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 (2)
알렌은 서양의술을 신봉하게 된 민영익대감을 앞세워 서양식 병원의 설치를 고종에게 적극 건의하였다.
그러자 1885년 12월에 고종은 재동의 이윤용(李允用)집인 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廣惠院)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알렌박사는 광혜원의 원장을 맡게 되어 본격적인 서양식 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당시 서울 장안에는 ‘노랑머리에 파란 눈의 서양사람이 두 귀에 고무줄을 꽂고, 가슴을 대보면서 주사를 놓아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돌아 하루 최고 260 명의 환자가 몰려들어 이들을 진료하기에 진땀을 빼기도 하였는데 1년간 외래 및 왕진 환자는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고종은 2주일 뒤인 4월 23일, 백성들의 치료에 공이 크다고 하여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고치게 하고, 통리교섭아문(統理交涉衙門) 안에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병원을 찾는 환자가 너무 많은데 비해 비좁아 이를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개업 2년 뒤인 1887년에 홍영식(洪英植)의 자택인 현재 중구 을지로 2가 181번지(KEB 하나은행 본점) 뒤편의 구리개(銅峴)로 이전하게 하였다.
제중원은 부인과 환자들을 위해 1886년 부인부를 설치하고, 미국북장로회에서 파견된 여의(女醫) 엘라스가 담당하게 되어 개원 1년 남짓해서는 종합병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의학교육을 실시하여 1866년 3월 29일 경쟁시험으로 선발된 학생 16명으로 개학했다.
학습생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4개월 후에 16명 중에서 12명을 선발하고, 미달의 성적을 가진 4명은 낙오시켰다고 하였다.
구리개로 이전한 제중원은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지원이 줄어들자 운영난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중원의 관제가 폐지되었으므로 병원 운영은 미국 북장로회의 후원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다가 광무 8년(1904) 9월에 남대문 밖 용산구 도동(挑洞)에 병원을 세워 세브란스라고 이름을 고쳤다.
조선말의 제중원이 있던 곳에는 대동구락부가 들어섰다가, 다시 1907년 가을에 그 자리에서 경성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잠시 농상공부가 들어섰다가 일제침략기 초인 1912년에는 조선귀족회관(朝鮮貴族會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