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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①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교과서에서 이데올로기란 이념, 세계관 등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렇게만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면, 이데올로기의 실천적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조금 어렵더라도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데올로기란 개인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주는 관념의 체계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세상을 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이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속에 나는 무엇을 하길 바라는가를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총체를 말한다. 세계란 어떤 곳이고, 나는 무엇이며,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각의 틀이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살아간다. 이데올로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관이라고도 하며, 자신의 가치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이념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규정하는 생각의 틀이지만, 그것은 내 개인이 고안한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그의 이데올로기지만, 그런 생각은 각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각자의 세계관, 이념을 모두 개인들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라면 세상에는 수 만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이다. 개인들의 이데올로기는 모두 상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데올로기란 개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특정한 사회가 구성되는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적 관계에 조응하는 권력의 메카니즘에 따라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현존하는 사회를 자본주의체제라고 생각해보자. 자본주의하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는 부르주아와 임금노동자이다. 그 외에 중간계급이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내에서 권력의 메카니즘은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중간계급인 중산층이 중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임근노동자는 피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중간계급 이데올로기, 임금 노동자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 팽배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예컨대 대표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이념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누구에게나 자유를 보장하고, 이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있고, 경제체제는 전체적으로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인류가 이륙한 최고의 질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는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영원히 지속되면 부르주아의 지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대중들, 일반적인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나 교회, 다양한 대중문화를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학습한다. 학교에서는 자유주의를 최고의 이념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신분제를 철폐함으로써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이성적인 원리에 따라 세상이 작동하도록 한 이념인 것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최고의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자기화 하는 것이다. 그의 계급적 위치가 부르주아이든, 중간계급이든, 노동자와 하층민이든 상관없이 그들 대부분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자유주의적 이념에 기초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개인들은 누구나, 자신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고, 능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자유주의’ 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피지배자들도 지배자인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세상과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문화산업이 이익을 남기려면 대중의 취향에 잘 맞춰야 하고, 대중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생산물들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이념을 그 속에 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대중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애국과 애족을 최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부르주아 사회를 매우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의 생산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주 좋은 곳이라고 묘사한다. 비록 악이 있지만 정의는 늘 승리하고, 실패도 있지만 끝은 늘 해피엔딩이며, 신분적인 차이는 있지만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식이다. 대중문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참 따뜻한 곳이라는 점을 늘 상기시킨다. 역으로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작품들은 현존하는 사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이 참 좋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드라마를 시청하고, 쇼프로를 보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무의식적으로 세계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갖게 된다. 세상을 긍정하면 할수록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우호적인 관점은 대중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가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도록 보장하는 사회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체제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갖게 함으로써 부르주아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다.
②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 소시민적 영웅주의 :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영웅주의를 묘사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의롭고, 신체적 매력이 뛰어나며, 정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다. [주몽]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이나, [슈퍼맨]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는 주인공인 ‘영웅 신화’로 가득 차 있다. 각본은 대체로 이렇다. 평화롭던 세상이 어느 날 위기에 처한다. 악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이 출현하면,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영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스파이더맨]에서는 머리는 좋지만 별 볼일 없는 물리학 전공 대학원생이 나온다. [슈퍼맨]은 일상에서는 선하지만 약간 멍청한 기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어떤 계기를 통해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고 위험에 처한 세계를 구원한다. 궁극적으로 악은 패배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드라마의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영화의 진행과정에서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건의 전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기가 곧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구원하는 주체가 된 듯 착각에 빠져든다. 그 와중에 자기 스스로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약과도 같은 황홀함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대부분이 대중들은 초라하고 별 볼일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쉬한 외모와 왕자의 복근이 없다. 거기다가 학생들은 생각대로 점수가 안 나오고, 직장인들은 언제 해고될 몰라 쩔쩔맨다.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고 나면 초라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과정에서 이런 고민을 싹 날라 간다. 어느덧 영화의 주인공이되어, 세상에 구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가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면 더 열광한다. 왜냐하면 나 같이 초라한 인간도 언젠가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초라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세상을 구원할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은 한편으로 나 자신에게 자긍심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자기를 긍정하게 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세속화된 낭만주의 : 낭만주의를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주 간략하게 정의할 수 있다. ‘사랑 아니면 죽음을 달라’ 뭐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기본적 테마이다. 젊은 베르테르를 생각해보거나 아니라면 바이런의 애정행각을 기억하면 된다. 돈이나 명예, 신분 상승, 이성과 질서가 아니라 감정이 이끌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질풍노도처럼 달려가는 것이 낭만주의의 주요 구성요소다. 낭만주의는 한편으로 체계에 대한 저항의 요소를 지닌다. 질서나 규칙이 아니라 용기, 불굴의 의지, 원시성에 대한 동경, 불타오르는 욕망, 질풍노도와 같은 사랑에 이끌리는 것이 낭만주의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나 바라고, 사랑을 하면서도 배우자의 능력이나 따지고, 힘 있는 놈한테 아부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삶의 모습은 낭만주의와 거리가 멀다. 낭만주의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처럼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를 교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의 낭만주의는 죠지 바이런이나 랭보와 같은 삶을 말한다.
그러나 세속화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실제의 낭만주의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세속화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사랑만으로 모든 것은 극복가능하다.’는 관념이다. 세속화된 낭만주의적 관념은 사랑이라면 모든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멜로물이거나 여고생들에게 철없는 환상만 심어주는 하이틴 로맨스와 같은 글이다. 드라마를 예로 들어 보자. [파리의 연인]에서 남자주인공은 재벌의 후계자, 그러니까 신의 아들쯤 된다. 돈이 힘인 사회에서 재벌은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다. 그 후계자는 신의 아들인 것이다. 반면 여자 주인공은 하층계급 중에서도 가장 하층인 파출부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고, 결국 맺어진다. 사랑만으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신분적 차이를 극복한 것이다. 사랑만 있으면 안 될 것이 없다는 내용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초월하여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낭만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와 같은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여성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 열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상의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초라하다. 원하는 만큼 외모는 빼어나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직장에다가 월급도 그렇게 많지 않다. 좋게 말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별 볼일 없이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별 볼일 없이 고만고만하게 살아야만 한다면 얼마나 삶이 고통스럽겠는가? 비록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을지라도’ 꿈은 꿀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재벌의 아들과 사랑을 나누는 꿈,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사는 꿈, 섹쉬한 몸매의 여성이 되는 꿈 등등 이런 것들을 꿈 꿀 수 있어야 ‘별 볼일 없는’ 인생에도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바로 그와 같은 꿈을 꾸게 하는 효과가 있다. 대중문화는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열망, 능력 있고 잘 생긴 남성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을 간접적으로 실현해 준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이나마 ‘나도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 애국주의와 휴머니즘 : 선량한 대중들이라면 누구나 ‘나라를 사랑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정의는 승리하며,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국민들 누구나 국가에 대해 우리는 충성할 필요가 없으며, 한국 사회는 정의보다 불의가 더 지배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면, 한국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국민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사람들이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애국은 좋은 것이고, 정의는 승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여겨야 한다. 대중들이 ‘애국과 정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된다는 인상을 지녀야만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하고 소속감을 느끼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대중들 스스로 자신의 국가가 정의를 실천하는 국가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애국이 곧 정의이다. 자기 국가가 정의를 대표하면 국가를 위하는 것은 정의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라고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매체는 국사교과서이고 그 다음이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 생산물들, 그러니까 TV드라마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모습은 늘 정의로운 존재거나 약자이다. [주몽]이나 [대조영]에서는 한족에게 핍박을 받는 존재로 고구려가 그려진다. 반면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드라마는 일본의 핍박을 받는 한민족을 그린다. 여기서 중국이나 일본은 악이고 한민족은 정의이다. 한민족이 약자이고, 한민족을 위하는 것은 정의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중문화는 이를 조장한다.
이런 구도를 보다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곳은 헐리우드 영화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미국은 늘 정의를 대변한다. 외계인이 침공하면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과 선량한 미국 시민이 영웅이 되어 지구를 구한다.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맞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는 존재로 주인공이 부각된다. 여기서 미국은 정의를 대변하고, 미국을 공격하는 테러리스트는 악이며,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은 미국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다. 부시의 말대로 미국은 선의 축이고 반미는 악의축을 대변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선악의 축을 전제로 전개되며, 이것이 정의를 사랑하는 헐리우드식 휴머니즘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분법이 대중문화에서는 매우 잘 먹혀든다. 미국인들은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신의 국가에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 한국의 대중들은 [주몽]과 [대조영]을 보면서 정의를 사랑한 민족으로서 한민족을 생각한다. 대중문화는 이렇듯 애국주의로 대중을 물들이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때 휴머니즘이란 다소 값싼 휴머니즘이다. 즉 ‘애국과 애족’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이다. 이런 휴머니즘은 평화주의라든과 사해동포주의, 진정한 정의와는 무관하다. 그저 자기 나라는 정의를 대변한다는 착각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휴머니즘이다. 즉 자기 나라가 정의를 수호하는 휴머니즘의 입장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진 휴머니즘인 것이다. 그것이 착각인 이유는 현실에서는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가장 전쟁을 많이 일으켰고, 다른 나라를 가장 많이 침공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침략과 전쟁을 달고 사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 무슨 휴머니즘이 있겠는가? 그래도 헐리우드 영화는 미국을 정의 즉 휴머니즘으로 묘사한다. 대중들은 착각해서 미국이 진짜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애국적 휴머니즘의 진정한 실체이고, [주몽]과 [대조영]에 열광하는 한국 대중들의 내재된 폭력적 휴머니즘인 것이다. 그것은 휴머니즘으로 가장된 호전적 애국주의이며, 이런 호전적 애국주의를 선동하는 매체가 대중문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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