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이 이야기를 성경만화에서 보고 일기장에 옮겨 그린 적이 있다. 말 풍선에 야곱이 “두렵도다 이 곳 이여…” 하는 대사도 적어 놓았다. 당시 어려웠던 집안 형편 때문이었는지 야곱이 고생스런 광야 길에서 노숙하며 하나님을 만난 것이 남 얘기 같지 않았나 보다. 그림 아래에는 나한테도 좀 나타나 달라는 두서 없는 기도문도 썼다.
그 후에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던가? 책에 언급된 어떤 교수님의 이야기처럼 돌아보면 인생의 큰 고비마다, 예배와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신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때로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이렇게 믿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말씀을 묵상하거나 찬양을 부를 때의 깨달음이나 감동, 교회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도 내 종교적 감수성이나 의 때문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처럼 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 수도 없어서 인생은 해를 거듭할수록 배배 꼬이다 못해 엉킨 실 뭉치 같다. 하나님이 끌고 가셔야지 내 밑천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말고는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나도 이 부분에서 자신 있던 적이 있다. 대학만 졸업하면 아주 세상을 다 바꿔놓고 하나님이 ‘멋지게’ 쓸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선교 단체 생활이란 것이 냉철하게 자기 내면과 세상을 보게 하기 보다 젊은 가슴에 불만 댕겨 놓는 면이 있었다. 그렇게 거품이 커지다 보니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외침 속에는 언제나 세상적인 성공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었다. 더 심각한 건 그걸 내 자신이 잘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공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기독교 사역자’가 되었다면 만족했을까? 졸업 후 적도의 나라에서 3년을 살다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 속았다고 생각했다. 서른이 되기 전 이제 청년 시절의 객기는 마지막이라며 갔던 일터에서는 천국이 정말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 자체가 내게 충격이었다.
그러다 다 포기하고 남들처럼이라도 살아보자고, 한 마디로 돈 벌러 갔던 직장인 학원에서 삶이 풀렸다. 여유 시간에 말씀을 배우러 다니며, 인생의 길과 하나님에 대해 오해했던 부분을 많이 회복했다. 길가에 나무와 풀 한 포기에도 감동했고, 살아있음을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드는 창조적인 작업이 그 때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나누는 의미 있는 대화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서든 여전히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힘 다 빠졌을 때 야곱에게,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나도 만난 것이다.
야곱에게 벧엘이 끝이 아니었듯이 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은 지금의 문제들로 엎치락 뒤치락을 한다. 세속적 취향에 흔들리기도 하고, 이리 저리 머리 굴리며 하나님과 대치하기도 한다. 예전보다 내 자신에 대해 정직한 탓에 속도감 마저도 현저히 떨어졌다. 하지만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은 내게 더욱 굳건하다. 그 다음 벧엘로 나를 이끌고, 마침내 나를 얼굴과 얼굴로 만나주실 줄을 믿는다. 또 한 번의 벧엘이 가까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