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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첨병_예례미야와 하나니야
예례미야 28:12-17
12. 예언자 하나니야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벗겨 부순 후에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너는 하나니야에게 가서,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었지만, 나는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겠다.
14.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이 모든 민족에게 쇠 멍에를 메워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리라.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리라.'"
15.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언자 하나니야에게 그대로 일렀다. "하나니야, 잘 들으시오. 야훼께서 그대를 보내지 않으셨는데, 그대는 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하여서 곧이듣고 안심하게 하였소.
16. 그래서 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나는 너를 땅 위에서 치워버리겠다. 나를 거역하는 말을 한 벌로 너는 이 해가 가기 전에 죽으리라.'"
17. 그 말대로 예언자 하나니야는 그 해 칠월에 죽었다.
유대인들의 종교가 세계종교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언자 전통입니다. 예언자 전통은 시대 상황을 관통하는 진리성을 담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민족 종교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유대민족은 예언자 전통보다는 모세의 율법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결국 예언자 전통에 기반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것입니다. 유대에서 배척당한 예수의 가르침은 세계로 전파되었고 오늘도 살아 숨 쉬며 예언자 정신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예언자(prophet)는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 히브리어(נבי)와 아람어(نبي)로는 나비(Nabi)라고 불렀죠. 나비(Nabi)는 나부(Nabu), 부르다라는 동사의 수동형으로 추측되므로, 그 의미는 '부르심을 받은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즉 하느님의 명을 받고 온 하느님의 대리자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예언자의 헬라어 프로페테스(Prophetes)는 '누군가를 위해 말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하느님의 대리자를 의미한다면 헬라어 표현은 대언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란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래를 내다보고 알려주는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언서를 읽을 때는 다음의 세 가지를 잘 유념해야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언자가 살던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상황 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달된 예언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죠. 다음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예언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는 거죠.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의 상황과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 의미는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성서학에서는 성서의 재해석(reinterpretation)이라고 부르죠.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를 세운 뒤로 예언자들의 활동은 매우 중요해집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라 함은 다른 민족 종교의 신들 마냥 참과 거짓,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배타적으로 자기 민족만 감싸고 도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진리와 정의 편에서 있는지 아닌지를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고 거기에 합당한 길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나타나 추상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정치와 사회, 종교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바로잡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자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언자들은 극소수였습니다. 고난과 박해를 무릅쓰면서 진리와 정의의 길을 결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기에 영합하며 이익을 취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기보다는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권력과 결탁하며 대중들이 좋아하는 말들만 늘어놓았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이들을 거짓 예언자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참다운 의미에서 예언자들이란 ▲이스라엘 사회의 지배계급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민중들을 낙관적인 환상을 심어주어 기만할 때 ▲소수 지배계급들이 부를 독점하여 대다수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지배계급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민중들을 억압할 때에 등장하여 야훼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현실을 변혁하려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참 예언자인 예례미야와 거짓 예언자인 하나니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유다왕국은 이방 종교와의 극심한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국제 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지고 있던 아시리아는 형제들끼리의 권력다툼으로 그 세력이 차차 약화되어 갔고, 신흥 바빌로니아가 힘을 얻기 시작하였죠. 예언자 나훔과 하박국은 아시리아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예레미야는 신흥 세력에 의해 닥치게 될 유다의 커다란 위기를 예고합니다. 기원전 612년, 결국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수도 니느웨를 빼앗깁니다.
아몬 왕의 뒤를 이어 8세에 등극한 요시야는 이스라엘 남북조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기원전 622년, 아시리아와의 정치적, 종교적 관계를 단절하고,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법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을 추진합니다(열왕기하 22:3~20). 그는 타 민족의 제의와 관습, 우상을 청소하였으며(열왕기하 23:4~18), 유월절 절기를 회복하였습니다(열왕기하 23:21~23). 때문에 성서는 "요시아처럼 야훼께로 돌아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모세의 법을 온전히 지킨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열왕기하 23:25)"고 극찬합니다. 이러한 그의 종교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두 예언자는 스바냐와 예레미야였죠.
한편,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밀려난 아시리아는 이집트의 느고 2세와 동맹을 맺고, 니느웨 탈환을 위해 유프라테스로 출병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609년, 자주 외교를 펼치던 요시야 왕은 출병을 이유로 자국의 영토를 침범한 느고 왕을 맞아 므깃도에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열왕기하 23:29~30, 역대하 35:20~24). 유프라테스로 계속 진격한 느고의 군대는 하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죠.
요시야 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여호와하스가 유다의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아들 역시 반 이집트 정책을 견지하였으나 즉위 3개월 만에 느고에게 붙잡혀 끌려간 후 이집트에서 죽습니다(열왕기하 23:31~34), 이집트는 요시아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을 세워 괴뢰 정부를 만들죠. 여호야김은 예레미야가 기록한 예언서를 불태우고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이 통치하는 동안 세력을 확장한 바빌로니아 제국은 유다를 포함한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전 지역을 정복하죠(열왕기하 24:1~7).
주전 605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브라데스강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 왕 느고를 물리치고 중동의 패권을 잡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야김은 어쩔 수 없이 바빌론에 조공을 바치게 되죠. 그로부터 3년 후, 바빌론과 이집트가 다시 싸웠는데 두 나라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느부갓네살은 바빌론으로 후퇴합니다.
여호야김은 그때를 틈타 바빌론을 배반합니다. 전열을 정비한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쳐 여호야김을 포로로 잡아가고 여호야김은 바빌론에서 죽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지만 그 역시 친이집트 정책을 추진하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주전 597년 항복합니다.
바빌론은 여호야긴을 폐위하고 숙부 맛다디야를 대신 왕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치게 하죠. 시드기야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이였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된 시드기야 또한 이집트 편에 서서 기원전 589년,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기를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정부에 ▲유다 정부가 이집트 편에 서서 바빌론에게 적대 행위하는 것을 즉각 중지할 것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결국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모든 유다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 ▲7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대응은 신속하였습니다. 기원전 588년 1월,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봉쇄하였습니다(열왕기하 25:1, 예레미야서 52:4). 이듬해 여름까지 완강하게 버틴 예루살렘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성벽이 뚫렸으며, 불타 폐허가 되고 말았죠(열왕기하 25:1~12, 예레미야서 39:1~10, 52:4~16).
전쟁에 지고 도망가다 붙잡힌 시드기야 왕은 끔찍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왕의 아들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고, 자신도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거기서 죽습니다(열왕기하 25:6f, 예레미야서 52:9~11). 대부분의 귀족들과 전문 기술공 및 일부 주민들 또한 시드기야와 함께 바빌론 포로로 잡혀가죠.
느부갓네살은 그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미스바를 그 수도로 정합니다(예레미야서 40~44장, cf. 열왕기하 25:22~24).
이로써 기원전 586년에 남유다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바빌로니아에서의 긴 유배 생활이 시작됩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자 그동안 백성들을 미혹했던 거짓 선지자 중의 하나인 하나니야가 예레미야를 몰아붙입니다. 하나니야는 유다가 바빌론을 섬기는 기간인 70년을 마친 후 바빌론과 열방들이 심판받게 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반대하여(렘 25:12), 2년이 차기 전에 바벨론이 힘을 잃고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니야가 ‘왕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로 현혹한다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니야는 자신의 예언이 옳다고 증명하고 싶어, 바빌론의 압제를 상징하여 메고 다니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낚아채 부러뜨리기도 합니다.
하나니야의 폭력과 백성들의 분노에 위협을 느낀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조용히 떠나죠.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다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서 하나니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죠. "'하나니야는 나무 멍에를 부수었지만, 나는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겠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이 모든 민족에게 쇠 멍에를 메워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리라.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리라'(12-14)"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니야가 하나님의 대리자나 대언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거짓말을 하여서 곧이듣고 안심하게 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는 “이 년만 있으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모든 민족에게 메운 멍에를 내가 이렇게 부수리라(11절)"고 거짓 예언을 하였죠, 이런 하나니야의 생각과 태도는 2가지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생각 하나님의 뜻이라고 마음대로 신념화한 자기 확신범이거나 아니면 권력자, 혹은 기득권 편에 들어 이득을 보려는 자 중 하나인 것이죠.
야훼 하나님을 참칭하여 백성들을 속인 것에 대한 징벌은 가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니야에게 '나는 너를 땅 위에서 치워버리겠다. 나를 거역하는 말을 한 벌로 너는 이 해가 가기 전에 죽으리라(16절)'"고 선언 합니다. 하나니야는 결국 두 달 뒤인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습니다.
하나니야에게 죽음의 벌이 내려진 이유는 그가 대리자나 대언자가 이님에도 거짓 예언으로 백성을 미혹하였다(15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이고 하나냐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당시의 시드기야 왕이나 고관, 제사장들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니야가 진짜 예언자처럼 보였겠죠.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누구를 참 예언자라고 선택했을까요? 과연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와 하나니야는 두 사람 모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레미야는 “예전부터 우리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지방과 강대한 나라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있겠다고 예언하였소(8절)”라며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 왔음을 강조합니다. 또 “'잘되어 간다'고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말이 맞아야만 참으로 야훼께서 보내신 예언자인 것이 드러날 것(9절)”이라며 결과가 예언의 진실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주장은 하나니야의 예언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는데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 말이 맞는 말이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주장에 왕을 포함한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은 귀를 닫습니다. 아니 도리어 하나니야의 주장에 동조하며 예레미야를 핍박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 예레미야와 그를 동조하는 세력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죠. 불의를 행하고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된 예언자를 만날 때 분노합니다. 그리곤 원수처럼 대하며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거나 안 되면 죽이려 들죠.
진리를 외면하고 정의를 무시하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자신들과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시드기야와 그를 따르는 세력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따라가던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가 되어 70년간 나라를 잃고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벗어난 지 이제 78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댓가로 우리는 지금까지 또 다른 식민지배 속에 살아왔죠.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이 그대로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상층부를 장악하면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미군정을 배경으로 반자주 반통일 세력의 첨병이 됩니다.
그동안 우리 민중들은 미군정, 이승만 친일 독재,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이명박·박근혜 재벌독재에 맞서 자주와 통일을 지향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애써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윤석열 검사독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검사독재의 배후에는 미국과 일본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 나라를 비극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독재 세력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습니다. 조선과 필리핀을 각각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로 나누어 갖겠다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흐름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연장 선상에 신냉전 질서 조장, 한미일 군사동맹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 아시아 패권 다툼에 우리 정부가 돌격대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핵 폐수 방류는 이런 맥락에서 미국과 일본의 대 아시아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8일 자유총연맹 창립 제69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들"이라고 규정했으며.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녔다"는 가짜뉴스를 유포하였습니다.
또 개각을 단행하며 신임 통일장관에 뉴라이트계 극우인사를. 중립을 견지해야 할 국민권익위원장에는 이명박에게 비단길을 깔아줬던 'BBK 검사' 김홍일을 지명했습니다.
이는 자주와 통일, 검찰개혁을 지향한 전임 정부의 개혁 노력을 지우고 영원한 주군인 미국과 일본을 위해서는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 질서를 외면하겠다는 것이죠. 마치 시드기야 정부외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립적 반부패 기관인 국민권익위를 사정기관으로 만들어 '한동훈 검찰'과 '유병호 감사원', '김홍일 권익위' 삼각편대로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반대파에 대한 공격 체계를 갖추겠다는 이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죄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27일 광명시 관내 32개 시민·사회 단체가 일본의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반대 성명을 내고 “정부는 핵 오염수 방류 반대를 공식 선언하고 국제재판소에 재소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매우 늦었지만 시민사회에서 움직임이 없어 몇 명 뜻있는 단체들이 나서서 추진한 것입니다.
지금 개혁세력들은 여러 번의 좌절을 겪으면서 새 세상을 향한 동력을 끌어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무관심과 권력, 기득권 세력의 탄압에 뒤로 물러선 형국입니다. 예례미야가 독기 서린 하나니야와 분노에 찬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슬그머니 자리를 뜬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뒤로 물러서는 예례미야를 돌이켜 세우시죠. 오늘 우리의 자리 역시 예례미야를 부르셨던 그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 곳입니다. 그동안 놓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어 왔던 외세의 손을 과감히 끊고 자주와 통일을 위해 결단하는 길만이 앞으로의 70년 포로생활의 운명을 끊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나서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3.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