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
월간조선에 실렸던 '흉노 이야기'입니다. '유목민이야기'의 독자들이 관심있어 하는 내용이어서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이곳에 싣습니다. 흉노가 동서로 분열되었을 때, 서쪽으로 갔다가 사라졌던 서흉노의 자리에서 600년 뒤 훈족이 나타나지요. 아틸라와 함께 바람같은 말을 타고... 지금부터 재미있는 흉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민족사의 주도세력이 된 신라 김씨(金氏) 왕족은 흉노였다"
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신라 김씨왕족(金氏王族)은 북방 초원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흉노족(匈奴族)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정설로 되면 한국인의 정체성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민족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
4~6세기 신라는 중국문화를 거부하고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 서방의 로마문화를 받아들이다가 로마가 무너지자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양의 2대 일류문화를 수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흉노족의 당당한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 문무왕의 비문(碑文)―『나는 흉노王의 후손이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신라에서만 나오는 적석(積石)목곽분·각배(角杯)·금관;로만 글라스는 흉노의 표시물 ■ 주체성;포용성·다양성·개방성을 지닌 신라의 통합력이 삼국 통일의 에너지였다
[1장 : 우리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
민족사의 주도세력인 신라 김씨왕족의 뿌리 우리 민족사의 주체세력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김씨들이다. 통일대왕인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상징되는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박씨, 석씨에 이어 김씨 왕조를 연 것은 3세기 초 미추(味雛) 이사금이고 4세기 나물마립간대(奈勿麻立干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씨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 신라 김씨들이야말로 화랑도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도세력이고 따라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이란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 집단은 민족문화의 원형을 굳히게 한 주역이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성과 민족사의 뼈대가 상당 부분 형성되었다. 신라 김씨 왕족들은 그래서 민족사의 주인공들이라고 불릴 만하다.
요사이 정통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이 신라 김씨 왕족이 북방 유목 기마민족인 흉노계이며 이 집단이 북방에 서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집권세력이 되었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신라 김씨왕족이 지배층으로 등장하던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왕들은 나물 마립간, 지증 마립간식으로 불렸다. 마립간(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어원이다. 이 김씨 왕족의 무덤이 경주 고분이다.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적석목곽분이라 불린다. 시신을 목곽(木槨) 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목곽이 썩어 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이 적석목곽분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목곽분의 전형이다. 장례식과 묘제(墓制)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묘제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득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4~6세기의 6대에 걸친 마립간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마구(馬具)와 무기가 특히 많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기사(騎士)가 떠오른다. 김씨 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서 지배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고고학자들이 과감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최병현(崔秉鉉) 교수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최병현 교수는 「신라고분연구(新羅古墳硏究)」(일지사 간)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선행묘제(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 문화의 직접 도래(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 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3~4세기 중국 북부 유목민족 대남진(大南進) 때(5胡16國시대) 한반도로 밀고 들어와 경주에서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김씨 왕족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금(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금(金)이란 뜻이다. 흉노계라는 신라 지배층이 성씨를 김(金)이라고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경주 천마총 안으로 들어가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가슴장식, 금귀고리, 금허리띠 등 온통 금장식품들과 칼, 마구(馬具)를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한국인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이국적(異國的)이다. 적석목곽분이란 묘제(墓制), 북방계 출토 유물들, 풍부한 마구와 금제품, 김(金)씨, 마립간(麻立干)이란 호칭 등이 흉노의 표시물들인 셈이다.
경기도 박물관장 이종선(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저서 「고신라왕릉연구(古新羅王陵硏究)」(학연문화사 간)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 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고토(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 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 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동남진(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승석문(繩蓆文)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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