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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역사탐방 (제13코스 : 한강 백년다리길)
※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 역사탐방프로그램 >
① 용사의 집 - ② 연복사탑 중창비 - ➂ 일본관사 - ➃ 새남터 순교성지 - ➄ 한강대교- ➅ 1·4 후퇴 시 시민 철수 부교 설치지역 - ➆ 노들섬- ⑧사육신묘
◇ 용사의 집 (’나인트리 프리미어 로카우스 호텔’) : 용산구 한강대로 23길 25
- 호텔로 변한 장병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건립한 원호시설
용사의 집은 용산구에 있는 대한민국 군인과 군인 가족을 위한 원호시설이다.
1955년에 육군본부에서 주한미군의 장교클럽을 벤치마킹하여 육군회관을 건립하였지만, 장교들을 위주로 한 시설이어서 병사들을 위한 편의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전방 부대들의 장병들이 휴가를 나와 용산역을 거쳐 고향으로 내려가려면 용산역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했다. 이를 보게 된 박정희 대통령이 "장병들이 잠시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하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하사금으로 1억 2천만원(당시 금액)을 들여 대지 1006평, 건평 1225평 규모로 1966년 3월~1969년 8월까지 지상 5층에서 지하 1층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해당 시설의 명칭을 ‘용사의 집’으로 정했다.
용사의 집 시설은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낡은 시설이어서 그동안 여러 환경 개선공사도 진행되기도 했으나 계속 버티기가 어려워서 2016년 12월 시설을 폐장 후 철거하고, 2023년 4월, 지상 31층, 지하 6층 규모에 274개의 객실과 실내수영장을 갖춘 ‘나인트리 프리미어 로카우스 호텔’로 재개장했다.
이 호텔은 전체 객실 중 45개를 병사 전용 객실로 사용하고 있다.
◇ 연복사탑 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 : 용산구 한강로3가 40-1010 (유형문화재 제348호)
- 고려 때 개성에 있는 연복사 오층탑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연복사탑 중창비는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재건된 고려 때의 사찰인 개성시의 연복사(演福寺) 오층 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았다. 비록 비신(碑身) 부분은 잃어버렸으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부분만은 온전하게 옛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0년에 용산의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 구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2년에 시민인 김석중 씨가 인터넷 카페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에 연복사탑 중창비를 발견하였다는 글을 올림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연복사탑 중창비가 용산으로 이전된 경위에 대하여는 경의선 철로가 지나는 구역과 맞물려 있고, 개성역(開城驛)과도 상당히 인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경의철도(京義鐵道)의 부설과 관련하여 이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복사탑 중창비의 비문은 대사헌을 지낸 양촌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초대 한성부윤을 지낸 독곡 성석린(成石璘)의 필체를 새긴 조선 초기의 귀중한 문화재이다.
◇ 일본관사 : 용산구 한강대로 7길 14
- 거의 훼손되고 일부 만남은 일본인이 거주하던 사택(舍宅)
일본 강점기에 일본인 거주지로 770채 정도의 사택이 있었으나 훼손되고, 일부 만남아 있다.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지만, 독특한 지붕 모양이 일본 주택의 흔적을 보여준다. 기와가 약해 관리가 어렵다.
현재는 작은 1호관사, 3호관사와 가장 큰 4호관사가 남아 있다.
◇ 새남터 순교성지(새남터 성당) : 용산구 이촌동 199-1
- 조선시대 중대한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하고,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
새남터는 조선시대의 국법에 따라 일반 죄수들이 처형되던 서소문(西小門) 밖 형장과 달리, 중대한 국사범(國事犯)을 처형하는 형장(刑場)으로 성삼문 등 사육신이 고귀한 일생을 마친 곳이다.
잘 알려졌지만 조선 후기, 서학(西學)을 박해하던 때에 새남터는 천주교인들이 국사범으로 단죄(斷罪)되어 체포, 고문당하다가 신앙을 증명하고, 순교한 곳이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조선 후기 순조~고종 때에 국내로 잠입하여 전교 활동을 벌이던 외국 성직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새남터는 현재도 순례자(巡禮者)가 그치지 않는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성지로 꼽히고 있다.
용산역에서 한강대교로 건너기 전에 서부이촌동으로 가는 「이촌동 길」로 들어서면 주택가에 새남터성당이 세워져 있다. 이 성당이 세워진 부근 일대는 새남터로서 사남기(沙南基), 사남평(沙南坪)으로 표기되었지만, 이 지명은 조선시대에 남대문 밖에서 한강까지에 이르는 한강의 범람원으로서의 모래땅, 사지(砂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이곳에 한강 제방이 축조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여름철 홍수 때 한강물이 범람하면 물이 들어왔다가 빠지는 일이 되풀이되어 이곳에는 넓은 모래땅이 생겼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새남터가 군인들의 훈련할 터 즉, 연무장(演武場)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한강대교(漢江大橋) : 용산구 이촌동 ~ 동작구 본동
- 처음 인도교가 가설된 한강의 쌍둥이 다리
한강에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도록 최초의 인도교가 놓인 것은 경술국치 7년 뒤인 1917년이었다. 1900년에 한강철교가 가설되고 17년 동안 인도교가 가설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도시 내의 교통수단이 보행 위주였기 때문이다. 처음의 한강 인도교는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하여 가설하였으므로 폭이 좁고 중앙차도 4m, 좌·우측 보도는 각 1m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로 노들섬에서 용산 쪽으로 건설되었던 소교가 유실된 것을 1929년 9월에 다리를 재개통하였다. 이 당시 노량진 쪽에는 폭은 18m로 확장, 경간 60m인 3운(運)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양쪽 다리 중간은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하였다.
그 뒤 새 인도교는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되었다. 이 당시의 인도교는 폭 20m에 길이는 10,005m였다.
이 다리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때 폭파되는 수난도 겪었다. 휴전 후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1958년 5월 15일에 준공되었다. 1981년에 교량을 완전히 2배로 확장하여 쌍둥이 다리가 되면서 ‘한강대교’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동안 차량의 증가로 인하여 기존의 전일의 교량만으로는 폭주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신설된 제1 한강교∼관악구청 간 도로에 의하여 부가되는 도로교통량의 처리도 문제가 되어 1981년에 불가피하게 확장공사를 하였다.
원래의 한강 인도교 하류 쪽에 전과 같은 6 경간(徑間) 타이드 아치를, 그리고 보 교 구간에서 상류 측에 19 경간의 판형교를 가설하여 교량을 2배로 확장하였다. 한강 인도교가 처음 S자형의 평면 노선이었던 것을 대칭으로 확장함으로써 이때부터 이름이 한강대교로 바뀌었다.
한강대교는 노들나루(노량진)가 있던 곳이라 노량대교라는 이름이 적당하지만, 한강철교 이후 최초로 세워진 다리라 하여 한강 인도교, 제1 한강교라 불리다가 한강대교로 이름이 정해졌는데 현재 한남대교는 한강진이 있었던 자리이므로 한강대교라고 명명해야 했다.
◇ 노들섬 : 용산구 양녕로 445
- 모래사장을 한강 인도교를 가설하면서 생긴 인공섬
노들 지명은 예로부터 용산 맞은편을 노들, 노돌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일설에 따르면 노들의 사전적 의미는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란 뜻이라고 전한다. 조선 초 태종 14년, 노들에 나루(津)를 만들면서 노들나루라는 이름이 퍼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노량진(鷺梁津)이다.
노들섬은 원래 섬이 아니라 이촌동 쪽에 붙어있는 넓은 백사장이었지만 1917년 일제강점기 이촌동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제 인도교를 놓으면서 모래 언덕에 석축을 쌓아 올려 인공섬을 만들고, 중지도(中之島)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름에는 피서지와 낚시터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시민들이 애용하는 유원지였다
1968년부터 시작된 한강 개발계획으로 노들섬은 유원지의 기능을 상실했다. 오늘날 이촌동 인근에 제방을 쌓아 안쪽을 메우고, 그 위에 도로(강변북로)를 놓는 데에 필요한 자재로 이 일대의 모래가 쓰였다.
이에 따라 동부이촌동과 서부이촌동이 생겨났는데 반대급부로 사라진 모래밭에 강물이 들어와 섬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게 되었다.
1969년에는 한강개발관광(진흥기업)이라는 회사가 2억을 들여 섬이 된 모래밭 주변을 메웠다. 이후 공유수면매립법에 따라 1973년, 건설부의 인가를 받아 노들섬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매립공사로 섬의 크기가 1만여 평에서 4만5천여 평으로 확장되었고 시멘트 둔치가 생기면서 현재의 노들섬이 완성됐다.
1986년에는 진흥기업이 건영에 노들섬을 매각하였고, 2005년에는 서울시가 오페라 하우스 건립을 위해 매입한 후, 현재까지 여러 개발 과정을 거치고 있다
◇ 1·4 후퇴 시 시민 철수 부교 설치지역 : 노들섬
- 1951년 1·4 후퇴 시 피난길에 오른 시민들이 한강에 설치된 부교를 건넌 곳
1950년 12월 31일~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공세로 한국군은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하자 피난길에 오른 서울시민들이 한강을 도하 때 이용했던 부교(浮橋)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1951년 1월 3일,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명령에 따라 한강 이북의 모든 국군과 유엔군은 1월 4일 오전까지 한강에 임시로 설치된 부교를 통해 철수를 완료했다.
1950년 12월 하순부터 이미 피난령이 내려져 서울시민 대부분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는데, 이는 전쟁 초기에 피난 가지 못하고 잔류하였다가 이후에 온갖 시달림을 받았던 경험 때문이었다.
이곳은 1·4후퇴 당시 서울시민들의 피난 상황을 보여주는 장소 중의 하나이다.
◇ 노들나루 : 동작구 노량진동
- 서울과 시흥·수원을 잇는 한강의 나루터
노들나루는 노량진(露梁津)·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로도 불렸다.
노들나루는 한양도성과 시흥 · 수원 방면 사이의 간선도로를 이어 주는 길목이다. 이 나루는 조선 전기에는 주로 민간인들이 왕래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왕의 행차가 빈번하여 강을 건너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노들나루에도 한강나루, 삼전도에서와 같이 배다리[舟橋]가 놓이게 되었고, 정조는 이를 위하여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만들어 보고하게 하였다.
이 나루에는 도승(渡丞)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이 나루에 속하였던 진선(津船)은 10척이었고, 관선(官船)은 15척이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 위치하였다.
◇ 사육신묘(死六臣墓) : 동작구 노량진동 182번지 2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호)
- 조선시대에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거사를 계획하다가 굴복하지 않은 여섯 신하의 묘
조선시대의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조선시대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서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거사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뒤 끝까지 세조에게 굴복하지 않고, 처형된 성삼문·유성원·이 개·하위지·박팽년·유응부의 여섯 신하를 ‘사육신’으로 꼽았기 때문에 이들은 오랫동안 알려진 조선시대 충신의 대명사였다.
성역화(聖域化)된 2,700㎡ 사육신묘 묘역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문을 지나면 그 안에 좌우로 정조 6년(1782)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비각 안에 있고, 1955년에 세운 6각의 사육신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다시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서면 사당인 의절사(義節祠)가 있다. 1955년에 세운 사육신 묘비는 서울시에서 육각비(六角碑)를 세우면서 각 면마다 사육신의 시와 시조를 써서 새겨 놓았다.
현재 의절사 뒤에는 현재 7개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는 1978년에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경북 선산(善山)에 있던 하위지의 묘를 이장해 오고, 유성원의 묘를 새로 꾸미면서, 병조판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를 추가로 조성하였다. 따라서 의절사에는 사육신의 여섯 분이 아닌 일곱 분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다.
광복 직후까지는 이곳에 ‘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 쓴 두 개의 묘소와 박씨지묘(朴氏之墓)·이씨지묘(李氏之墓)·유씨지묘(兪氏之墓) 등 다섯 분의 묘소만 모셔져 있었다. 이곳의 ‘성씨지묘’ 두 개는 성삼문과 그의 부친 성승(成勝)의 묘소로 전해 왔다. 사육신 중의 하위지는 고향인 선산에 모셔져 있었고, 유성원의 묘는 모셔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광복 후 어느 때인가 사육신묘 서쪽에 성승의 묘소를 없애 버렸으므로, 1978년에는 사육신 중 네 분의 묘소만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
정조 때 세워진 신도비는 원래 사육신 묘소 아래 큰길가에 위치하였다. 이 비를 1978년에 현재 자리에 옮겨 놓았는데 비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성삼문 등 여섯 충신이 사형을 받을 당시 서울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혼란하였으므로 이들의 시신을 매장할 겨를조차 없었던 중에 다행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승려의 차림으로 남몰래 이 산에 시신을 묻었다. 그러하니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어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라는 구절이 있으니 사육신의 묘소가 조성된 내력의 일부를 알 수 있다.
사육신의 충절은 남효온의 육신전(六臣傳)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숨겨져 왔다. 사육신이 처형되고 나서 200여 년 뒤인 숙종 8년(1682), 동작진(銅雀津)에 사육신을 위한 육충사(六忠祠)를 세웠다. 숙종 17년 9월에는 국왕이 친히 노량진 한강을 건너서 사육신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어서 그해 12월에는 숙종이 여섯 충신의 관작(官爵)을 복위하고, 시호(諡號)도 내리는 동시에 서원을 묘소 산마루에 이전한 후 ‘민절서원(愍節書院)’이라는 이름을 써서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