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명유래집 : 중부편≫(2008,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관인면’에 관한 설명을 살펴보면, 1909년(융희 3)에 관인면이 철원군에서 경기도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한국지명유래집 : 중부편≫의 관인면 설명 _국회도서관에서 얻음
그런데, ≪황성신문≫에서는 이미 1907년에 관인면이 연천군에 소속된 것으로 나와 있다. 곧, 앞서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관인면 중리에 있는 리민(里民)들이 모금한 사실을 전하면서 이미 연천군에 소속된 것으로 나타났다(http://blog.daum.net/coreai84/13388391).
△ 연천군 관인면_≪황성신문≫ 광무 11년(1907) 6월 5일자 <국채보상의무금집송인원급액수(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부분
그래서 이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 ≪황성신문≫ 광무 10년(1906) 12월 21일자에서 관인면이 철원에 속한 것으로 나오고 있음을 찾을 수 있었다. 곧, 기무라 우이치로(木村宇一郞)에게 사광(砂鑛)을 인허해 준 사실과 함께 이 때 관인은 철원에 속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 철원 관인면_ ≪황성신문≫ 광무 10년(1906) 12월 21일자 부분
그런데, 이듬해 11월 12일자 ≪황성신문≫에서는 기무라 우이치로에게 관인면의 금광을 또 허가해 준 사실과 함께 관인면이 연천군에 소속되어 있음을 전하고 있다.
△ 연천군 관인면_≪황성신문≫ 광무 11년(1907) 11월 12일자 부분
물론, 위에서 인용한 ≪황성신문≫에서 기무라 우이치로의 이름이 ‘木村宇一’ 또는 ‘木村又一郞’ 등의 오식이 보이고 있어서 관인면 관할 군의 오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1907년의 두 가지 소식에는 모두 연천군으로 적기하고 있음을 볼 때, ≪한국지명유래집 : 중부편≫에서 정리한 관인면의 1909년 연천군 편입설은 심각한 오류라 하겠다. 한편, 1906∼07년은 일제가 통감부를 통해 ‘면제’ 실시를 위한 제도를 정비하던 때로 이해되고 있다(윤해동 2006 : 39-61). 그런데, 이때는 면의 통폐합보다는 향장제(鄕長制)의 폐지―군주사(郡主事)의 설치, 향회(鄕會)의 해체― 지방위원회의 설치 등 군 단위에서는 가능한 한 자치기능을 배제하고 향반(鄕班)이라는 제한된 계층의 정치참여를 봉쇄하려는 군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던 때였다(이상찬 1986 : 55). 곧, 조선 왕조 전통의 지방관제인 부목군현(府牧郡縣)을 부와 군으로 통폐합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1895년 8월 23부제 시행으로 목과 현이 일시 사라지는데(≪지방제도조사地方制度調査≫, 1906, 55∼61쪽), 학부에서 편집 간행한 ≪조선지지朝鮮地誌≫(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 열람 가능)에 잘 정리되어 나와 있다. 한편, 1906년 내부(內部)에 설치된 지방제도조사소의 지방제도 개정을 위해 정리한 ≪지방제도조사≫에는 기왕의 지방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을 공공연히 담고 있다.
목부군현(牧府郡縣)이 초무정제지획(初無定制指劃)하여 대읍(大邑)은 3, 40면이요 소읍(小邑)은 4, 5면으로 부등(不等)하니 대읍은 면촌(面村)이 활원(活遠)하여 관령(官令)을 민불능주지(民不能周知)하고 민폐(民弊)를 관불능통찰(官不能洞察)하여 우유징수지사(遇有徵收之事)하면 관속(官屬)과 면임(面任)이 종중(從中) 작간(作奸)에 방불승방(防不勝防)하니 차(此)는 읍대지폐야(邑大之弊也)오 소읍은 전군(全郡) 면적이 4, 50리에 불과하니 해(該) 지방에 소수부세(所收賦稅)로 해군(該郡) 관리의 봉급이 부족하 타군(他郡)에서 이획(利劃)하는 군이 다유(多有)하고 민정으로 언(言)하면 범간(凡干) 주구(誅求)에 읍유소이민유곤(邑愈小而民愈困)하니 차(此)는 읍소지폐야(邑小之弊也)라(≪지방제도조사≫, 1906, 81쪽).
곧, 지방의 크기가 정해진 바가 없어 대읍과 소읍의 차이가 크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민폐와 운영의 곤란함 따위를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방민들의 광범한 반발과 한국인 관리들의 지방자치 실시 주장,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지방자치 반대 입장 등으로 군 폐합안은 철회되고 9월 초에 이르러 논의의 방향은 비입지(飛入地)와 두입지(斗入地)의 정리를 기본으로 하는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전환되었다(윤해동 2006 : 51-52). 여기서 비입지와 두입지는 월경지로도 불리는 것으로 “구제(舊制)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은 인구(隣區)를 감시(監視)하기 위하여 또 상견제(相牽制)하고, 어염(魚鹽)을 공급하기 위하여 월경(越境) 점유한 고로 행정구역이 거개 장방형(長方形)으로 두입하여 견아상제(犬牙相制)와 흡사하고, 혹은 강해산협(江海山峽)을 따라 왕왕 비입(飛入)이 산치(散置)한 기자(棋子)와 흡사하니 차(차)는 후게(後揭)한 바 두입지와 비입지가 시야(是也)라(≪지방제도조사≫, 1906, 80-81쪽)”고 하여 비입지와 두입지의 문제가 군현의 자생적 재생산을 위한 궁여지책으로의 성격(윤해동 2006 : 48)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폄하하고 있었다. 그래서 광무 10년(1906) 9월 24일에 반포된 칙령(勅令) 제49호 <지방구역정리건(地方區域整理件)>에 따르면 관인면을 철원의 두입지로 파악하여 연천에 속하게 하였던 것이다(송병기ㆍ박용옥ㆍ박한설 1970 : 170). 이 칙령은 ≪고종실록≫에는 같은 날로 적기되어 있지만, ≪관보≫에는 9월 28일에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윤해동 교수는 10월 1일부로 시행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윤해동 2006 : 51). 그럼에도 위에서 살핀 ≪황성신문≫에서는 그 해 12월 21일까지도 관인을 철원군 소속으로 보고 있음을 볼 때, 위 칙령은 190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서는 위 칙령으로 정리가 된 각 지역의 면에 대한 관할 군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있어야 칙령의 효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 칙령 제49호 <지방구역정리건>에 실린 관인면_국회도서관에서 얻음
하지만 ≪지방제도조사≫ 작성 시기에도 관인면은 연천군에 편입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곧, 연천군의 면수가 칙령 제49호 반포에 보이는 원면(原面) 수와 같은 5개 면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원군은 9개 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지방제도조사≫의 작성이 1906년 9월 칙령 제49호 반포 이전에 종료된 듯하다.
△ ≪지방제도조사≫ <목부군관하표(牧府郡管下表)>의 연천군 면수 _국립중앙도서관에서 얻음
△ ≪지방제도조사≫ <목부군관하표(牧府郡管下表)>의 철원군 면수 _국립중앙도서관에서 얻음
그렇다면, ≪한국지명유래집 : 중부편≫에서는 관인면의 편입년도를 왜 1909년으로 적기하는 오류를 남겼을까. 그래서 당시 관인면민의 반발로 인하여 다시 철원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09년 다시 연천군으로 편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지만, 자료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관인면에서 활동한 정미의병을 정리하면서 1910년 4월까지 모두 ‘연천군 관인’으로 정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가 일제에 의한 지방 통치의 하부 구조에 대한 구상이 제일 처음 구체화한 때라는 점이다(이상찬 1986 : 66). 곧, 1906년 10월 <조세징수규정租稅徵收規程> 제7조에 징세기기구로서의 면장이 법제화된다. 세무서에서 지세(地稅)ㆍ호세(戶稅)의 총액을 면장에게 부과하면 면장은 면내 다액 납세자로 구성된 5명 이상의 임원과 함께 최종납부액을 경정하여 납세자에게 납입고지서를 발부하고 그에 따라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이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군수에 의해 세금이 부과ㆍ징수되던 것을 면장과 임원에 의해 세금이 부과ㆍ징수되도록 바꾼 것이다(이상찬 1986 : 66-7). 그런데 이는 지방관 직제로서의 면장이 아니라 세무서에 소속되어 한 면의 조세행정 책임자였던 것이다(이상찬 1991 : 22). 그런데 이는 징세업무를 관찰사와 군수가 맡도록 하는 칙령(윤정애 1985 : 101)에 정확히 반하는 제도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1910년 합방 직전까지 주로 군의 권한을 박탈하고 그에 대신하여 면을 말단 행정구역으로 위치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군의 권한이 징세ㆍ경찰ㆍ사법 기능과 같이 전문 기관으로 기능이 분화되거나, 상급기관인 도 또는 하급기관인 면으로 이관됨으로써, 군은 이제 면의 관할과 관련된 기능만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향촌세력의 약화를 시도한다. 그렇지만 면은 지역적 통일성의 측면에서는 군의 하위적 위상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고, 자치적 통일성이란 훨씬 요원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오히려 면보다는 촌락의 자치기능에 주목하여 이를 변형하여 포섭하려 한다(윤해동 2006 : 84-5). 바로 이러한 일제의 의도를 품은 회오리 한 가운데에서 관인면이 철원군에서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
# 도움받은 책과 글 ≪地方制度調査≫ 1906(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 열람 가능,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발행년도를 밝히지 않았으나, 윤해동 교수의 견해를 따른다) 宋炳基ㆍ朴鎔玉ㆍ朴漢卨 共編著 1970 ≪韓末近代法令資料集≫Ⅴ, 國會圖書館(국회도서관 누리집 열람 가능) 尹貞愛 1985 <韓末 地方制度 改革의 硏究> ≪歷史學報≫105, 歷史學會 李相燦 1986 <1906∼1910년의 地方行政制度 변화와 地方自治論議> ≪韓國學報≫42, 一志社 이상찬 1991 <한말 지방차지 실시 논의와 그 성격> ≪역사비평≫13, 역사비평사 윤해동 2006 ≪지배와 자치 : 식민지기 촌락의 삼국면구조≫, 역사비평사 ≪한국지명유래집 : 중부편≫, 2008,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국회도서관 누리집 열람 가능) |
출처: 고리아이 역사공부방 : Clio of Corean 원문보기 글쓴이: 고리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