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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 판다를 위하여 ]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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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다를 위하여 ]
이진숙 시집 / 나무아래서시인선 007 / 나무 아래서(2011.11.2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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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를 위하여
이진숙
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구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월은
이제 겨우 판다로 돌아와
조릿대 숲의 은밀한 향내를 맡는다
먹이를 먹는 데에만 삶의 대부분을 바친다는
오명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리하여 멸종될지도 모른다는 위협도
아직 살아 있다
아직……
우리는 모두 살아 있다
먹이에 열광했던 시간에도
사라진 먹이에 두려움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지난 세월 먹이에 들떴던 칭하이의 숲은 이제 앙상하다
그러나, 건넛산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무성한 대숲을 꿈꾸지는 않으리라
그곳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을 뿐
나는 그저 이곳에 존재하여 그곳은 그곳으로 남겨 두리라
개미를 위하여
이진숙
보도블록 갈라진 틈새로
개미들이 어디 이사라도 하는지,
그들을 방해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피하다 보니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오오,
세상을 바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라고?
편지
이진숙
푸드드득
참새 떼 날아오르고
마당 귀 펄럭이듯
날아오르고
…………………
남겨진 낟알 몇 톨
숨죽인
내 슬픔
수업 중에
이진숙
한낮 무거운 적막을 뚫고
벌레 한 마리
칠판 위를 기어오른다
이제 무대의 주인은 그나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흥겨워하며
환호를 보내고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기만 하는 나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벌레로부터 비켜서서
물끄러미 벌레를 바라다보는 일
그래서 벌레와 나와 둘 중에서
삶 가벼운 자의 우주를 돌려놓아줄 때
그저 고개 끄덕이는 일뿐
즐겨찾기
이진숙
늘 예문에 불과했어요
나의 생애는
사진첩에서 툭 떨어져 나오는
한 장의 사진처럼
늘 예문에 불과했어요
나의 사랑은
창문도 열지 않은 그대의
높은 아파트 베란다를 올려다보는
짙은 어둠 속
잔잔한 실루엣
한 여인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베어두었듯이
오늘은
이 어둠의 자료화면을 당신이 오려주세요
배꽃이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여인
안타까이 꿈의 조각 붙들었듯이
오늘은
이 추억의 조각들
당신의 클립보드에 붙여주세요
흠뻑 젖은 얼굴로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다가
문득 허무해질 한 순간을 위하여
그 날을 위하여
당신의 즐겨찾기에
나를 추가해주세요
사진관에서 웃다
이진숙
냉철하게
서로의 약점을 노려야 해
투명한 응시와 투명한 낯가림이 부딪치고
멈출 수 없는 웃음과 멈출 수 없는 분노가 부딪치고
……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를 길들이는 일
그것도 네가?
여기 3×4로
차디찬 웃음의 끝에 매달린 허무를 분만하는
너와 나의 결투가 있다
나는 웃는다
신발을 신으며
이진숙
현관을 나설 때마다
꼭 한 번은 몸 기우뚱거린다
신발을 제대로 꿰지 못한다
신발을 꿰어 신고 밖으로 나아가
바람 앞의 나무로 사는 것이
내 운명인데
운명은
그토록 더디게 익숙해지는 것일까
기우뚱거리며 생을 가늠해 보는
이 아침의 의식
바람 앞에 나무로 서는 연습
나는 지금 숙성되고 있다
이진숙
기포를 일으키며 고통을 부풀리고 있는
밀가루 반죽을 보며
썩고 썩어 문드러져 곰삭아져야
비로소 맛다운 맛을 낸다던
남도의 젓갈을 떠 올린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픔만의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될 때에만
비로소 한 생명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머니들 이야기를 떠 올린다
나는 지금 숙성되고 있는 것인가
남도의 젓갈처럼
고통으로 부글거리는 밀가루 반죽처럼
어머니의 진통처럼
빈집
이진숙
울타리 너머
너울너울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집게에 매달려 떨고 있는
하얀 보자가 아니다
실에 꿰인 채
핑, 돌아 보이는
호박고지도 아니다
부서지는 햇살에
잘 닦인
고즈넉한 마루
마루 위를 스쳐 빈집에
회오리치는
네
엷은 미소 한 잎 뿐
벽
이진숙
투명한 거울 뒤
반짝이는 차단遮斷의
벽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입김 한 오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당신 심중心中은
나의 벽에 반사되어
당신의 거울에 비칠 테지요
나는 당신을 차단하는
벽이 되고 싶어요
개살구가 하는 말
이진숙
시시덕거리다 지쳐
보도를 걷다
툭
머리를 울리는 굉음을 듣는다
나쁜 지지배
못된 지지배
여시 같은 지지배
꿍얼거리다
개살구에
한 대 얻어맞던 그 때처럼
퍼뜩 정신 들어
하늘 보니
깔깔거리는 개살구들
하루가 일 년 같이
시간 마디던
그 때
그립냐고
풍장
이진숙
추석 제사 모시러
고향 다녀 온 사이
경안천 물 끓어 넘쳤다
손가락 마디만큼도 안 되는
수많은 흰 물고기들
꽃 잎 날리듯
그렇게
도로에 몸을 늘이고 누웠다
누구의 죄를 빌어야 하기에
이리도 많은 몸을 빌어야 하는 것일까
바람결에
소슬히 몸 말리며
반짝이는 우리들의 주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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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自序
첫 시집을 낸지 십 년여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묶는다
침묵은 길었지만 단 하루도 내가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강물처럼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또 세원을 기다리며 시를 쓸 것이다
2011년 가을 깊은 날
이 진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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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詩集 [ 판다를 위하여 ]
[ 이진숙의 시 ] - 시집해설
완전한 고독으로 가는 길
전 기 철
시인. 숭의여대 교수
1
시인 이진숙의 작품들을 읽다 보니 “고독 속으로 도망가라”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난다. 고독한 천재로 살았던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살 충동을 견디지 못해 평생을 고통스러워했다. 고독한 철학자 비투겐슈타인 못지않게 시인은 고독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다. 시인에게 고독은 운명이며 본질이다. 이는 아마도 대상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탐구 자체가 존재적 고독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물과 소통하고 교감하게 하는 촉수이자 감각으로서, 재앙이며 동시에 축복으로서, 충일된 내적 공간으로서, 고독은 시의 존재론적 가치이다. 어쩌면 언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적막감에서 고독은 오는지도 모른다. 고독이 주체적이라면 적막은 그 환경이다. 언어는 적막을 통해서 고독을 끌어온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을 사물로서의 언어로 통합하는 게 적막이다. 그만큼 적막은 선적禪的 의미로서의 화엄 세계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적멸로의 완성에 이르는 길목에 적막이 있다.
시인 이진숙의 시적 상상력 역시 적막이라는 뿌리에서 피워 올린 꽃송이다. 이진숙은 내면의 적막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적막은 그가 사물과 교감하는 통로이며, 사물을 자기 안으로 들여놓는 자리이며, 동시에 시적 열정과 삶의 치열성을 끌고 나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의 적막은 우주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모든 존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가장 고요한 곳이기도 하다.
쓰르라미는
포플러 나무 하나 매달고
땡볕 속 적막을 저울질하고 있다
모든 다른 나무들 다 숨죽이고
수천 수억 만 번 부딪치고 부서져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뒤섞이어 돌아온
파도의
그 파도의 알갱이 하나가
날아올라와
쓰르라미의 저울눈을
흔들어놓는다
-「쓰르라미는 저울눈 위에서 떨고 있다」부분
시의 화자가 있는 공간은 팽팽히 부풀어 오른 땡볕과 포플러 나무와 한 마리의 쓰르라미가 대치하는 긴장감이 서린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터질 듯한 적막이 느껴진다. 지금 화자도 사물도 적막의 무게를 재고 있는 중이다. 이진숙 시인에게 적막은 우울한 정조가 아니라 관세음觀世音으로서 사물과 세상의 소리를 듣는 태도이다. 따라서 지금 적막을 저울질하고 있는 쓰르라미는 시인 이진숙이 사물에 몰입하고 있는 내면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하여 쓰르라미의 저울눈에 내려앉는 ‘파도의 알갱이 하나’를 귀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적막이 뽑아 올린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망망대해 숱한 파도의 너울은 격정과 변화의 세계이며 혼돈의 세상이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을 거치고 통과하여 단단히 여문 고요의 씨앗처럼 파도 알갱이 하나가 적막의 대지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동엽 시인은 그의「시인 정신론」에서 원수성原數性세계, 차수성次數性세계, 귀수성歸數性세계를 말한 바 있다. 잔잔한 해변을 원수성의 세계라 한다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차수성의 세계이고, 다시 물결이 숨어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귀수성의 세계라고 했다. 파도들이 ‘수천 수억만 번 부딪치고 부서져’야 했던 바다는 바로 차수성의 세계이다. 그곳은 변화무쌍한 만상들이 있고 온갖 갈등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무성한 잎과 꽃을 피워 올린 나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도 차수성의 세계다. 그러나 우주와 자연의 순환 속에서 모든 존재는 귀수성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진숙 시인에게 적막은 차수성의 세계를 거친 사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귀수성의 공간이다. 이러한 특징은 시인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자세에서 드러난다.
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모든 것이 사라진
비어있음이 눈부셔
고개 숙인 채
나도 하얗게 눈이 된다
어디만큼이나 온 것일까
가늠할 수도 없는 포근함이
서러워
왈칵 눈물 쏟아지는
스쳐 가는 바람이여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속에 부러지는
나의 가지들,
툭툭
눈 터지는 소리, 소리
들릴 뿐
-「暴雪」부분
폭설은 세상을 보자기로 싸서 치워버리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순간 익숙해졌던 세계는 사라지고 지상의 길들도 모두 지워진다. 이 때 세상이 덧입힌 것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원초적인 세계 속에 내던져졌을 때 “몽상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누가 말하는 것인가, 그인가, 세계인가?”라고 했던 바슐라르의 말처럼 화자 역시 ‘나도 하얗게 눈이 된’ 물아일체가 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적막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이 화자에게는 눈부신 일이고 가늠할 수도 없는 포근함으로 와 닿는다. 적막이 빚어 낸 우주의 요람 속에서 만상은 아기처럼 부드러워진다. 화자 역시 그렇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말랑말랑한 마음은 세상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존재를 본래적 자아로 회복하게 해 준다. ‘모든 것이 사라진’ 적막이야말로 오롯이 자신과 대면하는 공간이다. 온전한 자아를 만나는 이 지점이야말로 귀수성의 세계이며 존재 자체로 충일하고 충만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란, 혹은 시의 언어란 바로 이 귀수성의 세계이다.
인간에게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쾌락이 존재할까? 그중의 으뜸은 비워냄과 홀가분함의 상태가 주는 쾌락일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적막의 시간이다. 적막은 존재에게 회복과 치유의 힘을 생성시키는 내적 공간이며, 타인과 사물에게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의 자리이다. 또한 그것은 치장에 가려진 사물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 응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진숙 시인은 자신이 획득한 적막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공간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어디 자신만의 불행을 가져 오겠는가. 세상의 황폐화와 폭력성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돌보지 않는 사람은 타인이나 다른 생명도 돌볼 수 없다.
한낮 무거운 적막을 뚫고
벌레 한 마리
칠판 위를 기어오른다
이제 무대의 주인은 그다
…(중략)…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벌레로부터 비켜서서
물끄러미 벌레와 바라다보는 일
그래서 벌레와 나와 둘 중에서
삶 가벼운 자의 우주를 돌려놓아 줄 때
그저 고개 끄덕이는 일 뿐
-「수업 중에」부분
벌레 한 마리에 수십 개의 눈동자가 몰려있을 교실의 장면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수업을 중단하고 그 벌레를 지켜보는 선생님이 있다. 지금 칠판 위를 기어오르고 있는 벌레의 마음은 길 찾기에 필사적일 것이다. 화자는 ‘벌레로부터 비켜서서’ 바라 보는 일이 자신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방관적인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최선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매사에 조급하다. 섣불리 간섭하고 독단하려고 든다.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기에 벌레가 자신의 길을 열어가도록 적막의 시간을 물끄러미 기다려주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온전한 자리로 돌려놓아 주는 일이다. 이진숙 시인이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우주적인 적막 한 자리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생명이나 작은 것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배려로도 나타난다.
보도블럭 갈라진 틈새로
개미들이 어디 이사라도 하는지,
그들을 방해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피하다 보니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오오,
세상을 바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라고?
-「개미를 위하여」전문
개미들을 위해 걸음걸이를 비틀거리는 화자를 보니 고려의 문인 이규보가 쓴 <슬견설蝨犬說>이 생각난다. 개의 죽음과 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이규보를 찾아온 객이 개와 이의 죽음이 같을 수 없다고 하자, 이규보는 모든 생명이 살고자 하는 마음은 외형의 크기에 상관없이 같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생명의 소중함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생명의 무게는 본질적으로 같다. 코끼리의 몸무게와 개미의 몸무게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지라도 우주의 저울눈금에서 본다면 존재와 생명의 무게는 똑같을 것이다. 화자가 개미들의 생명을 위해 비틀거리는 걸음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생명과 삶이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직선에 길들여졌고 작은 것들은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의 삶이 춤이 되려면 비틀거려야 한다. 직선의 길을 거부하고 몸과 마음과 길이 구불구불 흘러가야 한다. 이진숙 시인이 개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걸을 수 있기에, “채송화 꽃 숭어리들/ 모여 낄낄 거리고”(「소낙비 속에」)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오직/ 쓸쓸한 들녘에/ 홀로 남은 어머니”(「간이역」) 같은 존재들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2
적막이 적멸로의 가치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갈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적막이 적멸이 되기 위해서는 눈 내리고 비 오는 과정을 모두 겪은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어쩌면 적막이라는 고요를 내포한 완전한 고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서의 치열성이 또 다른 적막의 얼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 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 진흙 밭을 뒹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진흙탕 속의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적막조차도 ‘길어 올린 강물로 식혀야만 하는 끓어오른는 ’것이 된다. 이진숙 시인에게 이런 갈등과 번민은 완전한 고독으로 가는 과정이다.
얼음판이 아니어도 좋다
쉽게 미치고 마는
사춘기처럼
질펀한 흙 위를
서툴게 돌다가
돌다가
진흙탕 위에 쓰러져도 좋다
…(중략)………
맞고 터지고 피 흘려도 좋다
땅 위에 쓰러져 눅진히 젖어도 좋다
나는 너의 팽이가 되고 싶다
-「팽이」부분
쓰러질 때까지 돌아야만 하는 팽이의 속성을 보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채찍을 맞아야만 하는게 팽이의 운명이다.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처럼 말이다. 무거운 바위를 밀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지만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시지프는 다시 바위를 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만 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만 한다. 팽이는 가혹한 시지프의 운명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화자는 기꺼이 팽이가 되어 살고자 한다. 그곳이 ‘질펀한 흙 위’일지라도 상관없다. 피 흘리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미쳐버린 무희처럼 춤추고 싶은 열정이 그가 시를 쓰는 동력일 것인가. 시인은 “맹렬하게 끓어 오르는 주전자/ 뚜껑처럼 박차고 나가고 싶을/ 때”(「달개비」)가 되기도 한다. 또한 “솟아오르는 / 꽃잎 같은 숨 다하여/누구에게 가 닿을/마지막 편지를/쓰고 있는”(「어항」) 물고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치열성은 타성에 가차 없는 질책을 던지기도 한다.
오늘 내가 버리지 못한 것은
한 장의 낡은 팬티만은 아니다
십원어치도 안 되는
타성의 노예가 되어 돌아와
내몸을 감싸는
진부한 신념
그 슬픈 기다림을 꾸짖고 있는 중이다
-「내가 버리지 못한 것」부분
신념은 진부하고, 그것은 다시 슬픈 기다림이 된다. 황소처럼 고집이 센 타성이라는 인간의 삶은 본래적인 자아라는 고향이 갖는 진리에 비하여 정말 보잘것없다. 그리하여 다시 귀향에 대한, 다시 말하면 본래적 자아로의 귀향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더 쌓이게 된다. 이는「겨울 가로수」에 오면 더욱 처연하게 나타난다. 세속에서 부질없이 느끼는 욕망 덩어리들이 무참하게 흩어지는 모습을 빈 거리에서 지켜본다. 무상無常에 대한 깨달음은 벌판과 비움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면서 본래적 존재로의 지향을 꿈꾼다.
햇볕 바래기가 되어
졸고 있는
내 세포들이나 꾸짖는 이 비겁함
차라리 선명한 아픔을 꿈꾸기로 하자
혹한의 벌판 위로
참혹하게 흩어져 나뒹구는 내 뼈의 살과
머리카락들
빈 거리에 홀로 서서
오랫동안 슬프게 지켜보기로 하자
-「겨울 가로수」부분
시인은 “차라리 선명한 아픔을 꿈꾸기로” 한다. 삶이란 비겁함의 연속이며, 참혹함의 연속이다. 적막 속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이 비겁함이나 참혹함은 나라고 하는 근원적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구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월은,
이제 겨우 판다로 돌아와
조릿대 숲의 은밀한 향내를 맡는다
먹이를 먹는 데에만 삶의 대부분을 바친다는
오명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리하여 멸종될지도 모른다는 위협도
아직 살아 있다
-「판다를 위하여」부분
곰이었을 수도 있고 너구리였을 수도 있는 삶, 다시 말하면 내가 아닌 여러 형태로 살아왔던 지난 삶에서 돌아와 본향本鄕으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먹이 활동이나 하고 있거나 멸종에 대한 위협에 시달린다.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황소가 집 앞에서도 집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남도의 젓갈처럼/ 고통으로 부글거리는 밀가루 반죽처럼”(「나는 지금 숙성되고 있다」) 비유하기도 한다. 화자에게 이 고통의 통과의례가 ‘곰삭고 문드러져’ 제 맛을 내는 젓갈이 되고 제대로 부풀어야 향기롭고 부드러운 빵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3.
이진숙 시인에게 적멸이라는 완전한 고독에 이르기 위한 적막의 길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만은 보여주고 있다. 심우도尋牛圖에 비견할 수 있는 이진숙의 시의 여정은 자아의 존재론적 성찰을 통한 삶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 이때 서늘하면서도 정감 있는 서정이 저절로 피어오른다. 산은 저 홀로 울고, 시인은 뜻 없이 가을 산을 걷지만 어떤 거스름도 없다.
다람쥐 한 마리 걸음하지 않고
햇빛조차 몸은 낮춘
허허로운 산골짜기
…(중략)…
너는 들을 수 있느냐
발걸음 돌려
마을로 내려올 즈음
모두가 두고 간 마음들 모두어
고요히 타오르는
가을 산의 울음소리를
-「가을 산」부분
타오르는 가을 산이 운다. 가을 산에 발자국을 냈던 만상의 흔적들, 만상의 마음들을 하나로 빚어 울음은 음악이 된다. 또한 가을 산의 울음소리는 시인의 내면에서 울리는 공명이다. 모든 발자국들도 받아들였으나 떠나버린 텅 빈 자리, 그 허허로움으로 울음소리 같은 가락을 뽑아내는 심금心琴이다. 이는 이진숙 시인이 ‘구름의 고독과 내통하고’ ‘야생의 삶을 뒤적거리며 찬란한 반역을’ 꿈꾼 후에 나타난 적막이며, 깨달음이며, 존재로서의 시이다. 여기에 그의 가능성이 있다.
이진숙 시인은 완전한 고독으로 가는 적막의 형상화를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완전한 고독을 이루기 위해서 좀 더 치열한 언어적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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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요즘의 시가 산문과 다를 바 없는 것은 시인이 어휘를 남용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어휘를 남용하는 것은 표현에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숙 시인은 아끼는 어휘를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시행이 되거나, 그것이 그대로 한 연을 이루는 시편들이 많다. 언어 예술가인 시인이 어휘의 가치를 알고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이진숙의 시는 거창한 주장이나 그럴싸한 의미의 옹호를 위해 동원되지 않는다. 시가 세계를 향한 애정의 고백이라는 것, 시인은 웅변가가 아니라 가객이라는 것을 조용히 설파한다. 이 시인의 서정적 자아는 사소하고 작은 것을 품기 위하여 항시 눈을 뜨고 있다. ‘간이역’, ‘빈집’ 어릴 적 동무 ‘김순자’와 순자네 엄마, 더러 잊어버린 고향의 말처럼 하마 잊힐 것도 같은 자신의 존재감, 시인은 이런 것들과 쉬지 않고 교신한다.
― 이향아(시인. 호남대 명예교수)
시인에게 고독은 운명이며 본질이다. 이는 아마도 대상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탐구 그 자체가 존재적 고독이기 때문이다. 사물과 소통하고 교감하게 하는 촉수이자 감각으로서, 재앙이며 동시에 축복으로서, 충일된 내적 공간으로서 고독은 시의 존재론적 가치이다. 어쩌면 언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적막감에서 고독은 오는지도 모른다. 고독이 주체적이라면 적막은 그 환경이다. 언어는 적막을 통해서 고독을 끌어온다.(…중략…)
시인 이진숙의 시적 상상력 역시 적막이라는 뿌리에서 피워 올린 꽃송이다. 이진숙은 내면의 적막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적막은 그가 사물과 교감하는 통로이며, 사물을 자기 안으로 들여놓는 자리이며, 동시에 시적 열정과 삶의 치열성을 끌고 나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의 적막은 우주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자 모든 존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가장 고요한 곳이기도 하다.
― 전지철(시인.숭의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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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시인∥
∙ 1955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 아주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 1993년 월간《문학사상》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하였으며,
∙ 시집으로는 『원숭이는 날마다 나무에서 떨어진다』가 있다.
∙ 현재 고등학교 교사이기도 한 그는「석전동인」「기픈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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