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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억압없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의 삶을 살았고,
독일 최초(어쩌면 그 당시 유럽 최초로) 여성의 정치참여 길을 열고 여성의 날을 제정하는 등 여성운동에 엄청난 공헌을 한 클라라 체트킨.
75세의 노구에도 독일의회에서 파시즘을 분쇄하자는 열정적인 연설을 하던 그녀를 기억하는 내게
그녀의 사상을 이끈 정수인 마르크스주의를 방기한 강의가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체트킨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남녀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여성의 억압을 위한 투쟁에서 최전선에 서 있었습니다.
(체트킨이 1920년 레닌과의 담화를 글로 옮긴 <레닌과 클라라 체트킨의 여성문제에 대한 대화>는 레닌과 같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문제에 얼마나 깊히 천착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운동을 올바로 평가하고 전망하는 활동가가 이 역사적 공간을 외면한다면 운동의 많은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린 절름발이가 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체트킨 강의에 대한 마지막 소감은 아래의 기사로 대신합니다.
[한국인권뉴스 2007. 1. 22]
클라라 체트킨(좌)과 로자 룩셈부르크(우)
클라라 체트킨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데 반해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남성과 손잡고 자본가와 싸운다."
[공익광고]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작은책》2004년 5월호
역사속에 그 여자 <클라라 체트킨>
독일 역사를 공부하거나 여성운동에 관심 가진 이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에긴 낯선 인물 클라라 체트킨. 그러나 그는 여성운동을 말하려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클라라는 독일 색소니의 작은 마을 비데라우에서 1857년 7월 15일 태어났다. 그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어머니의 영향을 듬뿍 받았다. 여성이 남성처럼 권리를 지닌 한 인간임을 클라라에게 일러준 최초의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17살 때, 독일 굴지의 대도시 라이프치히에 있는 폰 슈타이버 사범학교에 무료 입학한 클라라는 부르주아 여성운동가들과 사귀다가 점차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클라라가 입학한 폰 스타이버 사범학교는 여성이 다닐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때 독일에서는 여성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고, 교육받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교사였다. 독일 여성운동의 초창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은 대개 교사 출신이다.
1878년 봄, 클라라는 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때 오시프 체트킨을 만난다. 러시아에서 망명 온 목수 직업을 가진 사회주의자 오시프. 오시프는 독일 사회민주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다. 클라라는 오시프의 영향을 받아 사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 해 10월, 비스마르크 내각은 <공공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사회민주주의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반(反)사회주의법 혹은 사회주의 탄압법이라고 하는 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 법에 따라 사회주의 운동은 불법이 되고 주요 인물들이 추방당했다. 2년 뒤, 오시프가 체포되었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오시프는 추방령을 선고 받고 프랑스로 떠났다. 이 무렵, 오시프와 클라라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클라라는 오시프를 따라 가기로 마음먹었다. 몇달 뒤, 클라라는 망명길에 오른다. 10년이란 긴 망명생활의 시작이었다.
- 남편과 함께 파리로
클라라와 오시프는 파리 몽마르트 거리에 있는 단칸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이듬해 첫아들 막심, 2년 뒤 둘째 아들 콘스탄틴이 태어났다. 하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클라라의 독일 국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던 같다.
파리 생활은 지독한 가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파리는 클라르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생계와 집안일과 육아에 쫓기면서, 하층 계급 사람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클라라인지라, 가사노동을 직접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파리는 두 사람을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둘 다 결핵에 걸린 것이다. 클라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회복되지만, 오시프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1889년 1월, 클라라가 32살 때다.
6개월 뒤, 클라라는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 연단에 섰다. 클라라는 외쳤다. <여성해방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한 이 연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문제를 마르크시즘에 입각하여 분석한 최초의 것이다. 클라라는 자본주의 대량 생산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설명하고, 여성노동의 사회 진출은 사회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이므로 남성의 임금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한 여성 해방의 문제는 결국 '경제적 문제'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은 여성을 눈뜨게 한다
클라라는 여성이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자녀 교육은 물론 사회 발전에 유익하며 여성해방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직업인으로서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온 클라라 자신의 경험이 짙게 농축되어 있는 대목이다. 클라라는 자신있게 말한다. 일은 여성 자신을 눈뜨게 하며,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여성은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다. 아이들은 그런 어머니를 모범 삼아 자란다고. 오직 사회주의만이 모성과 직업 활동 간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사회주의 탄압법이 폐기된 1890년, 클라라는 독일로 돌아왔다. 10년 만의 귀환이었다. 이듬해 그는 여성신문 ≪평등(Gleichheit)≫ 편집장이 된다. 이후 25년간 그는 ≪평등≫에 수많은 논설과 평론을 썼다. ≪평등≫은 1902년 사회민주당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클라라 체트킨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하여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을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부터 분리,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문제는 계층별로 서로 다르다면서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데 반해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남성과 손잡고 자본가와 싸운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중요한 업적은 당에 여성만의 조직을 따로 만들고, 나아가 국제 사회주의 여성운동 조직인 인터내셔널 여성협의회를 창설한 것이다. 당시 독일에선 여성의 정치 활동을 금하고 있었으므로 여성이 당 활동에 참여하면 그를 빌미로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곤 했다. 당내 분위기도 여성에겐 중요한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 클라라는 사만당 지도부에 들어간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러자 클라라는 아주 독창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여성만의 조직을 따로 만들자'는 것. 마침내 1900년 사만당 여성회의가 발족되고 클라라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제정한 것도 클라라였다.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회 인터내셔널 여성협의회에서 클라라는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뉴욕에서 자수산업 여성노동자 수백명이 투표권 획득과 노동조합 건설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 날을 세계 모든 나라 여성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11년부터 시행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3월 8일이면 다채로운 기념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 3월 8일을 여성의 날로
1898년 봄, 클라라는 프리드리히 춘델과 재혼했다. 춘델은 클라라보다 18살 아래의 촉망받는 화가로서, 사민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슈투트가르트 예술아카데미에서 제명당한 인물이었다. 클라라는 아들들의 동의를 얻어 춘델과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체트킨이란 성을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법률상의 절차는 밟지 않은 듯하다.
재혼 뒤, 클라라의 건강은 몹시 나빠졌다. 그러나 클라라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이 무렵 더욱 본격화되어 자신의 활동 영역을 여성문제에 집중한다.
1914년은 클라라 체트킨의 생애 중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온 유럽이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다. 모두들 정체모를 '애국심'에 사로잡혔다. 의회에 진출에 있는 사민당 소속 의원들도 정부가 내놓은 전쟁채권 발행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참전에 동의한 것이다. 사만당 가운데는 클라라와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몇 사람만 참전에 반대했다. 이들은 이 전쟁은 조국을 지키기 위한 '방어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야심어린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참된 사회주의자라면 침략전쟁에 동조해선 안된다고 외쳤다.
사만당 지도부에 몹시 실망한 클라라는 독자적으로 반전운동을 펼쳤다. 인터내셔널 여성협의회 서기 자격으로 스위스 베른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각국 대표 28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반대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당의 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였다. 클라라는 선언문을 직접 썼다. 제목은 <근로인민여성이여!>
"여러분의 남편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의 아들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입니까? ········· 자본가들에겐 이익이 됩니다. ········· 노동자들은 이 전쟁에서 얻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뿐입니다. ········· 살인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당의 방침을 거스르는 건 물론이고 독일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 행위로 클라라는 체포되어 4개월간 보호감호 조치 끝에 중병이 든 채로 석방되었다. 사민당은 클라라를 ≪평등≫ 편집장에서 제명했다. 20년 넘게 몸담아온 ≪평등≫에서 좇겨난 클라라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사민당은 참전파와 반대파로 완전히 갈라졌다. 참전파가 절대다수였다.
이후 클라라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과 함께 스파르타쿠스 단을 만든다. 스파르타쿠스 단은 나중에 독일공산당의 모태가 되었다. 두 달 뒤, 스파르타쿠스 단은 베를린에서 시위를 벌였다. 진압에 나선 에베르트 정권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메링도 피살당했다.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슈투트가르트에 있던 클라라는 무사했다. 곧이어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하고 사민당이 집권한 최초의 공화국이 출범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 공산당 소속 연방의회 의원을 역임하고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클라라는 로자와 카를이 없는 독일 공산당에서 살아있는 신화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그는 1919년 3월 출범한 제3인터내셔녈, 세칭 코민테른에서 여성 서기국 서기장을 맡았다.
독일과 소련을 오가며 일하던 클라라는 1920년 말, 소련에 정착한다. 그는 레닌과 그 부인 크룹스카야와 아주 가까이 지냈다. 소련에서 클라라는 코민테른의 여성정책 수립과 시행에 주력하는 한편 국제적색원조(International Red Help) 의장으로서 미국내 흑인 인권운동과 사형반대운동에 앞장섰다.
- 파시즘을 쳐부수자
클라라 체트킨이 조국 독일에 마지막 모습을 보인 것은 1932년 8월 30일 독일 연방의회 개원식 날이다. 최고 원로의원에게 개회사 하는 명예를 부여하는 연방의회의 관례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 이래 14년 동안 의원으로 재직중인 75살의 노익장 클라라 체트킨은 이날 개회사를 했다. 2시간에 걸친 그의 연설은 녹음 테이프로 남아 있다. 연설 제목은 '파시즘을 쳐부수자.'
나치의 위협에도 아랑곳 없이,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히틀러의 파시즘을 조목조목 비판한 그는 '소비에트 독일의 첫 소비에트 의회의 명예의장이 되어 지금처럼 개회사를 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걱정대로 독일은 파시즘에 의해 정복당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당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클라라는 나치의 위험을 알리는 성명서를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세계 역사상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한 혁명가들은 많지만 클라라 체트킨처럼 여성문제를 자기 과제로 삼고 평생 천착한 사회주의자는 극히 드물다. 그는 '사회주의만이 여성을 진정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또 그를 위해 살았다. 그런 그이니만큼 혁명 후 소련 사회에서 여성들의 변화된 삶을 지켜보며 여러 가지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스탈린의 정치적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았던 것 같다.
클라라 체트킨이 죽은 지 60년 만에 소련은 무너졌다. 소련의 해체를 보았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박은봉 (책과함께 출판사 기획실장)
* 작은책 http://www.sbook.co.kr/
[한국인권뉴스]
첫댓글 그렇군요. 대단한 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