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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승선했던 선박은 주로 Panama 선적(船籍)의 것들이었는데 일본 선적도 두 척 있었다. 당시 일본 해운업계에서도 경비 절감을 위해 전 승무원 중 통신국장(通信局長 : 선박도 허가받은 하나의 무선국(無線局)임으로 통신국장이라 칭함)만 일본인으로 하면 나머지는 모두 외국선원들로 해도 되도록 법을 개정을 했기에 가능했다. 국익(國益)에는 철저한 나라였다. 전 승무원 중 1명만 일본인, 나머지는 외국인이다.
그래서 선장(船長)은 의사소통부터 음식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았다. 회사에서도 배려를 요구했다. 두 척에서 5명의 일본인 통신장을 경험했다. 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 내 일본어 실력도 부쩍 늘었고 배운 것도 많았다. 또 이들이 귀국하여 내 명성(名聲)을 한껏 올려주기도 했다.
지중해 어느 항에서 일본인 선원이 승선하고 있는 선박을 한국 선원으로 교체하도록 일본 선주(船主)와 계약이 되어 출국 날짜까지 받아 놓고 항공권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일본 선원노동조합이 자기네들의 밥그릇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이 계약이 무산되었다. 일본측에서도 체면상 말이 아니었기에 대신(代身) 소개해 준 것이 있었다.
일본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시작되어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사이를 빠져 고베(神戶)로 연결되는 해로(海路)가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인데, 수로(水路)이면서도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 가운데 인노시마(因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히로시마현(広島県) 오노미치시(尾道市)에 속한다.
세토나이카이 중 일부(빌려온 사진)
일본의 남북조시대와 전국시대(14세기 중엽~16세기 말)에 이 섬을 거점으로 한 해적들이 세도나이카이(瀬戸内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던 것이 유명한 역사의 흔적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시코쿠(四國)와 혼슈우(本州)을 잇는, 9개의 섬을 지나는 다리가 있어 절경이나 아트 명소, 파워 스팟(영험 있는 곳) 등 볼 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 섬에 진유우카이운[仁勇海運]이란 자그마만, 주로 Barge선(船:거룻배)를 운영하는 회사가 있었는데, 돈을 벌어 같은 섬 안에 있는 역시 소형선을 주로 건조하는 조선소에서 2천톤 급의 다목적 화물선을 신조하게 된 것이다.
사장(社長)은 그야말로 옛날 시골 구두쇠 영감님으로, 우리식으로 하면 무명 바지저고리에 백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아들은 미국 제네랄모트사의 길쭉한 비크차를 몰고 다녔다.
신조선이기 때문에 선장과 기관장이 먼저 현지에 도착, 시운전을 마칠 때까지 협조를 해야 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1의 조선국(造船國)이 었지만 시골 작은 섬에서 처음으로 이런 선박을 만드는 실정이라 제반 여건이 어렵고 힘들었다.
이 와중에 느닷없이 허리가 끊어지는 듯 한 통증이 발생, 미칠지경이었다. 다친 적도 없고 눌러봐도 괜찮은데 그냥 허리 전체가 아프기만 하다. 움직일 수는 있지만 견디기가 어려웠다. 부득이 병원을 의뢰했다. Doctor가 문진(問診) 후 여기저기를 눌러보더니, 증세로 봐선 요로결석(尿路結石) 같다고 했다. 요로결석? 한자(漢字)를 보면 오줌길에 돌이 생겼다는 뜻인데…? 차근히 설명을 들었다. 우선 진통제를 줄테니 밤에 심하면 먹고, 맥주를 두어 병 마셔보라 했다. 어쩌면 소변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고….
의사가 환자에게 술을 약으로 권하는 병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숙소에 돌아와 객고(客苦)도 심하고 기분도 울적하던 차에 의사가 마시라고 했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얼큰하게 취하도록 몇 병을 마시고는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소변끼가 있어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거시기에서 물컹하고 뭣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니 아프던 허리가 시원한 느낌이었다.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변기를 들여다 보니 새하얀 변기 바닥에 좁쌀만한 한 게, 새카만 돌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냥 맨손으로 건져 씻어보니 진짜 돌이었다. 요놈이 요로(尿路)을 막고 있어 미친 듯이 아팠다는 뜻이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이걸 깨끗한 손수건에 보물처럼 싸 들고 병원엘 갔다.
의사가 놀라며 아직 심하게 아프냐고 했다. “그게 아니고 이게 나왔습니다.”하고 보여주었더니 웃으며 이젠 괜찮다고 하며, 그걸 달라고 했다. 크기가 큰 편이라 혹시 견본으로 쓸 기회가 있을 거라 했다. “그러지요” 하고는 정중하게 책상 위에 두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내 새끼를 두고 온 것처럼 서운했다. 내 거시기에서 나왔으니 내 새끼가 아닌가.
왼쪽은 외항에 대기 중. 오른쪽 빨간 원 속의 V자형 하얀 크레인이 있는 것이 No.3 Tungho
이렇게 탄생한 것이 ‘NO.3 TUNGHO’호라는, 약 2,000톤 규모의 소형 다목적 선박이었다. 이 배는 일본과 타이완[臺灣] 사이를 정기선(定期船)으로 운항했는데, 타이완[臺灣]의 관문인 기륭[基隆]과 카오슝[高雄]을 거의 보름만에 한 번씩 드나들었다. 마도로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비슷한 문화에, 넘치는 먹거리에, 술과 여자가 마음대로 였으니….
언젠가 네이버가 우리나라에서 1920년부터 80년대 이전에 나온 가요(歌謠)의 가사를 조사해 봤더니 가장 많이 나온 것이 ‘마도로스(matroos)였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막 성장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할 때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선원들의 멋진 복장과 입에 문 파이프와 이국 아가씨들과 밀어 등은 부러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사 모두가 그렇듯이 양면이 있다. 물론 위험성도 높았지만, 양상(洋上)에서의 업무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더구나 해상(海上)이라 동료 이외는 아무도 상황을 볼 수가 없는 일이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나라를 살린 산업역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1976년 이 ‘NO.3 TUNGHO’에서 만난 일본인 통신장(通信長)이 무라오카(村岡)씨다. 그는 상고(商高) 출신으로 어쩌다 통신사가 됐는데, 알콜중독에다 여색(女色)에 빠져 가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자, 지역 은행에 근무하던 그의 상업고등학교 동기들이 협심(協心)하여 은행융자로 집을 사서 부인과 딸을 생활하게 해 주고는 무라오카(村岡)는 배를 태워 내 보내고 저당잡은 그의 월급으로 대출금과 생활비를 지불하게 하는 대신, 그는 선상(船上)에서 월 일정액만 지불받도록 조치를 취했다. 나 보다는 두어 살 연상이었다.
타이완 기륭항 중앙공원에서, 오른쪽부터 필자, 기관장, 무라오카와 그의 현지 애인
출항 후 하루 동안 식사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방장이 보고했다. 걱정하고 있는 데, 마치 실성한 모양의 그가 내 방을 찾았다. 이상했다. 처음 봤을 때 불콰하던 얼굴이 하얗게 핏기가 없고 비실비실 하며 몸도 제대로 가누질 못한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말도 횡설수설이다.
언뜻 떠오른 것이 ‘마약 아니면 알콜 중독’이었다. “술?” 했더니 “삐루 삐루(맥주)”만 외친다. “내게 사케(正宗)가 조금 있는데 줄까?”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급했다. 작은 병을 따고 정종 한 컵을 단숨에 쭉 들이키고는 1분이 안 되어 제정신을 찾는다. 내 거시기에서 돌이 빠진 것 만큼이나 희한한 일이었다. 그러고는 실은 ‘알콜 중독자’임을 밝히고 첫 항차라 미쳐 준비를 못했다고 하며 “아리카토오(고맙다)”를 연발했다. 이로써 그는 내게 첫 은공(恩功)을 입음으로서 친해지고 마음을 터기 시작했다.
그에게 아침 식사는 맥주와 커피 한 잔이었다. 점심과 저녁은 맥주에다 면(麵)이나 약간의 밥 이외는 특별히 필요한 것이 없었다. 맥주는 그에게 필수 상비 식량이었다. 그의 몸에는 늘 알콜성분이 있어야 정상인이 된다. 그 다음부터는 주방장에게 일러 꼭꼭 챙겨주도록 했다. 외국항이나 타 항국에 입항시 세관에게 그 사실을 선장이 보증을 해 줌으로 그의 침실에 쌓인 맥주박스가 인정을 받았다. 그 후에도 그의 여색행각(女色行脚) 등도 인정해줌으로 더욱 가까워 졌다.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늘 현지 애인이 있었는데 그것도 갈 때마다 바뀌어 다른 사람들은 비아냥을 했지만, 나는 인정해 주었다. “오토코쟈나이카?(男じゃないか? : 남자 아닌가?) 하고…. 그래서 날 좋아했었고, 나는 그를 잘 이용(?)했다.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세상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 같았지만, 오래 살지 못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어느 일요일 낮, 점심을 끝내고 쉬는데 무라오카씨가 얼굴이 하얗게 변해 내 방문을 두드렸다. 사고가 났는가 싶어 내심 놀랐다. 대뜸 하는 말이,
“센쬬, 보꾸 아노 시코도가 데낀. 시니따인데수(선장, 나 그 일이 안 돼. 죽고 싶어)”
“낮에 갔오?”
“응, 그 영어 선생하고 호텔에 갔는데 아무래도 안 되네.” 했다.
짐작이 갔다. 술과 여자가 그의 삶의 유일한 낙(樂)인데 여자와의 그 작업(?)이 안 된다니 죽을 맛임에는 분명하다. 그 영어 선생이란 여인은 나도 안다.
당시에 미(美)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대만 · 한국 · 필립핀 등 큰 항구를 가끔 방문한다. 명목이야 ‘친선방문’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장병들의 코풀어주기(?)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 기간동안 병사들은 아가씨 집에 가기도 하고 쇼핑도 하며 해상에서 쌓인 심신의 객고(客苦)를 푼다. 부산에서도 그랬다. 미항공모함 입항 중에는 텍사스 골목은 문전성시였었으니까…. 유럽에서도 그런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동안에는 유명 술집이나 바(Bar)에서는 이 기간을 놓칠세라 영어 할 줄 아는 아가씨를 임시로 고용하여 호객과 거래를 도와준다. 그러다가 항공모함이 떠나고 나면 각 업소는 썰렁해진다. 그 중 한 여인을 무라오카씨가 눈독을 들인 것이다.
뻔하다. 중학교 영어 선생으로 정년퇴직한 여인이랬다. 말하자면 그 업계에선 퇴물이지만 ‘님도 보고 뽕도 따러’ 나온 것이다. 밤에는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였으니 늘씬한 허리에 짙은 화장의 얼굴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우선은 토막 영어지만 말이 제법 통한다. 미군들이 드나들 때는 선원들은 뒷전이다. 단가(單價)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엔간히 밑천께나 들였을 것이다. 어째 낮에 호텔로 가기로 하고 일요일에 만났는데, 이상하게 그 일이 안 된다고 했다. 당연하지. 낮에 보니 그야말로 할마씨였다. 그러니 그 넘의 물건이 일어설 리가 없지.
사범학교 시절 입에 거품을 물며 천장만 쳐다보며 알아 듣지 못하는 말로 수업을 하시던 박정수 심리학 선생님! 그 선생님의 강의가 그렇게 긴요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무신 말이지는 몰라도 어느 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냉장고에서 잘 익은 맥주를 꺼내 앞에 놓고 선무당(?)의 강연을 시작했다.
“어이 무라카미상, 낮에 보니 그 여 선생 많이 늙었지요?”
예상보다 더 늙었단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게 당연하다. 보통 때 같으면 야들야들한 젊디 젊은 것들이 새고 샜는데 한 낮에 그 퇴물을 안고 일이 될거냐? 하기야 며칠간 밑천 들여 힘들게 꼬셔 겨우 잡은 약속이니 아깝기는 그지없을 것이고….
속 대로 하자면 "야 이 자슥아, 맨날 밥도 안쳐먹고 맥주만 먹는데다 그 일만 해대는 데 무슨 장사라고 한 낮에 할매를 안고도 그 일이 될거냐?"고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수는 없어,
“내가 보긴 당신이 좀 피로가 쌓인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거 같으니 한숨 푹 자고, 저녁때 다시 나가서 다른 젊고 예쁜 아가씨를 골라 해보소. 잘 될거요”
“있는 데로 털어 주고 나니 돈이 없는데…”
“그래요? 내가 2만엥 빌려주지요.” 하며 주었더니 벌떡 일어나 “센쪼, 아리가도 고자이마스”(선장, 고맙소) 하며 돈을 받아 쥐고는 큰절을 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슬며시 염려가 된다. ‘서툰 무당짓이 안 맞으면 어쩌나’…. 나이 적은 내가 연상인 그의 그 일까지 코취해 줘야하다니, 좀 서글프고 한심한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것도 내 업무의 일부라고 할 수 있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초저녁을 넘기자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다시 선장실을 찾았다. “선장, 진짜로 당신 말이 맞았소. 잘 돼요. 고맙소.” 하면서 내밀지도 않았는데 내 손을 잡고 나갈 때 보다 더 허리를 굽힌다. 잘 된 것이다. 선무당의 푸닥거리가 용케 약발을 받은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하면 “이노치오스쿠우(命を救う : 목숨을 구했다)”한 셈이다. 나로서는 바다에 빠진 선원을 구출했다기 보다 주색과 여색에 빠진 외국선원 한 명의 생명을 구한 셈이었다. 나도 기분이 좋아서 같이 나가서 한 잔 하고는 어깨동무를 하고 귀선했다.
타이완 기륭항 중앙공원에 세워진 보살상, 파란 원안이 필자
마침 그때 우리 기관장의 후배 하나가 대만 아가씨와 결혼, 신혼생활을 부산에서 시작했는데, 그 친구의 소개로 둘이서 기륭(基隆)시내에 있는 후배 처가(妻家)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신부(新婦)의 아버지는 기륭 시내 경찰 파출소 소장이었다. 신혼부부 당사자들이야 ‘얼시구나’ 좋았지만 친청 아버지는 낯선 외국에 외동딸을 보내 놓고 마음이 병이 되어 입원할 정도였다. 다행히 후배의 장모, 즉 신부 어머니가 일본말을 잘해 의사가 잘 통했다. 사위가 보낸 친구들이었으니 소식도 들을 수 있어 칙사대접이었다.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경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합석했다.
한국은 36년이지만, 대만은 50여 년간을 식민지로 살았기에 일본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반일(反日), 즉 원수로 보는 대신 대만은 일본 때문에 지금 이만큼 살기 좋게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고맙게 생각하며 일본을 존경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한 동안은 기륭(基隆) 시내에서의 사소한 시비는 파출소장의 힘으로 잘 해결되었다.
반면 부산의 신랑집에서는 외국 며느리를 맞은 시어머니가 죽을 판이었다. 후배 부친이 한전(韓電)의 간부로 정년퇴직한 점잖은 분이었으니 그야말로 양반집인 셈이었다. 이 판에 하나뿐인 새 며느리가 하늘 같은 시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밥 묵어라”, “아버지 정구하고 오나”고 ‘막 묵으려’ 했으니, 예쁜 외국 며느리라 시아버지는 이해를 하고 “오냐, 오냐” 하며 며느리 등도 다독그려 주지만, 그 꼴을 보는 시어머니가 눈이 뒤집히고 병이 날 지경이었다. 어느 쪽이나 그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는 생각이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양 집안 사돈들이 서로 다녀가고 어른들의 권유로 후배는 그렇게 좋아했던 승선 생활을 그만뒀다고 했다.
빨간 원안의 작은 섬이 Luda( 祿島 ) 섬. 이 섬 때문에 살았다.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이 NO.3 TUNGHO의 마지막 항차, 필리핀 세부항에서, 광석 중에서 가장 무겁다는 동광석(銅鑛石)을 싣고 일본으로 귀항하던 중 대만 동쪽에 떠있는 주먹만한 Luda(祿島)섬 인근에서 만난 태풍으로 그야말로 구사일생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선박이다.
사실은 불과 1년 동안이었지만 재미있고 인상에 남는 일들도, 사고도 많았는데, 어쩌다 이 기간동안의 일기를 적은 노트 한 권이 없어졌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또래의 발자취라 흥미진진 중에도 낯 선 이바구.
힘 겨웠던 젊은 날의 애환을 노년에 편안하게 기록하고 있고,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네요.
독자들에게 감동. 감명을 안겨 줄 수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2025년 역시 건강한 모습으로 귀한 흔적을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
健行하십시오.
노년 건망증 땜시 깜빡,^^
보살상 품속까지 어떻게 올라갔을까요? 내부에 엘리베이트가 있나 싶어서 검색했는데 나타나지 않네요.
그리고
보살 품속에 안긴 개구쟁이 늑점이님,
세상을 내려다 보는 느낌, 감상문이 없넹.^^
그게요. 그렇슴다. 서른 중반의 한참 뻘떡거릴 때였는데 세상이야 늘 높이 올라가나 땅에 있으나 좁게 보였지요.
기륭항의 중정공원은 마치 부산의 용두산처럼 기륭항이 바로 내려다보니는 곳인데 거기에다 용두산엔 전망댈 세웠지만
거긴 자항보살상을 세워 출입항하는 선박들의 안전항해를 빌어주었지요. 올라가는 길은 좁은 계단을 밟았지요.
아무나 올라가지 말고 그만큼 정성과 다리가 뻐근할 만큼의 고행(?)을 들이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게 말이오.
반세기 전의 일입니다. ㅎㅎㅎ 건강하소. 부산넘
그 시절에 계단을.
저리도 높으니 아무나 올라 갈 용기를 가질 수 없겠습니다. 가파르기도 할 것 같고.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서 선배님의 글 솜씨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픽션만 조금 넣으면 멋진 소설이
되겠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