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외교, 새 길 열리나 : 아베 신조, 그는 누구인가
‘강한 일본’ 원하는 ‘세습’ 정치인
논술의 맥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 다음카페 eea
☃ 0169334-4876
대국 꾀하는 일본·일본인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여전히 불안하고 격변하고 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대국의 지위를 굳혀가면서 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일본은 과거와 달리 지난날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적·군사적 대국의 길을 가고 있다.
냉전의 고도로 남아 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북한은 국제적 억압 속에서도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날 특수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 세 나라는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의 모습이고 그 한 가운데 일본이 있다.
패전 후 일본은 7년의 미국 점령통치와 3년의 정치적 격동기를 지나 1955년 소위 ‘55년 체제’라는 일본 특유의 정치구도를 만들었다. ‘55년 체제’는 그 후 40년 가까이 일본을 세계 제2의 경제·산업·기술대국으로, 그리고 잠재적 정치·군사 강국으로 발전시키는 견인차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냉전 구조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고 또한 냉전적 상황에 길들여진 ‘55년 체제’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1993년 붕괴됐다. 일본은 38년에 걸친 자유민주당 일당 지배의 시대를 끝내고 연립정권으로 새로운 정치의 틀을 시도했다.
‘잃어버린 10년’으로 알려진 지난 10년 동안 호소가와의 연립정권, 무라야마의 사회당 정권, 자민당·사회당·공명당의 연립정권 등 잦은 정권 교체와 정치적 혼미를 지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집권하면서부터 정치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국내외의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 이어 전후 세 번째로 장기간 집권한 정치 지도자로 기록됐다. 뿐만 아니라 최근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실시한 전후 수상 평가 여론조사에 의하면 고이즈미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 이어 2위에 오르고 있다(요시다 44%, 고이즈미 41%, 2006.9.2).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타협과 설득을 모르는 독불장군형의 고이즈미 총리는 집권기간 동안 장기불황을 종식시키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정치의 많은 부분과 일본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의 재임 5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행동은 한국과 중국에서 강한 국민적 반일 감정을 불러왔고 또한 심한 외교적 마찰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공약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과거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이는 전후 세대들의 심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기대·불안을 함께 안고…
이처럼 격동하는 국내외 상황과 역사 인식의 변화 속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드디어 총리로 등장했다. 그의 등장은 이미 예견됐던 것이지만 많은 신화를 만들었다. 51세에 총리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전후 최연소 총리의 기록을 갱신했다. 총리 취임 당시 54세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보다 세 살, 55세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보다 네 살 적은 나이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경력과 업적없이 아버지의 선거구를 ‘세습’ 받아 중의원에 당선된지 불과 13년 만에 정상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일본 특유의 파벌정치 속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단련된 리더십이 검증된 정치 지도자가 아니다. 또한 그는 관방장관을 제외하면 행정 수장인 대신(大臣)의 경험이 전혀 없다. 일본 정치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그는 ‘강한 일본’을 지향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켜간다는 소신, 국제적 감각, 고이즈미와 다른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등장에는 기대와 불안이 함께하고 있다.
아베 신조는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정치 명문가(名門家)의 3세 정치인이다. 그의 본적은 시모노세키(下關)를 중심으로 한 야마구치(山口)현이다. 그의 지역구이기도 한 야마구치현은 메이지유신의 거점이었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 전전 일본을 이끈 많은 내셔널리스트와 국권론자를 배양한 죠수번(長州藩)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베 히로시(安倍寬)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맞섰던 정치가이고, 아버지 신타로(晋太郞)는 80년대 ‘명외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영원한 ‘대동아공영권’ 신봉자인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A급 전범으로 스가모(巢鴨) 감옥에서 3년3개월 복역했다가 풀려나 총리를 지냈고 그의 재임 기간에 미·일안보조약을 개정(1960)한 인물이다.
기시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1964~1972)하면서 경이적인 고도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또한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반환받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물이다. 양가 모두 정치를 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신조는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아베 신조는 195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이케이(成磎)중고등학교를 거처,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79년까지 2년 동안 미국의 남가주대학에 유학했으나 학위를 취득하지는 않았다. 귀국 후 고베(神戶)제철소에 입사하여 고베제철소 뉴욕지사 등에서 3년 반 동안 근무하고 1982년 말 퇴사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외상이었던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변신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부친 신타로가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신조는 부친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1993년 중의원에 첫 당선됐다. 그의 나이 39였다. 현재 5선 의원으로 자민당 내 모리(森)파 속해 있다.
1993년 이후 그는 관방부장관(2000년), 간사장(2003년), 간사장 대리(2004년), 관방장관(2005)을 역임했으나 최근까지만 해도 일본 정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정책통으로 의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거나 정치인으로서의 중량감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저 평범한 정치인이었다.
북(北)이 만들어준 ‘스타 탄생’
평범한 정치인에서 일약 총리로 부상하는 ‘스타 탄생’의 계기는 북한이 만들어 주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때 불거진 ‘일본인 납치사건’은 북·일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아베에게는 기회로 작용했다.
북한 측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5명 생존, 8명 사망’을 확인하자, 관방 부장관으로 고이즈미를 수행했던 아베는 북한이 일본인 납치사건을 시인하고 사죄하지 않으면 공동성명에 서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를 실현시켰다. 아베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인과 사죄를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를 계기로 각광을 받으면서 일본 정치 무대의 중심에 등장했다.
그 후 아베는 ‘납치 문제’를 일본이 해결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주제로 설정하고 정치적 행보를 걸었다. 북한이 저지른 일본인 납치는 ‘반인륜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발 행위라는 점에서 국민적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아베는 납치 문제가 안고 있는 이러한 국민 정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귀국 후 ‘납치가족회’를 찾아가 그동안 정부가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음을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한편, 대북 강경 조치를 주도했다. 2003년 납치됐던 일본인이 일시 귀국했을 때는 북한과의 약속을 파기하면서까지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는 정부의 결정을 끌어냈다.
또한 일본 정부 조사로 2004년 말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橫田めぐみ)의 유골이 가짜로 판명되자 아베는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압력뿐이며 경제제재를 발동할 단계”가 됐다고 주장하면서 들끓는 여론에 기름을 붓는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 7월 5일 김정일 정권의 미사일 발사는 아베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 정부는 미사일 발사를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고, 대북 강경정책에 국민적 공감대를 유도했다. 아베가 그 중심에 있었다.
아베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사일 기지를 공격하는 것은 헌법의 자위권 범위 안에 있다는 견해가 있는 만큼 논의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 일본 국민과 국토, 국가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의 관점에서 검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여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유엔 안보리에 유엔헌장 7장을 근거로 한 북한 제재 결의안을 만들어 내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고, 대북 송금 저지를 내용으로 하는 개정외환법, 북한선박 입항을 금지하는 법, 북한 인권법 제정 등을 주도했다. 아베가 보여준 과감하고 일관된 대북 강경 자세는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개헌, 북한, 아시아 외교…그가 안은 과제들
고이즈미 시대의 연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치 개혁, 경제 발전, 교육 개혁 등 아베가 그의 재임 기간 역점을 두어야 할 어젠다가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의 언행으로 보아 가장 중요시할 의제는 역시, 개헌, 북한 문제, 그리고 아시아 외교라 할 수 있고, 이러한 문제들은 그의 정치철학이나 소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평화헌법 개정 개헌 문제는 총리 아베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이다. 일본에서 개헌 논의는 상당한 역사와 우여곡절을 지니고 있다. 개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헌 문제는 냉전 종식 이후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화헌법’이라는 전후 일본의 헌법은 점령자 미국이 만들어준 것을 일본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부정하고 있는 이 헌법은 미·일동맹과 함께 전후 일본이 국제 분쟁에 휩쓸리지 않고 경이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점령군이 만들어 준 헌법을 반(半)세기가 넘게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것은 일본인의 자주 정신과 국가 의지에 문제가 있다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됐다. 즉, 전후 헌법은 점령자인 미국이 제조하여 일본인들에게 강요한 것으로서 일본인의 의지와 정신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를 정면에서 제기함으로써 커다란 사회적 반응을 일으켰던 에토 준(江藤淳)은 종전 직후 일본인들의 정신 속에는 자괴, 자책,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의식이 형성됐고, 오늘날에도 일본의 국가 의지와 일본인의 자존심이 아직도 종전 직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힘주어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은 결국 일본이 정신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미국이 1946년에 만들어 준 ‘헌법’에 계속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이러한 심리적 구속에서 벗어나 보다 ‘일본적’이고 자유로운 ‘국가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외제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1946年憲法-その拘束”).
아베의 개헌 노선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최근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어 있는 그의 책,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國へ)에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평화헌법의 초안은 진보적인 젊은 연합국사령부의 참모들에 의해서 10일 정도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진 것으로서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에 ‘사죄하는 문서’와 같은 선언이라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헌법 제정을 강력히 제안했다.
“나라의 골격은 일본국민의 손으로 백지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서 비로소 참다운 독립이 회복”될 수 있고, 헌법 개정이야말로 “독립 회복의 상징”이고 “구체적 방법”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개헌에 대한 아베의 집념은 그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위권의 범위라면 핵 보유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일찍부터 밝힌 기시는 집권하면서 헌법조사회를 발족하고, 경찰관직무집행법 개정을 시도하는 등 개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결국 무산됐다.
그 후 상당기간 개헌 논의는 수면 밑으로 잦아들었다가 베트남 전쟁 종식을 계기로 다시 정치·사회적 이슈로 등장했고, 냉전 종식 후 가속도가 붙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2000년 중·참의원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하고, 2005년 조사회의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 졌으며 자민당이 초안을 발표했다. 반세기 전 외할아버지가 집념을 보였던 개헌 문제가 이제 아베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개헌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아베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아직도 개헌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고, 개헌에 찬동한다 하더라도 제9조의 개정에 있어서는 찬성보다 반대가 우세한 것이 현재의 여론이다. 지금까지의 그의 발언이나 성향으로 보아 아베는 개헌을 위하여 적극적 자세를 취할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강행을 추진하기보다는 오히려 개헌을 위한 명분과 분위기를 축적해 나가는 데 더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문제 일본인 납치, 핵 개발, 미사일 발사 등을 포함한 ‘북한 문제’는 아베가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의 하나이다.
그동안 아베가 보여준 일관된 대북 강경 입장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주는 역할을 했지만, 이는 정략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소신의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납치와 미사일 문제를 처리하면서 보여준 그의 치밀하고도 신속한 대응은 아직까지 미지수로 알려진 그의 능력의 한 단면을 과시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베는 자신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만난’ 것은 1988년 가을부터였고, 납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의’한 것은 1993년 중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후 외무성이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으니 조용히 있어 달라”고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조선 납치의혹 일본인구원 의원연맹>을 구성하고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모임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면서 납치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키워갔다.
납치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그의 집요한 ‘결의’의 결과는 김정일의 납치 인정과 사죄(2002년 9월 17일), 24년 만에 5인의 납치 피해자의 일시 귀국(2002. 10. 15), ‘국가의 의지’로서 5인의 북한 귀환 불허(10.29), 북한이 사망했다고 한 8인 납치 일본인의 생존 주장, 북한에 돌아가지 않은 5인 가족의 일본 귀환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면서 아베의 정치적 입지는 확고해졌고 고이즈미 이후의 인물로 부각했다.
북한 문제에 대한 아베의 이러한 일관된 자세는 그의 확신과 방향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국가적 범죄’로 규정하고, 이는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일본 국민의 ‘생명을 빼앗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데 확신을 가지고 있고, 국가는 국민의 안위를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대북 문제 접근은 바로 이러한 원칙과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공작원이 우리나라에 침입해서 우리나라의 국민을 채가서 그들을 대남 공작에 활용했다.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이 걸린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그의 확고한 인식이다. 그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는 양보나 협상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이고, 이러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일관된 자세를 가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도 아베는 강경하면서도 치밀하고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그는 지난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부터 9개항의 제재안 발표까지 준비된 시나리오를 차질 없이 주도했고, 또한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끌어내는 지도력을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대화’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이 북한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 데는 ‘대화와 압력’을 기본 방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압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북한의 정책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지금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나 또한 일본에 기항하는 선박에 엄격히 법 집행을 하는 것과 같이 압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변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북한을 보는 시각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미사일 발사 후 ‘직접 공격’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는 일본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공격의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만일 북한이 일본에 미사일 공격을 한다면 미·일안보조약에 의하여 미국이 즉시 반격할 것이고, 이는 곧 김정일 자신의 정치적 권력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신념과 원칙을 바탕으로 한 아베의 대북정책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대화의 문을 열어 놓고는 있지만 ‘국가적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납치 문제나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일관계정상화의 길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그의 대북자세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과 협조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
아시아 외교 고이즈미와 같이 아베도 일본의 대외정책의 근본 틀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응함에 있어서 미국과 긴밀한 연대를 속에서 미·일동맹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는 “이번의 미사일 발사에의 일련의 대응을 계속하면서, 일·미동맹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일본 국민도 잘 이해”됐다고 주장하여 미·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베도 냉전 종식 이후 더 강화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과 경제력, 최강의 군사력을 고려한다면 일본으로서는 미국과의 동맹 강화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동맹 강화가 일방적으로 일본이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대등한 동맹, 즉 미국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일본도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쌍무적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필요하고, 이는 그의 개헌론과 맞물려 있다.
아베가 지향하는 미국과의 관계는 불을 보듯이 명확하지만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는 대단히 불투명하다.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불안하다. 그 근본 원인은 그의 과거사에 대한 역사 인식이다. 물론 은밀한 가운데 실시되기는 했지만 고이즈미의 야스쿠니(靖國)참배로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한 가운데서 진행된 아베의 신사참배(4월 15일)는 그의 역사 인식을 행동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아베가 역사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것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7년부터였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포함하여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한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을 만들고 이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외할아버지 기시를 ‘나라의 장래만을 생각한 진지한 정치가’로 보고 있는 아베에게 일본에는 전범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지난날의 역사는 오욕의 역사가 아니다. 그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그가 구상하고 있는 교육 개혁과 맞물려있고 이웃과의 관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아베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 인접 국가와 신뢰 관계 강화에 노력하겠다”며, “‘열린 아시아’ 속에서의 강력한 연대를 확립”해 나갈 것을 강조하면서도, “야스쿠니에 가느냐 안 가느냐로 정상회담 개최 여부가 정해진다는 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은 그의 역사 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없을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아베의 이러한 역사관은 한국이나 중국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동아시아의 장래도 그리 밝지는 않다.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는 원론은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구체화해 나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베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인도와 호주 등을 아시아 외교의 중심축으로 삼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은 그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이 아무리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연계의 폭을 넓힌다 해도,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 속해 있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떠나서 설 수 있는 자리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은 지난날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앞으로 일본이, 그리고 아베가 만들어 가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웃 희생없이 함께 가는 정책 펴야
아베로 상징되는 일본을 이끌어 갈 새로운 세대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전후 세대인 이들은 제국주의를 체험했거나 또는 냉전적·국제적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 발전에만 집착했던 과거의 지도자와는 다른 여건과 상황에 있다.
전후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는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한 국제적 공헌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행한 것을 알지 못하고, 패전의 아픔보다 성장과 발전만을 기억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는 민족적 우월감과 자신감에 젖어 또 다시 새로운 패권적 지위를 추구할 가능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
아시아의 주변 국가들은 지금 아베의 등장에 기대와 우려의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새로운 진로의 방향타를 잡고 있는 아베는 과거의 지도자들과 달리 제국주의 시대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전후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이다. 그는 보편적 가치와 도덕을 바탕으로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추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고이즈미의 뒤를 이어가는 아베에게 깊은 의구심과 우려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베가 고이즈미와 같이 국익 지상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고 ‘탈아입구’의 정책을 택한다면 이웃과의 관계는 나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날의 일본 역사는 일본의 변화와 발전은 항상 주변 국가의 희생과 굴종을 강요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역적으로 아시아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았고, 또한 아시아 공동의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공헌하지도 않았다. 전전에는 아시아를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고, 전후에는 원료 공급원이나 시장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일본이 택해야 할 진로는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강한 일본’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강한 일본’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 등장하는 아베의 용기와 결단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