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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몸소 보여준 우리시대의 슈바이처
-聖山, 장기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우리 시대의 성자(聖者)
장기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8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였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에도 그의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청년시절 선생이 의사가 되면서 품었던 다짐이 하나 있다.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는 소망이 그것이다. 그 다짐은 한평생을 살며 지켜졌고 실천됐다. ‘가난한 사람도 치료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박애정신은 들꽃같은 삶의 질곡에서도 비바람에 꺾이는 일이 없었다.
선생은 1932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당시 국내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선생의 수제자로 경성의전 외과에 근무했다. 이때 그는 맹장염을 일으키는 세균에 대한 논문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를 완성했고, 1940년에는 이 논문으로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평양 연합기독(기흘)병원에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해방 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김일성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났다. 둘째 아들 가용(張家鏞·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씨만 데리고 우역곡절 끝에 월남하면서 그의 제2의 인생은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가족과의 생이별이라는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평생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참의사의 길을 걷게 만든 동기가 됐다.
1950년 12월, 월남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일했다. 부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951년 6월에는 영도구 남항동의 제3교회 창고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이를 모태로 복음병원(고신의료원 전신)이 태어났다. 이것은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푸는 의사로서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1958년에는 부산시 서구 토성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놓고 3년여 간 봉사하기도 했다.
평생을 박애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장기려 선생이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 남긴 업적도 만만치 않다. 1959년 국내 최초로 간에서 암세포를 잘라내는 수술과 이후 간 대량 절제 수술에 처음으로 성공하는 쾌거를 올렸다. 대한간학회는 이 날을 기념해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정했다.
68년에는 정부보다 10년 앞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Blue Cross Baylor Plan)’을 결성하여 우리나라 민간의료보험을 앞당기는데 선구자가 됐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로 평가하기도 한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취지로 시작한 민간 최초의 의료보험 기구였다. 가난한 환자들이 돈 걱정 없이 치료 받게 해주고 싶은 선생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1979년 동양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장기려 선생은 복음병원장(1951~1976년), 청십자병원장(1975~1983년), 부산아동병원장(1976년), 부산백병원 명예원장(1983년) 등 병원장으로 40년, 서울의대 교수(1953~1956년), 부산의대 교수 및 의대학장(1956~1961년), 서울 가톨릭의대 교수(1965~1972년), 복음간호대학장(1968~1979년) 등 대학에서 20년을 일했다.
사랑의 인술 44년, 한평생 가난한 이웃들의 등불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서민적이었다. 초라하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하나,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그의 인생에는 돈과 명예가 다 부질없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 말년에는 고신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선생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45년을 홀로 살았다.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했다. 선생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엇 하나에도 올곧은 선생의 심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분이 베푼 선행은 헤아릴 수 없다. 걸인이 돈을 구걸하자 현찰이 없어 수표를 줬다는 이야기,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발이 묶인 환자에게 몰래 도망가라고 병원 문을 열어준 이야기, 며느리가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갖다 주라고 한 일, 책도둑에게 책 대신 돈을 갖고 가라고 했던 일들이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선생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래 얼마가 필요해’가 아니라 늘 ‘이것 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 ‘바보의사가 아니라면 성자가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일까. 병원을 운영할 당시 돈 없는 환자들은 일부러 그의 출근길에 쓰러져 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다. 돈이 있든 없든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탓이었다. 때로는 돈이 있는 사람들도 돈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이 마저도 모두 받아들였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 아니었으면 가능하기라도 했을까.
이런 그의 베풂은 안타까운 가족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부인과 다섯 자녀를 북녘에 두고 온 선생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가족상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이 땅의 이산가족들이 모두 상봉을 이룬 후에 만나겠다”며 아내에게는 편지만 보냈다고 한다.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해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을 때였다.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될 당시 정부에서 사회 문화계 인사들에게 특별히 가족 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선생에게도 제안을 한 일이 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다른 이산가족들과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며 거절했다. 결국은 평생 그리던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욕심을 끝까지 버렸다. 개인적 기쁨과 행복조차도 혼자 독점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기려 선생의 이루지 못한 소망은 둘째 아들이 대신 이뤘다. 지난 2000년 8월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환갑을 넘긴 아들이 50년만에 만났다.)
선생은 통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좀처럼 표명하지 않았다. 1990년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으로 공안정국이 기승을 부릴 때는 오히려 수많은 지식인들이 움츠려든 것과는 달리 “통일을 위한 용기 있고 장한 쾌거”라고 당당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희생한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학생, 문규현 신부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라고 과감히 속내를 털어놨다. 가족을 통해 민족분단의 아픔을 몸소 체험해온 그였기에 그분의 말은 가슴 뭉클하게 하는 호소력이 있었다.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로 우리 곁에 머물다 간 성자
그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하나는 신앙심(기독교적 가치관), 다른 하나는 분단과 함께 생이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었다. 특히 그는 가장 없이 힘들게 지낼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저렸고, 그래서 병원에 오는 어려운 환자들을 보면 모두 가족 같이 여겼다. 선생 자신이 그 환자들을 잘 돌보면 누군가 자신의 가족도 잘 돌보아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장기려 선생이 남기고 떠난 말을 되새긴다. “우리 주위 어딘가에 병든 이웃과 가난한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그분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분이다. 그에게는 천한 사람도 없고, 귀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든지 존귀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대하였고, 환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을 가졌던 선한 의사였다. 평생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의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고, 그것을 실천했다.
장기려 선생은 슈바이처와 같이 비유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무엇이 있다. 슈바이처는 유럽 사람들, 특히 기독교가 저지른 죄를 씻기 위해. 자기 발로, 반은 자선사업 겸 아프리카로 갔다. 그러나 장기려 선생은 6․25라는 동족상잔, 이산가족의 비극을 앉은 자리에서 날벼락처럼 당하면서 그의 인생역정이 시작됐다. 슈바이처에게는 고난의 체험이 없으나 그는 온몸으로 시대의 고난을 체험했다. 인술 하나로 이 땅의 고난을 스스로 짊어졌다.
1950년 6월, 한반도에 불어 닥친 전쟁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이 누더기가 된 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던 부산. 그곳에서 천막 병원을 열고 무료로 가난한 이웃을 치료하며,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사람.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다소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겸손해 했던 무사무욕의 삶을 실천한 사람.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집 한 채는커녕 통장에 달랑 천만 원을 남겨 놓았고, 그마저도 간병인에게 줘 버리고 빈손으로 떠나갔던 사람, 장기려 선생.
그가 부산에 남긴 발자취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해준다. 그의 삶은 은퇴가 없는 일생이었다. 만년에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세민 환자들을 돌보며, 왕진을 청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가난에 멍든 우리네 서글픈 이웃들에게 소금 같은 존재였다. 서러운 풀잎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안겨준 거룩한 영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의 인술과 생명, 평화의 정신은 장기려 선생의 전 생애를 엮어간 키워드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가르쳐준 그를 나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성자(聖者)’라 부르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선생과 함께 살아온 우리로서는 큰 기쁨,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여야 할 것 같다.
벌써 10월의 달력은 마지막 한장을 남겨 놓고 있다. 아침 찬바람이 제법 옷깃을 여민다. 몸도 마음도 찬기운이 드는 요즘 그분의 삶이 더욱 그리워진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천막병원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44년을 부산에서 사랑의 인술을 베풀다 1995년 12월 25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로 장기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눈부신 아침햇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진정한 아름다움만 영원히 남긴 채
인물 연보
성 명 : 장기려 (張起呂, 父 장운섭, 母 최윤경씨의 차남, 본관 安東)
출 생 지 :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39번지
본 적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180-1 번지
주 소 :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34번지
생 몰 년 : 1911년 8월 14일(음력) 출생, 1995년 12월 25일 소천
1. 학력 및 경력
․1928 03 개성 송도 고등보통학교 졸업
․1928 04~1932 03 경성 의학전문학교 졸업
․1932 04~1940 02 경성 의학전문학교 외과조수 및 강사
․1940 03~1945 08 평양 연합기독(기홀)병원 외과과장
․1940 09 19 일본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박사학위 취득
․1945 11~1946 12 평양도립병원 원장
․1947 01~1950 11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1950 12~1951 06 부산 제3육군병원 외과근무 (군속)
․1951 07~1976 06 부산복음병원 초대원장 (설립)
․1953 03 1956 0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교수
․1956 거창고등학교 이사
․1956 09~1961 10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외과교수 및 학장
․1957~1988 신앙생활 성경모임인 정기간행물 '부산모임’ 발행
․1959 02 한국 최초로 간암에 대한 대량 간 절제술 시행
․1965 03~1979 12 서울 카톨릭의과대학 외과교수
․1968 04~1972 12 부산 복음간호전문대학 학장
․1968 05~1989 06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 대표이사
․1974 02 한국 간 연구회 창립 및 초대회장
․1975 08~1983 10 청십자 병원 설립, 원장
․1976 04 부산복음병원 원장 정년퇴임
․1976 05 거제도 고현보건원 봉사
․1976 10~1993 04 부산아동병원장 겸 이사장
․1976 11 한국청십자 사회복지회 대표이사
․1979 03~1994 12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부산백병원 명예원장
․1983 03 청십자병원 명예원장
․1985 03 한국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장
․1993 04 한국청십자 사회복지회 명예대표이사
2. 수상 경력
․1960 04 07 보건의날 공로상 (부산시장)
․1961 10 13 대한의학협회 학술상 (대통령상)
․1975 부산시 제1회 선한시민상
․1976 02 07 제4회 보건의날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
․1978 10 27 인도장 금상 (대한적십자사)
․1979 08 31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
․1980 10 05 제23회 부산시 문화상 (지역사회개발부문상)
․1981 09 25 국제라이온스 인도상
․1990 02 27 인간상록수 (청년지역사회개발상록회)
․1991 03 22 제1회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삼성복지재단)
․1992 10 14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서울대학교 총장)
․1995 11 18 제4회인도주의실천의사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1995 12 31 재미한국인의사회 봉사상
․1996 01 30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통령)
3. 저작 및 관련 서적
․『평화와 사랑』, 규장문화사, 1980.
․『생명과 사랑』, 규장문화사, 1980.
․『나의 회고록-외길 한평생』, 장학사, 1981.
․『할아버지 손은 약손』, 소년 한국일보, 1992.
․『외과학』, 한국외과학연구소, 1969.
․『간장 및 담관계 질환』, 최신의학사, 1982.
․『아름다운 사람』, 문화문고, 1998.
․『위인전기전집, 장기려』, 래더교육, 1997.
에피소드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야?
어느날, 복음병원에서 회진을 하러 가던 선생은 벌써 며칠 전에 퇴원을 해도 좋다고 지시한 환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당신 아직 퇴원 안하고 뭘 하노. 수술 경과도 썩 좋았는데…….”
환자는 기려를 보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서무과에서 퇴원을 못한다고 합니다. 모자라는 입원비를 가져올 때까지 신분증을 보관한다고 가져갔습니다.”
“뭐라고요?”
회진하던 발걸음을 서무과로 돌린 선생은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야?”
화가 난 그는 사무실의 책상을 엎어버렸다. 언제나 온화하고 인자한 원장이 이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직원들은 처음 보았다.
엎어진 서랍 속에서 모자라는 입원비 대신 받아둔 반지나, 시계, 목걸이 들이 튀어나왔다. 선생은 그것을 보자 현기증을 느끼며 걸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천막 무료병원에서부터 시작한 복음병원이 이렇게 변해 있었다니, 자신이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열중해 있는 동안 병원은 무료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 병원 문을 활짝 열고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만들었다.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경남 거창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농부는 입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선생을 찾아가 하소연 하였다.
“모자라는 돈은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어본 기려는 마침 주머니에 돈도 없고 하여 한 가지 묘안을 알려주었다.
“그냥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밤에 문을 열어줄 테니.”
마치 남의 병원에 와서 큰 인심이나 쓰는 듯한 원장의 말이었다. 농부는 원장의 이 말에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어찌 그럴 수가…….”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낼 돈은 없고, 병원 방침은 통하지 않고,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농부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날 밤 선생은 서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원하고 난 뒤, 병원의 뒷문을 슬그머니 열어놓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불 보퉁이를 든 가족과 환자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그는 가만히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일 하시오.”
농부의 가족은 가슴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간호원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왔다.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그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얘야, 혼수이불을 고학생 녀석에게 갖다 주거라.
홀로 데리고 내려온 둘째 아들 가용이 결혼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며느리는 혼자 사는 시아버지에 대한 정성으로 비단 이부자리를 마련해왔다. 하지만 선생은 푹신하고 편안해 보이는 이부자리를 보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끔 만나는 고학생의 모습이 떠오르자 선생은 며느리에게 말했다.
“얘야, 이 이불을 그 녀석에게 갖다 줘야겠구나. 겨울에는 늘 감기를 앓는 아이거든…….”
“아버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 혼수가 아버님 보시기에 변변치 않다면…….”
며느리는 입은 옷도 거지에게 잘 벗어주고 온다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남편으로부터 들었지만, 혼수까지 남에게 주자고 할 줄은 몰랐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뜻을 무조건 거스르기가 좀 그랬다.
“아버님께서 꼭 그러시기를 원하신다면, 제 성의를 보아 새 이불은 아버님이 쓰시고, 지금 사용하시는 걸 남에게 주면 어떻겠어요?”
사리에 맞는 절충안이었지만, 선생은 오히려 며느리의 생각이 엉뚱하다는 얼굴이었다.
“얘야, 이왕 남에게 주려면 쓰던 것보다는 새것으로 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니?”
며느리는 더 이상 고집을 부려봐야 이 시아버지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혼수 이불을 고학생의 자취방으로 보냈다.
◎무거운 책보다는 돈이 낫지 않겠소?
병원 경비원이 순시를 하다가 원장 사택 쪽으로 숨어드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얼마 전 한복을 도둑 맞았다는 소문을 들은 경비원은 이번에도 도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은 이 기회에 자기 손으로 꼭 도둑을 잡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장님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하였다.
경비원은 오랫동안 골수염으로 고생했었다. 3년째 누워 지내던 어느 날, 외출했던 친척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병을 고칠 방법이 생겼다고 흥분하였다.
“장박사가 사택에서 병원으로 오는 길에 자갈밭이 있는데 거기 누워 있다가 그분 눈에 띄어 돈 없어도 병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군.”
경비원은 친척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마침 출근하는 선생의 눈에 띄어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퇴원을 하던 날,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선생을 찾아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마시오. 오죽하면 자갈밭에서 나를 만나려고 했겠소.”
선생은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었다.
“당장 힘든 일은 피하는 것이 좋겠소. 혹시 병원 경비원으로 일해 볼 마음이 있으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으니 생각해 보시오.”
그래서 경비원이 된 그는,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던 터에 마침 사택으로 숨어드는 도둑을 발견한 것이었다.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놓고 발걸음을 죽인 채, 서재의 창문을 살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원장이 이미 도둑을 잡아놓고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도둑은 서재 앞에다 가져온 보자기를 펴놓고 책을 싸려고 한 모양이었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대신 그 책값을 쳐줄 테니 책을 두고 가시오. 무거운 책보다야 돈이 더 낫지 않겠소?”
“원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도둑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 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 짓 말고 바르게 살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원장님.”
도둑은 돈을 받아 들고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경비원은 사라지는 도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커다란 감동 하나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
거제보건원의 정희섭 원장은 선생이 월남해 왔을 때 부산 제3육군병원의 원장으로 그를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선생은 2주일에 이틀씩은 거제도에서 환자를 보기로 했다. 그가 오는 날은 병원이 장날처럼 붐볐다. 외딴 섬마을에서 오는 환자들은 바람이 불어서 배를 탈 수 없을까 걱정되어, 미리 병원 가까운 여관에 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할머니는 손자가 수술을 받고 퇴원하게 되는 날, 손수건에 달걀 3개를 싸와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님, 우리 삼대독자를 살려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그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서 기도로 키워주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 손자의 병은 제가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이 수술하여 우리 손자를 안 살렸습니까?”
선생은 웃으며 설명했다.
“할머니, 우리 몸에는 자기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이 있답니다. 그 힘이 없다면 의사는 아주 작은 수술도 못한답니다. 할머니는 칼을 쓰시다가 혹 손을 벤 일이 있었지요?”
“암, 있고 말고요.”
할머니는 유명한 박사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물어오는 것이 고마워서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어디 약을 바르고 할 틈이 있습니까? 피가 멈추게 꼭 싸매두고 일을 하다보면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말짱해졌지.”
할머니는 손가락의 상처 자국을 찾아내려고 앙상한 손을 펴서 들여다보았다.
“알 듯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네요. 우리 손자를 선생님이 분명히 살려내시고도 그 공이 아니라고만 하시니…….”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의 마음은 장기려 선생이 무의촌을 찾을 때마다 떠올랐다.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고마워하는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이것은 선생이 무의촌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을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