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애지》 신인상 당선작 - 언제나 배가 고픈 외 4편 / 임봄
언제나 배가 고픈 / 임봄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어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이름을 불리지 못했기에
무엇도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요
그래서 계단 하고 불러주었지요
그랬더니 오른쪽 끝에서
날개 하나가 삐죽이 솟는 거예요
내가 너무 작게 불렀나요 ?
조금 더 크게 불러줄 걸 그랬나요 ?
어제는 얼음이 든 쥬스를 마시는데
첫눈이 오고 앵두들이 빨갛게 익었어요
첫눈이 녹고 앵두들이 떨어지고
그녀가 울었어요
내가 첫눈 하고 부르자
첫눈에서는 하얀 양파꽃이 피어났는데요
조금 더 크게 불러줄 걸 그랬나요 ?
언제나 배가 고파서
굳게 닫힌 문들을 뜯어먹고 싶었어요
후식으로 반짝이는 문고리도
먹어치우고 싶었지요
그녀의 네모진 방에 직각들이 부풀어 오르면
시계 초침은 왜 그리 초조해 하던지요
조금 더 크게 불러줄 걸 그랬나요 ?
그랬다면 내 관자놀이에서
사과들이 둥글게 커졌을텐데요
조금씩 점점 빠르게 / 임봄
나는 고양이, 담쟁이 넝쿨 수북한 담장 위에서 휘휘 휘파람을 불어요. 세상은 정지되고 나는 로프 없이 번지점프를 해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개미들이 서로 꽁무니를 물어뜯어요. 일렬로 늘어선 슬픔이 느리게 행진할 때도 당신의 구두는 명랑한 스타카토로 달리는군요. 별들은 탄력 있게 울고 망고 쥬스에서는 바다냄새가 나요. 나는 식탁 밑으로 숨고 숫자 속으로 가라앉고 당신의 편두통 안으로 기어들어요, 감쪽같이. 수학 공식에 숨은 풍경 속에서도 배꼽이 단단해지는 비밀을 알면서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었지요. 고독을 들키려고 내장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나는 길게 히히 웃고 야옹 하고 짧게 울었지요. 태양의 흑점에서 날개를 접은 나비가 다시 날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예요. 나는요, 말아 올린 꼬리에서 뿌리가 내려 넝쿨로 스미고, 스미고, 스며요. 점점 빠르게 나는 어쩌면 날개가 돋을지도 모르지요. 아, 전에 이미 말했던가요
모로코 / 임봄
구태여 당신을 추억해야 한다면
난 여행을 떠날거야
우기 지난 모로코에 가면 와디를 따라
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넘을거야
백조 한 마리가 우물로 내려오면
나는 슬픔을 참느라 길게 늘어난 목에
오래 입을 맞추어야지
춤을 출거야, 태양의 흑점 한 가운데서
가볍게 뛰며 경쾌한 왈츠를 추어야지
모로코 하고 읊조릴 때 흐르는 음률을
낮은음자리표로 붉은 카펫에 그려 넣을거야
카사블랑카에 들르면
집을 잃은 군인과 술집 여가수의 이야기가
비처럼 흐르는 영화를 볼 거야
키스신 뒤쪽으로 폭죽이 터질거야
잘 익은 포도주는 거리에 흥건히 엎질러질거야
아, 나는 철없이 취할거야
그곳에 가면 푸른 수염을 기른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보다 먼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당신은 이미 늙어 있을거야
오래 전 당신의 외투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낙타의 발자국들이 푸르게 피고 있을지도
太陽曆을 읽다 / 임봄
그때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소멸하던 섬들이 낙하하여
내 왼쪽 젖가슴을 어루만질 때
당신의 짓무른 눈과 축배를 들지 못한
빈 잔 두개,
필라멘트를 태우는
기억 몇 개,
바람의 신열을 감지하며 풀들이 떨고
태양은 가슴 위로 빗금을 그었다
마야의 사원에서 생을 독식하던 말발굽 소리,
강 건너 숲 사이로 떨어지던 독수리 날개와
머리칼 위로 쏟아지던 화살의 분신들
파상풍의 원인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해 가을에 문마다 박아놓은 녹슨 대못들이
그대로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얼핏 아비의 눈에서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는
유성을 본 것도 같았다
꿈틀대던 자기장은 거대한 바위에
삼백 예순 다섯 개의 부호를 차례로 새겨 넣었다
얼굴 없는 아비,
침묵하며 사원의 탑을 돈다
오래 전 내 왼쪽 젖가슴에 가둔
비밀이 은밀히 새어나와
팽팽히 새벽 공기를 가르고 있다
북향의 방들 / 임봄
한 평의 방에는
햇빛의 유언조차 전달되지 않았다
외풍이 심한 북향의 방,
날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검은 머리칼,
수북한 상실의 흔적들을 나는 더 이상
오해하지 않기로 했다
오래된 가구들이 건네던 유서들과
숙면을 방해하던 무관심들 사이에서
당신은 인생의 반이 지났다며 사소하게 웃는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해골 속 뭉친 수심의 털뭉치를 풀어
한 올 한 올 뜨개질을 하던 그 많은 밤들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고백한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루체비스타가
광장에 세워진 저녁,
시베리아 북풍을 따라 온 황사가
창문 아래로 몸을 날리고 있다
임 봄 시인 (본명 임효선)
1970년 대구출생.
[당선소감]
사막에 들어서는 순간, 이방인인 내게 모든 풍경들이 낯선 언어로 말 걸어왔다. 앞서간 누군가가 노숙을 끝내고 떠난 자리에서 금빛 사막여우 한 마리를 만났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파랑새는 그저 파란 새일 뿐이었다고 말하자 그는 말없이 파란 뼈를 가진 새가 잠들어 있는 모래무덤 하나를 가리켰다. 붉은 꽃잎을 펼치고 날고 싶어 하는 바위를 본 적이 있노라고 말하자 그는 바위 한줌을 내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손바닥에 놓인 모래가 바람을 걸친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여백이 많아야 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내가 내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기도 했다.
누군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그 소리는 내 인생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으나 부끄럽게도 아직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더듬으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국어의 속살에 놀라워하며 내 안과 밖에서 부유하는 것들을 끌어안고 밤을 새울 뿐이다. 박수소리는 없고 나는 내가 던진 수많은 질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되돌아갈 자신은 없고 멈출 자신은 더더구나 없으니 이제 끝없이 이어질 질문과 대답사이의 침묵을 온몸으로 견디며 묵묵히 사막을 걷는 일만 남았다.
기교가 아닌 시를 대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 방황하는 내게 ‘기다려주마’ 하며 용기 주시던 아버지 같은 또 한분의 스승님, 편애하는 편운재시창반 식구들, 내 살붙이들, 그 외에 불러야 할 많은 이름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음을 안다. 기회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따뜻하게 가족으로 맞아주신 『애지』에도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