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주 교수의 세계사여행]
제2차 세계대전(상) - 대전의 원인
세계대공황 그림자, 파시즘 침략 마성 깨우다
<사진설명> ① 오스트리아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는 독일군. ②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 ③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장면. ④ 스페인 내전시 우파 지도자 프랑코 장군. ⑤ 만주의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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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독일군은 국경에 드리워진 차단막을 제거한 후 물밀 듯이 폴란드로 쳐들어갔다. 급기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그토록 처절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왜 유럽 열강은 재차 전쟁을 벌였을까?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린 유럽 각국은 평화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이의 재건과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열망도 잠시뿐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파시즘이 힘을 얻게 됐다. 드디어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파시스트들의 침략 본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서구 전승국들의 분열적인 모습과 유화적인 대응으로 더욱 기고만장해진 이들의 모험으로 인해 세계는 재차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유럽, 평화 재건·유지 위해 노력
누가 뭐래도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스트 국가들의 침략정책으로 발단됐다. 즉, 생활권 확보를 향한 파시즘의 침략적 본성이 전쟁 발발의 근본 원인이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 맨 먼저 세계평화를 위협하면서 군국주의의 마수(魔手)를 드러낸 국가는 일본이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중국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령했다. 국제연맹이 이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자 일본은 보란 듯이 국제연맹을 탈퇴(1933)해 버렸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 행동과 이에 대한 국제연맹의 무기력한 대응은 다른 독재자들의 야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나치가 행동을 개시했다. 총리 취임 직후 히틀러는 독일의 군비증강을 막고 있던 국제연맹을 탈퇴(1933)하고 독일군 재건에 착수했다. 서구 민주진영을 상대로 도박을 벌일 준비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로카르노 조약(1925)에 의해 비무장지대화된 라인란트로 독일군을 진주(1936)시켰다. 이의 성공에 고무된 히틀러는 더욱 노골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기 시작했다. 같은 게르만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1938. 3)한 데 이어 이듬해 봄에는 체코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마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국제연맹의 취약성을 간파한 그는 제국주의 시절 패배의 치욕을 씻고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의도하에 에티오피아를 침공(1935)했다. 이어서 국제연맹의 경제제재에 반발해 아예 연맹을 탈퇴했다.
지속적으로 침략 정책 추구
각개 약진하던 파시스트 국가들은 스페인 내전(1936~39)을 계기로 서로 결속했다. 내전 중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을 공동 지원하면서 가까워진 독일과 이탈리아가 동맹을 체결(로마-베를린 추축, 1936)했던 것이다.
이듬해 일본까지 가세하면서 이른바 방공협정(Anti-Comintern Pact, 1937)이 탄생했다. 대표적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결속한 것이었다. 이들이 손잡은 이유는 단 하나, 지속적으로 침략정책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의 침략정책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왜 전승국들은 이러한 독재자들의 침략 행동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전후에 서구의 열강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추구했고, 그러다 보니 파시스트들의 침략에 대해 묵인 또는 양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 열강 상호 간에는 고립주의정책(Isolation Policy)을 견지한 채 파시스트 국가들의 침략정책에 대해서는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취했다.
서구 열강 유화정책 펼쳐
제1차 대전 종전 후 전승 열강은 자국의 당면 문제 해결에 골몰하여 국제문제에는 무관심했다.
예컨대, 영국은 1924년 프랑스가 요청한 ‘제네바 의정서’에 서명하길 거부하고 영연방과 식민지 중심의 경제블록을 구축하는 데 열중했다. 미국 역시 종전 후 ‘유럽으로부터의 이탈’ 쪽으로 선회해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하고 관세 장벽을 높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심지어 중립법마저 제정(1937)했다. 이러한 고립주의적 분위기에서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프랑스만 노심초사했다. 서구 열강 중심의 집단안보체제 결성에 실패한 프랑스는 차선책으로 체코·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이른바 ‘소협상(Little Entente)’ 체제를 구축,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처럼 열강 상호 간에 협력체제가 없다 보니 파시스트들의 침략정책에 적극 대응하기보다는 이들의 요구를 묵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이러한 유화정책에는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염원이 깔려 있었으나 기대와 달리 독재자들의 침략 야욕을 더욱 조장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이러한 유화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뮌헨협정(Munich Agreement, 1938. 9)을 꼽을 수 있다. 1938년 봄 오스트리아 합병을 완료한 히틀러는 더욱 대담해져서 7월에는 독일인 거주지역임을 빌미 삼아 주데텐(Sudeten) 지방을 내놓으라고 체코를 압박했다. 애써 지켜온 유럽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체임벌린(영국 총리)과 달라디에(프랑스 총리)는 히틀러의 암묵적 동의하에 무솔리니가 중재한 뮌헨회담(1938. 8)에 참석했다. 이들 4거두가 회동해 논의한 결과가 바로 뮌헨협정이었다. 히틀러의 요구대로 체코의 주데텐 지방에 대한 독일의 병합이 인정됐다.
이때 히틀러는 체코의 기타 영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나 이는 곧 거짓임이 드러났다. 결국 이 회담은 파시스트들의 침략 야욕을 고무하고 서방과 소련 간에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동유럽 지역에 이해관계가 깊은 소련을 제외시킴으로써 스탈린은 회담의 진정한 저의(底意)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됐다.
체코 주데텐 지방 독일에 병합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우려는 곧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로 나타났다. 1939년 봄에 체코의 나머지 영토마저 병합한 히틀러가 이번에는 폴란드의 회랑지대와 단치히 시를 요구했다. 그제야 히틀러의 진정한 속셈을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가 강경 대응으로 돌아섰다.
양 진영 간에 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서방 진영을 경악케 한 ‘독소불가침조약’ 체결(1939. 8. 23) 소식이 전해졌다. 이념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였던 나치즘과 볼셰비즘이 서로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손을 잡은 것이다. 이제 양 전선에서의 동시 접전이라는 전통적인 ‘방위 트라우마’를 해결한 히틀러가 폴란드 땅을 짓밟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9년 9월 1일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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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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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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