 잊혀져가는 것들이 점차 많아졌고, 그 중에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이 뒤섞여 있다.
책의 제목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 일직교회 종지기의 삶을 사셨던 권정생 선생님은 타락해진 종교의 암울한 모습을 직감하시며 많이 염려하셨음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때론 깊은 한숨이 느껴지고 때론 격노하셔서 따끔한 한 마디를 내뱉기도 하신다. 책 제목 <우리들의 하느님>은 사실 선생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원래 ‘태기네 암소 눈물’로 제목을 붙이기를 원하셨다. 그럼에도 제목이 <우리들의 하느님>으로 정해진 것은 순전히 당시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김종철 선생님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왜 선생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제목을 바꾸었을까? 권정생 선생님과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권정생 선생님의 생명사상은 예수의 생명사상과 맞닿아 있다. 가난한 이들과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이 권정생 선생님의 사상과 삶을 관통하는 주제로 본다면 작금의 교회는 너무나 부요해져 본모습을 잃은 지 오래이다. 글 곳곳에 교회로 대변되는 변질되어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걱정이 <우리들의 하느님>에 오롯이 담겨서였을까?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모습에는 신앙인은커녕 인간으로서의 기본 책무도 망각한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현실의 교회를 바라보시며 권정생 선생님께서 깊은 한숨 가운데 내뱉으신 말은 가령 이런 것이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선교를 한답시고 온 세계를 떠들고 다니며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온갖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도 하나의 공해물로 인식된다면 빛과 소금은커녕 쓰레기만 배출해내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한번 반성할 틈도 없이 그냥 발가벗은 임금님처럼 앞으로 앞으로 가고만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 왔다. 한때는 십자군 군대의 앞장에 서서 전쟁과 학살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천국 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그야말로 뚜쟁이 노릇도 했고, 대한민국 기독교 백년사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쳤고, 더러는 땅투기꾼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에게, 얼마나 이용당하며 시달려 왔던가”
(‘우리들의 하느님’ 중에서)
목회자들에게도 한 마디 하신다.
“나는 신학(神學)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올바른 신학을 한다면 농학(農學), 인간학, 자연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추상적이며 관념에 머문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사꾼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 정말 똥짐 지는 목회자는 없는 것일까?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
(‘십자가 대신 똥짐을’ 중에서)
우린 과연 권정생 선생님의 말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선한 눈매를 가지셨지만 근원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에 힘주어 서슴없이 질타하신다. 교회가 그 순수함을 잃어버릴 때 그것은 있는 이만 못하다. 오히려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멸망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구원을 지향하는 교회가 오히려 멸망의 도구가 된다니! 선생님은 현대의 교회에서 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걱정하셨던 교회의 모습은 그대로 세상을 대변하고 있다. 교회의 타락은 세상의 타락의 축소판이다. 선생님께서 책 제목으로 정하고 싶으셨던 ‘태기네 암소의 눈물’은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자연스러움을 벗어난 인간의 인위(人爲)가 생태의 보루인 농촌에까지 미치는 것을 바라보시며 걱정이 앞서신 것이다. 새끼를 얻을 목적으로 인간에 의해 인공수정을 해야만 했던 태기네 암소의 눈물을 보며 인간의 탐욕으로 덧입혀진 암울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신다. 자연을 인위로 갈아치우는 인간의 욕심 많은 행위를 중단하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자연이 그래도 살아있는 농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시대적 사명임을 일깨워주신다. 난 ‘태기네 암소의 눈물’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눈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다. 태기네 암소의 눈물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아파하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들의 눈물을 대변한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심성 고운 생명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세상은 악마적 세상이다. 모두 순수함을 잃어버린 참담한 결과들이다.
세상을, 사람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았던 순수의 눈에 욕망의 백태가 끼고 말았다. 순수의 눈을 회복해야 한다.
“꽃을 꽃으로만 볼 수 있는 순수의 눈을 가질 때, 이 세상의 모든 장벽은 허물어져 사라질 것이다”
(‘꽃을 꽃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중에서)
권정생 선생님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서 11장의 내용이다.
“그대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순수(純粹)로 돌아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이리라. 변질된 것은 도려내고 영혼의 새살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순수로 돌아가 태초의 안식처인 에덴을 거닐고 싶다. 그곳에는 쓰라린 아픔도, 숨 막히는 슬픔도, 고통의 절규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에게 순수한 모습은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아기의 상태와 같다 할 수 있겠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면 아기는 마냥 웃는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줄 것 같은 전적인 신뢰의 마음으로 엄마를 찾는다. 엄마는 아기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빛만 보아도 그 심사를 꿰뚫어 안다. 이렇듯 신뢰를 바탕으로 하면 표현하지 않아도 그저 이심전심 마음은 통하는 것이리라. 순수한 인간의 상태란 전적인 신뢰의 상태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신뢰가 깨진 것이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인간의 탐욕이다. 순수함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야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더 이상 누구를 원망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중에서)
3. 지난 5월 첫주일에 어린이주일, 꽃주일을 기념하여 보냈다.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교우들 가정의 자녀들(청년들을 포함하여), 그리고 장애인부모회 친구들에게 선물상자를 준비해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부하느라, 취업을 준비하느라, 일을 하느라 타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에게는 선물상자를 택배로 보냈다. 어린이주일이 되기 전 멀리서 뜻밖의 선물상자를 받은 청년들은 이 선물상자를 받고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릴 적에는 어른 흉내를 내며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의 때가 묻고 생이 변질되면 오히려 순수의 세계를 동경한다. 버거운 생을 살아가느라 지치고 힘겨운 이들일수록 순수에의 동경의 마음은 더욱 간절하다.
예배를 위한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그동안 난 어린이주일임에도 어른들을 향해 설교를 해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느 누구도 어린이 시절을 지나지 않고 어른이 된 이는 하나도 없다. 사느라 잊고 지냈지만 사실은 마음 한 켠 순수의 아이를 품고 지내고 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순수에의 동경의 마음이 간절해지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번 어린이주일에는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 마음속에 잊혀져있던 어린이들을 소환해 그들과 함께 설교를 나누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용은 짧으면서도 단어선택도 최대한 단순하고 쉽게 구사하고자 했다. 나의 설교의 말은 적게 하고, 내가 하고픈 말은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 <강아지똥>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의 백마디 말보다 훨씬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강아지똥은 알다시피 보잘것없고 하찮은 똥이 꽃으로 화하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꽃이 되어야 한다. 시절을 따라 세상을 환하게 하는 꽃이 되어야 한다. 생명이 되어야 한다. 의성서문의 모든 아이들에게 꽃이 되자고 설교했다. 꽃이 되자는 말은 순수에로 나아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본디 모습인 순수 말이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랑 거두고 진실하게 삶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타락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는 길이다.
우린 여전히 꿈꾸어야 한다. 순수(純粹)로 돌아가는 꿈을...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