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에 추억을 묻고– 장흥답사
박경훈
2011년 3월 20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흔적』 창간호 출판 기념을 겸한 올 첫 답사인데다 버스 두 대를 대절해 놓은 상태여서 못난 총무의 머릿속에는 온갖 방정맞은 생각이 다 든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사이 회색의 여명이 눈까풀을 스쳐 지났는데도 비는 줄줄 장맛비처럼 내리고 있다. 마치 초등학교 때 비오는 날의 소풍날 아침처럼 어리둥절해서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도 가느냐.”는 회원들의 전화가 세수할 틈도 주지 않고 빗발친다. “태풍이 오지 않는 한 갑니다.” 녹음기처럼 대답은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답답하기만 하다. 작년 땅끝마을, 보길도 답사 때 쓰고 남은 우장과 새로 산 비닐 우의 두 뭉치를 챙겨서 어린이 화관 앞으로 달렸다. 생각과는 달리 예약한 회원들이 다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승우 회장님도 무척 걱정을 하셨는지 반가운 얼굴들과 잡은 손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비오는 날의 나들이, 무거운 침묵이 흐를 것만 같았는데 차안은 온통 웃음꽃으로 화기애애하다.
마이크를 잡은 김재원 원장님은 결석자 한 명 없이 참석한 것에 신이 났는지 지금 비가 이렇게 내리지만 장흥에 도착해서 답사가 시작되면 햇빛이 쨍쨍 날거라고 장담을 한다. 하기는 ‘날씨가 맑아지기를 바라는 화원들의 뜨거운 염원이 있는 한 이란’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일기예보에 전라도 남해안 지방에는 하루 종일 큰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무얼 믿고 큰소리치시는지...
지금 가는 장흥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새마을사업이 시행되지 않을 정도로 오지이어서 전라도다운 정서가 가장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교통이 아주 불편한데다 특별히 이름난 것이 없기 때문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낮선 이름일 뿐이다.
땅이라는 것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잘난 사람을 만나면 팔자가 바뀌는 모양이다. 백제 때나 통일신라시대에는 보성군과 영암군에 소속된 자그만 촌락에 불과했던 장흥이 고려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 임씨가 지금의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다는 인연으로 일약 장흥부로 승격을 했으니 말이다.
텅 빈 도로를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속력을 줄인다. 잘 닦여진 국도를 버리고 구절양장 같은 탐진강을 거슬러 오르기 때문이다. 섬진강, 영산강과 더불어 전라도 3대강이라는 탐진강은 은어와 천연기념물인 무태장어가 사는 맑은 물로 이름이 났었는데, 지금은 탐욕스런 인간의 손길에 닿아 무태장어는 자취를 감추고, 은어도 돌아오지 않는 만신창이 강이 되어 버렸다.
탐진강을 휘돌고 감돌아 가는 길은 마치 고향 길 같이 정겹기만 하다. 처절한 삶의 현장에 던져진 탓으로 평소엔 고향을 잊고 지내지만 이런 정경을 보면 불현 듯 버들피리 불고 송사리 쫓던 고향이 그리워진다. 생각하면 고향은 내 생명의 근원이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고, 뽑아내려 해도 뽑히지 않고, 부수려 해도 부서지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늘 삶에 지친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토닥거려준다.
보림사
4시간을 달린 끝에 목적지인 보림사에 닿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우의를 달라고 하지 않을 만큼 날씨가 맑아지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일주문이다.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든다. 원장님 말에 의하면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차장 일대는 울울창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영 아니올시다. 숲을 까뭉개서 주차장으로 만들어 놨으니 고즈넉한 고찰의 분위기는 싹 사라지고 천박한 도시풍물이 어정쩡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보림사는 이름에서부터 바로 남종선에 맥을 대고 있는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이름이 바로 중국의 선종 6조 혜능이 북종의 신수 스님에게 쫓겨 광동성 소주 조계산에서 은거한 절 보림사와 같기 때문이다. 이 절은 통일신라 말기에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들어온 선종 중 가장 먼저 도입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종찰이었다. 교종 중심으로 발전해온 신라 불교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깨우친다.’(不立文字 直指人心)는 혁신적인 종지와 체제로 도입된 선종은 재향세력과 지방민들의 지원 속에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한다. 이 가운데 보림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은 고려시대까지 번성을 누렸던 선종의 대표적 산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절은 최초로 남종선(南宗禪)을 도입한 도의(道儀)의 제자인 염거(廉巨)의 법맥을 이은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선사가 860년(신라 헌안왕 4)에 창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보조선사 비문과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신라국가지산보림사사적(新羅國迦智山寶林寺事蹟)에 의하면 체징보다 100여 년 전의 사람인 원표 (元表)스님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원표스님이 법력으로써 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으므로 759(경덕왕 18)년 왕이 특별히 명하여 절에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워 주었다는 것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그때 세웠다는 장생표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의 경계표시이었는데, 아깝게도 6,25 때 사찰의 중요 건물들과 함께 화마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체징선사가 이곳에 선문을 개설하자 문도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었는데, 그가 입적할 때인 880(헌강왕 6)년에는 800 여명의 제자들이 머무는 거찰이 되어 있었다. 보조선사가 입적한 3년 뒤인 883년 문인들의 요청에 의해 헌강왕이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사로 하라는 교지를 내리게 된 것이다.
보조선사의 입적 후 고려시대까지 보림사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사세는 여전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불교가 핍박받았던 조선시대에도 보림사의 향화는 꺼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성종과 숙종 때 두 탑이 수리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시대에 들어와서 보림사는 창건 이후 최대의 피해를 입는다.
1950년 늦가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퇴로가 차단된 전라남도 8개 군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과 공비들은 가지산으로 몰려들어 보림사에서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인 1951년 3월11일 아침 8시 국군과 경찰로 조직된 토벌군이 몰려오자 인민군과 공비들은 보림사를 불 지르고 달아났다 한다. 이날 오후 3시 보림사를 불태운 공비 680명은 국사봉 아래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다고 한다. 인과응보가 즉시에 일어난 것이다. 한겨울을 잘 지내게 한 사찰의 은혜를 하필이면 불로써 갚으려 했을까? 한갓 권력욕에 혈안 된 정치모리배들이 내세운 이념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천년고찰을 불 지르는 것이 무슨 영웅이나 된 듯이 날뛰었을 가엾은 군상들이 뇌리를 스친다. 이처럼 민초들은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 하면서도 힘 있는 자의 괴뢰가 되어 엉뚱한 곳에서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민중들의 속성을 이용하려는 지도자들이 나타나는 한 지상의 평화는 요원할 것이다.
보림사 일주문, 천왕문
일주문, 천왕문, 영각만 남기고 불타버린 절터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절은 폐사위기에 처했었는데 1980년대 도지사의 후원으로 중창불사가 원만히 이루어 졌다 한다. 당시 김종호 전남도지사는 6.25 때 중위로 공비토벌에 참전했다가 공비들의 매복에 걸려 중상을 입고 사경에 빠졌었는데 어떤 스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인연이 있어 보림사 중건을 후원해 주었다는 것이다.
일주문 앞에 서니 빗속에 갇혔던 안개가 햇빛을 만나 대적광전 뒤쪽 가지산 계곡을 타고 빠르게 올라간다. 가슴을 누르던 먹구름도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아 개운하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협소한 골짜기에서 만난 일주문, 첫인상이 만만치 않다. 장중한 팔작지붕에 중첩된 포작이 화려하다. 정면에는 ‘가지산보림사’라고 세로 두 줄로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뒤쪽에는 ‘선종대가람’ ‘옹호문’이란 현판이 또 걸려 있다. 현판 끝에 옹정 4년이란 연대가 명기된 것으로 봐서 영조 2년(1726)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일주문 양 기둥 위에는 청룡과 백룡이 조각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는 용들이 사는 용소이었는데 보조선사 체징이 절을 지으려고 못을 메울 때 안 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쳐서 쫓아냈는데 이때 백룡은 승천을 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죽었다. 그 죽은 곳이 장평면 청룡리이고 그 뒷산이 용두산이란다. 그래서 승천한 백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고 죽은 청룡은 여의주도 없이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 있다. 이것은 용신을 믿는 토속 신앙의 무리들을 국가의 지원을 받는 불교가 쫓아내고 절을 지었다는 반증이라고 원장님은 설명하셨다.
박석으로 포장된 길을 몇 발자국 걸어가니 사천문이 나왔다. 일반 절의 천왕문이다. 중종34년(1539)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인데, 가운데 칸은 출입로로 이용하고 좌우 칸은 나무로 만든 사천왕과 금강역사상을 모셔 놨다. 사천왕상 등에는 구멍이 나 있어 복장물이 도난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1971년과 1995년 보수공사 때 조선시대 국어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월인석보』제17권을 포함해서 250여권의 희귀본들이 쏟아져 나왔다. 만약에 사천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을 만들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이 된다고 한다.
쌍 삼층 석탑
사천문을 지나면 보림사의 중심구역이 된다. 안개 걷힌 마당에 불국사 석가탑을 닮은 석탑 두 기가 우뚝 서 있다. 비에 씻긴 햇살이 탑신에 부딪쳐 흩어지니 더욱 신비롭다. 시중에는 이 탑이 보림사 남북 탑으로 소개되어 있는 책이 많은데, 잘못된 명칭이라고 원장님이 설명하신다. 동서 탑으로 불러야 된다는 것이다.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의 좌향이 정남북 방향이 아니라 동남향에 가깝기 때문에 이 탑 역시 불상과 같은 방향으로 서 있는 것이다. 절대 향으로만 본다면 남북으로 놓여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전통은 상대 향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동서 탑이라고 불러야 맞는다는 것이다. 남북 탑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35년 탑을 복원하고 나서 경성제대 등전량책(藤田亮策)이라는 일본인 교수가 ‘보림사 남북 양 탑’이라고 소개한 것을 뒤 사람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베껴 쓴 결과가 빚어낸 오류가 시정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탑 역시 여느 사찰의 탑과 마찬가지로 모진 시대의 시련을 겪었다. 1933년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도둑질하려고 탑을 무너뜨렸으나 다행히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듬해에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초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이 탑의 건립과 보수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탑지가 나왔다. 탑지에는 이 두 탑은 870(경문왕 10)년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서원부(지금의 충주)소윤 김수종에게 칙명을 내려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810(진성여왕 5)년에는 왕명으로 내궁 소장의 사리 7과가 봉안되고, 조선시대인 1478(성종 9)년에는 두 탑이 기울어져 도인 원식이 대화주가 되어 크게 중수하였다. 이어서 1535(중종 30)년과 1684(숙종 10)년에도 보수되었음이 원래의 탑지에 덧붙여서 기록되어 있다. 보림사 탑은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또 원래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다른 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안에는 선문 종찰을 상징하는 높이273.5cm의 철로 된 비로자나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거대한 불상의 규모에 비해 불단이 낮고 건물이 너무 왜소하고 초라하다. 1968년에 재건된 이 건물이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잘 대변해 주고는 있지만 불상의 진면목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불상에 걸 맞는 전각이 아쉽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가 없어졌지만 보조선사 당시에 조성 봉안된 불상으로 불신은 완벽하다.
전체적으로는 허리가 길고 무릎 폭이 넓어 정삼각형에 가까운 이등변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있다. 건장한 모습에 당당한 체구로 활달한 무장의 기풍을 연상시키고 있는 이 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왕경(경주지방)지역의 작품들과는 대조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큼직한 육계에 흙으로 덧붙인 나발이 불신에 비해 커 보인다. 기다란 얼굴에 이마는 좁고 얼굴은 살쪘다. 치켜 올라간 눈, 편평한 콧마루 선, 사다리꼴로 두드러진 인중에 두툼한 입술, 빨려 들어간 볼 등의 굳은 표정에서 긴장감이 역력하지만 전체적으로 서민적인 친밀감이 느껴진다. 큰 귀는 턱 밑에까지 닿았는데 귓불이 마치 녹아내리는 고드름처럼 힘없이 늘어져 형식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좁은 어깨를 덮고 밋밋한 가슴을 드러내면서 V자형으로 가슴에 모아진 옷자락은 다시 두 팔에 걸쳐져 무릎을 덮으면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사실성이 떨어지고 있다. 양 섶을 풀어 헤친 것 같은 겉옷과는 달리 젖가슴까지 끌어 올려 조여 맨 듯한, 군의의 매무새는 호방함 속의 절제라고나 할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智拳印)을 맺고 있다. 지권인은 말아 쥔 오른손 안으로 왼손의 검지를 밀어 넣어 오른손 엄지와 맞닿게 한 수인으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가르침을 뜻한다. 지권인을 짓고 있는 두 손은 불신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비례가 맞지 않고 있다.
이불상은 왼팔 뒷면에 조성에 대한 명문이 있다. 명문이 있는 불상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인데 해석하면 이렇다
“불상이 완성된 것은 석가여래가 입멸한 뒤 1808년 되는 해로, 이때는 정왕이 즉위한지 3년 되는 해다. 대중 12년(858) 무인 7월 17일에 무주 장사의 부관이던 김수종이 불상 만들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는데, 정왕(헌안왕)이 8월 22일에 만들도록 허락하니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런데 보조선사창성탑비문에는 ‘장사(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부수 김언경이 선제 14년 즉 헌안왕 4(860)년 중춘(仲春)에 녹봉을 떼 내고 사재를 털어 철 2천5백 근을 사서 노사나불 한 구를 주성하여 선사가 거주하는 범우를 장엄하였다’고 하였다.
거의 동시대에 새겨진 두 기록이 다르게 적혀 있다. 858년에 김수종이 주성하였다는 불상의 명문과 860년에 김언경이 조성하였다는 비문의 기록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종과 김언경이 동일인이라는 설과 김언경이 불상조성의 공덕을 독차지하려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이 설명이 귀에 설지 않은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 해당화 붉게 핀 서해 갯벌에서 짚불에 구운 풍천 장어를 포식했던 고창 답사 때의 일이 생각난다. 해 저무는 무장읍성 객사 앞 돌계단에서 원장님이 ‘무장’의 역사를 설명하시면서 보림사 얘기도 곁들였었는데 그때 황토에 비치는 석양빛이 너무 곱고 부드러워서 지금까지 잊혀 지지가 않는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과 비
대적광전을 나와 동쪽 언덕으로 오르면 잘 가꿔진 잔디 밭 위에 보조선사 부도와 비가 서 있다.
부도는 높이 4.1m의 거대한 규모로 보림사의 개산조인 보조선사체징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보조선사가 입적한 후 비와 함께 884(헌강왕10)년에 세워진 8각 원당형이다. 하대석은 파손이 매우 심하다, 남은 형태로 보아 아랫단에는 안상 위단에는 사자상이 부조 되었는데, 조각상을 정으로 쪼아 떼어 가버려 세부적인 것은 알 수가 없다. 탑신석의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고 우주 위에는 주두받침이 있어 목조 건물의 모양새를 본떴음을 알 수 있다. 탑신 전후 면에는 문이 있고 문안에는 도깨비 얼굴이 양각된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가 조각되어 있다. 문의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화려한 갑옷에 옷자락과 매듭이 정교하고 섬세하다. 이 부도는 대석에 비해 탑신이 크고 옥개가 빈약하여 전체적으로 비례가 어긋나 있다. 9세기 말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국운을 보는 느낌이 든다.
보조선사창성탑과 함께 세워진 3.46m의 비석은 귀부, 비신, 이수가 온전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귀부의 머리는 용두로 눈을 활짝 열지 않은 채 위로 뜨고 있어서 얼굴이 찌푸린 인상이다. 쳐들린 콧구멍에서 수염이 돋아 나오고 입 옆에 갈기가 붙고 여의주를 입속에 감춘 듯 아주 엄한 상이다. 쌍봉사 철감선사 탑비의 귀부처럼 곧추세운 목 앞 한가운데로 가로 비늘이 박혀있고, 덩치에 비해 작은 네 발에는 4 개의 발가락이 있다. 등에는 겹으로 6각의 귀갑이 정연하게 조식되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신 받침대는 측면에 구름, 윗면에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비신 위의 이수 중앙에는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란 제액이 있고 앙 옆으로는 구름 속에 뒤엉긴 용의 모습이 깔끔하게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김영이 짓고 글씨는 첫줄에서 일곱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구양순체로 썼고 그 이하는 김언경이 저수량체로 썼다.
비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보조선사 체징은 웅진(지금의 공주)출신으로 속성은 김씨, 어릴 때 출가하여 화산 권법사한테서 경전을 배웠다. 827(흥덕왕 2)년에 가량협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억성사에 머물며 도의의 법을 이어받아 스승의 가르침을 펴고 있던 염거를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837(희강왕 2)년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선지식들을 만났으나 모두 스승 염거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어 2년 만에 되돌아 왔다. 귀국 후 무주의 황학난야에 주석할 때 헌안왕이 장사부수 김언경을 보내 궁중으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해 겨울 다시 왕은 승정 연훈법사와 사신을 보내 스님을 가지산사로 옮겨 거처하게 하였다. 이 산은 원래 원표대덕이 머물렀던 곳이다. 860년 김언경이 스님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녹봉과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조성하여 스님이 거처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그러자 헌안왕도 망수댁과 이남댁 등 금입택에 명하여 금과 곡식을 내게 하여 절을 장엄하게 하고 사찰을 선교성에 예속시켰다. 861(경문왕 1)에 여러 곳에서 시주한 재물로 절을 넓히고 그 낙성 일에 스님이 이르니 바야흐로 암수 무지개가 법당 안으로 들어오는 상서가 있었다.
880(헌강왕 6)년 4월 13일에 세속 나이 77세, 법랍 52세로 스님이 입적하였다. 제자에는 영혜, 청환 등 800여 명이 있었으며 883년에 문인 의거 등이 스님의 행장을 엮어 왕경에 나아가 비를 세울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유사에 명하여 시호를 보조, 탑호를 창성, 절 이름을 보림이라 하고 김영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이른 새벽부터 설쳤더니 배가 고파온다. 표정들을 보니 나 혼자만이 허기를 느끼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왔던 길을 되짚어 정남진으로 향했다. 푸른 바다가 보이고 망울진 적동백, 백동백이 줄지어 나타나자 차안은 환성이 터진다. 좁은 해안 도로를 요리 돌고 조리 달려서 도착한 정남진, 한반도에서 봄이 제일 먼저 오는 곳이라지만 비온 뒤의 바닷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연속극 모래시계로 정동진이 각광을 받자 이에 자극을 받은 장흥군이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으로 직선을 그었을 때 한반도의 끝에 해당하는 지점을 정남진이라 이름 짓고 각가지 행사를 벌이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장이다. 답사단은 바람 부는 정남진에서 『흔적』창간호 출판 기념식을 했다. 회장직에서 물러나신 김태엽 고문님과 『흔적』 편집위원장으로 수고하신 소진 박기옥 부회장님께 공로패를 전달하고 ‘금굴횟집 해뜨는 마을’에서 푸짐한 해산물로 배를 채우고 토요일마다 열린다는 7일 장터를 버스로 둘러보고 천관산으로 향했다. 원래는 여러 보살이 계시는 곳이란 뜻으로 ‘지제산’이라 하다가 언젠가부터 천관보살이 상주 설법하는 곳이라 해서 천관산으로 불리게 되고 절 이름도 천관사가 되었다고 한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니 새로 쌓은 축대가 나왔다. 천관사다.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에는 쇄석이 깔려있고 사찰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된 극락보전과 칠성각과 요사채가 전부다. 1200년 전 장보고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아 이곳저곳을 살폈더니 엄청난 규모의 석조물들이 무리지어 흩어져 있다. 신라 3층석탑과 고려의 5층석탑, 석등, 멧돌, 주춧돌... 한창 때의 천관사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당가 억새 쪽으로 발을 옮기니 천관산 정상이 손에 닿을 듯 다가선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다.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보성만 건너 고흥반도의 천등산, 팔영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강진만 건너 해남군의 두륜산, 달마산이 보인다는데, 생각 같아서는 단박에 올라가 작년에 직접 답사했던 두륜산, 달마산을 먼발치로 보고 싶었지만, 발 아래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풍광으로 대신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세찬 겨울바람을 견뎌낸 넓은 잎사귀 몇 장을 달고서 봄을 기다리는 굴참나무 군락지를 지나 읍내로 들어서니 평탄한 길이 나왔다. 엄청 먼 거리의 강행군이었지만 피곤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차랑차랑 해지는 것은 '남도에 추억을 묻고' 돌아왔기 때문이리라.
첫댓글 고맙습니다.
답사후기에 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