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 산야에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그 중에는 곧게 서지도 못하는 풀에서
고개 들어 예쁘게 피어 올리는 꽃이 있는가 하면,
잎사귀 하나 없는 커다란 나무 까지 끝에
겅중하게 얍상한 꽃무더기를 매달고 서 있는 놈들도 있다.
그 중에 산수유란 놈은 나무 전체에 채색하듯 피어
온 동네를 물들이며, 그런대로 꽃 핀 것처럼 분위기가 그럴싸 하지만
이 생강나무 꽃이야말로 그러지도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피었다가 봄바람이 좀 세어졌다 싶으면
한 군데로 떨어져 쌓이는 것이다.
아, 김유정 선생의 소설 ‘동백꽃’에서
정분난 점순이와 ‘나’가 껴안고서 그 속에 푹 파묻힌 꽃.
♧ 생강나무 꽃 필 무렵 - 김승기
해마다 기다린 만큼 손 흔들며
다가오는 보슬비
마른 나뭇가지에 얼굴 부비고 있다
빗물에 입맞춤하는 나무들
꽃눈 틔우려나 보다
눈가에 맺히는 이슬이 붉다
지금쯤 은한 강물에 머리 감고 계실까
동백기름 바르시고
참빗으로 머리 빗어 쪽을 지시던
생강나무 꽃길 밟고 가신
할머니, 펄럭이는 옷자락에서 생강 내음 일던
어릴 적 기억
떨어지는 빗방울에 묻어 있다
비 그치면 꽃망울 부풀겠지
꽃향 실은 바람은
또 한 바탕 머리 풀어 놓겠지
여전히 꽃 속에서 웃고 계실 할머니
생각으로 지금도 가슴 설레는 손자는
이제 팔다리 저리는 중년,
온몸 감싸고도는 무거운 물안개
떨치며 휘저으며 밀어내는 손길 밖으로
겨울이 저만치 가고 있다
아, 어쩌면 좋아
할 일 마치고 떠나는 행복한 길인데,
산허리 돌아가고 있는 겨울
그 등 굽은 뒷모습이 쓸쓸하다
♧ 생강나무 꽃 - 우공 이문조
김유정의 동백꽃을 아시나요
이른 봄
강원도 산골짝을
수놓는
노란 병아리들
생강나무 꽃
산수유와
닮은 듯
다른 꽃
생강나무 꽃
그 이름 아는 사람
그 이름 다정히 불러주는 사람
별로 없어도
섭섭하지는 않답니다
그 유명한
김유정의 동백꽃
그게 바로 생강나무 꽃이랍니다.
.
♧ 첫사랑 생강나무 - 김내식
설레는 생강나무
옷고름 속
살며시 숨어든
하얀 눈송이
그늘진 계곡
찬바람이 희롱하고
별들도 질투하고
햇빛마저 외면하니
하얗게 얼어 반들거리다
햇솜처럼 고운 님
봄비 되어 다시오니
엄동설한 겨우내
참고있던 서러움
달뜬 숨을 토하며
가지 끝에
샛노란
울음을 터뜨린다
♧ 생강나무를 생각하다 - 김종제
상처로 신열을 치른 몸에
생강냄새가 난다고?
은은하면서도 산뜻한
제 빛깔과 향기가 있는데도
남의 이름을 함부로 갖다 붙였다니!
생강나무에는 생강이 달리지 않는다
산동백나무에는
붉은 동백꽃이 피지 않는다
봐라, 누구 맘대로 네 이름으로 부르느냐
저 나무에 어서
본래 이름을 찾아 돌려주기를
폭력과 완력의
지리하고 길었던 그 겨울
몇 차례의 폭설暴雪과 영하零下도 있었지
철모르고 얼굴 내밀다가
찬바람에 얼어 터져 죽었던 과거
고스란히 드러낸 오늘
아침이 먼저 밝아 오는 나라처럼
이른 봄에 제일 먼저
산비탈 양지 바른 곳에
그 노오란 꽃이 피는 것이다
마른 뼈에 생기가 돌고 살이 붙고
심장에서 새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새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봄이므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할 일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초록으로 무성해지기 전에
겨울 같은 마음 떨쳐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 눈 속에 정분난 생강나무 꽃 - 송문헌
- 山寺9 -
아침 공양 시간이었습니다 목탁 소리에 선잠 깨니
철늦은 눈이 절 마당 가득 합니다 눈 속 요사채 봉당
서성이다 산골짝 올려다보니 울창한 가지마다 눈꽃이
현란합니다 어느 꿈결에 또 다른 산사에 와 있는 듯
혼몽 하였습니다 요사채에서 법당 뜨락으로, 水閣으로
그리고 공양간으로 한 줄로 자리한 사이 계단을 껑충
껑충 건너뛰어 넉가래를 들고 뒷간 가는 길을 밀고
갔습니다
그곳에 이르자 황급히 그놈을 꺼내어 쏴 내 깔기고
진저리 치며 올려다보니 오오, 오줌통 너머 산비탈에
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생강나무 꽃이여, 하얀 눈꽃 송
이 속에 영하의 긴긴 밤 얼싸안고 밤새 어떤 수행에서 얻
은 꽃입니까
늦은 밤 山中 어디선가 툭 하고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 그 파열음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후드득 후드득
눈꽃 떨어지는 소리에 조바심이 납니다 한낮의 눈 속
생강나무 꽃이 생각나 다시 찾아갑니다 옷매무새도 가
다듬지 않고 꺼칠한 모습으로 히죽히죽 이른 아침 방
문 열고 나오던 어느 정분난 과부처럼, 꺼칠꺼칠 늘어
트린 노란 꽃 봉만이 헤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날밤은 괜시리 밤새도록 질척거리는 산길을 싸다녔습
니다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출처] 생강나무 꽃시모음 / 김내식 外|작성자 비비추 김귀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