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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12일 목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성명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한다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이야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8,1ㄷ-7.11-13
형제 여러분, 1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7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11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스스로 복음을 재단할 수는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고, 나쁘게 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와 같은 동물도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인간답지 않습니다.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대로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카 6,35)는 다시 이것도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려면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여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 살아 있다면, 분명 그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과는 삶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전원을 켜면 기계가 돌아가고 끄면 멈추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힘으로만 살고 있는지는 그 행위를 보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천상적 사랑, 참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무나 억울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들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피정 센터를 찾은 분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분들이 그런 사연 한 보따리를 안고 오십니다.
그를 떠나 보낸 이후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그분들 바라보며 너무 환하게 웃고 다녀도 안 되겠구나, 너무 행복한 표정 지어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분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를 불시에 떠나보내고 난 후 사는게 사는게 아닌 분들, 차라리 내가 그를 대신해서 먼저 갔으면 하는 마음에, 밥숫가락 뜨는 것조차 송구스런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게 한 그 웬수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요?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복음의 가르침,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을 접할 때 마다 화딱지가 하늘 끝까지 솟구치니 참으로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 국어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 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법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환경이 만듭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이킹은 먹을 것이 없는 춥고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이 더는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약탈자가 된 예입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할까요? 척박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람은 어째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주님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착할 수밖에 없고, 서로 자주 싸우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은 집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머무느냐에 의해 내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을 탈출시킨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원 예물을 받아 성막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전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치하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부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판사는 그 전 해 12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며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2010-8-3, 조선일보 기사 참조]
모 부장판사는 왜 판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그리 비관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심판을 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 환경 안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피오렐로 라 과르디아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제99대 뉴욕시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법률 경력을 쌓았으며 뉴욕에서 판사로도 재직했습니다.
라 과르디아가 뉴욕시의 판사였을 때 한 남자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그 앞에 끌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법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했지만, 상황은 비극적이며 사회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즉시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법정으로 향하여 그에 대한 책임은 뉴욕 모든 시민에게도 있다고 하며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던 그 사람에게 돈을 모아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은 돈은 피고인과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달되었습니다.
왜 같은 위치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심판관의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성전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 사람이 믿고 사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해 창조가 진행되는 때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지만, 재판정은 이제 사랑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에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재판관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예수님만이 성전 중앙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 옆에 세웠습니다. 신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심판관이 아닌 엄마처럼 보이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서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금주를 하신 건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79년입니다. 형제 중에 술을 잘못 배운 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금주가 형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저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자식이 사제가 된다는데 아버지로서 성서를 가까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제가 사제서품 받았을 때, 아버지는 저의 서품 성구를 족자에 써 주었습니다. 제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사제인 제가 책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 아버지는 늘 책을 읽으셨습니다. 제게도 책을 가까이 하면 좋겠다는 걸,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헌팅턴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그토록 원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장례미사 강론 중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면서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형을 대하였습니다. 형이 집을 나가면 어머니는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남겨 놓았습니다. 먼 길에 지친 형이, 혹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형이 오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늘 기다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기일을 꼭 챙겼습니다.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연도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본인의 건강보다는 자식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음력이라 생일을 기억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식구들의 생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 못했지만, 어머니는 저의 생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인사이동이 되면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시골 성당의 본당 신부로 갔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부탁을 받고, 3년 동안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사제관 일도 하였고, 예비자 교리도 하였고, 환자 방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영정 사진은 복자회 재속회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미사는 갈 수 없었지만, 추기경님께서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낌없는 사랑을 남겨 주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천상에서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받는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 길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귀도 (Guy)
신분 : 평신도
활동지역 : 안더레흐트(Anderlecht)
활동연도 : +1012년
같은이름 : 구이도, 귀돈
무사와 기사,택시 운전사들의 주보
그는 원래 농부였는데, 브뤼셀 교외 레켄Laken 성당의 성당지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약간의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사업이 실패하므로써 돈과 직업을 잃어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생활을 주로 성지를 참배하고, 성도 예루살렘까지 순례하면서 숨은 덕을 쌓았으므로 그를 성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복자 유베날리스 안키나 (Juvenal Ancina)
활동년도 : 1545-1604년
신분 : 주교, 의사
지역 : 살루초(Saluzzo)
같은 이름 : 안치나, 주베날리스
유베날리스 안키나(Juvenalis Ancina)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의 포사노(Fossano)에서 지방 귀족 가문인 두란도 안키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례 받을 때에 포사노의 수호성인인 나르니(Narni)의 성 유베날리스의 이름을 따서 요한 유베날리스라 부르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 대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사보이아(Savoia)의 몬도비(Mondovi)로 갔고 부친의 사망 후에는 파도바(Padova) 대학교를 다녔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는 토리노(Torino)에서 철학과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자신의 평소 소망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인술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는 게임이나 오락을 해본 일이 없다. 그의 유일한 오락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시를 쓰는 것이 고작이었고, 교회와 국가 간의 중대사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성 특히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에 관한 두 편의 풍자시를 썼고, ‘그날 분노의 날’에 대한 메시지에 매료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기도와 묵상에 더욱 몰두하고 세상일을 경시하기 시작했으며 하느님을 위한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사보이아 공작의 주치의로 초청받고 1575년에 로마(Roma)에 갔다가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를 만나 오라토리오 회원이 되면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1595년 그는 거의 10여 년 동안 나폴리(Napoli)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봉쇄생활을 갈구하였으나 살루초의 주교직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참으로 마지못해 주교직을 수행하다가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그는 189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