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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농수기(윤영환 지음)
돌산 황무지에 사과꽃을 피웠다
농업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살아가는 농민치고 땅 한 평쯤 일구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무지 개간-그것은 뼈를 깎는듯한 아픔이 있기에 더욱 그 보람이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10년 전, 대학을 다녔다는 건방진 생각에 빈농의 아들임을 까맣게 잊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동분서주했던 내가 어떻게 개간이란 힘겨운 일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아마도 내게 주어진 숙명이 아니었던가 한다.
돌덩이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사나운 가시덩굴만 무성한 45도 경사의 가파른 산을 비지땀으로 개간, 각종 탐스러운 과실들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정녕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힘든 일들을 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10년 전 나는 서울에서 건축업에 실패,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인 전북 정읍(井邑)시 덕천면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에게 체면은 말이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경작하시던 논 1천 평과 남의 논 2천 평을 빌어 묵묵히 벼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어려움은 따르게 마련이어서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시 도시로 나가자고 조르는 아내, 농사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가난, 무리한 노동을 감당해낼 수 없는 체력. -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참아야 한다.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다시금 실패할 수는 없다) 그러기를 3년. 그동안 모은 얼마간의 돈에 빚 얻은 돈을 합해 처가 마을인 이곳 장성군 장성읍 부흥리에 야산 2만 평을 마련했다.
77년, 뽕나무 8천그루와 감나무 2천 그루를 경운기에 싣고 정읍에서 40km나 떨어진 이곳 마을에 들어섰다. 그때 마을사람들의 조롱은 빗발쳤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파내고 있는 뽕나무를 지금 심다니! 정신이 이상한 사람아녀?』
주위의 비웃음은 간신히 나를 이해하기 시작한 아내마저 의욕을 잃게 했다. 나 역시 이러한 시련을 감당치 못하고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아내와 나는 나란히 산에 올라 가시덤불을 헤치며 괭이 끝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돌밭을 일구었다. 비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 정강이와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은 물집투성이가 되었다. 온몸은 가시에 찔리고 긁혀 상처가 나 아물 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뽕나무를 심는 자리가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일하는 순간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뽕나무는 별다른 기술 없이도 몇 차례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더니 그런대로 잘 자라주었다.
그러나 봄부터 가을까지 아내와 함께 사흘이 멀다 하고 정읍에서 장성까지 1백 리를 기차로 와서 다시 십 리나 되는 높고 낮은 험한 산길을 아이들을 업고 다니면서 뽕나무를 보살피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듬해 봄, 『상록수』라는 별명을 붙여준 친구들의 도움으로 왜성사과나무 5백여 그루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묘목을 갖다 놓고 밤잠을 설치며 훌륭한 과수원으로 만들기 위한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막상 돌무더기 산과 가시덤불을 또 일굴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친구들의 기대와 호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산을 일구고 또 일궈야만 했다. 물 한 동이씩을 들고 산꼭대기까지 3백m를 기어오르면서 사과나무 5백여 그루를 다 심었을 때는 그야말로 기진맥진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속에 파묻히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굴러 넘어졌던 지게질에도 익숙해졌고, 나무뿌리를 캐내고 구덩이를 파는 데에도 이력이 붙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면 사과 묘목이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야 했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구덩이를 팠다. 남들이 모두 잠자는 밤에는 늦도록 잠구(蠶具)를 만들었다.
78년 봄, 잘 가꾸어진 뽕나무로 누에 두 상자를 칠 수 있었지만, 잠실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궁리 끝에 마당 한 구석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그 안에서 누에를 치기 시작했다.
호사다마(好事多摩)랄까, 4령(齡) 때 날벼락이 떨어졌다. 갑자기 몰아닥친 폭우로 비닐하우스가 여기저기 줄줄 새어 빗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잠박을 들고 새어드는 빗물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보았지만 놓을 자리마저 제대로 없었다. 그 순간 보온 못자리용 필름이 생각났다. 허둥지둥 필름을 꺼내 선반 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신히 빗물을 막을 수 있었다.
그해 나는 마을 주민들이 영구(永久) 잠실에서 생산한 누에고치에 비해 손색이 없는 수확을 올림으로써 『비닐하우스에서 어떻게 누에를 기를 수 있을까』 하던 마을 사람들의 의문을 뒤엎고 성공적인 모험과 선구자의 감회를 맛볼 수 있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익은 영농자금 일부가 되어 사과나무 5백 그루와 단감나무 5백 그루, 뽕나무 8천 그루를 가꾸는 데 사용했다. 자금은 언제나 부족했지만 우리 부부의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해나갔다.
나는 매년 산을 더 일구어 사과?자두?복숭아?밤 등을 심기로 하고 그 계획을 착실히 실천하여 6ha의 산에 4천여 그루의 과수를 가꾸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나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80년 봄 어느 날, 전남 장성지방에서는 왜성사과가 열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사과대목(臺木)이 무엇이며 어떤 품종인지조차도 모르고 아무런 지식 없이 심은 것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이 소문은 아내의 귀에도 들어가 부부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헛소문이기를 바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마음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하루는 『인근 농가에서 왜성사과 50여 그루를 심었는데 6년이 되어도 열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그 농가를 찾아갔다.
과연 열매가 달려 있어야 할 큰 나무에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왜 사과가 안 열렸어요?』
조심스럽게 과수원 주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4년째 되던 해 몇 개가 달리더니 그 후로는 전혀 열리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그는 『이곳은 사과의 적지가 아닙니다』하고 자신 있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기가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나를 보자 뛰어나왔다.
『정말로 사과가 한 개도 안 열렸어요?』
『….』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말을 해야 알잖아요?』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한숨 속에 뜬눈으로 날을 밝혔다.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잠자는 세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니 사과나무가 더욱 원망스러웠고 아내의 말대로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도시로 나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포기하기에는 그동안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억울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다시 그 과수원을 찾아가 나무의 자람 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잎에 싸여 보이지 않았던 나무줄기에는 벌레 먹은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고 그곳에서 수액(樹液)이 흘러내리고, 벌레 구멍은 뿌리 속 부분까지 뚫려 있었다.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사과가 열리지 않는 이유는 벌레 피해 때문이었다.
어제는 이곳에서 미래의 꿈을 잃고 왔지만, 오늘은 잃어버렸던 내 작은 소망을 되찾아 돌아올 수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내는 내 말을 듣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우리가 몇 년 동안 가꾸어온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사과가 열리기까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땀은 거짓이 없었다. 우리가 흘린 땀을 자양분으로 하여 사과나무를 잘 자라게 하여 애타게 기다리던 꽃을 몇 개 피워주었다. 평소 강전정을 한 탓인지 꽃은 몇 개 안 되었지만 그 꽃들은 우리 가족 모두의 꿈이며 희망이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꽃에 문안하러 갔다. 그 꽃은 며칠을 두고 좀처럼 시들지 않았다. 꽃이 어떻게 하여 열매가 되는지도 모르던 나는 사과가 보이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후 꽃잎은 서서히 져가고, 사과는커녕 꽃대마저 노랗게 시들어 떨어져 버렸다. 설레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며칠을 밥맛도 잃고 방 속에 처박혀 누웠다.
그때 아내가 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여보,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원인이나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묘목을 줬던 친구를 한번 찾아가 보세요.』
『가보면 뭘 해, 이 지방에서는 되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원인은 확실히 알아야 속 시원하게 그만둘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그 친구를 찾았다.
『글쎄, 꽃이 피면 사과는 틀림없이 열리는 법인데….』
친구도 머리만 갸우뚱 거릴 뿐 후련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봐, 기왕 해 온 일이니, 조급하게 생각 말고 1년만 더 기다려보는 게 어때.』
돌아서는 나의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친구는 몇 번이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1년만 더 기다려보자.)
나는 이튿날부터 용기를 내어 다시 산에 올랐다. 우리 부부에게 그때 1년은 참으로 길고 지루한 한해였다.
그해는 봄누에 4상자를 치고도 많은 뽕이 남았다. 가을누에 7상자를 치기 위해 뽕밭에 간이 잠실을 짓기로 하고 산꼭대기의 경사진 뽕밭에 50여 평의 터를 다듬었다. 무더운 여름을 땀으로 녹이면서 바위를 깨내어 잠실 터를 다듬었다. 산꼭대기까지 각종 자재를 운반해야 했던 아내는 머리가 부어오르도록 무거운 짐을 이어 나르는 억순이가 되었다.
(이렇게 비지땀을 흘려야만 먹고사는 것인가.)
땀에 흠뻑 젖어있는 아내의 구멍 뚫린 런닝과 까맣게 타버린 얼굴, 거칠어진 손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 저희에게 참을 수 있는 용기와 산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우리 부부는 지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질 때마다 쏟아지는 오열을 삼키며 이렇게 기도했다.
아내가 힘겹게 들어 올려주는 슬레이트 한 장 한 장을 받아 올려가며 지은 잠실 속에서 가을누에를 치기 시작했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호롱불을 밝혀놓고 무서워 떠는 아내를 위로하며, 아이들의 잠자리까지 이곳에서 같이하면서 열심히 누에를 쳤다. 그해 우리 마을에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가지뽕 치기를 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누에고치를 따고 정성을 다해 선별(選別)을 끝낸 후 공판장에 나갈 때는 마을 사람들이 무척 부러워했다.
『야, 거기 모조리 1등 아냐, 어떻게 했길래 고치가 이처럼 좋지?』
공판장에서 우리 부부의 누에고치가 화제가 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칭찬을 받을 때는 정말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어느 검사원이 우리의 고생을 위로해 줄 때는 높게 맞은 등급이 그저 봐준 것처럼 한없이 고마웠고 소처럼 일만하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무척 자랑스럽기만 했다.
사과나무를 심은 지 5년째 되는 해인 81년 봄이었다.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많은 꽃을 피웠다.
얼마 후엔 꽃마다 열매가 맺혔다. 잔뜩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던 나는 드디어 환호성을 울렸다.
『여보 당신이 이겼어요.』
『아냐, 모두 당신 덕분이야.』
이 열매들은 그동안 우리 부부가 흘렸던 한 맺힌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었건만 우리 부부는 얼싸안고 또 울었다.
그 후 사과 열매는 날이 갈수록 잘 자라 주었고 나는 영농일지에 그때그때의 자랑을 빠짐없이 기록해 나갔다.
장성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그리고 나의 농장에서도 처음으로 사과를 재배해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사과나무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던 나는 다른 과수농장을 찾아다녔고 교육이 있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의문이 생겼을 때는 관할 농촌지도소 원예담당자에게 상의했고, 나름대로의 실험?실습을 거듭했다.
그해 가을, 많은 수확을 올릴 수는 없었지만 가족과 친척 그리고 따뜻한 이웃과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첫 수확의 기쁨은 돈을 벌게 됐다는 것을 떠나 이웃과 흙에 감사하는 것만으로 우리 부부는 만족했다.
6년째인 82년에는 여름전정 위주의 결과지(結果枝)를 만들었고 가지유인?순지르기?눈긋기 등 환상박피에 성공, 가시덩굴로 뒤덮였던 돌산이 황금빛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산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사과가 안 된다던 주위 사람들은 물론 사과 재배에 뜻이 있는 많은 사람이 나의 과수원으로 찾아와 그야말로 축제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나 매년 과수원을 늘리고 10여 일 간격으로 뿌려야 하는 고독성 농약 때문에 누에치기는 포기해야 했다. 미리 뽕나무 사이에 심어놓았던 단감을 잘 가꾸기로 작정하고 이제까지 나의 영농자금을 공급해주던 뽕나무를 모두 파냈다.
82년엔 6년생 사과 5백여 그루와 5년생 사과 3백여 그루에서 약 8백여만 원의 조수익을 올렸다.
수확할 때 20리터들이 양동이를 두 손에 들고 2천여 2016-09-21 상자분의 사과를 모두 아내와 나둘이서 따내렸다. 비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장화를 신고 오르내렸지만 무릎이 성할 때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 개간할 때의 아픔과는 너무나 다른 아픔이었다.
이렇게 따내린 사과는 잘 손질하여 광주(光州) 원예협동조합 공판장에 출하, 많은 인기를 독차지했다.
모양과 맛이 뛰어난 장성지방의 새로운 명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 부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그동안 수없이 흘린 땀과 눈물의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인 탓으로 너무 많은 사과를 딸 욕심으로 제대로 솎아내지를 않았더니 지난해에는 해걸이로 수확이 크게 떨어지는 씁쓸함을 맛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날의 자본투자에만 급급해온 눈물겨웠던 나날들을 청산하는 『황금의 한해』가 될 것을 기대하며 철저한 영농대책을 마련하여 시비?병충해방제?전정 등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며, 지난날의 영농일지를 참고삼아 과학적인 영농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우리 부부가 개간한 옥토에는 사과나무 2천여그루, 복숭아 4백여 그루, 단감 5백여 그루, 밤 1천여 그루가 있으며 모두 수확기에 들어가 풍성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의 고된 일과를 위로해 주게 되었다. 이 밖에도 양봉 20군과 한우 4마리를 기르고 있다. 우리는 빈털터리 영세농에서 개간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올해 나는 수입 목표를 약 2천만 원으로 잡고 있다. 나는 경사가 심해 남에게 소개하기가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내가 심은 모든 나무들이 성목(成木)이 되는 몇 년 후에는 나의 총수입은 약 5천만 원은 될 것이다. 왜성사과가 내 고장의 새로운 명물로 각광을 받게 될 그날을 위해 오늘도 나는 쉬지 않고 나의 젊음을 과수에 바치고 있다.
⊙ 당선소감
윤영환<전남 장성읍 >
당선의 통보를 받고 온 가족이 고개 숙여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보잘것없는 영농체험을 쏟아지는 졸음과 함께 원고지에 옮겨쓰면서도 당선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기쁨은 저의 일생을 영농의 길로 꿋꿋이 가라는 채찍이라 생각하고 감격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며, 두 어깨가 부서지도록 땅을 가꾸는 훌륭한 영농인이 될 것을 새삼 다짐합니다.
벅찬 오늘로 인해 서울로 이사하여 편히 살아보자는 아내의 성화도 어쩌면 끝날 것 같습니다.
「당선」이라는 한 단어는 저의 남은 일생을 마무리하는 날까지 크나큰 힘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고된 일속에서 고생만 해온 아내에게 오늘의 이 영광과 보람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흘렸던 숱한 고난의 땀방울들이 오늘로 인해 영롱한 구슬이 된 듯한 이 느낌은 농민신문 1000호의 뜻깊은 기념과 더불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검둥이처럼 살아가는 농민의 부끄러운 글에 귀한 영광을 갖게 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심사평
최민호<서울대 농대교수 >
한마디로 눈물과 감동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수기들이 많았다. 농촌 생활의 여러 가지 악조건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끈질기고 처절한 노력과 투쟁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단면을 그대로 그려놓고 있었다. 집념으로 일관된 그들이 영농자세는 한탕주의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리는 현대인들의 심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어떤 사회에서, 혹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주어지는 역경과 고난을 극북해 나갈 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원리는 영농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농수기를 심사한 훈 추출(抽出)해 낼 수 있는 영농의 성공 요인은, 첫째 강한 인내력과 의지, 둘째 머리를 쓰는 지혜, 셋째 과학영농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또 하나의 요인은 부부간의 사랑과 협동이었다.
앞으로의 응모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문장을 좀 더 다듬고 문법과 맞춤법에 유의해 주었으면 한다. 훌륭한 수기라 하더라도 내용 전달이 잘 안되는 표현과 문장 구성으로 말미암아 입선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입선되지 못한 많은 영농인에게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 끊임없는 정진(精?)이 있기를 빈다.
♨출처/농민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