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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베르나노스 / 정영란 옮김 / 민음사
1. 작가소개
- 지은이: 조르주 베르나노스
1888년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학교와 소신학교 등, 네 번 전학을 거치며 초중등 교육을 마치고 소르본 대학교에서 문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병역 면제를 받았는데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지원병으로 참전했다. 잔 다르크가의 후손인 잘 탈베르 다르크와 혼인하고 보험회사 지방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출장 중 틈틈이 기차와 카페, 호텔 등에서 소설을 집필하다가 1926년 『사탄의 태양 아래』를 발표하여 문단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베르나노스는 전업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보험 회사를 퇴직했다. 1933년 오토바이 사고로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중상을 입고 평생 목발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생활고로 프랑스 내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스페인에서 집필한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로 193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했지만 곧이어 소설 집필을 중단하고 시대의 직접적 증언이 될 정치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드골 장군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하나, 입각 제의는 뿌리치고 유럽 순회 강연을 떠났다.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 『기쁨』, 『윈 씨』 등과 정치 비평집 『진리의 스캔들』, 『우리들 프랑스인』, 『로봇에 대항하는 프랑스』 등이 있다.
파시즘과 정치적 야합이 판치는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환멸을 느껴 떠난 튀니지에서 간경변을 얻고 1948년 7월 파리 근교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 옮긴이 : 정영란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베르나노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서 『공기와 꿈』,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등과 공저 논문집으로는 『프랑스 현대소설 연구』, 『프루스트와 현대 프랑스 소설』 등이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어느 본당에서나 선과 악은 무게중심을 아주 아래쪽에 둔 채 힘의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선과 악은 밀도가 다른 두 액체처럼 서로 섞이지 않은 채 포개져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p7)
내 본당은 권태에 먹혀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 권태가 본당 모두를 우리 보는 앞에서 아귀아귀 먹어 대는데도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p7)
☑ 권태라는 치명적인 악령. 오늘날 대부분의 본당이 그럴 것이다.
마을 위 사방으로 수중기가 피어올랐고 마을은 탈진한 가여운 한 마리 짐승마냥 물기 어린 풀숲에 그냥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마을 전체라고 해 봐야 얼마나 작은지! 그런데 바로 이 마을이 내 본당이다. 내 본당이건만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마을이 밤의 장막 속으로 가라앉으며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슬프게 지켜보고 있었다 …… .(p8)
☑ 글쓰기의 매력. 나도 이런 멋진 글을 쓰고 싶다
마을의 고독과 나의 고독을 이토록 통렬하게 느낀 적이 여태 없었다. (p8)
☑ 주인공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고독이다.
권태, 그것은 일종의 먼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먼지를 우리 모두는 오가면서 들이마시는데 하도 입자가 고운지라 이에 걸려도 바드득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1초라도 오가는 걸음을 멈추면 이 먼지는 얼굴과 양손을 포함해 우리를 완전히 덮어 버린다. 이런 재의 비를 털어 내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마냥 설쳐 대는 것이다. (p9)
☑ 권태를 이기는 방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권태, 이 나병의 이러한 감염과 확산을 사람들이 이토록 겪은 적은 여태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궁극에 이르지 못한 채 뒤틀려 버린 절망, 절망의 이 추한 형태는 분명 발효하며 와해되어 가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모습이다. (p9)
☑ 19세기 그리스도교의 모습, 20세기는 더 암울해졌다. 적어도 그리스도교라는 관점에서는.
교회 웃어른들의 낙관론은 아예 죽어 버렸다. 낙관론을 아직 들먹이는 분들은 그저 습관이 되어 그렇게 가르칠 뿐 정작 자신들이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p9-10)
여하튼 “꼬치꼬치 따지려 들지 말아야 한다.”라고들 한다. 아아, 우리는 그런데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 있지 않는가! 웃어른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세상사를 아뢸 이는 누군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런 만큼 수사들의 복종과 단순성을 과찬하는 말을 들을 때면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내 마음에 그리 와 닿지 않는다…… .“ (p10-11)
☑ 세상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따지는 사람은 싫어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너무 투박하고 세련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하지만 학식과 교양을 과시하는 신부는 언제나 내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세련된 사상을 가까이 자주 접한다는 것은 요컨대 시내에서 멋진 외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 코앞에서 멋진 나들이 저녁 식사를 하지는 않는 법이다. (p12)
☑ 적어도 사제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기도가 습관이 된 사람에게는 성찰이란 너무나 흔히 어떤 알리바이, 특정 의도 속에 자신을 굳히려는 은밀한 방편이 되곤 한다. (p13)
돈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내리는 모래처럼 새 나간다. 끔찍하다. (p14)
나는 일기를 적어 보는 이 일을 앞으로 열두 달 이상은 계속하지 않기로 오늘 아침 마음을 정했다. 다음 해 11월 25일 나는 이 종잇장들을 불에 던져 넣고 잊어버리련다. (p15)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하리라. 그런데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 위한 이 첫 시도 초두에 그만 어디서부터 이런 자기 연민, 동정심이 솟구친단 말인가? 영혼의 가닥가닥이 헤벌어지며 울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웬일인가? (p16)
본당이란 으레 더럽기 마련이야. 교우 집단 전체는 더 더럽지, 최후 심판의 날 보게될 테지만 천사들이 더없이 거룩하다는 수도원들에서도 삽질로 퍼낼 더러운 것이 얼마나 많을지! 거름 푸듯 말이야! (p20)
☑ 사실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면 마음은 편한데, 묘하게 씁쓸하다.
마귀를 뽑아 버린다는 생각과 함께 자네들이 가진 또 다른 괴벽은 사랑받고자 하는 거야. 물론 자네들 자신을 위해 사랑받으려 든다는 말일세. 진정한 사제는 결코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게. (p21)
우리는 숫염소를 포함해서 모두와 어울려 지내야만 하지. 숫염소이건 암양이건 주인께서는 짐승들 하나 하나를 온전히 보살펴 데려오라 하시거든. 자네, 숫염소가 숫염소 냄새를 피우는 것을 막아 보려는 생각은 아예 말게.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실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십상일 테니. (p30)
☑ 교회는 악인과 의인이 함께 어울려 있는 곳이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전통! 하면서 늙은이들은 못마땅해 웅얼거리고 진보! 하면서 젊은 신부들은 떠들어 대지. (p30)
☑ 교회에서도 진보적인 신부, 보수적인 사제들이 함께 있다. 정치적으로도.
어린이는 바로 자신의 무력감에서 제 기쁨의 근본원리를 겸허하게 이끌어 내는 것이지, 어린이는 모든 것을 제 어미에게 맡기지, 제 현재, 과거, 미래를, 알아듣지? 제 온 목숨, 인생 전체가 어머니의 시선 속에 들어있는데, 그 시선은 바로 미소이지. (p32)
☑ 약하기에 의탁하게 되는 것. 믿음에서는 의탁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사람이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알게 되었으니 기적이 따로 있겠나! (p33)
☑ 이것만 바로 깨달아도 정말 기적이다.
서너 푼밖에 안 하는 조그만 인형이 어떤 꼬마에게는 한 계절 내내 즐거움을 안겨 주지만 500프랑짜리 장난감을 앞에 두고도 하는 게 늙은이니까, 왜 그렇게 되는 걸까? 그건 그가 바로 어린이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야. 교회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 안에 이 어린이 정신을, 이 천진 순수를 이어 가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지. (p33-34)
☑ 어린아이의 단순함, 약함, 의탁. 이런 것들이 하느님 나라로 이끈다.
일기란 것이 주님과 나 사이의 대화가 되고, 기도의 연장이 되며, 아마 고통스러운 위경련이겠지만 여전히 너무 자주 극복하기 힘들게 느껴지는 기도 생활의 어려움을 에둘러 가는 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기는 때로는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던 저 수천수만 가지의 잡다란 일상의 근심이 내 오죽잖은 삶 속에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알알이 드러내 보여 준다. (p39)
나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근심의 하찮은 것까지도 당신 몫으로 맡아 주시고 아무것도 경멸하지 않으심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차차 잊어버리고자 노력해야 할 것을 나는 왜 오히려 종이 위에 적어 놓으려는 걸까? 제일 나쁜 것은 이런 속내를 적어 가는 데서 내가 너무나 큰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p39)
우리 신부들도 어느 정도 유족함과 안락함을 체면으로라도 누리며 살라고 사람들은 은근히 강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비참함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 . 극도의 빈한에 맞추어 합당하게 사는 데는 새삼스레 힘이 들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왜 겉치레를 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를 궁한 소리 하는 사람들로 만든단 말인가? (p42)
☑ 사제의 삶은 궁극적으로 가난의 삶이다. 프란치스코 성인.
수도자들은 영혼을 위하여 고통을 겪는다. 우리들, 우리들은 영혼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어제 저녁 내게 깃든 이 생각이 마치 수호천사처럼 내 곁에서 밤을 함께 지샜다. (p45)
☑ 교구 사제들은 본당 신자들의 영혼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내 본당! 감동을 느끼지 않고는 결코 입에 올릴 수 없는 말, 아니 사랑의 격정을 느끼지 않고서는 하지 못할 ‘내 본당’이라는 말! (p46)
☑ 사제에게 본당은 가족을 의미한다. 첫 본당이라면 얼마나 애틋할까!
'영혼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나를 위로해 줄 이 말을 밤 내내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위로의 천사는 오늘 저녁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p49)
누구에게 돈을 줄 때 나는 하도 서투르고 우스꽝스럽게 쩔쩔매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 같다. 누구를 기쁘게 해준다는 느낌을 나로서도 받기가 어려운데 그건 또 내가 남을 기쁘게 해 주기를 너무나도 원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들이 보면 내가 망설이면서 억지로 주는 듯 보일 것이다. (p49-50)
☑ 나도 그렇다.
세상사람 모두가 굳이 배우지 않고도 그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듯한 일상사의 가장 기본적이고 자질구레한 일들에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나는 매일같이 놀란다. (p51)
제일 좋은 치마를 입고 제일 예쁜 머리쓰개를 하고 오셔도 어머니는 다른 집 아이를 맡아 키우는 비참한 여인네의 그 가여운 미소, 아래로 숙는 고개와 뒤로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어찌할 수 없었다. (p52)
나는 내 천성을 개조해 보려는 야심은 없다. 이런저런 일에 곧잘 마음 내키지 않는 경향을 이겨 내고 싶을 뿐이다. (p53)
홀로 있음은 가혹한 일이다. 무관심한 사람들이나 배은망덕한 사람들과 자기의 고독을 나눠야 함은 더욱 가혹한 일이다. (p54)
☑ 사제의 숙명이다. 피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것.
내가 한편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만큼이라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면 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 예측을 할 수 없을 만큼 내 위는 변덕을 부리니! 아무리 작은 신호라 할지라도 이상 신호가 온다 싶으면 그만 오른쪽 옆구리에 예의 그 작은 통증이 번지는데 그러면 그야말로 경련이 일어나거나 제동기가 걸리는 느낌이다. 입안이 곧바로 말라 버리면서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p57)
그들이 극히 사소한 경의의 표시만 해 와도 나는 당황하게 되는데 나에게 표시하는 그 경의는 오직 내가 부여받은 위치에 국한된 것일 뿐임을 내가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하면서도 그네들은 내게 극도로 공손한 예를 표할 수 있는 것이다. (p58)
나는 베푸는 데 서투른 것만큼 청하는 데도 별로 낫지 못한 자신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기 원하는데 나는 언제나 내 열성에 즉각 화응하는 열성, 절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호응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p59-60)
☑ 사람들이 사제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크다.
지금 내가 그저 길손으로 머무는 작은 성당이 15세기에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마을은 같은 자리에서 끈기 있게 더위와 추위, 비와 바람 그리고 태양을 참으며 때로는 번창하고 때로는 비참하게 한 조각 땅에 달라붙은 채 그 진액을 빨아올리고 또 죽은 이들을 그 지하로 되돌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 (p61)
백작은 모범적인 본당 교우도 아니다. 매주일 소미사에는 꼬박꼬박 나오지만 영성체하러 나오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부활절을 제대로 맞이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아아, 그리도 자주 비어 있는 내 곁의 친구 자리, 친한 길벗의 자리를 성큼 차지하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다른 데서 찾으려 들지만 헛될 뿐인 자연스러운 소탈함을 그에게서 보았다고 내가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p67)
노예제도는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묵은 세상도 무너졌다. (p70)
☑ 인류 역사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노예제도가 지속되어 왔던가!
영혼에 유익할 생각이 하나 떠오르면 나는 그걸 하느님 대전에 갖다드릴 생각으로 얼른 내 기도 속에 집어넣지. 그러노라면 그 생각이 얼마나 크게 모습을 바꾸는지 놀라게 되지.(p72)
☑ 하느님에게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기도다.
내가 젊었을 때 본 적이 있는 어떤 고약한 유리 공장 사장은 열다섯 살짜리 어린애들에게 유리 만드는 대롱을 불게 했지. 그 애들의 여린 가슴이 그만 터져 버리면 그 짐승같은 주인 놈은 다른 아이들을 얼마든지 좋을 대로 데려다 쓰곤 했지. (p73)
우리 주님이 가난과 혼인하셔서 가난한 이를 정말이지 존엄하게 드높이셨기에 아무도 이젠 더 이상 가난한 이를 그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할걸세. (p74)
☑ 주님은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알몸으로 돌아가셨다.
채찍질 당하는 농노의 신음 소리, 구타당하는 여인네의 비명, 주정뱅이의 딸꾹질 소리, 기뻐 날뛰는 저 야생적 환성 소리와 오장육부의 으르렁 소리가. 왜냐하면 빈궁과 음탕은 굶주린 두 마리 짐승이 그러하듯 슬프게도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고 불러 대는 것이다. 그렇다. 물론 이런 것이 내게 혐오감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토록 뼈에 사무친 비참, 제 이름조차 잊어버린 비참, 이제 찾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법도 없이 제 흉흉한 얼굴을 아무 데나 무턱대고 드미는 이 비참을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서 눈을 뜨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p78-79)
☑ 비참! 언젠가는 주님께서 갚아주시리라!
우리는 너무 계산이 많거든. 그게 바로 악이지. 그러니 우리는 가난의 정신을 그저 입으로 가르칠 뿐이지. (p83)
교황 레오 13세의 저 유명한 회칙 『레룸 노비룸』을 지금 자네들은 무슨 사순절 담화문이나 읽듯 건성으로 흘려 읽지. 그 당시에는, 이보게. 젊은 친구, 우리는 발밑에서 온 땅이 뒤흔들리는 줄 알았다네. 얼마나 열광하고 고무되었던지! 그때 나는 광산지대 한복판에 있는 노랑퐁트의 본당 신부였지. 노동이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따르는 상품이 아니라는 저 단순한 사상, 노동 임금과 인간 생명을 놓고는 밀이나 사탕 커피처럼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는 그 사상이 사람들의 의식을 뒤엎어 놓았지. 알아듣겠나? 강단에서 사람들에게 그걸 설명했다는 이유로 나는 사회주의자로 몰렸고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은 나를 몽트뢰이로 좌천해서 몰아냈다네. (p87)
☑ 레오 13세 교황의 「노동헌장」은 비참과 노동자를 껴안았다.
그래, 나도 내 고민들이 있었던 거지. 제일 힘겨운 것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하고 웃음거리나 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지. (p88)
나는 혈기라면 남아돌 정도로 넘쳤지. 그래, 그 당시 나는 루터를 이해했어. 그도 혈기 하나는 대단했지. 에르푸르트의 수도승 소굴에서 정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그를 정말 휘둘러 댔겠지.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시지 않고, 우리 같은 약골들이 보기에는 루터의 격분은 좀 지나치지. (p88-89)
사람에 따라서 인생을 빨리 터득하기도 하고 늦게 알게 되기도 하지. 그래도 제 나름대로 다 알기 마련 아닌가. 물론 각자는 자기 경험의 몫밖에는 갖지 못하지만. 20센티리터의 병이 1리터를 담아 낼 수는 절대 없으니까. (p90)
맹수 조련사가 하듯 그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그 놈이 뒷걸음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그놈의 그 현기증 나는 유혹에서 자네는 벗어나지 못할걸. 필요한 만큼만 바라보게. 그리고 기도 없이 절대로 불의를 쳐다보아서는 안 되네. (p91)
☑ 불의는 힘이 세다. 괜히 불의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 “내 말을 돌려 달라.”라고 최후의 날 심판자가 말하실 걸세. 이런저런 사람들이 그때 제 조그만 꾸러미 속에서 무얼 꺼내 들릴까 생각하면 웃을 생각이 달아나지. 달아나고말고! (p91)
☑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바르게 돌려드릴 수 있을까!
우리가 그 말씀을 보존했던가? 그리고 그걸 제대로 보존했다 치더라도 됫박 안에 숨겨 두지는 않았는지? (p91)
☑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고 살았는가?
가난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천칭에는 무겁게 달려서 연기 같은 너희들의 온갖 보물도 그것과 평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p95)
비록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분노란 사제가 쉬 빠지기에는 너무나도 수상쩍은 영적 동요다. (p98)
☑ 분노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몫은 아니다. 그런데 쉽게 휩쓸린다.
성인들이 교회의 영예가 되기에 앞서 교회의 시련이 되었던 경우가 너무 많았어. (p100)
☑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했다.
전쟁터의 병사는 자기를 살인범이라고 여기지 않지.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한 일에서 폭리를 취하는 장사꾼도 자기를 도둑이라고 생각지 않네. 왜냐하면 푼돈이라도 남의 호주머니에서 직접은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p102)
백만장자는 돈궤 안에서 그 어떤 군주보다도 더 많은 인간 목숨을 좌지우지하지만 그가 휘두르는 권력에는 우상들처럼 귀도 눈도 없다. 그는 죽일 수 있다. 그렇다. 죽이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이 그저 죽여 버릴 수 있다. 이런 특권은 어쩌면 악마들의 특권이기도 할 것이다. (p106-107)
욕육의 악마는 말이 없는 악마다. (p109)
사람들 말마따나 내가 수단을 벗어 버린 지 오래된 것은 자네도 짐작했겠지. 하지만 내 마음이야 변하지 않았네. 내 마음은 한층 더 인간적인, 그러니 한층 더 관대한 인생관을 향해 열린 것뿐일세. 나는 내 밥벌이를 하고 있다네. 이건 중요한 말이고, 중요한 일일세. 밥벌이를 한다! (p109)
우리는 우리 천부적 소명의 초인간적 권위에 비싼,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른다. 우스꽝스러움과 숭고함은 간발의 차이일 뿐! 평소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그리도 너그러운 세상은 우리들의 우스꽝스러움은 본능적으로 증오한다. (p111)
아름다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생각을 지니지 못해도 추함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곧바로 느낀다. 범용한 신부는 추하다. (p111)
☑ 사제라는 지위에 대한 어려움.
나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 어제 마치 계시처럼 문득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겉으로는 때때로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옥죄는 손길을 완전히 늦춘 적 없는 이 끈질긴 고통을 전혀 몰랐던 때가 문득 멀리, 현기증마저 날 정도로 아득히 먼 과거로, 거의 어린 시절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 (p113)
이제는 아무도 불편해하는 내 형색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실 더 이상 마르려고 해야 더 마를 수도 없는 이 한심한 얼굴. (p113)
옷을 다시 추스려 입으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니 내 한심한 얼굴, 매일 조금씩 더 노래져 가는 그 얼굴이, 길다란 코와 입술 양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깊은 겹주름이며 짧게 깎았지만 잘 말을 듣지 않는 면도칼로는 어쩔 수 없어 뿌리가 남아 있는 뻣뻣한 턱수염과 더불어 문득 흉하게 느껴졌다. (p115)
끔찍한 밤. 두 눈을 감자마자 슬픔이 엄습했다. 불행히도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이 낙담, 그야말로 영혼의 출혈을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p128)
☑ 영혼도 출혈이 있다니!
그 아이의 고요하고 침착한 눈 속에서 나는 내가 고대했던 연민을 발견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내 두 팔이 저절로 그를 잠시 둘렀고 나는 그 아이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p129)
☑ 연민의 마음은 울음으로 연결된다.
"자네 몸이 참 한심하네.“ 하고 신부님은 마침내 입을 여셨다. ”자네보다 더 한심한 사람은 참말이지 온 교구를 다 뒤져도 찾아볼 수 없을 거야! 그런 몸을 하고 일은 말[馬]처럼 하니 쓰러질 수밖에. 자네 같은 이에게 본당을 맡기는 걸 보면 주교님도 어지간히 신부가 아쉬운 모양이야!“ (p131)
하느님의 정통 상속자인 ‘가난한 자’에게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그 나라를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인가? ‘가난한 자’를 찾아 나선 교회는 지상의 모든 길을 돌며 그를 부른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저 현기증 나는 산꼭대기에, 2000년부터 끊임없이 마치 ‘천사’의 목소리 같은 숭고한 목소리로, 그 유혹적인 목소리로 “너 만일 엎디어 나를 경배하면 이 모든 것 네게 주리라 …… .”라고 되뇌는 ‘심연의 주인’ 앞에 맞닥뜨려 있는 것이다. (p135-136)
☑ 교회는 가난한 자의 것이다.
그 어느 사회도 ‘가난한 자’를 눌러 이기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타인의 어리석음, 허영, 악덕에 기대여 산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애덕으로 살아간다. 이 얼마나 숭고한 말인가.
(p137)
나는 너무나 일찍 악덕의 참모습을 보아 버렸다. 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정녕 마음 깊이 큰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처한 불행을 생각하면 절로 떠올리게 되는 영상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요컨대, 음란이 두렵다. (p140)
솟아오르기 시작한 종기는 자꾸 건드리는 법이 아니다. (p140)
정말 슬프게도 어린이들도 절망에 처한다는 것을 경험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지 않는가! (p141)
예전에는 어리석고 데면데면하게 보였던 우스꽝스러운 교태 공격이 이제는 그 애 또래의 많은 아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병적 호기심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어떤 고의적 집요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p141)
저 꼬마들에게서 위로를 구하다니 난 도대체 무슨 존재일까? 나는 그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말을 하고 내 고통과 기쁨을 그들과 함께 나누기를 꿈꾸었고, 내 삶을 내 기도 속에 몰입하듯이, 그 아이들에게 상처 줄 위험은 물론 피하면서 그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일에도 내 삶을 몰입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 . (p143)
아무도 불만을 갖게 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쪽에서 좋게 처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선선히 받아들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선의를 상호 대치 관계에 놓아버리는 경향이 더 크다. 뭇 영혼의 이해할 수 없는 건조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p146)
☑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어디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 데나 뿌려도 악(惡)의 씨는 거의 틀림없이 싹을 틔운다. 반대로 정말 어쩌다 갖게 되는 작으나마 선(善)의 씨가 짓눌려 죽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단한 행운, 비상한 천운이 따라야 한다. (p146)
☑ 악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아이러니!
물론 나는 기도를 드리려는 발원이 이미 하나의 기도라는 것과, 하느님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의무 이행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공기가 내 허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산소가 내 피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간밤, 그때, 기도는 내게 그토록 절실한 것이었다. (p147-148)
☑ 기도하려는 마음이 기도라는 말은 위안이 된다.
만일 기도가 정말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듯 일종의 수다, 제 그림자와 나누는 미친 사람의 대화, 아니면 그보다 더 못하게, 이 세상 재물을 얻기 위한 헛되고도 미신적인 탄원이라고 한다면, 저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그들의 마지막 날까지 저렇듯 많은 위안을 받았기보다는 정녕 강하고도 힘차며 충만한 환희를 거기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이 어찌 믿어지겠는가!
(p148)
☑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기도의 힘.
슬프다! 사람들은 정신분석의 말은 믿으면서 뭇 성인(聖人)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거의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한다. 성인들이 체험하는 내면 심화는 다른 내적 탐색과는 같지 않고, 인간 고유의 복잡성을 차츰차츰 드러내기보다는, 별안간 전적인 계시에 다다르면 천상을 향해 열리는 것이라고 그분들이 강조하셔도 사람들은 그저 어깨나 으쓱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무시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사람 그 누가 기도가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p149-150)
☑ 과도한 정신분석[심리학]에 대한 맹신이 종교에도 퍼져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문자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 그토록 길게 느껴진 시간들이건만 그 어떤 분명한 기억도 없다. 그저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총탄이 한 알 내 가슴 한복판을 뚫어 놓은 느낌뿐. 그 충격에 외려 다행히도 무감각한 혼수상태에 빠져 상처의 깊이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 . (p150)
사람은 결코 혼자서 기도하지 않는다. 내 슬픔이 정말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 하느님을 청했다. 그분은 아니 오셨다. (p150)
똑같은 고독, 똑같은 침묵, 그런데 이번에는 장애물을 통과한다거나 혹은 그걸 에둘러 갈 수 있으리란 그 어떤 희망도 없다. 아니 장애물이란 것이 있지도 않다. 아무것도 없을 뿐, 아아! 나는 밤을 내쉬고 밤을 들이마신다. 밤은 어떤 식으로든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영혼에 난 틈새를 통해 내 안에 들어앉는다. 나 자신이 밤이다. (p150-151)
내 고독, 그 완벽한 고독을 나는 증오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 어떤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다. (p151)
나는 공허와 허무의 구렁텅이 바로 곁에 마치 걸인처럼, 주정뱅이처럼, 죽은 이처럼 누워서 누가 나를 거두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p151)
그런데 고통마저도 나를 찾아 주지 않는다. 제일 흔히 매일같이 겪던 정말 하찮은 위(胃)의 통증마저. 몸은 끔찍하게도 멀쩡하다. (p152)
☑ 고통을 통한 내적 투쟁.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생명이 내게 무관심한 것처럼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진다. 이런 사실을 어찌 표현하랴. (p152)
하느님께서 무(無)에서 나를 끌어내신 이래 디뎌 온 길 전체를 나는 거꾸로 되짚어 가 버린 것 같다. 그 처음에 나는 하느님 자비의 그 불똥,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먼지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깊이를 헤아리지 못할 ‘밤’ 속에 되잠긴 채 다시 그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먼지 한 톨은 더 이상 붉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거의 꺼져 가려고 한다. (p152)
☑ 죽음을 예감한 듯 하다.
아침은 이다지도 청명하고 아늑하고 또 놀라우리만큼 경쾌하다 …… . 아주 어렸을 적, 나는 물방울이 뚝뚝 듣는 새벽녘의 생 울타리 속을 파고들곤 했다. 그러고선 흠뻑 젖어 덜덜 떨면서도 행복한 맘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내 다정한 어머니로부터 살짝 따귀 한 대와 뜨거운 우유 한 사발을 안겨 받곤 했다. (p152)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깊은 진정성을 결코 삶에 걸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겉껍질에서 살고 있다. (p154)
나는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죽게 될 사람의 이 세상살이 중에 영원 보화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영원 보화들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p158)
그것이 제 아무리 에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생각은 기도가 될 수는 없다. (p158)
나는 이 일기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내가 치르고 있는 이 시련 중에 겪는 사건들을 성실하게, 조심을 다해 정확하게 진술해 둔다는 것이 언젠가 내게 유익할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p158)
작은 광장은 여전히 적막했고 여전히 청명했으며 일정 간격으로 단조로운 원을 그리며 큰 새들이 하늘 꼭대기에서 우리를 향해 내려오는 듯 보였다. 나는 그저 그 새들이 돌아오기를, 거대한 낫이나 낼 법한 그 휘익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p165)
'성인‘들이 무슨 소용에 닿느냐고? 성인들은 이 얼간이들을 속량하기 위해 값을 치르시지. (p166)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라져 있는 것도 어떤 우주적 큰 법에 부응하는 것이어야겠지. 교회의 눈으로 보면 부자는 가난한 자의 보호자요 그의 형이란 말일세! (p166-167)
“나는 찾을 확률이 가장 많은 곳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다네. 그분의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p168)
☑ 가난한 자를 교회에서는 복되다고 하는데 현실은 비참하다.
“그런데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네가 멸시하는 저런 얼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자네를 기다리고 계시다면 어쩌지?“ 왜냐하면 그분은 오직 죄만을 제외하고 우리 모든 비참을 받아 안으시고 또 성화하시니 말일세. 설령 비겁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자는 사실 대들보에 깔린 한 마리 쥐처럼 거대한 사회 구조 밑에 눌려 버린 비참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거든. (p168)
☑ 가난하기에 복되다. 이 얼마나 복된 아이러니인가!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놀람을, 이어서는 경계심을, 그다음에는 거짓말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려는 의지’, 그것은 흐려진 물, 진흙탕 같은 것이었다. (p171)
좀 쉬려고 침대에 몸을 누이니 내 안에서,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p172)
나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 시련이 가혹하고 설명할 길 없이 너무나 순식간에 들이닥쳐서 내 이성과 신경을 뒤흔들어 놓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고 내 안에서 기도의 정신을 고갈해 버리고, 커다란 절망의 엄습이나 그 끝없는 나락보다도 더 무서운, 암담한 체념으로 나를 대신 가득 채울지라도, 내 신앙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p173)
☑ 마지막까지 붙잡고 가야할 것은 오직 신앙이다.
내 신앙은 내가 찾지 않았던 곳, 이를테면 내 육체 안에, 내 이 가련한 살 속에, 내 피와 내 살 속에, 죽어 가겠지만 세례를 받은 이 육신 속으로 숨어 들어가 존속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가끔 든다. (p173)
☑ 신앙은 신기하다. 믿지 않는 자들이 보면 망상인데, 믿는 이에게는 전부이다. 이 비길 데 없는 무한 간극!
색정은 이해된다기보다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나는 저 흉흉한 얼굴들이 갑자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미소 속에 고착되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 아아! 모든 위선이 벗겨져 나간 쾌락의 면모는 바로 고뇌의 면모라는 것에 사람들은 어찌 좀 더 자주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아아, 열흘에 하루 꼴로 아직도 내 꿈결에 나타나는 저 탐욕스러운 얼굴들, 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들! (p175)
☑ 쾌락과 고통은 일란성 쌍둥이다.
원하는 것만 참으로 소유하거늘,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전적이고 절대적인 소유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더 이상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더 이상 그대들의 기쁨을 원하지 않는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거늘 그대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도 또 내세에서도, 그러니 영원히, 그대 자신들을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p179)
☑ 사랑이신 하느님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내 고통과 일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만일 상대가 그 누구든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은 유혹에 내가 진다면 하느님과 나 사이의 마지막 끈이 끊어지고 나는 영원한 침묵 속에 들어갈 것같이 여겨진다. (p180)
실수들 때문에 나는 그저 너무 혼란스럽다. 나는 필경, 의도는 좋으나 평생을 두고 무지와 절망 사이를 오가는 약하고 가련한 부류에 속하나 보다. (p181)
그녀는 제의실 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녀의 홀쭉한 얼굴은 그저께 보았을 때보다도 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입술 가에는 너무나 경멸하는 듯한, 너무나 고집스러운 주름이 져 있었다. (p183)
겨울의 새벽, 사무치게 쓸쓸한 겨울 새벽빛이었다. (p185)
"아이라니요! 저는 오래전부터 아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다 압니다. 그때부터요. 평생 필요한 만큼 다알죠.“ (p187)
☑ 너무나 많은 것을 경험한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데가 절단되어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콸콸 흘러나가 버리는 듯한 이 상처 입은 피조물을 위해 무얼 말해 주고 무얼 해 줄 것인가? (p189)
나의 기도는 슬펐고 그 영상도 내 기도처럼 슬퍼 보였다. 나는 이 슬픔을 간신히 가누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것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온통 떠안아 그것이 내 심장과 영혼, 내 골수, 내 존재 전부를 채워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p189)
"슬프지만 어느 집에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집에도 보이지 않는 짐승들, 마귀들이 있습니다.“ (p191)
☑ 그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삶인가!
거의 잊고 있었던 위통이, 전에 겪었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더 무시무시하게 일었다. 그리운 델방드 노의사 선생의 표현이 기억에 떠올랐다. 쇠꼬챙이로 찌르는 고통이라는 표현이었는데 바로 그랬다. (p192)
☑ 몇해 전 겪었던 치통의 고통이 그랬다. 간헐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그 불쾌함.
한 걸음 뗄 적마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윽고 나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고집스레 저항하는 것도 교만이 많은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판단하면서 더는 견딜 수 없으니 1분만이라도 그저 걸음을 멈춰 달라고 아가씨에게 청했다. (p193)
남의 과오를 판단하다니 그대는 대관절 무엇입니까? 과오를 판단하는 자는 그 과오와 한 몸을 이루고 그것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p196)
☑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하는데 그게 안된다.
이 고통 어린 얼굴이 대관절 내가 불과 몇 주 전 보았던 거의 어린애 같던 그 얼굴과 정녕 같은 얼굴이란 말인가? 나는 그 얼굴의 나이를 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얼굴에는 나이도 없지 않을까? 교만에게는 나이가 없다. 고통도 결국 그런 것이다. (p197)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 기도를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된 것이 벌써 몇 주일이다. 정말 기도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은총 중의 은총은 다른 은총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제 분명 더 이상 그럴 자격이 없게 되었나 보다. (p199)
정녕 하느님께서는 내게서 떠나가셨다. 적어도 그 점만은 확실히 안다. 그럴 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비밀을 나 홀로 간직하고 있었다! (p199)
☑ 믿음은 어떤 이에게는 피를 철철 흘리는 투쟁으로 올 수도 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신부님을 감히 판단했고 거의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벌하셨습니다. 저를 도로 신학교로 보내주십시오, 저는 영혼들에게 위험한 존재입니다!
(p199)
책임자의 위기는 모든 이에게 위험한 것이다. (p200)
☑ 모두를 위험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사제라는 이름에 합당한 신부는 드러난 사례만을 보지 않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불가피한 가정과 사회의 사정들이나 거기서 비롯할 필경 정당할 타협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무정부주의자, 몽상가, 시인 유라고 나를 질타하신 블랑제르몽 수석 신부님의 말씀이 과연 옳다. (p201)
악 안에서의 연대성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p202)
☑ 악이 연대하며 덤비면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인류가 멸망한다면 바로 혐오와 권태 때문일 것이다. 몇 주 만에 떡갈나무 목재를 손가락만 갖다 대도 푹 들어가며 넘어지는 푸석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보이지 않는 버섯들로 대들보가 갉혀 들듯이 인간 존재는 차츰 갉혀 들고 있었던 것이다. (p204)
천주여, 저는 제 힘을 과신하였나이다. 당신은 마치 사람들이 막 태어나 눈도 못 뜬 짐승 새끼를 물에 던지듯 저를 절망 속에 던져 넣으셨나이다. (p205)
위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또 시작되었다. 돌바닥에 드러누워 짐승처럼 끙끙거리며 뒹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 할 지경이다. 내가 어떤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는 하느님께서나 홀로 아실 일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걸 정녕 아시는지? (p206)
저는 고통을 겪어 본지라 고통이 무언지 압니다.(p212)
☑ 예수님의 수난 이유!
고통은 모든 것을, 사회도, 가정도, 조국도, 하느님까지도 저주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p212)
☑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사제는 의사와 같습니다. 상처나 고름, 혈농 따위를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의 모든 상처는 곪습니다. (p212)
고통이 진정한 것일 경우 사제는 그 고통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겁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다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 (p212)
☑ 사제는 신자의 고통에 함께 하는 사람이다. 외면하는 사제는 사제가 아니다.
마지막 날도 그 두 사람은 외출을 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어린것이 이미 죽은 후였죠.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지는 법이 없었어요. (p216)
☑ 백작과 그 딸 상탈은 이상한 관계다.
새끼 고양이가 털실 뭉치를 가지고 놀고 있을 때 그 새끼 고양이가 벌써 생쥐를 생각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할 일은 정확하게 다 합니다. (p216)
나는 그 어떤 딸년이 우리 집의 실제 여주인이라는 것, 나는 체념하고 희생적 역할이나 맡고 그저 구경꾼이나 하인 노릇을 해야 된다는 것을 진작 알게 되었습니다. (p216-217)
어떻든 저는 살아 왔습니다. 저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완벽하게 서로 다르면서도 너무나 정확하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맞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말입니다. (p217)
☑ 백작을 두고 어머니와 딸이 갈등을 빚는 이해하기 어려운 없는 상황
“그 애는 가정교사를 참을 수 없어 하죠. 고통을 주는 존재라면 그 누구도 이 집 안에 있는 걸 견딜 수 없어 한 애거든요!” (p218)
“구렁텅이는 그것을 똑바로 내려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호려 불러 당깁니다. 그네들은 그 속에 떨어질까 무서워 차라리 스스로 뛰어드는 것이죠.” (p220)
“내가 인고한 것을 그 애는 그래 참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p221)
워낙 여러 분 배신을 당한만큼 나도 부정한 아내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난날 내가 얼굴 붉힐 일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p223)
이 세상에 강자의 위선보다 더한 무질서는 없습니다. (p224)
끊임없는 접촉 가운데 만족을 채워 갈 수 있기 때문에 가족 간의 증오는 모든 증오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며, 열이 끓지 않으면서도 차츰차츰 독소를 퍼뜨리는 열개(裂開)된 종기 비슷한 것이다. (p227)
나를 꺾어 놓으신다고요? 그분은 저를 벌써 꺾어 놓으신걸요 ……, 아직도 무얼 더 제게 하실 수 있단 말씀이에요? 천주는 제게서 제 아들을 앗아가셨어요. 나는 그런 분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p227-228)
☑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엄마의 외침이다.
부인, 지옥이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p229)
☑ 사랑이 없는 삶을 산다면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다.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더 이상 이해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은 아, 끔찍하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p230)
나로서는 도저히 가눌 수 없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일생의 가장 큰 유혹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도우셨다. 나는 갑자기 볼 위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비참의 마지막 고비에 임한 임종하는 자의 얼굴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단 한 방울의 눈물이었다. 부인도 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p231)
지옥이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p240)
저는 하느님을 거역했고 그분을 미워했나 봅니다. 그래요, 저는 가슴에 이 증오를 품은 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신부님에게만 저를 맡겨 드립니다. (p241)
우리의 온갖 고통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그것들을 맡아 주셔서 그것은 천주의 성심 안에 있습니다. (p243)
부인은 내일 고해를 들어 달라고 내게 청했다. 나는 나 자신도 절대 침묵을 지키겠다고 언약하면서 부인에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약속시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라고 나는 말했다. 이 마지막 말을 할 때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고 슬픔이 다시금 나를 엄습했다. (p243)
살아 오면서 중대한 시련을 겪고 났을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나는 일종의 무감각, 사고의 마비 상태를 체험했다. 그런데 그것은 불쾌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마음 가벼운 행복감 같은 이상한 착각을 줬다. 어떤 행복일까? 그것을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 얼굴 없는 환희, 있어야 할 것이 있었고 이미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p244)
희망! 바람 불고 쓸쓸하고 무섭던 어느 3월 밤에 그것은 네 두 팔 안에 안겨 죽었습니다.…… . 내 빰 위로, 나만이 아는 부위에 나는 그것의 마지막 숨결을 느꼈더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제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얻어 온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진정 제 것인, 나만의 것인 희망,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받는 자와 다르듯, 철학자들이 같은 이름으로 운위하는 것과도 다른 희망이 말입니다. (p245)
졸음이 몰려온다. 두 눈이 저절로 감겨 오는 바람에 성무일도를 마치기 위해서는 종횡으로 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행복한가 아닌가. 모를 일이다. (p246)
주님께는 증인이 한 사람 필요했던 것이고, 분명 마땅한 이가 없어 마치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와서 증인으로 세우듯 다만 그렇게 내가 선택된 것이리라. 내가 무슨 역할을, 참다운 역할을 수행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나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일 터이다. 한 영혼이 희망, 망덕(望德)과 화해하는 저 엄숙한 혼인에 참석하는 은혜를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만 해도 과분한 일이다. (p249)
부인이 내 앞에서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치른 투쟁, 영원한 생명을 위해 치른 저 위대한 투쟁, 부인이 탈진하면서도 지지 않고 치러 낸 그 투쟁에 대한 추억이 내 기억에 너무나 강하게 되살아나서 나는 실신할 것만 같았다. (p252)
샹탈 양은 내게 등을 돌렸고 내가 지나가자 등 뒤로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들려왔다. 내 말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p253)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일기 쓰는 일에 절실하다. 이 일에 쓰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만이 내 내면을 밝혀 보려는 어떤 의지를 느끼는 시간이다. (p254)
아침저녁 꼼꼼하게 더듬어 쓰는 일기는 이 허허한 광야에 어떤 표지물을 세워 주는 것만 같다. (p255)
제 얼굴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위해서 이 얼굴을 만드셨다면 그건 따귀를 맞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직 뺨따귀를 맞아 본 적이 없습니다. (p257)
신부님이 저들 앞에서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고 정확히 말하더라도 저들은 신부님을 여전히 광신도나 광인 취급할겁니다. (p259)
☑ 이미 편견을 가진 사람은 진실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부님의 순박함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고 그 순박함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것이죠. 신부님의 순박함은 그들을 태워 버리는 불길 같은 것이죠. (p260)
그는 얼굴이 온통 벌겋게 되어 내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는 탁자 밑에 떨어져 있던 네 절로 접은 종잇장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백작 부인의 편지였다. 나는 자칫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그의 손에서 받을 때 손가락이 서로 닿았으니까 그는 내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p263)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날의 체험으로 알게 되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참으로 쉽다! (p264)
☑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온전히 의탁할 수가 있다.
나는 신부님이 무얼 생각하는지 알아요. 신부님은 저를 괴물이라 생각하시죠? (p265)
만일 내세라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것이라면 어머니는 어제 깨달았을 겁니다. 어머니는 나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어요. 내 남동생이 죽은 후부터 나를 미워하셨어요. (p265)
아가씨가 변하지 않으면 증오할 대상은 언제라도 계속있기 마련입니다. (p266)
저는 무엇이든 간에 입 딱 다물고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온몸의 피가 핏줄 속에서 부글거릴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일거리를 붙잡은 채 눈은 착 내리깔고 혀를 깨물고 있는 게 어떤 쾌감을 주는지 아세요! 어머니도 그랬죠.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생각과 자기 분노에 잠긴 채 둘이 나란히 앉은 채 일을 하며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었답니다. (p266-267)
아직 어리다고까지 해야 할 사람이 어쩌면 저토록 냉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p268)
정녕 아가씨가 아버지를 심판하고 있다는 것, 이 판결은 확정되었으며, 또 어쩌면 용서도 없는 것이었지만, 슬픔이 깃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 노인을 딸 앞에서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것은 모멸이 아니라 바로 이 슬픔이었다. 왜냐하면 그 위인의 속에는 불행히도 이러한 슬픔과 동조될 수 있을 그 어떤 것도 없어, 그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p270)
“저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의 길고 길었던 시련은 끝나고 완성되었다. 내 시련은 이제 시작이다. 어쩌면 그것은 같은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어쩌면 기진한 한 피조물에게서 막 벗겨 주신 그 짐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일까? (p277)
내가 백작 부인에게 강복을 주던 그 순간 내게 찾아들었던, 의념과 뒤섞인 그 기쁨, 절박한 아늑함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었을까? 내가 막 죄를 사한 뒤, 그 몇 시간 후, 안정과 휴식을 위해 존재하던 친근한 방의 문턱을 넘어 죽음이 찾아와 거두어들인 그 여인은 이미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해 버렸다. (p277)
자네는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네. 기도의 대상을 위해 너무 고통을 느끼지 않나 싶어, 피로도에 따라 영향 성취도 달라져야 하듯이 기도도 괴로움과 보조를 맞춰야겠지. (P280)
기도를 할 수 없거든 같은 말이라도 반복하게! 여보게, 나도 여러 번 난관을 겪었네! 마귀가 나한테 기도에 거부감을 느끼게 얼마나 사주하던지. 묵주기도 하는 데도 구슬땀을 흘릴 정도였으니 어찌 좀 알만한가? (P280)
☑ 그저 머무는 것도 기도다.
시간이란 하느님께는 아무것도 아니지. 당신의 시선은 시간을 꿰뚫으시니까. (P281)
사람들이 자네에 관해 거북하고 곤란한 얘기들을 내게 여러 번 되뇌었지만 나는 상관 않네! 사람들의 악의를 난 알거든. 하지만 자네가 그 불쌍한 백작 부인과는 어리석은 짓만 한 것은 사실이야. (P283)
샹탈 양이 진실을 왜곡한 경우라면 그녀는 그 왜곡도 재간을 다해 부렸을 것이니 만일 내가 입을 연다면 나는 고인의 비밀을 누설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빠져나오지 못할 어정쩡한 거짓말의 그물망 안에 갇혀 허덕여야 할 것이다. (P285)
무엇보다 백작 딸을 만나 주지 말게. 그야말로 마귀야. (P285)
이틀 전부터, 아주 분명하게 의식하지는 못한 채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았던 잘못에 대해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정직하자면 침묵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P286)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방금 누렸던 기이한 평화는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불행의 예고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P287)
인간적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죽는 것인데 자네는 자신을 조금씩 죽여 가고 있었어. (P289)
우선 매일매일 작은 일들을 하게나. 정성을 들여서 말이야. 공책 위에 몸을 숙이고 혀까지 내민 채 글씨 공부하는 꼬마 학생을 기억하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저 우리의 힘에만 맡겨 놓고 계시는 계제에는 그분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걸세.
(P291)
작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듯하지만 그것들은 평화를 주네. 그건, 그래, 들에 핀 꽃들 같은 것이지. 향기도 없다고 오해들 하지만 전부 합치면 향기를 뿜는 거야. 작은 것들의 기도는 천진하지. 작은 것들 하나하나마다 ‘천사’가 있지. 자네는 천사들에게도 기도를 드리나?
(P291)
☑ 우리 각자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것을 잊고 산다.
사람들은 천사들에게 기도를 충분히 드리지 않지. 천사들은 신학자들에게 적잖이 두려움을 주는 존재랄까. 동방교회의 옛 이단 탓이지만 그런 두려움은 기우일 뿐이네! 세상은 천사들로 가득하네. (P291)
그분은 물론 우리 어머니시지. 새로운 이브이자, 인류의 어머니시지. 그러나 그분은 인류의 딸이기도 해. 옛 세계, 고통에 찬 세계, ‘거룩한 은총’ 이전의 세계는 어머니인 동정녀에 대한 막연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다림 속에 오랫동안, 몇 세기나 슬픔에 잠긴 제 가슴에 그분을 안고 고이 흔들어 주었네 …… . (P291)
하느님의 거룩함! 하느님의 단순함! 천사들의 교만을 처단하신 하느님의 그 무섭도록 놀라운 순진함! 정말 그렇다네. 마귀는 하느님의 그 단순함을 똑바로 바라보려 애써 보았을 거야. 그러다 피조물의 정점에 있던 활활 타는 그 횃불은 대번에 밤의 심연으로 떨어져 버린 거지. (p292-293)
그분은 우리 인간의 기쁨은 어느 하나 물리치지 않으셨네. 그분은 오직 죄만 물리치셨지. 하지만 당신의 죽음에는 정말이지 정성을 들이셨어!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셨어.
(p293)
성모님은 개선도 기적도 누리지 않으셨어. 인간의 영광이 그 크고 거친 날개의 아주 가느다란 끝자락으로라도 성모님을 스치는 것을 당신 아드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네. 성모님처럼 자신의 품위에 대해, 자기 자신을 모든 천사들 위에 올려 앉히는 당신의 그 품위에 대해 그렇게까지 까맣게 모르며 순진하게 사시고, 고통 당하시고, 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네. (p294)
‘동정녀’의 눈길만이 진실로 어린이다운 눈길, 우리의 치욕과 불행 위에 머무신 눈길로서는 오직 유일한 진실로 어린이다운 눈길일세. (p295)
아아, 통증이야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수반된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느낌은 나의 의지를 이제 완전히 꺾어 놓았다. 우리는 문지방에 서 있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자네야말로 나를 강복해 주어야 하네.”라고 그분은 대답했다. (p296)
☑ 고통받는 이는 복되다는 이 신비!
나는 그가 괴상하다고 여기신 나의 식사법을 좋아서 택한 것은 아니었다. 내 위가 다른 음식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뿐이다. (p297)
첫 번째 실신이 나를 덮친 것은 그보다 좀 더 지나서였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서 있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빰에는 차가운 진흙이 닿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침내 일어섰다 놓친 내 묵주를 가시덤불 속에서 찾아내기까지 했다. (p300)
하늘의 진노를 막아 준 조그만 손을 가지신 숭고한 피조물, 은총이 가득한 그분의 두 손 …… 나는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을 보였다가 또 안 보이기도 했다. 통증이 워낙 심해졌고 몸은 다시 미끌어지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두 손중 하나를 내 손으로 잡았다. 그것은 어린이의 손, 이미 일과 빨래로 거칠어진 가난한 어린이의 손이었다. (p301)
☑ 성모님의 손, 가난한 어린이의 손.
나는 그 얼굴을 보았다. 까칠한 손과 마찬가지로 전혀 윤기 없는 어린이의 얼굴, 아주 어린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슬픔, 내 마음, 비참한 한 인간의 마음에 그리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할 수 없어 나로서는 도무지 한몫 나눌 수 없는 그런 슬픔의 얼굴이었다. (p301)
빗물이 생 울타리에서 흘러내려 목과 팔을 적셨다. 통증은 차츰 가라앉아 갔으나 눈물 같은 맛이 느껴지는 미지근한 물을 자주 뱉게 되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것은 그 시도조차도 해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p302)
하기는 의식을 잃은 것도 절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생생한 고통의 노예가 된 듯, 아니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의 노예가 된 듯 느껴졌다. 왜냐하면 고통이 되돌아오리라는 확신은 고통 그 자체보다 더 괴로운 것이었기 때문이고 나는 개가 주인을 따라가듯 그 고통을 따르고 있었다. 내가 잠시 후 넘어져 버리면 그 쓰러진 자리에서 빈사 사태로 나중에 발견될 것이고 그래서 입방아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p302)
☑ 되돌아올 고통을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수단을 빨아야 했다. 천은 뻣뻣했고 물은 벌겋게 되었다. 피를 많이 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307)
내 소심함은 얼마 전부터 정말이지 강박증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행인의 시선이 내게 머무는 것을 느끼면 후닥닥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치에 맞지도 않고 어린애 같은 이런 두려움을 이겨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장은 가슴팍에서 쿵쿵거리고, 상대방이 내 인사에 답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다시 제대로 숨을 쉬게 된다. 상대의 답례 인사는 이미 내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 시점을 넘어서야 그렇게 뒤늦게 돌아오곤 하니 말이다. (p314)
확실히 기도도 좋아졌다. 그러나 나는 내 기도가 낯설다. 예전 기도는 고집스러운 탄원 같았다. 예를 들어 성무일도 중 어떤 교훈의 말씀이 내 주의를 끌 때도 나는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조르며 강압하는, 하느님과의 말 겨루기를 속으로 계속 이어가는 듯 느끼곤 했다. 그렇다. 나는 그분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앗아 내고 억지를 써서라도 그분의 자애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것이든 소망한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마을처럼 내 기도도 하중을 잃고 위로 떠오른다…… . (p320-321)
또 약간의 출혈, 아니 각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스쳤다. 그야 물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자주 들고 때로는 염려도 된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두려움과는 다르다. 이번 두려움은 일순간밖에 머물지 않았다. 이런 순식간의 인상을 무엇에다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 채찍 한 자락이 심장을 후려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오, ‘주님의 거룩한 수난!’ (p321)
☑ 주님의 두려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죽음에 대한 공포. 두 번째 발작은 첫 번째보다는 덜했던 것 같다. 그러나 꼭 짚어 말할 수 없는 가슴의 어떤 점을 중심으로 온 몸이 이리 위축되고 떨리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 (p322)
아무도 나와 젊음을 나누고자 하지 않았기에 나는 젊음을 결코 모르고 살아 왔던 것이다. (p325)
나는 청춘이 축복받은 것임을, 도전하여 질주할 모험임을, 그 모험마저 축복받은 것임을 깨달았다. (p325)
주파한 길도, 시간도 도저히 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우리가 빨리, 아주 빨리, 점점 더 빨리 질주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질주로 인해 생기는 바람은 내 온 몸의 무게로 맞받던 처음과는 달리 역풍의 장애물이 아니라, 이제는 현기증 나는 통로가 되어 주었으니 무서운 속도로 휘저어져 생긴 두 바람기둥 사이로 진공상태를 만들어 냈다. (p327)
☑ 사제도 한 사람의 젊은이다.
저는 그분들의 질서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을 그분께 나무랄 뿐입니다. (p334)
☑ 사랑없이 살아가는 삶이 지옥이다.
진실된 마지막 병정은 1431년 5월 30일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인 것은 당신 같은 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인 것 이상이죠. 죄의 선고에 이어 파문하고 끝내 화형 했으니까요. (p338)
☑ 잔다르크를 죽인 것은 교회였다. 또 그를 성녀로 만든 것도 교회였다.
내가 지금껏 나 자신을 너무 의심한 것은 분명하다. 자신에 대한 의심은 겸손이 아니라, 때로 거의 미친 듯 들끓는 교만의 가장 극단적 형태라는 생각까지 든다. 불행한 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대항하게 만드는 질투 어린 흉포로 결국은 자신을 잡아먹게 만드는 그것, 지옥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p344-345)
☑ 자신에 대한 의심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그것이 지옥으로 이끈다.
내 안에 커다란 교만의 싹이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소위 이 세상의 헛됨이라고들 불리는 것에 대해 내가 오래전부터 느끼는 무관심은 만족감보다는 경계심을 내게 불러일으킨다. 내 우스꽝스러운 인격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극복할 수 없는 일종의 혐오감 속에 무언가 불순한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345)
☑ 무관심과 이기심을 경계해야 한다.
아아, 내가 나을 수 있다면! 내가 고생하고 있는 병의 고비가 그저 때로 서른 살 고비를 나타내는 육체의 변화 중 첫 증세에 지나지 않는다면…… . (p346)
겉보기가 가장 값이 덜 나가는 것이라 해서 반드시 그 소중함이 덜한 것도 아니다. 그 반대다. 내가 이 일기장에 대해 가지는 애착에는 분명 병적인 것이 있다. 그렇다해서 이 일기가 시련을 당할 때 큰 도움을 아니 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늘 읽어 보니 이 일기는 내가 자족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수치스럽지만, 내 생각을 가다듬기에는 충분히 정확한 아주 소중한 증언들을 전해 준다. 이 일기는 나를 몽롱함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이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p347)
펜을 가누지도 못하니 수치스러운 일이다. 양손이 다 떨린다. 지속적인 것은 아니고 가끔, 아주 짧게, 수초간 간혈적으로만 떨린다. (p355)
역시 유치한 짓이겠지만 나는 성당 바닥 돌에 자유롭게 무릎을 꿇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대고 부복하고 싶었다. 나는 이때처럼 기도에 대한 육체적 저항을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p356)
나는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두려움들, 신경 가닥가닥마다 하나씩 달라붙은 두려움, 무수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집중해 보려 들면 캄캄하기 이를 데 없는 한밤인양 내 고뇌의 깊숙한 곳에 웅크린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군중의 수군거림 같은 그런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p357)
내 불행이 특출난 것도 아니다. 세상 곳곳에서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의 사람이 나처럼 멍하니 이런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나는 아마 최초의 내적 동요를 제어하는 데 가장 미력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p360)
☑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 왜?
아 물론 당신이 겪는 소소한 통증이 다 끝났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고비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누구나 제 병을 지닌 채 사는 데 익숙해져야죠.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 모두 다 말입니다. (p365)
내가 거기에 있는 것 자체가, 이유야 모르겠지만, 상대를 뒤흔들어 놓고 있었고, 1초 1초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는 더 참을 수 없이 여겨지고 있다는 것과, 그런데도 그의 마음 상태는 나를 가도록 내버려 두지 못하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포로 신세였다. (p373)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제 분수에 맞는 자리에 박혀 있었어야 했겠죠. 우리는 몸을 사릴 줄 모르고, 다른 것에도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니 말입니다. 당신의 신학교 시절 모습이 나의 프로뱅 고교 시절과 꼭 같았을 거리고 저는 장담합니다. 하느님이냐 과학이냐, 우리는 각자 그에 투신했죠. 뱃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같은 정열로.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처지는 이제 꼭 같습니다…… .“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이미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p373)
☑ 의사는 주인공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죽음까지도 닮았다.
“저는 6개월 내에 죽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가 자살에 대해 언급하는 줄 알았다. 그는 내 시선에서 아마 이런 내 생각을 짚어 냈던 것 같다. “제가 왜 당신 앞에서 엉터리 배우짓거리를 하는지 저도 모르겠군요. 당신 시선을 보면 무엇이든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자살을 한다고요? 아이쿠! 그건 귀족이나 시인의 심심풀이지 저 같은 사람의 손에는 닿지 않는 사치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저를 비겁한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것도 사양합니다.” (p374)
인간은 자신을 탕진해서만, 제 고유한 실체를 희생해야만 기쁨을 누리죠. 기쁨과 괴로움은 결국 하나입니다. (p376)
그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나는 벌써 산 자들 속에 끼여 있는 한 죽은 자에 불과했다.
(p377)
의사의 눈길은 내 시선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의 시선에서 믿음과 동료애, 그리고 무언가 알지 못할 어떤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친구, 동행자의 시선이었다. (p377)
☑ 그야말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도대체 무슨 끔찍한 이변으로 이런 상황에서 천주의 이름까지 잊었는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 스스로는 결코 해명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혼자였다. 내 죽음과 마주하고 형언할 수 없이 고독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존재의 상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p380)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다지도 사랑했더란 말인가?’라며 나는 자문에 잠겨 있었다. 이 아침과 저녁들, 이 길들을 변화무쌍하고 신비스러운 저 길들, 사람들의 발자취가 가득 새겨진 저 길들, 대체 나는 저 길들, 우리 길들, 이 세상의 길들을 그리도 사랑했더란 말인가? (p380)
☑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나는 의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나는 울고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흐느끼지 않은 채 울고 있었다. 한숨 한 번 쉬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울고 있었다. 임종하는 이들이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도 그리 울고 있었다. 그것 역시 내게서 빠져나기는 생명이었다. (p380-381)
나는 하느님께서 단 한마디, 사제다운 단 한마디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내 목숨에서 남아 있는 나머지 그 모두를 바쳤을 것이다. 하다못해 나는 용서를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눈물에 목이 메어 그 말을 더듬거리기만 했다. 나는 눈물이 목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 눈물은 피 맛이었다. (p381)
☑ 사제는 한 인간이기에 자신의 죽음 앞에서 우는 것이다.
눈물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내가 나 자신 때문에 우는 것은 정녕 아니었다. 그 점은 확신한다! 자신을 증오하는 감정에 그토록 가까이 가 본 적은 여태 없었다. 나는 내 죽음 때문에 우는 것은 아니었다. (p381)
나는 사랑하면서도 감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과도 같았다. 정말이지 눈물이 비겁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눈물이 사랑의 눈물이었다고 생각한다…… . (p382)
나 같은 나이에 죽음은 너무나 멀리 느껴져서 우리 자신이 범용에 대해 매일같이 겪는 체험으로도 그다지 실감나지 않는 법이다. (p385)
내 죽음이 여기 있다. 이 죽음은 다른 그 어떤 죽음과 마찬가지고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통상적인 한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p386)
하느님, 저는 모든 것을 당신께 기꺼이 바치나이다. 다만 저는 제대로 바치는 방법도 몰라 마치 앗기는 대로 두는 것 같은 모습으로 바치나이다. 저의 최선은 가만히 있는 것이나이다. 저는 바칠 줄 모르오나 당신, 당신께서는 취하실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p386)
어떤 추함, 그 추함에서 오는 어떤 황량함보다 더 깊은 적막과 고독도 없다. (p387)
불쌍한 여인네들이 병에 대해 말하기를 이토록 꺼리고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는 자주 봤다. 그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이는 곧 죽을 겁니다. 하지만 그이는 정작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펄쩍 뛰듯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p395)
☑ 또 한 사람의 남자가 죽음 앞에 서있다. 환속한 사제가.
아이들보다 더 착한 건, 신부님, 정말 없어요. 아이들은 하느님이죠. (p397)
십자가 위에서도, 수난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거룩한 인성‘을 완성하시면서 ’우리 주님‘은 당신이 불의의 희생이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저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아주 어린아이들도 아는 이 말, 어린이 같다고 할 수 있을 이 말은, 그 일 후로 두고두고 되뇌게 될 말 아닌가. 저들은 벼락이 칠 줄 알았으나 뭐랄까, 천진한 손 하나가 그들 위에서 심연의 아가리를 막아 버렸던 것이다. (p403)
내가 때로 괴로워하며 받아야 했던 비난들은 나나 비난자나 양측이 다 나의 진정한 운명을 모르기에 내게 과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기쁘다. (p403)
☑ 그가 곧 죽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토록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물론, 하느님께서 내게 남겨 두실 마지막 몇 달, 마지막 몇 주 동안, 내가 본당 직무를 맡을 수 있는 한 나는 예전처럼 진중하게 행동하도록 애써 보겠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미래 걱정은 덜하고 현재를 위해 일할 것이다. (p404)
수사나 수녀들이 언제나 임종을 잘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들 한다. 이런 걱정을 지금 나는 하지 않아도 좋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의 용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최후가 완벽하고 완결되기를 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나도 잘 이해한다. 나로서는 그럴 수도 없으니 나의 임종은 그저 저 생긴 대로 진행될 것이다. 만약 이런 말이 너무 대담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진정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 아무리 아름다운 시구절이라 하더라도 더듬거리는 고백만 못하다고 나는 말하련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비유가 아무에게도 거슬리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임종은 우선 사랑의 행덕(行德)이니까. (p405)
나는 사람들을 무척 사랑했고 산 자들의 이 땅은 내게 아늑했음을 지금 생생히 느끼고 있다. 나는 눈물 없이는 죽지 못할 것이다. (p405)
왜 걱정하고 왜 지레 판단한단 말인가? 무서우면 무섭다고 부끄럼 없이 말하리라. 그러니 그분의 ‘거룩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날 때 주님의 첫 눈길은 안도시켜 주시는 눈길이기를! (p405-406)
내가 느끼던 고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내 영혼의 한 자락은 무감각하게 되었고 최후까지 그러리라 생각한다. (p408)
이 투쟁도 이제 끝이 났다. 이 싸움이 어떤 것이었던 지도 더 이상 알 수 없다. 나는 나 자신과, 이 가련한 껍질과 화해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이다. 은총은 자기 자신을 잊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서 모든 교만이 사라져 버린다면 은총 중의 은총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지체(肢體) 중의 그 어느 지체처럼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p409)
임종하는 친구는 자기 묵주를 원한다는 것을 손짓으로 알려 주었으므로 저는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주었고 그는 그때부터 그 묵주를 가슴 위로 꼭 모아 잡고 있었습니다. (p411)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손을 제 손 위에 얹으며 제 귀를 그의 입에 가까이 대라는 분명한 눈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매우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여기 아주 정확히 옮겨 적었다고 믿습니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그런 후 그는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p411)
☑ 어떤 삶을 살았던, 그 모든 것은 은총이다!
작품 해설
1936년 간행한 이 작품은 절망과 광기가 끊임없이 틈타는 성덕(聖德)의 길 가운데 던져진 애처롭도록 유약해 보이는 젊은 신부가 남긴 내면 일기다. (p414)
떠나지 않을 듯한 눅눅함을 남겨 놓으며 끝도 없이 내리는 가랑비에 갇힌 그렇고 그런 마을 모습은 권태와 타성에 젖어 탈그리스도교 과정에 접어든 20세기 초반 서구의 보편적 풍경과 다름없다. 그 속에서 놀랍도록 순수한 사제가 우직하리만큼 열정적으로 다가가는 영혼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은 절망과 믿음의 초월적 비극, 신비극을 일상 속에서 손에 잡히듯 가시화하고 있다. (p414)
이 신부는 열성이 지나쳐 고생을 사서 하고 동분서주하며 온갖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만 물론 다 실패할결세. 그러고도 어리석은 이들, 사악한 이들, 나쁜 놈들의 농간에 계속 걸려들겠지. 그래서 그가 정말로 패배하고 다 잃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바로 그때, 천주를 섬기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만큼 그는 그분을 섬긴 것이 될 거야. 신부의 순수함이 모든 것을 눌러 이기고, 그는 암으로 조용히 죽어갈 걸세. (p415) (작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그건 바로 경험 없는 젊은 성인 신부와 그를 에워싼 범용한 군상들 간의 비극적 오해지요. (p417)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며 작가가 쓴 글 중)
글 따위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는 이 기이한 생각이여! 아직도 구속(救贖)을 받을 수 있는 이 세상의 몫은 오로지 어린이들, 영웅, 그리고 순교자들에만 속한다는 내 깊은 확신에도 불구하고 설득하고 납득시키려 드는 씁쓸한 아이러니여. (p421) (작가의 『달빛 아래의 대 공동묘지』중)
이 소설의 주인공은 파스칼적인 격정적 믿음에 부추겨져 있지만 또 파스칼처럼 병으로 고문받고 있으며(둘 다 요절한다.) 저 고전인의 ‘섬세의 정신’에 비견되는 그의 초월적 형안은 심지어는 일기를 써 내려가는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려는 듯한 자기연민의 정 속까지 파고든 악마적 정신을 통찰하게 하니 그의 불안과 탈진의 저항은 얼마만 할 것인가. (p421)
누구건 언제고 사탄에게 노략질당할 수 있는 취약한 인간의 내면, 그 두려운 분열을 무고한 신부가 겪는 정신적 위기가 대신하고 있다.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밤을 연상시키는 밤들을 환각에 시달리며 지새우는 그는 세속적 기준으로 판단되지 않는 사람이다. (p421)
미약한 건강, 해진 신부복,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방심한 태도가 낳은 몰이해, 불가능해져버린 기도, 덕으로서의 희망마저도 거부하고 싶은 분심과 분열로 시달리며 자살의 유혹까지 겪는 이 신부뿐 아니라 베르나노스의 여러 주인공들의 모습은 클로델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요지부동한 신앙으로 버티고 서서 신앙의 숭엄함을 노래하는 자들이 아니다. 베르나노스는 클로델이나 모리아크나 마찬가지로 신앙이 깊지만 모범적 정숙주의가 그리스도교라는 등식을 거부하고 가시적 교회의 타성과 편협성 관료주의에 대해 양보없는 비판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가하였으니 우리는 그 증언을 주인공 신부와 공감의 대화를 나누는 토르시의 신부나 외인부대 장교 올리비에 그리고 자살한 델방드 의사를 통해 통렬하게 듣게 된다.
(p422)
안팎으로 갉아 드는 고통에도 정녕 어린이 같은 그 욕심 없는 사랑으로 순수하기에 종내 사제의 위엄성을 확보하는 신부의 영적 혜안, 그 초월적 힘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베르나노스적이다. ‘어린이’ 신부와 대갓집의 나이 든 백작 부인과의 극적인 대좌야말로 그런 베르나노스의 사제상을 놀랍도록 보여 준다. (p422)
허약함을 넘어 죽음이 임박하도록 육체의 고통을 받는 그는 작가의 말대로 “복된 암”으로 이미 수난 중이다. 이는 수난 예수와 일치될 수 있는 은총, 「이사야서」53장이 그려보이는 구속자(救贖者)와 일치할 수 있는 은총이다. 그는 한 인간, 각별히 사제로서 대사제, 저 ‘상처입은 치유자’이신 예수와 이렇게 일치해 간다. 밤 깊은 진흙 길에서 객혈 끝에 쓰러진 그의 얼굴을 닦아주는 세라피타, 간특하기까지 하던 맹랑한 소녀는 이 수난자 앞에서 문득 면포를 든 베로니카로, 어린 성모로 변모된다. (p423)
환속의 이유를 지적 발전의 귀결로 허장성세 가장하고 있는 옛 동창 뒤프레티의 집 복도 간이침대에서 맞이하는 주인공의 임종은 골고다 사건의 재현이다. 그 치욕의 객사, 임종의 순간 그는 구속의 예수와 자신의 고통을 화해시키니 숨지며 간신히 웅얼거린 “모든 것이 은총”이란 말은 타협적 신앙의 주절거림이 아니라 끈질긴 밤의 끝에 ‘자신과 화해’한 인간만이 표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고백이다. 본의 아니게 성인의 임종을 지킨 뒤프레티의 편지를 잘 읽어 보라. 우리 성인신부는 성무 집행권을 상실한 환속자에게 사죄경을 발할 신묘한 기회를 주고 죽어 가면서 끝내 그 불행한 옛 친구까지도 베르나노스의 평소 믿음처럼 사랑의 행덕 현장인 임종의 신비에 참여시킨다. (p423-424)
스스로 다 알고 어른인 척 굴고 싶어 하는, 20세기에 어린이 정신의 미덕을 역설한 베르나노스는 독특한 설득력으로 세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로 이분되는 게 아니라, 어린이 정신으로 충만하여 사는 성인과 그것을 잃어버린 (죄인이라기보다는) 불행한 사람들로 나눠지는 것임을 알려 준다. (p426)
세계 역사에 있어서 아름다운 모든 것은 인간의 겸손하지만 강렬한 인내와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신비로운 조화를 통해 우리도 모르는 새 이뤄지는 것입니다. (p428) (작가가 한 소녀에게 적어 준 글 중)
삶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p428) (작가가 한 소녀에게 적어 준 글 중)
3. 이책에 대한 간략한 나의 느낌 또는 소개
오래간 만에 소설을 읽었다. 어렵지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