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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조병화
가을&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 뜻대로 가을은 이루어져갑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가을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실로 많은 것들이 끝을 지어갑니다
대지(大地)에선 동식물들이 그 번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그 열매들이 남아갑니다
하늘에선 태양과 구름이 그 가뭄과 홍수를 거둬 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다시, 빈 천지가 마련되어 갑니다
사람에선 사랑과 미움이 그 스스로의 맺음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고독한 혼자들이 남아갑니다
그 열매들을 당신 뜻대로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가득찬 빈 천지에 새 봄을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고독한 혼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흐린 점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당신의 입김으로
티 하나 없이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도시(都市)에선 되도록이면 담가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전원(田園)에선 물가로 둑으로 산록(山麓)으로
되도록이면 잡목림(雜木林), 잡초(雜草) 속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밤에는 별에서 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새로운 별을 찾아
좀 떨어진 곳에서 쉬겠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든 거 다, 당신 뜻대로 살펴 제자리 가려두고
지닌 거 하나 없이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수고는
봄으로 해 주십시오
눈을 다시 돌려 드릴 때
수고의 말씀
봄에 받겠습니다
내일(來日) 어느 자리에서, 춘조사, 1965
거리를 두고 조병화
거리(距離)를 두고
밤이 쏟아져 오는 내 유리창
건너편
고층 빌딩 한구석에
등불이 호올로 밝다
등불이 있는 곳엔 사람이 있을 텐데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람은 호올로 떨어져 있어야 하나 보다
등불 아래 가는 손이
가슴을 지우고 지우고
길어 갈수록 시원치 않은 긴 편지를 쓰고 있나 보다
창문이 점점 밝아 간다
기어코 다 태 버린 재를 밟고
창문에 기대어
유리창을 쳐다보고 있나 보다
나는 저 창 안에 등불이 꺼지기 전에
어두운 층계를 내려가자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은 호올로 떨어져 있어야 하나 보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구름 기둥, 불 기둥 조병화
구름 기둥, 불 기둥
……광야 끝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향하게 하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급기 제13장)
지금 나는 너의 광야 끝에 장막을 치고
떨어진 생명의 보따릴 베고 주야를 샌다
그리운 사람아, 망설이는 사람아
지금 네가 찾고 있는 것은 뭐냐?
생명은 하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라지만 먼 고향
보이지 않는 곳에 네가 있다
구름 기둥으로 너는 나를
불 기둥으로 나는 너를
비치며, 인도하며
서서히 가자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자리
서로 지켜서 가는 자리
캄캄한 밤이면
손을 잡자
`생명은 밝으며 쓸쓸한 것'
지금 나는 너의 광야 끝에
장막을 치고, 발을 씻지 못한 채
떨어진 생명의 보따릴 베고
낮과 밤을 샌다.
쓸개 포도의 비가(悲歌), 동아출판사, 1963
굿바이 조병화
굿바이
지금 무수한 내가 흐트러진 채
내 옆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파리의 골목 골목에서
런던의 공항에서
로마의 분수가에서
혹은 아테네 돌 위에서
……
나와 헤어진 무수한 내가
지금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코리아 나의 하늘 아래 있습니다
코리아는 아시아 동쪽 나의 영주지
눈물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지구엔 어디나 인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정된 시간들 속에서
지구엔 어디나 인간들이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생각을 해 보면 나의 인생처럼
다시는 올 수 없는 자리들
지금 무수한 내가 흐트러진 채
지구 그 자리
시간 밖 저쪽에서 나를 찾고 있습니다
시인이란 만인의 벗이라는데
나의 가슴은 이렇게 어리고 가난합니다
빠이 빠이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성문각, 1957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조병화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산토끼의 귀를 가져 놀라길 잘하나 보다
갈나무 잎새가 지는 소리에도
산머루 가지에 눈 뜨는 소리에도
왜 가슴은 이리 안정할 줄 모르나
아마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사귀긴 쉬우나 오지는 않는 사람들의 말 마디가
귀 안에 늘 머물러
내일이나 모레나 혹은
내 앞에 쌓여 있는 어느 날에
꼭 만날 듯한 낯없는 먼 나라의 회화 소리들이
가는 파동을 쉴새 없이 귀에 전해 주어
지금도 서운한 나 혼자의 날이 지나간다
나 호올로 남기고 돌아간다
오지 않는 사람만 기다리게 하는
그러한 사람의 자리에
우리 어머님은 나를 놔 두시고 가셨나 보다
나의 작은 육체 어느 구석구석에
슬플 줄 모르는 혈액이 흐를까
기다릴 줄 모르는 가는 골격이 끼여 있을까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산토끼의 귀를 가져 놀라길 잘하나 보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나일 강 조병화
나일 강
그저 사정도 인정도 없이
그저 흘러내리는 나일 강은
그저 토색물투성이 붉은 흙의 물결
그저 기운만 센 산골 청년처럼
그저 멋모르고 도시로 내달리는 문맹 청년처럼
이디오피아 청년처럼
그저 나일 강은 흘러내리는 강물
그저 거센 토색물투성이 붉은 흙의 투성이다
인간의 적은 지혜처럼 물결을 골라
범선은 기슭을 따라 강을 기어올라도
나의 작은 머리가 지식을 다하여
유역을 더듬어
강을 따라 강을 끼고 흐르던 일들을 더듬어 기어올라가도
무식처럼 캄캄한 강물의 깊이
나는 한 마리 새처럼
지중해를 건너선
아프리카 다리목에 앉아
`영혼의 불멸'처럼 미지한 흙에 취한다
나일 강은 그저 사정도 인정도 없이 흐르는 물결
그저 기운만 센 산골 청년처럼
그저 글 한 자 모르는 거센 이디오피아 손님처럼
그저 사정도 인정도 없이 내리닥치는 강물
그저 생생한 토색물투성이 붉은 흙의 물결이다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성문각, 1957
낙엽 조병화
낙엽&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서울, 성문각, 1957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남남 조병화
남남
□ 10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는 네 하늘이 되고 싶어라
울타리도, 칸막이도
경계도 없는
넓은 넓은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있는 건 오로지
생명, 희열, 영광, 무한, 사랑과 신뢰
끝없이 피어 만발한
빛의 물결
네 그 대륙이 되고 싶어라
피곤에 지친 영원한 네 휴식
그 푸른 풀과 바람
그 둥우리가 깃들어 있는
넓은 넓은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남남, 일지사, 1975
낮은 목소리로 조병화
낮은 목소리로&
□ 1
가장 많은 하늘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가장 많은 하늘 아래 빈 그 자리
아름다움이며 슬픔이며 사람이 사는 곳
가장 많은 눈물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 6
보이옵는 자리에 항상 계시옵니다
보이지 아니하옵는 자리에 항상 계시옵니다
얼굴, 눈, 코, 귀, 목, 몸, 나직이 보이시오며
보이지 아니 하옵는 자리에 항상 계시옵니다
□ 15
주어진 내 자린,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니옵니다
보이옵는 세계도 보이지 아니 하옵는 세계도 아니옵니다
존재의 세계와 부재의 세계를 떠돌며
항상 옆 자리 뵈옵는 자리, 바람의 자리옵니다
□ 18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하나를 갖고 싶어 하옵니다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가장 먼저 걸 갖고 싶어 하옵니다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단 하나 나를 갖고 싶어 하옵니다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단 하나 갖고 싶어 하지 아니 하옵니다
□ 40
생각을 항상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생각을 항상 비쳐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생각을 항상 자리잡게 하여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생각 속에 항상 이 목숨 다 하여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 43
아름다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지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평화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은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 45
시간은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변하오며 지나가옵는 것은 사람이올 뿐
시간은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 81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주시옵신 가장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참으로 `위대'하옵니다 그 마지막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그 `있음'.
낮은 목소리로, 중앙문화사, 1962
너와 나는 조병화
너와 나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버린 카렌다 속에, 모오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아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패각의 침실, 정음사, 1952
노아 조병화
노아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方舟)를 지어라……(창세기 제6장)
사랑하는 사람아
이 `밤의 홍수' 속에서
너와 나는 사랑으로 방주를 짓자
사랑해도 사랑해도 사랑이 모자라면
나머지는 그리움으로 짓자
형제들의 홍수 속에서
카인(=얻음)과 아벨(=사모)의 홍수 속에서
이 `잔인의 홍수' 속에서
입술을 마주 댄 사람아
너와 나는 그리움으로 방주를 짓자
방주가 부서지면
마주 가라앉자
깊은 자리로
깊은 자리로.
쓸개 포도의 비가(悲歌), 동아출판사, 1963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조병화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에
훅,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
당신의 말씀 그 목소리
얘, 너 뭐 그리 생각하니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
너대로
다 그냥 사는 거다
잠깐이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에
훅,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
당신의 목소리 그 말씀
얘, 너 뭐 그리 혼자 서 있니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
다
너대로 그냥 사는 거다
그게 세상
잠깐이다.
어머니, 중앙출판사, 1973
다도해 조병화
다도해
여기는 바다가 아니올시다
그대로 수록색 치는 호수올시다
기암 절벽이 아니올시다
그대로 바가지를 엎어 띄운 섬들이올시다
저것이 어째서 풍선으로만 보인답니까
날개를 활짝 편 나비들이올시다
장미꽃 도미와 보라색 도미가
수심 벌판에 뜨고
나를 실은 백조호는
방금 작별한 요양원의 소녀처럼
해초원에 각혈을 계속합니다
이곳에선 너절거리는 철학독본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란과 같이 연한 눈을 하고
그대로 수록색 치는 호수에 뜨면 됩니다
여기는 바다가 아니올시다
어디선가 남양의 열매처럼 익어가는 그대로 호심이올시다.
인간고도, 산호장, 1954
도화사 조병화
도화사(道化師)
오히려 이국인들끼리 다정한 거리에 태어났소
그것이 과오의 제1원인인가 보
―아무려면 어떤가
인간에서 절연된 인간이랍니다
거리마다 이면(二面)의 표정이오
거리상(距離上)의 도화사들이오
지도를 펼치면 다 나의 향토
향토 밖에 서서
잃어 버린 엄마 엄마의 이름을 부르오
누구의 아들이기에 나는 이리 약할까
미련이 있으나마
단번에 부정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에
나는 나의 삶을 봉사해 왔소
제전(祭典) 끝에 남은 것은
아 찬란한 공허
전율이라오
내일을 황홀히 기다리는 절망 속에
내일의 도래를 두려워하는 심사라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미세스와 토오스트 조병화
미세스와 토오스트
직업부인 미세스․최가
쇼․윈도우 안에서 밀크와 토오스트를 든다.
채권이 찻종 옆에 와 놓인다.
미세스․최는
전쟁을 연상하기엔 너무나 귀여운 채권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타너스 그늘에
햇빛이 조는 유월(六月) 어느 오후(午後)
하루의 지출과 일급(日給)이
오래간만에 밀크와 토오스트를 대접한다.
입을 벌린 나이롱 핸드백 속에서
싸아젠․루이스와 담배를 물고 찍은
남편의 사진이
미세스․최의 얼굴을 기웃거린다.
군우리(里) 전투에 쓰러진 남편의 소식을
미세스․최는 가끔 잊어버린다.
슬픈 기억은
하루만 견디면 사라진다.
플라타너스 그늘에
햇빛이 조는 유월(六月) 어느 오후(午後).
직업부인 미세스․최가
쇼․윈도우 안에서 밀크와 토오스트를 든다.
전쟁이
온종일 토오스트 집 쇼․윈도오에 기대 선다.
패각의 침실, 정음사, 1952
밤의 이야기 -1- 조병화
밤의 이야기 -1-
□ 1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네,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네,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네, 죽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네, 죽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눈물을 보았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슬픈 나라를 보았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당신을 보았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네, 마지막 그 눈을 보고 있습니다.
□ 2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생의 변두리
시가 가끔 찾아 주는 곳
참나무 소나무 머루 다래
싸리꽃이 총총히 피어 있는
잡나무 숲
당신도 한 번은 찾아 줄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곳
십 리 이십 리 삼십 리 뜸뜸이 떨어져서
아침을 기다리는 곳
울타리 나직이 불을 괴고
밤을 새워서도 이야기가 남는 곳이다
세상을 걷고 떠나는 사람이
하늘로 직행을 하는 곳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곳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생 변두리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리
밤과 낮이 소곤소곤
헤어지다 만나곤 하는 곳이다
□ 3
밤은 모든 것을 낳는다
이유도
까닭도 없이
밤은 낳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이
낳아선 없어질 때까지
밤은 그저 낳는다
괴로운 것은 인생일 뿐
밤은 아픔을 낳는다
그리고 밤은 바꾼다
이유도
까닭도 없이
밤은 바꾼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이
바꾸어선 없어질 때까지
밤은 그저 바꾼다
괴로운 것은 인생일 뿐
밤은 모든 것을 바꾼다
없는 자에겐 없는 대로
있는 자에겐 있는 대로
괴로움과 아픔
―어둠을 같이 재워 주고
밤은 너와 나의 생각을
같이 하여 준다
밤이야기, 정음사, 1961
밤의 이야기 -2- 조병화
밤의 이야기 -2-
□ 1
묵은 역사처럼 밤이 내리면
나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처럼 고요하다
고장난 엔진과 녹슬은 철판 사이를 더듬어
기어오르는 바닷고기처럼
빌딩과 계단을 내려
적적한 사색
지하실 입구를 돌아 나오면
휘어진 안테나
걸린 시그널.
수없이 피를 흘린 인간의 지성은 지금
묵묵히 스스로 스스로의 피를 흘리며
밤은 시간에 몸을 풀어놓는다
어둠에 싸인 나의 시력은
가라앉은 고성능 프리즘
잠망경처럼 때때로 긴 목 위에 솟아올라도
비쳐드는 풍경은 어두운 공동 묘지
(아니면)
쓸쓸한 밀회 장소.
뜨거운 수명에 스스로 매몰해 간 고독한 천재들은
냉랭한 별들의 운석처럼 입을 다물고
드문드문
부엉새 같은 등불들이 비에 젖어서
인기척 적적한 도시의 거리
―밤은 나에게 잠을 주지 않는다
밤이여! 만민의 어머니 같은 어두운 가슴이여
―없는 자의 소유여
―누구의 소속도 아닌 이 생존의 위안처여
어둠은 내리어
―묵은 역사처럼 밤이 밀리면
부엉새 같은 등불 아래
―적적한 사색
―시간과 사람은 바뀌어
나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처럼 고요하다
서울, 성문각, 1957
밤의 이야기 20 조병화
밤의 이야기 20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겐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밤이야기, 정음사, 1961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조병화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봄은 쓸쓸한 솔개의 눈알 속에서
겨울을 기거하고 있었다
온 하늘 푸른 곳
사방이 없는 자리
바람이 날개를 기르는 자리
눈을 기르는 자리
빈 것이 생명을 기르는 자리
봄은 시장한 솔개의 눈알 속에서
겨울을 기거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체온을 이어서
황량한 시간
작별을, 기거하고 있었다
2월이 오고, 3월이 오면
솔개는 홀로 하늘에서 쓸쓸하다
마침내 스스로의 이름으로 하여
쓸쓸한 천사처럼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온 겨울, 때를 기거하고 있었다
인간이 영원을 그리며
한동안
쓸쓸한 몸 속에서
생을 기거하고 있듯이.
平?共存)의 이유(理由), 선명문화사, 1963
비 조병화
비&
어제는 비를 맞으며 빗속에서
속삭이고 사랑을 하고
해 저물도록 비와 같이 깊은 사랑에 젖었는데
어제는 하늘에 구름이 뜨고 하늘에서
목마를 때 단비가 내리고
오월의 잎새에 단비가 내리어
나무를 키우고 노래를 키웠는데
이제는 비가 내려도 어제의 비가 아니다
사랑을 해도 어제의 사랑이 아니다
노래를 불러도 어제의 노래가 아니다
어머니의 젖처럼 신비하던 하늘도
고향의 공기처럼 즐겁던 오월도
빗물에 비를 타고 맑은 하늘이 내리던 서울도
어제처럼 가고
하늘에 구름이 아닌 구름이 뜨고
구름에서 비가 아닌 비가 내리고
죽음의 재가 비를 타고 온종일 내린다는
―오늘은 어두운 오월이다
어제는 하늘에 우물물 같은 구름이 뜨고
하늘에서 목마를 때 목마른 단비가 내리어
개울 고기를 키우고 열매를 키우고 노래를 키웠는데
어제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하늘이 개고
빗속에 비를 맞으며 사랑을 하던 자리엔
새파란 풀이 밭을 이루고 이야기가 남았는데
이제는 비가 내려도 개지 않는 하늘이다
사랑을 해도 사랑이 빈 사랑이다
노래를 불러도 노래가 빈 노래이다
서울, 성문각, 1957
비는 내리는데 조병화
비는 내리는데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그대로 어둠이 되는 미도파 앞을 비는 내리는데
서울 시민들의 머리 위를 비는 내리는데
비에 젖은 그리운 얼굴들이
서울의 추녀 아래로 비를 멈추는데
진종일을 후줄근히 내 마음은 젖어내리는데
넓은 유리창으로 층층이 비는 흘러내리는데
아스팔트로 네거리로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대로 발들을 멈춘 채 밤은 내리는데
내 마음 속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내 마음 밖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막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가난한 방에 가난한 침대 위에
가난한 시인의 애인아……어두운 창을 닫고
쓸쓸한 인생을 그대로 비는 내리는데
아무런 기쁨도 없이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하루가 오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미도파 앞에 발을 멈춘 채 내 마음에 밤은 내리는데
서울, 성문각, 1957
사이공 조병화
사이공
이곳은 여자들이 고운 도시옵니다
이곳은 나무가 많은 그늘진 도시옵니다
이곳은 불란서 말이어야만 통하는
동양의 이역, 작은 불란서 파리옵니다
멀리 사이공 강을 타고 들어온 외국 선박은
지금 극동의 초입을 돌아와
동양의 물을 마시며
강변가 부두에 바람을 찾아 나온
삿갓 쓴 월남의 남녀들
이 고장 사정은 내 고장 사정과 비슷한 고장
김 서방 이 서방 박 서방
혹은 옥희 순희 정희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오래간만에 보는 동양의 얼굴들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처럼 가난들 하옵니다
나는 정객도
관리도 아니옵니다
다만 한구석 적(籍)을 가진 인간 주민
이곳은 여자들이 고운 도시옵니다
이곳은 나무가 많은 그늘진 도시옵니다
이곳은 불란서 말이어야만 통하는
동양의 이웃 작은 불란서 파리옵니다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성문각, 1957
샘터 조병화
샘터&
빨간 태양을 가슴에 안고
사나이들의 잠이 길어진 아침에
샘터로 나오는 여인네들은 젖이 불었다
새파란 해협이
항시 귀에 젖는데
마을 여인네들은 물이 그리워
이른 아침이 되면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태양을 안고
잎새들이 목욕한
물터로 나온다
샘은 사랑하던 시절의 어머니의 고향
일그러진 항아리를 들고
마을 아가씨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따르면
나의 가슴에도 빨간 해가 솟는다
물터에는 말이 없다
물터에 모인 여인들의 피부엔
맑은 비늘이 돋친다
나도 어머니의 고향이 그리워
희어서 외로운 손을
샘 속에 담그어본다
해협에 빨간 태양이 뜨면
잠이 길어진 사나이들을 두고
마을 여인네들은 샘터로 나온다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해가 물든다
꿈이 젖는다.
패각의 침실, 정음사, 1952
서산나귀 조병화
서산나귀
말은 말이로되 나귀올시다
서산나귀올시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지지리 못생긴
서산나귀올시다
뛸 줄도 모르고
날을 줄도 모르고
그대로 꾀도 부릴 줄 모르는
한 마리 서산나귀올시다
긴 긴 길을
긴 긴 세월을
말은 말이로되 고집만 센 나귀올시다
한평생 일복만 타고난 서산나귀올시다.
인간고도, 산호장, 1954
시간은 마냥 그 자리 조병화
시간은 마냥 그 자리
생각을 더듬으면서
생각을 여행하며
생각을 찾는 사람에겐
시간은 마냥 그 자리
어딜 가나 자욱한 시간
변하는 건 인간뿐이다.
천 년이 눈 앞에 있고
이천 년이 눈 앞에 있고
변하는 속에서
변하는 걸 살며
예까지 왔다.
바다로 시작하는 이곳, 육지 끝머리
대서양 언덕
솟은 십자가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쓰러지는 자리에서 쓰러진다.
변하는 건 인간사
변하는 속에서
시간은 마냥 그 자리
두고 가며, 떠나는 걸 산다.
내 고향 먼 곳에, 중앙출판공사, 1969
안녕하신지요 조병화
안녕하신지요
`……,안녕하신지요? 저번 일요일에
금문교 갔다가 그쪽 상점에서, 우연히
이 엽서를 발견하고
파이프 문 아버지랑 산보 나간다고
우산 들고 나가는 아이들 모습이
정말 아버지 생각나게 해서,……'
이렇게 시작한 네가 보내 준
쥐의 가족을 그린 그림 엽서
받아 보고, 나는 어두운 방에서 혼자 울었다
파이플 물고 있는 아버지 쥐와
우산을 접어 든 새끼 쥐와
손목을 잡고 있는 어머니 쥐와
손수레에 타고 있는 꼬마 쥐와
이것들을 이끌고
하루를 들로 나가고 있는
가장의 당당한 위풍
파이플 물고 손수레를 밀고 있는
그 가장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그렇지 못한 나를 소리없이 울었다
나는 약하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풀리지 않는 이 냉혹
이 냉혹한 어둠 속에서 나는 혼자다
그 혼자를 살아오면서 이 어두운 시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먼 훗날 이러한 나의 생애가
너희들의 눈물이 될는지
수치가 될는지는 모르나
나의 시는
나의 유서
나를 다하여 나의 운명을 살아도
가장으로서의 이 어둠
미안하기 짝이 없다
다만 고마울 뿐
혼자서 운다.
달의 파이프, 일지사, 1978
어느 여행자의 독백 조병화
어느 여행자(旅行者)의 독백(獨白)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세상
으로 걸쳐 열려 있는
이 빛의 벌판
제한된 목숨 살며
항상 떠나는 생각
헤어지는 연습하며
낮과 밤을 산다
있는 것이 없는 거
없는 것이 있는 거
이 맑은 충만
이 순간
임재(臨在)와 부재(不在)를 왕래하며
덧없이 떠날 생각
연습을 하며
연습을 하며
작별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생(生)과 사(死), 한 몸에 지녀
한 몸에서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서로 돕다
몸 허물어지면 그뿐
땅으로
하늘로
아, 이별
혼자서 보이지 않는 저 세상
그곳으로 또 떠나는거지.
먼지와 바람 사이, 동화출판사, 1972
어느 존재 조병화
어느 존재(存在)
넌 저 세상에서 무얼 보았는가
네,
터무니없이 거대한
실로 거대한
꿈의 나무를 기어 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아래 뿌리도 보이지 않는
위 가지 끝도 보이지 않는
좌우 넓이도 폭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로 거대한 안개의 기둥같은
꿈의 나무를 기어 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더듬더듬 더듬거리며
그 중천을 기어 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그걸 바라다보면서, 멀리
나는 당신이 계실 듯한 이 방향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더듬더듬 더듬거리며
이 절벽
이 중천을 기어 올랐습니다
오로지 그뿐
실로 거대한 곧은 꿈의 나무
그 중천을
묵묵히, 그저 묵묵히
홀로 스스로를 기어 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안개로 가는 길, 일지사, 1981
언양 미나리 조병화
언양 미나리
부제 : 정인섭 시인 옛고향 지나며(70.4.11)
보게, 자네 언양이라는 곳 아나
미나릿골 말일세
경부 고속도롤
대구서 올라타면 영천, 경주
를 돌아
단숨에 경상도 언양
지금은 하이 웨이 인터체인지로 변했지만
옛부터 소문난 미나릿골
맑은 시내 산간 마을
동으로 돌면 울산
남으로 내달으면 부산
앗다, 쏜살같이 뻗어버린 신식 신작로
산천이 쭉쭉 치마 벌린 길이더군
그거 또한 온통 봄빛
눈부신 개나리, 살구
바람이 뒹구는 보리밭
하늘의 노고지리
가슴 시원한 신라 서라벌
서울은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 꼬리
으스스 찬 방 두고 떠났는데
영 너머 이곳 내려앉은 남방
가시나 허벅지 같은 언양 미나리
동동주 서너 사발
취한 살구꽃
노을에
너울
너울
정박사 옛고향
곽, 김, 김, 모, 신, 전, 정, 조, 조, 조
한바탕 왁자지껄
앉았다 떠나는 사월, 칠십 년
보게, 동동주 미나리 두고 가는 자리
그 맛 아나
가시나 허벅지 같은 맑은
언양 거 말일세.
오산(烏山) 인터체인지, 문원사, 1970
역 조병화
역&
정거장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오지 않는 것만 기다리고 섰다
낯없는 사람들끼리 모여들다
낯없는 방향으로 헤져 간 뒤엔
대리석 기둥과 내가 도로 남는다
그래도 나는 가슴을 안고
쮜리히 행 급행 열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
의젓한 길손
한 노파가 개찰구 모퉁일 돌아온다
내 앞에 다정히 선다
적선을 애원한다
통하지 않는 회화이지만
나는 먼 나의 고향에서 하던 버릇을 잊지 않았다
해진 포킷 속에 허수한 손을 넣으면
낡은 인정만이 미끈거린다
아 나도 또 하나 당신과 같이
노자 없는 길손이었는걸―
언제까지나 정거장 등불 아래서
오잖는 것만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인가
이 정거장만은 영 경유하지 않을 먼 지구
어느 지점을
쮜리히 행 급행 열차는 질주한다
그 수레바퀴 소리도 한없이 멀어져 가는
후방 종점에
대리석 기둥과 내가 남아 간다
밤 열 한 시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옛 엽서 조병화
옛 엽서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연락선이 왔다 간다는 항구로
남행열차는 쉴새없이 달렸습니다
삼등실 좁은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흐르고
수족관에 뜬 어린 시(詩)같이
싹튼 보리밭이 보이고
포플러가 보이고 늙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말소리도 잠들어버린 찻간에
나는
중앙아시아 어느 바다로 가는 것일 게니 하고
졸음 없는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버리고 싶은 유산, 산호장, 1949
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오산(烏山) 인터체인지, 문원사, 1970
오후 일곱 시 조병화
오후 일곱 시
시(詩)를 경멸하면서
나를 회의하면서
거리로 간다
거리를 비벼 간다
주로 헛된 낭만을 걸어가며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연인이 되고 싶다
낯없는 여인들께 향수를 느낀다
먼 나라의 소도시를 걸어가는 생각이다
휘파람을 불고 싶다
샹들리에 그늘에서
순서를 잃은 과거가 당황한다
아 나의 소망아
살아서 한 번 미래를 걷고 싶다
거리를 간다
거리를 비벼 간다
나의 위치는
군상이 명멸하는 곳에서 또다시 안정하다
휘파람이 거리를 간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은혜 조병화
은혜(恩惠)&
부제: ― H․헤세 잠 위에……1962년(年) 8월(月) 9일(日) 그의 별세(別世)의 날
`잠은 긴 고독(孤獨)의 승리(勝利)이다'
85세, 작은 인생의 시간 속에서
먼 정신(精神)의 날개처럼
깊은 사색(思索)에 앉아
외로움과 즐거움이 같이 흐르는 곳
빛과 어둠이 같이 흐르는 곳
많은 혼자 속에 물러 앉아
스스로 지닌 것을
스스로 찾아
당신은 넓은 혼자를 살아 왔습니다
생명의 폭풍우(暴風雨) 속에서
청춘의 검은 방황(彷徨) 속에서
스스로의 영혼(靈魂)으로 안내해 준
당신은 최초(最初)의 내 안내인(案內人)이었습니다
허허(虛虛)히 밖으로부터 안으로 가득히
내 최초(最初)의 목소리가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검은 빛처럼 멀리
당신은 내 혼(魂)이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偉大)했습니다
동양(東洋)의 지혜(知慧)와
서양(西洋)의 사색(思索)이
생명의 자리를 깊이 높여서
스스로 만든 스스로의 집, 지금
당신은 고이 누웠습니다
하나의 생명을 다 하여
`고독(孤獨)한 것'을 완료(完了)한, 그
승리(勝利) 속에
고이 잠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時間)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 양지사, 1964
의자 조병화
의자(椅子)
□ 3
내일(來日)에 쫓기면서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간(時間)의 숙소(宿所)를 더듬으며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차례에 쫓기면서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 8
보이는 자리엔, 낙서를 하지 말자
`옛날에 어느 분이, 이 의자(椅子)에……' 하고
나를 찾을 때
―그 생각 속에 있자
보이는 자리엔, 낙서를 새기지 말자
`옛날에 어느 분이, 이 의자(椅子)에……' 하고
나를 찾을 때
―그 시간 속에 있자
보이는 자리엔, 낙서를 하지 말자
`옛날에 어느 분이, 이 의자(椅子)에……' 하고
나를 찾을 때
― 그 생각 속에 있자.
시간(時間)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 양지사, 1964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여숙, 정음사, 1956
잃은 시간 속에서 조병화
잃은 시간 속에서
긴 방파제로 싸인 뮤제 쟝․콕토
석탑에 기대어
눈이 가는 대로 해안선을 쫓아
선을 근다.
이곳은 망똥의 서쪽 해안
억세게 몰고 오는 바람의 물결
바다의 물결
어리벙벙 머리칼을 날리며
이 그림
내일의 회상을 그린다.
한번 뜨면 그 뿐,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의 장소
햇빛의 고향
슬픔과 기쁨, 같이 머물다 가는 곳
아, 생명은 유한한 거
육체는 소멸되며
어겼나 상실된 시간들이여
생각을 쫓으며
물결과 바람을 쫓으며
바라다 보는 유럽의 풍경
이어서 인간들이
물가로 모인다
오, 시간이여
상실이여
푸른 방파제 끝머리, 잃은 시간 속에서
나를 그린다.
내 고향 먼 곳에, 중앙출판공사, 1969
임해 교실 조병화
임해 교실
하얀 패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산머루처럼 익어 가던
생도들의 까만 눈알들이
전생에 혼 떼어
파란 해협의 어란(魚卵)처럼 맑다.
고사리 같은 하얀 목들은
바다를 향하여 날로 길어진다.
하얀 패각 속에서
어란처럼 맑은 눈알들에 끼여
아내와 싸우고 나온 기억을 잊어 버린다.
수평에 뜬
병원선을 바라다본다.
비내리는 날이면
나의 임해 교실은
홀리데이―.
버밀리언 표지 아래 누워
발진티푸스에 걸린 바다를 내려다본다.
생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쓴다.
아시아 작은 반도
남단으로 밀려와
하얀 패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패각의 침실, 정음사, 1952
장미와 도적 조병화
장미와 도적
아내가 집을 나가던 날.
장미를 훔쳐다 침대에 앉힌다.
행복이 계속하던 날의 불안이
침실에 고인다.
졸업식 날의 조세트 의상을 입은 채
장미는 처녀로 늙고 싶어한다.
전쟁에 나리낑이 된 딸처럼
제멋에 지쳐 산다.
장미에선 미련한 거만이 흐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레인 코트는 다시금
안개 깊은 해협의 층계에서 나를 부른다.
아내와
해협의 하늘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날.
패각의 침실, 정음사, 1952
종로 네거리 조병화
종로 네거리
오후 다섯 시면 같은 자리
고오 스톱 신호등 아래
푸른 불 기다리며
멍, 하늘을 본다
썬 글라스에 비쳐드는
속세 풍경
기억 깊은 골짜기로
템즈
세에느 내려 흐르고
라인
테베레
나일
미시시피 강둑의 바람
팔랑거리는 나뭇잎
미끄러운 냄새
종말에 가까운 여로
노을 길다
건너서 길가 `낭만' 비어 홀 등
들르면
헐건한 얼굴들
컬컬
돌아서면 영 빌 자리
오늘도 밤 깊었네
이젠
자
종로 네거리
삼백육십일
오후 다섯 시 같은 자리
고오 스톱 신호등 아래
눈, 비 내려도
푸른 불 기다리며
멍, 세월을 본다.
숙(假宿)의 램프, 민중서관, 1968
주점 조병화
주점
일체의 수속이 싫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뚫고 드는
우울을 견디지 못해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나는 먼저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해본다.
필요 이상의 예절을 지켜야 할
아무런 죄도 나에겐 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지극히 우울해진다
한때 이 거리가
화려한 꽃밭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기 싫은
그날이 있어부터
이 거리의 회화를 나는 잊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러한 수속조차 이미 나에겐 권태스러워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눈 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산다는 것이 권태스러운 일이 아니라
수속을 해야 할 내가 있어
그 많은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어
눈 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아버지가 된 그 일이
마침내 어쩔 수 없는 내 여생과 같이
패각의 침실, 정음사, 1952
죽음처럼 허탈이 조병화
죽음처럼 허탈이
죽음처럼 허탈이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허망이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고독이 어디 있으랴
젊어서 오만했던 죽음의 포기
젊어서 초월했던 죽음의 감상
젊어서 무관했던 죽음의 적막
지금 눈 앞에 오락가락
서성거리며
너와 나
가는 자, 남는 자
작별의 거리(距離)에서
죽는 자의 말을 듣는다
죽는 자의 눈을 본다
죽는 자의 목을 본다
죽음처럼 약한 게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가련한 게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무언한 게 어디 있으랴.
어머니, 중앙출판사, 1973
차창 조병화
차창
사랑이라는 것은 이와도 같이
외로운 시절의 편지라고 생각을 하며
차창에 기대어
추풍령 마루를 넘으면
거기 낙엽이 지는 계절이
늙은 산맥에 경사지고
인생과 같이 외로운 풍경은
언젠가는 나도 돌아가야 할
그날의 적막과도 같이
긴 차창에 연속하였습니다
1952년 12월
정오의 태양이 파란 가슴에 고여들고
나는 먼 보헤미안 시절의 그와도 같이
차창에 기대어
사랑이라는 것은 이와도 같이
외로운 시절의 편지라고 생각에 잠겨갔습니다.
인간고도, 산호장, 1954
천상과 지상 조병화
천상(天上)과 지상(地上)
하늘은 하나
푸른 품에
만민의 인간, 사랑을 품고
마냥 넓지만
지구는 지금, 한 점의 흙덩이
온 몸에 불을 안고
하늘을 돈다.
선녀의 잠자던 자리
인간의 꿈 품던 자리
약속한 자리
시간은 화약에 삭고
지구는 지금, 살을 찢는 가시방
줄줄
방어선
공격선
홈 투성이
국경이라는 선에서
목숨이 탄다.
하늘은 항상 하나
별밭에
내일은 자지만
인간이 사는 별
지구는 지금, 굳어버린 흙덩이
온몸에 불을 안고
하늘을 돈다.
별의 시장(市場), 동화출판사, 1971
초상 조병화
초상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버리고 싶은 유산, 산호장, 1949
추억 조병화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버리고 싶은 유산, 산호장, 1949
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하루만의 위안, 산호장, 1950
학 조병화
학(鶴)&
―뉴욕 북교(北郊)에 있는 수화(樹話) 김환기지묘(金煥基之墓)(1913. 2. 27 ― 1974. 7. 25)에서 강신석화백(姜信碩畵伯), 허종(許鍾) 교수 안내를 받고
꿈결 같소
뉴욕 북교(北郊), 이곳 켄시소
눈 덮인 공동묘지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두고 다시 만나다니
세월이 꿈결이요
인생이 꿈결이요
그러니까 1966년 여름
그곳 만하탄, 형의 아뜨리에에서
포도주에 취해가며 껄껄 세상 잊고
웃어댔던 것이 어제 같은데
지금은 이곳 남의 나라 공동묘지에서
형은 하얀 눈에 덮여 있구려
백년, 천년, 만년이 그대로 침묵
멋있던 형의 모습
그 웃음
그 유모어
다시 들리지 않는
이 산바람
조형, 우리 한국인이 왜 건강한지 아오
산삼이 썩어 내리는 약수를 마시기 때문이오
이렇게 한국의 산천을 칭송하던
형이
이곳 외진 남의 나라 공동묘지에
프레드릿히니, 헨리니, 죠지아니, 그로리아니
토마스니, 제퍼슨이니, 마리아니
하는 묘명 사이에 끼어 있으니
마침내, 한국 대표로 와 있는 거 같구려
그런데 이곳에선 왜 그리 키가 작소
살아서 키다리 멋쟁이 화백이었던
형이, 이곳에선 너무 키가 작구려
그러나 그게 좋소
아담하오. 겸손하오. 아름답소.
술 한 잔 따라 놓고 향 피우는
바람 속, 이 마음
생전에 술 한 번 크게, 흐뭇하게 내지 못한
이 초라한 인생, 용서하소
아, 하늘은 높구나
올려다보는 겨울 찬 하늘
흰구름 한 점
훨, 훨, 학의 모습
형의 모습
형은 그곳에서 학으로 떠 있구려.
안개로 가는 길, 일지사, 1981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어머니, 중앙출판사, 1973
혜화동 로오타리 조병화
혜화동(惠化洞) 로오타리
가을비 멎은`혜화동'로오타리 저녁 부근은
으스스 그림자 없는 슬픔
`베를레에느'의 슬픈 가을보다
내 가을이 더욱 슬프구나
사랑하던 사람도 슬퍼하던 사람도
가슴에 젖어지는 어젯날의 꽃송이
우수수 낙엽이 내리는
가는 정이 차구나
비야 내리다 멎고
마음은 줄줄이 고이는 저녁
아픈 사람아
두고 가는 정에 서 있는 가로등
홀로를 둘둘 말고 살아 있는
가을 저녁이
가을비 멎은 `혜화동' 로오타리
으스스 그림자 없는 슬픔이 차다
서울, 성문각,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