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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매산을 거닐며 忘却의 彼岸에서 되찾아본 解放과 6,25. 그리고 나.
동 매 산
2017. 09. 03. 나 홀로.
今年에는 7月부터 시작한 모진 더위가 9月에 접어들면서 한풀 꺾이는 듯하다. 日常나들이 外의 山行은 삼가고 있었는데 지난달 徐王子님의 갑작스런 연락받고, 北區에서와 같이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釜山西區協議會”에서 主催하는 山行인줄 지례 짐작하고 급하게 서둘렀지만 時間을 맞출 수 없어 抛棄한다고 通報. 이왕 나온 김에 解放 政局이 몰고 온 悲劇의 땅 ‘동매산’(一名 독뫼=獨山)을 찾았다. 充電안된 카메라는 그날의 발자취를 한 장도 담지 못해 많이 아쉬웠는데 오늘 날씨가 제법 시원해 그쪽 언저리로 발길을 돌려, 하마터면 나도 ‘동매산’ 悲劇(비극)처럼 어느 땅에선가 恨 맺힌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70餘年(여년)전의 지난날을 되새김질 해보려한다.
*코스
新平驛9番出口(가락타운쪽)∼북적북적 담장公園(右側)∼50m 앞 信號燈건너(가락타운쪽)∼沙下登記所∼가락타운 2, 3團地 버스停留所(右)∼登山路入口: 階段=117∼갈림길(左)=오르막∼갈림길(右)=稜線∼下端고개(直)∼갈림길(左)=稜線∼동매산∼배고개쪽∼運動器具-사거리(直)∼삼거리(直)∼돌탑봉∼내리막∼正面 흰색建物쪽∼배고개∼新平路敎會쪽∼건널목건너∼건널목건너(右)∼내리막길∼豫備軍訓鍊場入口∼多大路83번길=左側∼新平配水池∼新平老人福祉館 里程標따라∼갈림길(左)∼샹트 패미리타운∼맨 左側 오솔길∼갈림길(左=鐵條網쪽)∼鐵條網꺾이는 地點(洛東正脈길)(左)∼鐵條網꺾이는 地點∼갈림길(直)∼豫備軍訓鍊場 後門(右)∼林道∼갈림길(直)∼體育公園(右)∼舊平初校쪽(步道길)∼갈림길(直)∼갈림길(直)∼갈림길(直)(右=☓)∼訓鍊場塹壕•林道施設標識石(右)∼내리막∼삼거리(右)∼50m∼海東高運動場보이면(右)∼도랑길∼옥천파크•조은빌 사이로 내려서고∼갈림길(타이어프라자가 보이는 左側길)(道路쪽階段=☓)∼甘川삼거리(左)∼陸橋지나 直進∼GS25 便宜店∼건널목건너∼沙下路142番길∼골목으로∼삼경슈퍼∼크게 右側으로 돌아∼부영벽산 블루밍106棟앞∼成佛寺 里程標따라 左側으로∼갈림길(直)∼入山統制알림板 뒷길(右側 샛길=☓)∼林道갈림길(까치고개로 向하는 左側 林道入口에 있는 登山案內板 右側 稜線)∼삼거리(左)∼玉女峰(돌탑)∼右側으로 眺望 트이고∼희미한 길 50m쯤 가서 右側으로∼墓(咸安趙氏)∼共同墓地∼반달고개(右)∼甘川文化마을 入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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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설렁 걸어 보러하면서 거창하게 코스를 적어왔다. 9번出口를 버리고 이번에는 6번 出口로. 3907
*‘북적북적 담장공원’을 저쪽에 두고 들머리 도착. 3908 3910
***오늘은 산을 걸으며 歡喜(환희)의 8,15解放(해방)과 悲劇(비극)의 6.25를 겪으며 深淵(심연)으로 가라앉을 뻔했던 내 삶을 되새겨보려 한다.***
*117계단을 올라 산행준비 끝내고 私有地(사유지) 울타리로 들어선다. 3911
==나의 出生(출생).
***1905年 乙巳條約(을사조약)으로 倭(왜)놈들은 우리나라 外交權(외교권)을 剝奪(박탈)하고 統監府(통감부)를 設置(설치), 朝鮮侵略(조선침략)의 野慾(야욕)을 불태운다. 1908年 設立(설립)한 東洋拓植(株)(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워 우리나라 國土(국토)를 마구잡이로 집어삼킨다. 1910年은 韓日合邦(한일합방)이라는 美名(미명)아래 우리나라의 主權(주권)을 빼앗는다. 소위 庚戌國恥(경술국치)다. 왜놈의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가 號令(호령)하는 대로 따라야하는 奴隸(노예)가 됐다. 1915年, 交通(교통)의 中心地(중심지)였고 農産物(농산물)의 集散地(집산지)였던 龜浦(구포)의, 名文家(명문가) 聽雲 尹 相殷(청운 윤 상은=1887-1984) 先生(선생)깨서 갈밭이던 麥島(맥도)에 많은 資産(자산)을 投入(투입)해 農土(농토)로 開墾(개간)하니, 나의 아버지, 仲父(중부)님, 叔父(숙부)님 三兄弟(삼형제)도 여기에 參與(참여). 도우미(그 때는 身分制度(신분제도)가 없어졌는데도 奴婢(노비)라 했다) 한 世帶(세대)를 다리고 우리 文化 柳氏(문화 류씨) 集姓村(집성촌)인 金海(김해) 外洞(외동)에서 麥島로 移住(이주). 누님 세분 중 막내누나가 여기서 낫고 내가 낫고 여동생 둘이 낫다. 그리고 나는 꿈을 키워 나갔다.***
*下端(하단)고개 지나고. 3912
==解放의 언저리
***1945. 8. 15. 왜놈들 손아귀에서 우리들은 풀려났다. 그러나 나는 이날 解放(해방)된 줄 몰랐다. 어느 道路(도로)닦는 現場(현장)에서 일하고 늦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튿날 學校로 가는데 靑年 두 분이 지나가며 ‘日本은 이제 50年쯤 뒤떨어지게 될 거라’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學校에 들어서니 삼삼오오 모여서 歡喜(환희)의 도가니다. 萬感(만감)이 교차 한다. 밤이 되어 친구 몇 이와, 나를 때린 왜놈선생 집을 찾았다. 이미 逃亡(도망)가고 없었다.***
*碑石(비석), 望柱石(망주석), 香爐石(향로석), 床石(상석), 魂遊石(혼유석)은 수풀에 가려 있는 盆城 裵氏(분성 배씨) 墓(묘) 지나. 3913
***우리는 매달 學費(학비=그 때에는 月謝金(월사금)이라 했다)를 내면서도 공부는 뒷전이고 왜놈들 軍事施設(군사시설) 현장 등 오만 곳에 動員(동원)되어 勞動(노동)을 했다.
英語(영어)는 Alphabet 5자 가르치고 科目廢止(과목폐지), 어떤 科目은 한 學期(학기)에 4時間 가르치고 終結(종결). 여름방학인데도 作業場(작업장)으로 내몰리고------. 暗黑時代(암흑시대)였다.***
*悲劇(비극)의 ‘동매산’에 왔다. 民間人(민간인) 160여명이 集團虐殺(집단학살) 된 곳. 釜山地域(부산지역)의 많은 虐殺 埋葬地(학살매장지) 중 유일하게 遺骨(유골)이 發見(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6,25가 터지자말자 학살 시작. 여기 묻힌 분 대부분이 良民(양민)이라 나는 확신한다. 내 經驗(경험)에 비춰봐서----.
**國民保導聯盟員(국민보도연맹원)과 6,25전쟁으로 全國(전국)에서 모인 釜山刑務所 (부산형무소) 在所者(재소자)에 대한 大規模 虐殺(대규모 학살).
場所(장소) : 신평동 동매산 • 금정구 선동 ‘동래베네스트 골프장 • 동래구 반송 동 雲峰(운봉)마을 • 금정구 오륜동 회동수원지 • 해운대구 청사포 • 五六島 근처바다 • 서구 암남동 血淸所(혈청소) 근처바다.
屍身(시신)묻은 자리 : 영도구 동삼동 미니공원 • 영주동 釜山터널 위. 기타 등등
**全國(전국)에서 銃殺(총살) • 生埋葬(생매장) • 行方不明(행방불명)된 4,934名 중, 내가 살 던 金海(김해)에서 약 25%에 해당하는 1,226名(살해=272名 • 行方不明=954名)이 이슬로 사라졌다.
살해장소=진례면 사본리 냉정고개 • 생림면 나전리 나박고개. 상리고개. 상동고개 • 대 동면 주동리 주동광산. 숯굴 • 한림면 안하리 가자골 • 진영읍 뒷산 • 창원군 동 면 덕산고개 • 대산면 낙동강변. 등등 3915
***解放(해방)되기 두어 달 전 첫째시간, 여느 때와 같이 敎室(교실) 正面(정면)에 붙어 있는 왜놈國旗(국기)를 향해 先生은 敎壇(교단)위에 서고 級長(급장)인 나는 책상에서 나와 敎壇밑에 서고 나머지는 冊床(책상)에서 일어서서, 勅語集(칙어집)(왜놈 임금이 내려준 敎育(교육)에 관한 교육지침, 또 靑少年(청소년)에게 내린 지침, 기타 등등이 실려 있는 책)을 펴 들고 ‘靑少年에게 내린 칙어’를 읽는다. 그날따라 ‘칙어 책’을 안가지고 온 나는 옆자리 친구에게 빌려나와 다 읽고 난 직후 뒤돌아서며 던져주었다. 이를 본 왜놈선생, 급장이란 놈이 天皇(천황)을 모독한다며 골마루로 끌고나와 가죽(군수용으로 다 가져가고 일반인들에게는 귀한 물건이었다) 스립퍼를 벗어 내 뺨을 때리기 시작. 나는 골마루 끝까지 밀렸다가 다시 교실 앞까지 밀려온다. 얼굴은 紅柿(홍시)같이 붉게 부어오르고, 恐怖(공포)에 질리면 오줌을 잘기는 나는 온 바지가랭이가 오줌 범벅이다. 나는 이 事件(사건)을 잊을 수 없다. 스승은 그림자도 안 밟는다하지만 이 왜놈은 내 손에 맞아 죽어야했다. 그런데 三十六計(삼십육계)를 먼저 쳤다.***
*동매산 풍경. 3916
==暗礁(암초)의 삯이 튼다.
***대부분이 왜놈 先生(선생)들이었는데 이놈들이 떠나가고, 學校는 全國(전국)에서 모여들어 日本(일본)으로 撤收(철수)하는 왜놈들의 臨時 待期場所(임시 대기장소)로 변하니 자연히 休校(휴교)에 들어간다. 나는 下宿(하숙)집에, 開校(개교)하면 다시 오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順坦(순탄)했던 내 삶에 큰 試鍊(시련)을 겪게 될 실마리였다.***
*동매산 풍경. 3919
***늦은 밤, 自轉車(자전거)를 타고 동네로 들어선다. 보름이 며칠 남아 있는데도 달이 꽤 밝다. 동네가운데 水利(수리)도랑 둑에는 人山人海다. 고함소리가 진동한다. 區長(구장)패거리가 面書記(면서기)와 짜고 우리 部落(부락)에 割當(할당)되는 供出量(공출량)(가을에는 벼, 여름에는 보리)을 부풀려서 각 家庭(가정)에 配當(배당), 부풀려 있는 걸 모르는 善良(선량)한 農民(농민)들은, 잘 말린 곡식을 一定量(일정량)씩 가마니에 넣어 檢査場所(검사장소)로 져다 날라 정돈을 해둔다. 어느 날 檢査가 끝나면 바로 근처에 있는 精米所(정미소)로 옮길 때까지 그대로 둔다. 밤이 깊어지면 區長패거리들이 부풀려 놓은 數量(수량)만큼 자기 집으로 져 날랐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놈들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繼續(계속) 해먹던 솜씨 같다. 그런데 어떤 經路(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警察(경찰)이 알고 일당들을 逮捕(체포), 裁判(재판) 진행 중에 8. 15를 맞아 이 개새끼들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展望臺(전망대)에 올라 乘鶴山(승학산)도 한번 보고. 3921
***麥島의 땅 大部分(대부분)이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東洋拓植(동양척식) 所有(소유)로 돼 있어 收穫量(수확량) 절반을 小作料(소작료)로, 나머지 절반에서 供出(공출)을---, 그 나머지로 1年 食糧(식량)으로는 턱없이 不足(부족)하다. 供出代金(공출대금)을 받아 暗市場(암시장)에서 穀食(곡식)을 사면 供出量(공출량) 절반도 안 된다. 그러니 이놈들은 등쳐먹은 穀食을 暗市場에 팔면 곱으로 남는 계산이다.
4, 5月의 險難(험난)한 보리고개를 겪으며 살아가는 어진 農民(농민)들을 등쳐먹었으면 百拜謝罪(백배사죄)하고 容恕(용서)해 달라며 빌어야할 區長패거리들, 도리어 자기들을 경찰에 告發(고발)한 사람을 懲罰(징벌)하겠다고 고래고래 發惡(발악)이다.***
*정상에서 17, 8分 노닥거리다가 山行地圖(산행지도)와 거창하게 코스를 적은 종이를 잃어버리고, 조금 내려오니 沒雲臺(몰운대)쪽으로 視野(시야)가 트인다. 3923
***告發者(고잘자)로 指目(지목) 당한 분들은 어질고 순한 내 叔父(숙부)님 그리고 내 陳外家(진외가) 아저씨. 또 區長집 옆 옆집의, 혼자서 農事(농사)짓고 애기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는 남편 잃은 아주머니. 그 외에 순 하디 순한 몇 분. 이사람 들 이 16Km쯤 먼 距離(거리)인 金海警察署(김해경찰서)나 4Km 거리의 德斗駐在所(덕두주재소=지금의 파출소)에 찾아가, 평소에 무서워했던 왜놈警察(그때는 巡査(순사)라 불렀다)에게 고자질할 분은 아무도 없다. 그런대도 靑壯年(청장년)이 많이 布陣(포진)돼 있는 區長패거리들은 낮에 밤을 이어 이 분들을 괴롭힌다. 새끼줄로 몸을 묶고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발로 차고--. 이 광경을 보신 나의 아버지, 年歲(연세) 많고 어지신 나의 아버지 바르르 손을 떠신다. 나는 호주머니에 똘똘 감은 자전거체인을 감추고 있었으나 끝내 그놈들 얼굴에 한번 내리치지 못했다.***
*이내 사거리 안부에 내려선다. 3925
***區長(구장)패거리에 對蹠(대척)되는 분들의 子弟(자제)들은 靑年(청년)은 없고 모두 10대少年(소년)들, 10여명이다. 少年團(소년단)을 組織(조직)하기로 合議(합의). 名稱(명칭)은 一心會(일심회), 會則(회칙)을 만들고 團歌(단가)를 짓고. 내가 團長(단장)을 맞고 내 동갑내기가 부단장, 내 初等學校(초등학교) 동기이면서 日本(일본)에서 中學(중학)다니다 解放(해방)으로 歸鄕(귀향)한, 내 한 살 아래의 陳外家(진외가) 친구가 總務(총무). 어른 待接(대접) 깍듯이 하며 名節(명절)때 歲拜(세배)드리던 區長(구장)패거리에 꼿꼿이 맞서기로 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빤히 쳐다보며 눈 떼지 않기, 밤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團歌를 소리 높이 부르고 ‘왜놈 앞잡이질하며 도둑질해 먹은 거 다 吐(토)해내라’고 쓴 傍(방)붙이기 등등. 이렇게 해도 區長패거리 靑壯年들 잘못을 깨우쳤는지 한마디도 是非(시비)를 안 건다.
밤이 깊도록 왜놈 시절 못 배우고 덜 배웠던 科目(과목)을 復習(복습)하고 豫習(예습)하다 이듬해(1946年) 3月 開學(개학)이라는 소식 듣고 총무에게 團長 넘겨주고 學校로 復歸(복귀). 총무는 復學(복학)을 접고 農事(농사) 짓겠다하니 中學生(중학생)은 나 혼자.***
*안부에서 5分만에 돌탑봉.(11/01) 地圖(지도)가 없으니 地名(지명)은 거의 잊었고. 3926
==政局(정국)은 鎔鑛爐(용광로).
***敎師陳(교사진)이 짜여져 開校(개교)했겠지만 授業(수업)을 받아보니 좀 不實(부실)한 선생님도 계셨다. 그래도 靑雲(청운)의 꿈은 커져만 간다.
왜놈 쇠사슬에서 벗어난 우리, 主權國家(주권국가)가 되지 못하고 모스코바 三相會議(삼상회의=미국. 쏘련. 영국) 결정으로 信託統治(신탁통치)를 받게 되니 우리 까까머리 中學生(5년제 甲種中學(갑종중학)이 대부분이고 2년제 乙種(을종)도 몇 있었다)들 일반 市民(시민)들과 같이 反託運動(반탁운동) 깃발을 들고 洪水(홍수)처럼 거리를 메운다.
이럴 때에도 共産主義(공산주의)의 優越性(우월성)을 主張(주장)하는 知識人(지식인)들도 늘고 있다.
왜놈시대 民主主義(민주주의)니 共産主義(공산주의)니 하는 것을 하나도 몰랐던 우리들이 解放(해방)을 맞고 보니 이런 것들이 怒濤(노도)같이 밀려온다. 특히 左翼勢力(좌익세력)인 南勞黨(남로당)을 비롯하여 學生同盟(학생동맹), 靑年同盟(청년동맹) 등등 右翼(우익)의 무슨聯盟(연맹)에 對稱(대칭)하는 團體(단체)들이 幾何級數(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유토피아’가 곧 올 것 같은 宣傳煽動(선전선동)이 亂舞(난무)한다.***
*돌탑봉에서 쉬고 있던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 내 ‘몰골’ 하나 남기고. 3928
==난생 처음으로 疑心받아 본다.
***土曜日(토요일) 授業(수업)이 끝날 즈음, 來日(내일) 九德運動場(구덕운동장)에 모두 모여라는 누군가의 指示(지시). 1947年 7月 27日(日曜日), 소위 말하는 7, 27大會(대회), 運動場에는 男女 中學生들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 演士(연사)들은 하나같이 反託이 아니라 信託統治에 贊成(찬성)해야 된다는 것. 뒤에 알고 보니 左翼(좌익)들이 主催(주최)한 모임이었다. 口號(구호)를 외치며 西面까지 市街行進(시가행진)한단다. 運動場 正門(정문)에서 道廳(도청)앞으로 쏟아지는 人波(인파) 그리고 터지는 口號. 道廳 지나자마자 大廳洞(대청동)으로 휘어가는데 나는 隊列(대렬)에서 離脫(이탈), 직진하여 學校(토성동)쪽으로 가다 右側(우측)으로, 넓적한 道廳官舍(도청관사)들이 櫛比(즐비)한 비탈을 조금 올라 峨嵋洞(아미동)에서 대티고개로 이어지는 山腹道路(산복도로)변의 ‘00變電所’(변전소)로 갔다.***
*地圖(지도)가 없으니 ‘배고개’인 줄 모르고 배고개에 내려서고.(11/19) 3930
***그 때는 韓國電力(한국전력)이 아닌 南電(남조선전기)으로, 以北(이북)에서 전기를 끊으면 以南(이남)은 暗黑天地(암흑천지)가 되던 때. 유난이 早熟(조숙)한, 한 살 위의 내 초등학교 동기가 進學(진학)안하고 南電에 就職(취직)하여 여기서 勤務(근무), 農繁期(농번기)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한 달쯤 일을 도와주던 분이 살던 九德運動場 근처의 집에 下宿(하숙)하다가, 學校와 좀 가까운 中央洞(중앙동)으로 옮긴 下宿집(解放되고 日本에서 나와 차지한 敵産家屋(적산가옥))의, 둘째 아들(나보다 두 살 위)도 여기서 勤務. 昨年(작년=1946年) 10月, 大廳洞(대청동)의 깨끗한 校舍(교사)를 南一國校(남일국민학교)에 넘겨준 우리학교는, 갓 태어난 師範學校(사범학교)가 임시로 자리한 土城洞(토성동)의 낡은 校舍에서 寶水洞(보수동) 검정다리 근처의 光新國校(광신국민학교=현 화랑초등학교)로 옮겨간 후 그 자리에 들어갔다. 學校에서 5分 距離(거리)의 이 變電所에 자주 놀러왔다. 여기 所長(소장)을 포함한 職員(직원) 4명, 모두 左翼(좌익)쪽으로 기우러진 듯 보였다. 勞動組合(노동조합)의 무슨 宣傳(선전) 삐라 붙이러 다니느라 자주 자리를 비운다. 高壓(고압)으로 電氣(전기)를 받아 低壓(저압)으로 變換(변환)하여 一般家庭(일반가정)이나 官公署(관공서) 工場(공장) 등에 配電(배전)하는 重要(중요)한 곳인데도---.
더구나 以北에서 전기를 끊으면 스위치를 내려야 되고 전기가 들어오면 스위치를 넣고.---.(10m쯤 되는 막대기 끝에 갈고리를 달아 높게 붙어 있는 스위치를 걸어 당겼다 또는 걸어 밀었다한다. ‘지스곤스위치’라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이날도 아무도 안 보인다.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누가 다가와 身分(신분)을 꼬치꼬치 캔다. 여기 職員(직원)과 엮이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下宿費(하숙비)로 줄 쌀을 가지고 오신다 해서 기다리고 있다’하니 疑心(의심)하던 눈초리를 접고 돌아간다.
濟州 4,3事件(제주 4,3사건)이 터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當局(당국)에서 바짝 緊張(긴장)하는 모습이다.(濟州 4,3事件은 빨갱이 南勞黨(남로당)이 저지른 事件이지만 그 遠因(원인)이 왜놈 앞잡이 하던 警察(경찰)을 肅淸(숙청)하지 않고 軍政(군정)警察로 그대로 두어 社會問題(사회문제)로 浮刻(부각)된데다 3,1節 市街行進(시가행진) 구경하던 群衆(군중)에게 警察이 發砲(발포)하여 死傷者(사상자)가 났기 때문이다.)
日帝(일제)때에도 解放(해방) 후에도 下宿費(하숙비)로 쌀을 代身(대신)했고, 무거운 쌀을 메고 10里(리)고 50里고 걸어 다녀야 했던 그 時節(시절), 우리 父母(부모)님 나 때문에 苦生(고생) 많이 하셨다. 더구나 今年(금년) 봄에는 우리 집 旣存建物(기존건물)을 헐고 江原道(강원도)에서 싣고 온 錦松(금송)으로, 이름깨나 날리는 木手(목수) 招聘(초빙)하여 正寢(정침)과 舍廊(사랑)채를 新築(신축)했는데 그 뒷바라지 하시느라 엄청 苦生(고생)하셨다.***
*車道(차도)따라 계속 걷는다. 3931
==난생 처음으로 잡혀갈 뻔했다.
***左(좌)• 右(우) 對立(대립)으로 政局(정국)은 자꾸만 昏迷(혼미)해진다.
우리 一心會員들, 土曜日(토요일)마다 집에 가면 만난다. 農事(농사)지으며 善(선)하게 살아간다. 區長(구장)은 그 놈들 패거리 중에서 바뀌었고 그 놈들하고는 빳빳하게 맞서나간다. 밤이면 무슨 講演(강연)자리에 더러 나가는 모양, 左翼(좌익)들의 宣傳(선전)이 大部分(대부분)일터. 學校에서와 마찬가지로 右翼(우익)들의 宣傳은 거의 없으니---. 지금 와서 보면 그 때의 右翼들은 國民을 啓導(계도)하기보다는 左翼으로 기우려진 國民들을 잡아넣는데 더 置重(치중)한 것 같다.
우리 一心會 친구들에게도 査察(사찰)의 눈초리가 쏟아진다. 간혹 駐在所(주재소)에 불려 다니기도 한단다. 共産國家(공산국가)에서 하는 단골 메뉴, 農土(농토)를 地主(지주)로부터 無償沒收(무상몰수)하여 無償分配(무상분배)한다는데 귀가 솔깃 안할 農民(농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宣傳을 듣는다고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빨갱이도 아니다. 共産國家(공산국가)의 矛盾(모순)된 制度(제도)를 깨우쳐 주고, 民主國家(민주국가)의 長點(장점)을 弘報(홍보)하면 善(선)한 농민들 自己中心(자기중심)을 잡아갈 텐데------.
누가 잡혀갔다는 消息(소식)만 자꾸 들린다.***
*배고개에서 20여分 걸어 산길로 들어간다. 3932
***이듬해 정월(放學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 一心會員들 葬地(장지)까지 運喪(운상)하고 墓域造成(묘역조성)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이 어린 몇 사람 빼고 모두 잡혀갔다. 그 며칠 뒤 늦은 밤, 아버지가 居處(거처)하시던 사랑방에 켜둔 호롱불을 끄고 아버지 殯所(빈소)의 촛불도 끄고, 正寢의, 어머니와 女同生 둘이 居處하는 큰방 옆의 大廳(대청)무루 건너 작은 방으로 들어가 불 끄고 이불 밑으로 들어갔다. 잠이 들라할 때 내 방 옆의 울타리 바깥 菜田(채전)밭에서 몇 사람이 걷는 발자국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豫感(예감)이 이상했다. 온 몸이 戰慄(전율)로 硬直(경직)한다. 조금 있으니 우리 집을 한 바퀴 돌아 마당으로 들어와 큰방 문을 여는 소리. 나는 얼른 일어나 벗어난 옷을 안고 이불이 얹혀 있는 궤짝위에 바짝 엎드렸다. 내 房門(방문)을 확 잡아 열더니 후라시로 방바닥을 쭉 비춰본다. 그리고 없다하며 나간다.
金海警察署에서 調査(조사)받던 一心會員들, 主導者(주도자)로 내 이름을 댔다며 풀려난 후 나에게 전해준다. 當然(당연)한 일이다. 우리 一心會는 左翼이니 右翼이니 共産主義니 빨갱이니 하는 말조차 모를 때 우리 權利(권리)를 빼앗아 간 놈들과 맞서기 위한 組織(조직)인데-----.警察은 빨갱이 아닌 나를 잡아가 빨갱이로 만들 셈인가?
나는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을 緊張(긴장)할 수밖에 없다. 監視(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고 殯所를 지킨다. 菉山(녹산)에서 이사 온 내 둘째 누님이 사시는 이웃동네 區長아들(禹ㅇ益=나하고 同甲(동갑)으로 國民學校(국민학교)도 다르고 中學校(중학교)도 다르지만 渡船(도선)에서 자주 만나 친한 사이가 됐다) 역시 放學(방학)이라 집에 있었는데 어느 機關(기관)에서 잡으러왔다. 아버지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하니 있는 곳을 대라며 아버지를 때린다. 참다못한 친구가 스스로 나가 잡힌다. 이 소식을 누님이 급하게 달려와 전해주며 조심하라는 신신당부다. 이 친구 그 뒤 끝끝내 이 世上(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동매산’의 靈魂(영혼)처럼---. 美軍政(미군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지만 左右對立(좌우대립)은 날로 激化(격화)된다. 政局(정국)은 昏迷의 수렁으로 빠진다. 나는 放學이 끝나도 學校로 인가고 殯所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擔任先生(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내 사정을 묻고 學校로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고 몇 학생이 끌려갔다는 것도 傳(전)해 주신다. 나는 어머니가 平靜(평정)해지시면 곧 갈 거라 말씀드리고--. 외동임이 슬펐다.--***
*軍部隊(군부대) 철조망을 우측으로 끼고 體育公園(체육공원) 도착. 3934
==난생 처음으로 搜査機關(수사기관)에서 調査(조사)받아본다.
***집에서나 學校에서나 罪(죄)짓지 않은데도 罪人(죄인)같이 안절부절못한 나날, 5/10 大統領選擧(대통령선거=내 生日은 戊辰年(무진년=1928年) 陰曆(음력) 正月 24日(陽曆 2月 15日)인데. 외동아들이라 이내 出生申告(츨생신고)를 小任(소임=穀物로 報酬를 받고 洞內 일을 보던 사람)에게 맡겼으나 此日彼日(차일피일)하다가 12月 5日에 申告했다. 申告日이 出生日. 때문에 選擧權(선거권)이 없는 ‘얼라’가 된 것이다.=끝나고 곧 政府(정부)가 들어서면 政局(정국)은 平穩(평온)해 지겠지 여기면서 向學熱(향학열)에 불탔지만 모든 꿈을 접고 나이 많으신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들 곁으로 돌아왔다. 내가 扶養(부양)해야 된다는 責任感(책임감)이 앞서서다. 얼마 안 있다 우리 麥島의 培英國校(배영국민학교) 校監(교감)으로 계시던 四寸姉兄(사촌자형)이 敎師(교사)자리 하나 비었는데 날더러 講師(강사)로 오라한다. 敎職員(교직원)들은, 絶對(절대)는 아니지만 政治(정치)판에서는 比較的(비교적) 安全地帶(안전지대)라 할 수 있으니---. 나는 쾌히 承諾(승낙)하고 具備書類(구비서류) 提出(제출), 3學年(학년) 擔任(담임). 放學中(방학중=8/15)에 大韓民國 樹立(수립). 새 學年(학년)시작. 黃金色(황금색)들판에 가을이 물결치는 10月, 麗水反亂事件(여수반란사건)이 터졌다. 公安當局(공안당국)에 점 찍한 사람들은 또 잡혀 들어간다. 一心會員도 불려갔다. 초겨울, 駐在所에서 金海警察署로 같이 가자며 날 다리러왔다. 校長先生(평생에 잊지 못할 金 君一 교장선생)님이 한사코 同行(동행)하신다. 저녁 늦게까지 調査(조사)받는 내 옆에 계시면서 助言(조언)을 해주신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調査끝나고 擔當刑事(담당형사)다리고 食事待接(식사대접)도 先生님이 해주신다. 어느 食堂(식당) 넓은 방 한쪽에 앉아 食事하는 도중 갑자기 停電(정전), 암흑천지다. 擔當刑事 번개같이 내 양 손목을 잡는다. 조금 뒤 金 日成(김 일성)놈이 스위치를 넣었는지 불이 들어왔다. 刑事는 조금 무안한 기색, 나는 지금까지도 刑事가 왜 그러했는지 짐작할 수 없다. 자기를 찌를까봐? 내뺄까봐?-----
그리고 그날 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12月에는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이 制定公布(제정공포)된다.***
***訓練兵(훈련병)들이 隊伍(대오)를 지어 지나가고, 警備兵(경비병)들이 巡察(순찰)도 돌고 군데군데 訓練施設(훈련시설)이 있다. 寫眞(사진)은 삼가야했다.***
==6,25가 터지니 良民虐殺(양민학살)도 번개같이----.
***1949年 5月, 校長先生님을 비롯한 주위 분들의 勸誘(권유)로, 銓衡(전형)을 거쳐 정식 교사가 되는 敎員養成所(교원양성소) 입소.(敎員養成所 소장은 慶尙南道 學務局 獎學士로, 그 분의 아들은 요새 우리가 每週 만나는 ‘老터리클릅’의 한 멤버이다) 내가 入所(입소)한 다음달 國民保導聯盟(국민보도연맹)이 創設(창설)된다. 左翼(좌익)에서 轉向(전향)한 자를 保護(보호)하고 引導(인도)해 준다며 懷柔(회유) • 包攝(포섭)해서----. 뒤에 안 일이지만 ‘여기서는 몇 사람을 包攝--’의 地域割當制(지역할당제)가 있었다니 天地가 痛哭(통곡)할 일. 어떤 사람은 도장 찍어라 해서 찍었는데 保導聯盟員이 돼 있더라는 말도 수 없이 들려온다. 나는 敎員養成所 수료, 實習(실습) 마치고 外三寸(외삼촌)이 校長인 鳴旨國校(명지국민학교) 赴任(부임).***
*途中(도중)에 빵으로 요기하고 甘川(감천)고개로 내려왔다. (뒤돌아보고) 3935
***이듬해 6,25가 터졌다. 軍 情報機關(정보기관), 憲兵(헌병), 警察(경찰)등은 保導聯盟員들 豫備檢束(예비검속)에 들어갔다. 우리 一心會員들 모두 잡혀갔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모진 拷問(고문)을 당했다한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幕舍(막사 =空軍情報機關의 막사?)안은 찌는 듯 더웠고 밤중에 불려나간 사람의 悲鳴(비명)소리가 匕首(비수)처럼 날카롭게 들려오고 한번 불려나가면 밧줄에 메달려 毆打(구타)당해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일은 茶飯事(다반사). 빨갱이에 附逆(부역)한 일이 없는데 實吐(실토)하라니 答(답)할 거리가 없으니 더 두들겨 맞고---.團長(단장)인 내 친구는 失神(실신)해서 업혀 들어오면 幕舍안에 露出(노출)되어 있는 똥통의 똥을 보릿집모자에 걸러 마시기를 몇 번이나 했다한다. 打撲傷(타박상)에 똥물이 좋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 一心會員 중에, 解放(해방)되기 몇 년 전 南海에서 이사와 제법 많은 농사를 짓는 어진 집안의 河ㅇ浩군, 새벽에 불려나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한다. 분명 調査官(조사관)의 꼬임에 빠져 빨갱이질 한 거 하나만 불면 풀어 줄 거라며 “무어무엇 했지”하니 “예 맞습니다.”라고 했으리라.
美 트루먼大統領의 海•空軍만으로 人民軍(=북한군)을 擊退(격퇴)하라는 指示(지시)에, 戰線(전선)을 둘러본 맥아더將軍(장군)은 地上軍(지상군) 投入(투입)이 不可避(불가피)하다고 報告(보고)하고 承認(승인)을 받는다. 그리고 UN安全保障理事會(안전보장이사회)의 요구로 UN軍司令官(사령관)이 된다.
==난생 처음으로 잡혀갔지만 죽일 만한 罪名(죄명)을 못 만드니---.
어느 土曜日(토요일) 오후, 작년에 육군헌병과 結婚(결혼)한 내 바로 밑 女同生 집(釜山 동대신동 釜山刑務所(부산형무소) 동쪽. 넓은 대지에 작은 집을 몇 채 지어 세를 놓고 있었다)으로 갔다. 戒嚴令(계엄령)이 내려졌고 通行禁止時間(통행금지시간)은 오후 8時, 刑務所 앞을 지난 모서리의, 문이 열려 있는 派出所(파출소) 안을 들여다봤다. 몇 分이나 남아 있나싶어----, 그런데 아직 환한데도 正刻(정각) 8時다. 2分이면 동생집인데--. 들어오라는 私服(사복)차림의 號令(호령). 이날 通行禁止위반 第1號가 된 셈이다. 通行禁止時間에 익숙하지 못한 市民들 줄줄이 잡혀 들어온다. 트럭에 한 차씩 실려 이디론가 간다. 通禁위반자는 각처에서 잡혀온다. 많은 調査官들은 한 사람 한 사람 審問(심문)하며 때려죽일 놈, 軍隊 보낼 놈, 집으로 돌려보낼 놈 등으로 分類(분류)하는 모양. 調査마치고 안 끌려가고 나온 사람 한車 되면 또 다른 곳으로 실려 가 또 調査. 넓은 講堂(강당)에서 새우잠자고 주먹밥으로 아침, 또 실려 가 調査. 또--, 또--, 일곱 번째는 확실히 記憶(기억)나는 中釜山警察署. 日曜日 늦게 夜間通行證(야간통행증) 받아들고 나는 풀려났다. 만약 金海였다면 ‘要 注意人物’(요 주의인물)로 내 이름이 있었을 터.
==지금 생각하면 合同(합동)으로 調査했다면 한 번으로 끝날 걸---. 자기 기관이 第一(제일)이라고 傲慢(오만)해서 그랬나? 事態(사태)가 급해 당황해서 그랬나?
==난생 처음으로 亡命(망명)길에 오르다.
一心會의 主導者 나에게 칼날을 正照準(정조준)하고 있을 터.-
北의 金 日成 傀儡軍(괴뢰군)은 3日만에 서울을 占領(점령)하고 怒濤(노도)같이 밀고와 洛東江(낙동강)에 다다를 무렵 放學(방학)날이 왔다. 放學式이 끝나 學生(학생)들은 돌아가고 職員(직원)들 午餐會食(오찬회식) 시작할 무렵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空軍에서 왔다면서 나를 德斗支署(덕두지서)로 보내라고 하더라 하신다. 어머니와 같이 교장舍宅(사택)에서 점심 먹고 혼자 自轉車(자전거)로 德斗支署로 갔다.***
(앞을 보고) 3936
***支署로 들어가려다가 支署 근처에 사는 鳴旨校의 同僚敎師(동료교사)의 아내이자 大渚中央校(대저중앙교) 내 2年 先輩(선배)분을 찾았다. 自初始終(자초시종)을 이야기하니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다. 자기 同期(동기=나의 2年 先輩) 李o萬이 이 동네에서 有志(유지)로 살며 警察(경찰)과도 잘 지내는 집안의 아들인데도 잡혀가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맞아 失神(실신)한 것을 그 아버지가 업고 나왔다며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한사코 말린다. (*李o萬=뒤에 憲兵(헌병)이 되어, 軍需基地司令部(군수기지사령부)가 釜山에 처음 創設(창설)되고 初代司令官(초대사령관)으로 大渚中央校 내 5年 先輩(선배) 高O道 少將(소장)이 赴任(부임)하고 憲兵參謀(참모=中領(중령)가 된다. 砲兵參謀(포병)는 내 1年 後輩(후배), 工兵參謀(공병)는 中學 1年 先輩, 法務參謀(법무)는 陸士 法務官(육사 법무관) 등등,
***玉女峰(옥녀봉)은 抛棄(포기)하고 버스 타고 地下鐵驛(지하철역)→집으로.***
***나는 망설이다 駕洛(가락) 누님 집으로 갔다.
新婚 初(신혼 초)에는 동네에서 떨어진 집이었는데 지금은 동네복판 넓은 垈地(대지)에 지은 新築建物(신축건물). 누님 집에서 7,8分 거리의 國民學校에, 나보다 석 달 먼저 出生(출생)한 四寸兄(사촌형=敎員養成所 나 보다 一期(일기) 앞 수료)이 奉職(봉직)하며 學校舍宅(사택)에서 自炊(자취). 兄을 찾았더니 방학을 했는데도 麥島 집으로 안 가고 身邊整理(신변정리). 學校에 辭表(사표)내고 軍에 간단다. 一觸卽發(일촉즉발)의 危機(위기)속에 自進入隊(자진입대). 그 勇氣(용기)에 그저 感歎(감탄)할 수밖에---(兄은 憲兵이 되어 釜山 巨堤(거제) • 蓮山(연산) • 楊亭(양정) 일원에 설치한 捕虜收容所(포로수용소) 근무. 兄의 이런 勇氣가, 나도 6,25 1年만(1951. 6. 26)에 학교를 버리고 軍을 택한 動機(동기)가 된다. 兄이나 나나 외동으로 軍 免除(면제)의 惠澤(혜택)이 있었음에도------兄은 滿期除隊(만기제대)도 거부하고 長期服務(장기복무)했다.)
兄과 며칠 지내다 兄은 떠나고. 누님 집에서의 며칠은 坐不安席(좌불안석), 어느 기관(아마 西北靑年團(서북청년단)=⁅金日成의 共産主義를 반대하며 결성한 極右(극우) 反共團體(반공단체)로 南韓(남한)으로 넘어온 후 저들의 理念(이념)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左翼(좌익)으로 몰아 國民保導聯盟에 가입시키고 6,25가 터지자 동매산에서와 같이 殘忍(잔인)하게 良民虐殺(양민학살)에 앞장섰다⁆=이었으리라)에서 집집마다 사람을 추로 다닌다. 附逆者(부역자)도 잡고 軍 忌避者(기피자)도 잡는다. 모기 뜯는 마루 밑에서 밤을 세기도 했다. 누님 집 이웃에 사는 내 동갑내기도 잡혀 갔다는 소식. 자형과 누님은 안절부절못한다. 나는 떠나기로 한다.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라고 한다지만 九旬(구순)이 되고 보니 그건 아닌 거 같다.***
*菉山 中谷, 慶州 崔氏의 集姓村(집성촌). 그 宗家(종가)인 큰 자형 집으로 갔다.
1934年 大洪水(대홍수) 때 나는 아직 철들지 않은 꼬마였지만 할머니와 여기 와서 한 달을 묵었다. 人情(인정)많은 큰 누님 많이 반가워하신다. 세 살 아래의 큰 甥姪(생질)도 放學이라 집에 와 있었다. 여기서도 사람을 추로 다니지만 案內者(안내자)가 같은 門中(문중)사람이니 한결 安心이다. 넓은 邸宅(저택), 石築(석축)을 쌓아 높다랗게 지은 正寢(정침)뒤 언덕바지는 우거진 왕대 밭, 그 뒤 산비탈에 올라 엄마가 보고 싶어 많이 울었던 大洪水 때의 追憶(추억). 지금은 馬山(마산)쪽에서 砲(포)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閃光(섬광)도 보인다. UN의 安全保障理事會(안전보장이사회)決議(결의)로 UN軍이 參戰(참전)했고 美軍(미군)의 워커中將(중장) 指揮(지휘)아래 傀儡軍의 南下(남하)를 沮止(저지)하고 洛東江(낙동강)을 境界(경계)로 하는, 臨時首都(임시수도) 釜山을 防禦할 수 있는 橋頭堡(교두보)가 構築(구축)되니 戰局(전국)은 조금 잠잠해진다. 누님 집 아래 마당 너머에 집이 있는 甥姪의 八寸兄(팔촌형=생질이 다니는 學校出身(출신)이면서 현재 그 學校 敎師(교사)로 在職(재직), 얼마 있다 釜山大 敎授(교수)로--)도 집에 와있었다. 생질더러 빌려온 그분 책을 엄청 많이 읽었다. 日帝(일제)때 그 모진 試鍊(시련)속에서도, 物資(물자)가 귀해 冊(책)이 많이 發刊(발간)되지 않을 때에도 先輩(선배)들에게 빌려서 많은 책을 읽었다.⁅걸어 다니는 百科事典(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知識(지식)을 쌓아간 우리 讀書(독서)벌레 세 사람, 한 친구는 詩人(시인)이 되어, 中央洞 産業銀行(산업은행)앞 도로변에 있는 조그마한 酒店(주점)에 同好人(동호인)들과 자주 모이곤 하더니 ‘同人會’(동인회)를 組織(조직), 그 ‘리더’가 되고 詩集(시집)發刊. 그가 숨 거둘 때까지의 그 詩集들 한 권도 빠짐없이 내 書架(서가)에 꽂혀있다. 또 한 친구 官界(관계)로 進出(진출). 法制處 8名의 法制官(법제관)중 한사람. 商法(상법)을 담당했다. 朴正熙大統領에게 拔擢(발탁)되어 中央廳舍(중앙청사) 18層(층)에 있던 ‘國際ㅇㅇ局長’. 그리고 繼續(계속)해서 乘勝長驅(승승장구). 나머지 한 놈, 꿈은 컸다. 한 때는 文學에 心醉(심취)했고 解放後 實力(실력)있는 數學先生(수학)만나 ‘命題(명제)속에 內包(내포)된 解答(해답)을 찾아내는 推理力(추리력)에 戰慄(전율)도 했다. 더구나 天體物理學(천체물리학)의 문턱에서 2,000億(억)개나 되는 銀河系(은하계)가, 오직 重力(중력)으로서만 그 存在(존재)가 證明(증명)되는 암흑물질에 의해서 均衡(균형)을 잡으며 宇宙(우주)를 支撑(지탱)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는 차라리 내가 블랙홀로 들어가 윔홀을 거쳐 화이트홀로 나와 다른 銀河系로 가봤으면 하는 空想(공상)도 하며 새로운 知識(지식)을 開拓(개척)해보자 熱望(열망)했건만, 바른말하고 不正(부정)을 批判(비판)한 것이 되려 暗礁(암초)가 되었고 家庭環境(가정환경)의 變化(변화)로 부득이 理想(이상)의 나래를 접고 現實(현실)에 安住(안주)하는 망나니로 轉落(전락)하고 만다.
==Happy end.
放學끝나고 新學期(신학기)가 되었다. 우물쭈물 망설이다 9日 늦게 學校로 돌아갔다. 나 同甲(동갑)내기 同僚敎師(동료교사)의 兄을 비롯해 學閥(학벌)있는 몇 분이 사라졌다한다. 나는 郡(군) 學務課長(학무과장) 찾아뵙고 ‘譴責’(견책)의 페널티.
멕아더將軍의 仁川 上陸作戰(상륙작전), 서울 奪還(탈환), 北으로 進擊(진격), 平壤 (평양)奪還, 鴨綠江邊(압록강변) 到達(도달), 中共軍(중공군) 介入(개입)=人海戰術(인해전술)로 1/4後退(후퇴), 서울 다시 빼앗기고, 美 空軍의 강렬하고 지속적인 攻擊(공격)으로 엄청난 被害(피해)를 본 中共軍의 공세 鈍化(둔화), UN총회에서 中國을 侵略者(침략자)로 규정. 美 8軍司令官 ‘M.B 리지웨이’將軍이, 차량사고로 숨진 워커將軍의 後任(후임)으로 와 UN軍의 士氣(사기)를 回復(회복)하고 防禦(방어)에서 攻勢(공세)로 나아가 서울 再奪還, 中國 本土(본토) 攻擊(공격)를 主張(주장)한 ‘맥아더’將軍을 解任(해임)한 ‘트루먼大統領’ 때 休戰會談(휴전회담)을 시작했으나 다음 事由(사유)로 會談決裂(결렬). 그 事由① UN軍의 繼續(계속) 한국 駐在(주재)에 대하여 中 • 蘇(소)등 빨갱이나라는 모든 外國軍(외국군)은 전부 撤收(철수)주장. ② 현 境界線(경계선)을 維持(유지)하자는데 대하여 中 • 蘇등은 3.8線 復歸(복귀)주장. ③ 希望(희망)하는 捕虜(포로)만 召還(소환)하자는데 대하여 中 • 蘇등은 모든 捕虜는 無條件(무조건) 召還주장(당시 捕虜 171,000名 중 5萬名이 돌아가기를 거부했다함). 그 뒤 美大統領으로 아이젠하워가 當選(당선)되고 소련의 스탈린 死亡(사망)으로 새로운 분위기속에 ‘現在(현재)의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을 境界(경계)로, 각각 2Km의 非武裝地帶(비무장지대)를 두기로 하고 休戰條約(조약) 체결(1953. 7. 7.)
이렇게 大韓民國은 아직도 瘦醜漏透(수추누투)의 꼴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친구의 詩句(시귀)를 吟味(음미)하며 瘦醜漏透의 몰골로 변해온 나를 뒤돌아봤다.
.--손에 쥐고도, 양손에 가득 움켜쥐고서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젊음이란 그 빛나는 보석임을----
눈 깜짝할 사이 굴러 가버린 주옥같은 이십 대
두리번거리다 어느 틈엔가 그냥 놓쳐버린 삼십 대
조금은 살맛도 익히고 재미도 느끼는 듯하더니
어느새 저만치 달아난 사십 대
아직 늦지 않았노라 다시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오십 대도 다 가고
인생은 육십 대부터라고 큰소리 쳤지만
산정에서 내지르는 메아리 없는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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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추누투(瘦醜漏透)'=마르고 못생기고 새어 흐르고 구멍이 뚫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