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6 - 옹야(雍也) - ② |
1 |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애공이 묻기를, “제자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라 하자,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길, “안회라는 자가 있었는데, 배움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더니,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미처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셨다. 遷移也 貳復也 怒於甲者 不移於乙 過於前者 不復於後 顔子克己之功 至於如此 可謂眞好學矣 短命者 顔子三十二而卒也 旣云今也則亡 又言未聞好學者 蓋深惜之 又以見眞好學者之難得也 遷은 옮긴다는 것이요, 貳는 반복한다는 것이니, 갑에게 화가 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고, 이전에 잘못한 것을 뒤에서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자는 극기의 공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진짜로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명이 짧다는 것은 안자가 32세에 죽은 것을 말한다. 지금은 없다고 이미 말하고서 다시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를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은 대체로 그것을 깊이 애석해하신 것이다. 또한 이로써 진짜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朱子曰 不遷怒貳過 是顔子好學之符驗 如此却不是只學此二事 其學全在非禮勿視聽言動上 乃是做工夫處 不遷不貳 是成效處 주자가 말하길,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자가 배우기를 좋아하였다는 것의 부험이니, 이와 같다면 도리어 이 두 가지 일만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 학문은 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는 것 위에 온전히 있으니, 이는 곧 공부를 한 부분이고, 옮기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 것은 공효를 이룬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怒與過皆自己上來 不遷不貳皆自克己上來 노여움과 허물은 모두 자기로부터 온 것이고, 옮기지 않고 반복하지 않음은 모두 자기를 이김으로부터 온 것이다. 勉齋黃氏曰 存養之深 省察之明 克治之力 持守之堅 故其未怒之初 鑑空衡平 旣怒之後 氷消霧釋 方過之萌 瑕類莫逃 旣知之後 根株悉拔 此所以爲好學 而集註以爲克己之功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마음을 보존하고 기름이 깊으며, 성찰하기가 밝고, 자신을 이겨서 다스림이 강력하고, 붙잡아 지킴이 견고하기 때문에, 그가 아직 성내지 않은 처음에는 거울처럼 비어있고 저울처럼 공평하며, 이미 성을 낸 후에는 얼음이 녹고 안개가 풀리듯 하니, 바야흐로 허물이 싹틀 때는 흠결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미 그것을 안 뒤에는 뿌리와 줄기마저 모조리 뽑아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지만, 집주에서는 극기의 공효로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眞好學眞字須仔細看 경원보씨가 말하길, “진짜로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에서, 眞이란 글자를 반드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人惟不能克去己私 故遷怒者 私意之執滯也 貳過者 私意之隱伏也 顔子之學 眞能克己 故當怒未嘗不怒 旣怒則不遷 有過未嘗不知 旣知則不留 此皆克己之功效 而好學之符驗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사람은 오직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겨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노여움을 옮기는 것은 사사로운 뜻에 집착하여 막히는 것이고, 허물을 반복하는 것은 사사로운 뜻이 은밀하게 매복해 있는 것이다. 안자의 학문은 진정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성을 내야 할 적에는 일찍이 성내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이미 성을 내었다면 옮기지 않았다. 허물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었지만, 이미 알았다면 곧 남겨두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자신을 이긴 공효이자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符驗(징표)이다.”라고 하였다. 家語顔子少孔子三十歲 年二十九而髮白 三十二而早卒 공자가어에 따르면, 안자는 공자보다 30세가 어렸는데, 나이 29세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고, 32세에 일찍 죽었다고 한다. 厚齋馮氏曰 師有父兄之道 故稱受敎者爲弟子 當是時 曾子尙少好學而可以傳道者 惟顔子一人而已 曰今也則亡 言好學者無存也 不曰不聞而曰未聞 不敢以一己之聞見 厚誣天下之無人 又焉知來者之不如今也 후재풍씨가 말하길, “스승에게는 父兄의 道가 있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칭하여 弟子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증자는 아직 어렸으니, 배움을 좋아하면서 도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안자 한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지금은 없다고 말한 것은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듣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아직 듣지 못했다고 말한 것은 감히 자기 한 사람의 견문을 가지고 천하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심하게 업신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後來者가 지금보다 못할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
2 | ○ 程子曰 顔子之怒 在物不在己 故不遷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 不貳過也 又曰 喜怒在事 則理之當喜怒者也 不在血氣 則不遷 若舜之誅四凶也 可怒在彼 己何與焉 如鑑之照物 姸媸在彼 隨物應之而已 何遷之有 정자왈, “안자의 노여움은 사물에 있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옮겨가지 않는 것이다. 不善한 것이 있으면, 알지 못함이 없고, 그것을 알면 다시 행하지 않으니,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길, 희로가 일에 있으면(일 때문이면) 곧 이치상 당연히 기뻐하고 화를 내는 것이요, 희로가 혈기에 있지 않으면, 곧 옮기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순임금이 네 원흉을 주벌함에 노여움이 저들에게 있으니, 내가 저들에게 무엇을 관여할 것인가? 마치 거울이 사물을 비추듯 아름다움과 추함은 저것에 있어서, 사물에 따라 그에 대응할 뿐이니, 무슨 옮기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二句易繫辭文 乃孔子稱顔子語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 두 구절은 주역 계사의 글인데, 곧 공자가 안자를 칭찬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程子兼不遷怒不貳過說 운봉호씨가 말하길, “정자는 不遷怒와 不貳過를 겸해서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媸赤之反 姸美也 媸醜也 媸는 음이 치(chi1)이고, 姸은 아름답고, 媸는 추하다는 것이다. 雲峯胡氏曰 專說不遷怒 怒每自血氣而發 顔子之怒在理而不在血氣 故不遷 운봉호씨가 말하길, “오로지 不遷怒만 말한다면, 노여움은 매번 혈기로부터 피어나는데, 안자의 노여움은 이치에 있을 뿐 혈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又曰 如顔子地位 豈有不善 所謂不善 只是微有差失 纔差失 便能知之 纔知之 便更不萌作 張子曰 慊於己者 不使萌於再 或曰 詩書六藝 七十子非不習而通也 而夫子獨稱顔子爲好學 顔子之所好 果何學歟 다시 말하길, “예컨대 안자의 경지에 어찌 不善함이 있으리오? 이른바 不善이라는 것은 그저 미세하게 잘못이 있는 것이니, 그저 잘못이기만 하면 곧 그것을 알 수 있고, 그저 알기만 하면, 곧 다시 싹 트지 못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길, “자신에게 흡족하지 않은 것(慊於己者)이 다시는 싹 트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 혹자는 말하길, “시서육예를 70제자가 익혀서 통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자께서 유독 안회를 지칭하여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안자가 좋아한 것은 과연 어떤 배움인 것인가?”라고 하였다. 朱子曰 慊於己只是略有些子不足於心 便自知之 卽隨手消除 不復萌作 주자가 말하길, “‘慊於己’라는 것은 그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약간 부족한 것인데, 문득 스스로 이를 안다면, 곧바로 소제하여 다시는 싹 트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許氏曰 心過常小身過常大 顔子雖有心過無身過 無身過易 無心過難 要當制之於心而已 허씨가 말하길, “마음의 허물은 항상 작고, 몸의 허물이 항상 큰 법이다. 안자는 비록 마음의 허물이 있을지언정 몸의 허물은 없었다. 몸의 허물이 없기는 쉬우나, 마음의 허물이 없기는 어려운 법이니, 그것을 마음에서 합당하게 통제해야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
4 | 程子曰 學以至乎聖人之道也 學之道奈何 曰 天地儲精 得五行之秀者爲人 其本也眞而靜 其未發也 五性具焉 曰仁義禮智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懼愛惡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故覺者 約其情 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而已 然必先明諸心 知所往然後 力行以求至焉 정자가 말하길, “배움은 이로써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道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배움의 도는 어떤 것인가?”라고 하자, 정자가 말하길, “천지가 정기를 쌓아서 오행의 빼어난 것을 얻어 사람이 되는 것이니, 그 근본은 진실하면서도 고요한 것이다. 그것이 미처 드러나지 않을 적에 오성이 갖추어졌으니, 이를 일컬어 仁義禮智信이라 하고, 형체가 이미 생겨난 때에 외물이 그 형체에 접촉하여 마음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안에서 움직이면 7정이 나오는데, 이를 일컬어 喜怒哀懼愛惡欲이라 하니, 情이 이미 치열하여 더욱 흔들리면, 그 性이 깎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그 情을 요약(절제)하여 중도에 맞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性을 기를 뿐이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마음에서 밝혀서 갈 곳을 안 연후에 힘써 행함으로써 갈 곳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道者方法之謂 言學以至乎聖人底方法也 下文言學之道與學之得其道 皆是此意 쌍봉요씨가 말하길, “道라는 것은 방법을 일컬어 말한 것으로서, 배워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아랫글에서는 ‘배우는 도’와 ‘배움이 그 도를 터득함’를 말하였는데, 모두 이러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問儲精 朱子曰 精氣流過儲蓄得二氣之精聚 故能生出人物 누군가 정기를 쌓음에 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精氣(원기)가 유통하고 저축되어 음양 2기의 정기가 모임를 얻기 때문에, 능히 사람과 사물을 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本是本體 眞是不雜人僞 靜言其初未感物時 五性便是眞 未發便是靜 주자가 말하길, “本이라는 것은 本體이고, 眞은 인위적인 것이 섞여있지 않음이며, 靜은 그 처음에 아직 외물에 감화되지 아니한 때를 말한다. 五性이 곧 眞이고,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이 곧 靜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心是活物 故外物觸之而動 上言其本靜 故於此言 경원보씨가 말하길, “마음은 살아있는 사물이기 때문에, 외물에 접촉하면 움직인다. 위에서 그 본체가 고요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性固不可鑿 但人不循此理去傷了他 주자가 말하길, “성은 본래 깎아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이 이치에 따르지 않고, 가서 그것을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這一段緊要處 只在先明諸心上 明諸心知所往 窮理之事 力行求至 踐履之事 知所往 如識路 力行求至 如行路 주자가 말하길, “이 한 단락의 중요한 부분은 오직 먼저 마음에서 밝힌다는 것 위에 있으니, 마음에서 밝혀서 갈 곳을 아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고, 힘써 이르기를 구하는 것은 실천하고 이행하는 일이다. 갈 곳을 아는 것은 길을 아는 것과 같고, 힘써 이르기를 구하는 것은 길을 가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用工最緊要處 在約其情使合於中 約是工夫 中是準則 四勿便是約的工夫 禮便是中的準則 能約其情使合於中 則心得其正而不蕩 性得其養而不鑿 쌍봉요씨가 말하길, “힘씀에 있어 제일 긴요한 부분은 그 情을 요약하여 중도에 부합하게 만드는 일에 있다. 요약하는 것은 공부하는 것이고, 中이란 준칙이며,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은 바로 요약하는 공부이며, 禮는 곧 중용의 준칙이다. 능히 그 情을 요약하여 中道에 부합하게 할 수 있다면, 마음은 그 올바름을 얻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본성은 그 길러줌을 얻어서 깎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程子此段議論皆自周子太極圖說來 天地儲精 此精字 卽是二五之精 其本也眞而靜 眞字卽是無極之眞 特周子自太極說來 故先眞而後靜 程子只自天地說起 故先靜而後眞 儲字卽是凝字 自古言性 未嘗言五性 圖說謂五行之生也各一其性 故此曰五性具焉 圖說謂五性感動而善惡分 萬事出此 則曰其中動而七情出焉 皆五性感動之後有善有惡 至於情旣熾而益蕩 則全失其本來之善矣 圖說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聖人立人極之事 此曰約其情使合於中 學者克己之事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정자가 이 단락에서 논한 것은 모두 周子(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天地儲精(천지가 정기를 쌓음)에서 이 精자는 곧 음양오행의 精氣다. 그 본체도 진실하고 고요하다에서 眞자는 곧 無極의 眞이다. 단지 周子는 태극으로부터 말하였기 때문에, 먼저 眞을 말하고서 靜을 나중에 말하였던 것이다. 정자는 그저 천지로부터 말을 시작했기 때문에, 먼저 靜을 말하고서 나중에 眞을 말한 것이다. 儲자는 바로 凝자다. 자고로 性을 말할 적에 五性을 말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주돈이 저작에서는 오행이 생성됨에 있어 각자 그 性 하나씩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五性이 갖추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圖說에서는 五性이 감화되어 움직이면 선악이 나뉘고 만사가 나온다고 말하였지만, 여기에서는 곧 그 마음이 움직이면 七情이 여기서 나온다고 말하였는데, 이 모두 五性이 감화되어 움직인 후 善도 있고 惡도 있는 것이니, 情이 이미 치열해져서 더욱 흔들리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 본래의 善을 전부 잃고 마는 것이다. 圖說에서 中正과 仁義로 안정시키되 靜에 주안점을 두는 것은 성인께서 사람의 법을 세우시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 情을 요약하여 중용의 도에 부합하도록 만든다고 말한 것은 배우는 사람이 자신을 이기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
5 | 若顔子之非禮勿視聽言動不遷怒貳過者 則其好之篤而學之得其道也 然其未至於聖人者 守之也 非化之也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今人乃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所以爲學者 不過記誦文辭之間 其亦異乎顔子之學矣 안자의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것과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 같은 경우는, 그가 좋아함이 독실한 것이요, 배움이 그 도를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미처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절제하여 지킨 것일 뿐, 자연스레 감화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으니. 그로 하여금 몇 년을 더 살게 하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化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에 성인은 본래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요 배워서 이를 경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배움으로 삼는 것들이 기억하여 암송하는 것과 문사지간에 불과하니, 이 또한 안자의 배움과는 다른 것이다. 雙峯饒氏曰 不遷不貳 皆是守而未化之事 若怒自然不遷 心無過 可貳 則化而無事於守矣 쌍봉요씨가 말하길, “옮기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 것은 모두 지키는 것일 뿐 아직 化의 경지는 아닌 일이다. 만약 노여움을 자연히 옮기지 않고, 마음에 반복할만한 허물이 없다면, 化의 경지여서 지킴에 일삼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小人之怒在己 君子之怒在物 小人之怒出於心 作於氣 形於身 以及於物 以至於無所不怒 是所謂遷也 怒在理 則無所遷 動乎血氣 則遷矣 舜誅四凶 皆因是人有可怒之事而怒之 聖人之心 本無怒也 譬如明鏡好物來時便見是好 惡物來時便見是惡 鏡何嘗有好惡也 世之人 固有怒於室而色於市 정자가 말하길, “소인의 노여움은 자신에게 달려있고, 군자의 노여움은 외물에 달려있다. 소인의 노여움은 마음에서 나오고, 氣에 작용하여, 몸에 드러나서 외물에 미치니, 이로써 성을 내지 않는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이 이른바 옮긴다는 것이다. 노여움이 이치에 있다면, 옮길 곳이 없다. 혈기에 움직인다면, 옮길 뿐이다. 순임금이 네 원흉을 주벌할 적에, 모두 그 사람에게 노여워할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여워했던 것이다. 성인의 마음에는 본래 노여움이 없다. 맑은 거울에 비유하자면, 좋은 물건이 다가올 때 바로 드러남이 좋은 것이고, 나쁜 물건이 올 때는 곧바로 드러남이 나쁜 것과 같으니, 거울에 어찌 일찍이 좋고 나쁨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본래 안방에서 노했지만, 저잣거리에서 성을 내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上蔡謝氏曰 顔子不遷怒不貳過 則其所好乃克己之學也 상채 사씨가 말하길, “안자는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으니, 그가 좋아한 바는 곧 克己의 학문이었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顔子因物之可怒而怒之 又安得遷 內有私意而至於遷怒者 志動氣也 有爲怒氣所動而遷者 氣動志也 或謂不獨遷於他人爲遷 就其人而益之便是遷 曰此却是不中節非遷也 주자가 말하길, “안자는 외물의 노여워할 만한 것으로 인해서 노여워하였으니, 또한 어찌 옮길 수 있겠는가? 안에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노여움을 옮기게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은 뜻이 기를 움직인 것이다. 노기에 의해 움직여짐이 있어서 옮기게 된 것은 氣가 뜻을 움직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타인에게 옮기는 것이 옮기는 것이 될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나아가 더 보태는 것도 바로 옮기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도리어 절도에 들어맞지 않은 것일 뿐, 옮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問不遷怒 此是顔子與聖人同處否 曰 不遷者在聖人分上說便小 在顔子分上說便大 蓋聖人無怒 何待於不遷 聖人無過 何待於不貳 所以不遷不貳者 猶有意存焉 與願無伐善無施勞之意同 猶今人所謂願得不如此 是固嘗如此而今且得其不如此也 此所謂守之非化之也 누군가 묻기를,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안자와 성인께서 같은 부분인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의 분수 위에서 말하자면 작은 것이고, 안자의 분수 위에서 말하자면 큰 것이다. 대체로 성인께는 노여워함이 없으니, 어찌 옮기지 않으시기를 기다리겠는가? 성인께서는 허물이 없으니, 어찌 반복하시기를 기다리겠는가? 따라서 옮기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 것에는 그래도 의도함이 들어 있으니, 원컨대 善을 자랑함이 없고 공로를 자랑함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의 뜻과 같은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이와 같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본래 일찍이 이와 같았지만 지금은 이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키는 것이지, 化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問人之義理未明而血氣未曾消釋 物來觸著 則乘此血氣之動 惟好惡之所之 怒不能得休歇而至於有所移也 若顔子 則是磨得心地光明而無一毫物事雜在其間 或喜或怒 皆是物之當喜當怒 隨其來而應之 而在我初無容心 不以此動其血氣 而至於有所遷也 但此是顔子克己工夫到後方如此 却不是以此方爲克己工夫也 曰 夫子當時也 是從他克己效驗上說 但克己工夫未到時 也須照管 不成道 我工夫未到那田地 而遷怒貳過 只聽之耶 누군가 묻기를, “사람이 義理에 대하여 아직 밝지 않아서 혈기가 미처 녹아 풀어지지 않았는데, 외물이 와서 접촉하게 되면, 곧 이 혈기의 움직임을 타고서 오직 좋아하고 싫어함이 가는 바가 될 뿐이니, 노여움은 그쳐서 쉴 수가 없어서 옮겨가는 바가 있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안자의 경우라면, 갈고 닦아서 심지가 밝으므로, 그 사이에 터럭 하나라도 사물이 섞여 있음이 없으니, 혹은 기뻐하고 혹은 노여워할지라도, 모두가 외물이 마땅히 기뻐하고 마땅히 성내야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것이 오는 것에 따라 대응하는 것일 뿐,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용납하는 마음이 없기에, 이로써 자기 혈기를 움직여서 옮기는 바가 있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자의 극기공부가 (일정수준에) 이른 후에 비로소 이와 같다는 것이지, 이러해야만 비로소 극기공부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공자께서는 당시에 안자가 克己한 효험을 따라서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극기의 공부가 미처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반드시 단속하고 관리해야 한다. 나는 공부가 아직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기에 노여움을 옮기고 잘못을 반복하여도 그저 따를 뿐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問顔子不遷怒亦見得克己工夫否 曰 固是 然克己亦非一端 如喜怒愛樂 皆當克 但怒是粗而易見者爾 누군가 묻기를, “안자가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에서 또한 극기의 공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본래 그렇다. 그러나 극기란 또한 어떤 한쪽의 단서가 아니다. 예컨대 희로애락을 모두 마땅히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노여움은 거칠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顔子於念慮處少差輒改 而今學者未到顔子地位 且須逐事上檢點過 也不論顯微 如大雷雨也是雨 些子雨也是雨 無大小都喚做過 只是晴明時節 靑天白日 更無些子雲翳 這是甚麽氣象 안자는 염려하는 부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즉시 고쳤는데, 지금 배우는 자들은 안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또한 모름지기 일 위를 따라가서 잘못을 점검해야 하는데, 드러난 것이나 은미한 것을 논하지 않는다. 예컨대 벼락 치는 큰비도 역시 비고, 조금 내리는 비도 역시 비인 것과 같다.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다 잘못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저 청명한 시절에만 푸른 하늘이고 밝은 햇살이며 조금이라도 구름 그림자가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기상이란 말인가? 問喜怒發於當然者 人情之不可無者也 但不可爲其所動爾 過失則不當然而然者 旣知其非 則不可萌於再 所謂頻復之吝也 二者若不相類而其向背實相對 曰 聖人雖未必有此意 但能如此看 亦好 누군가 묻기를, “喜怒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에서 발현되는 것은 인정상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에 의해 움직여서는 안 될 따름입니다. 과실은 마땅히 그러하지 않아야 함에도 그러한 것이므로, 이미 그것이 잘못임을 알았다면, 다음번에는 싹이 터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른바 자주 돌아옴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喜怒 두 가지는 서로 비슷하지 않은 듯 하지만, 그 향배는 실제로 서로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성인께서 비록 반드시 이 뜻을 가지셨던 것은 아니겠지만, 다만 이렇게 볼 수도 있으니, 이 역시 좋다.”라고 하였다. 顔子只是見得箇道理透 見得道理透 自不遷不貳 안자는 그저 몇몇 도리를 꿰뚫어 보았을 따름인데, 도리를 꿰뚫어볼 수 있다면, 저절로 옮기지 않고 반복하지 않는다. 非禮勿視聽言動 是夫子告顔子 敎他做工夫 要知緊要工夫 却只在這上 如無伐善無施勞不遷怒不貳過 是他到處 又曰 顔子到這裏 直是渾然更無些子査滓 不遷怒如鏡懸水止 不貳過如氷消凍釋 如三月不違 又是已前事到這裏 已自渾淪都是天理 是甚次第 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은 공자께서 안자에게 알려주어서 그가 공부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긴요한 공부는 도리어 단지 이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善을 자랑함이 없고 공로를 자랑함이 없으며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공부해서 이른 곳이다. 또 말하길, “안자가 여기에 이른 것은 그야말로 渾然하여 더이상 조그만 찌꺼기도 없다는 것이니,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 것은 마치 거울을 물 위로 매달아 비치듯 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은 마치 얼음이 녹고 추위가 풀리듯 한 것이다. 예컨대 3달이나 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이미 앞의 일이 여기에 이르면 이미 저절로 혼연일체한 것으로서, 모두 다 天理이니, 이는 도대체 어떤 단계란 말인가?”라고 하였다. 問顔子之所學者 蓋人之有生 五常之性渾然 一心之中 未感物之時 寂然不動而已 而不能不感於物 於是喜怒愛樂七情出焉 旣發而易縱 其性始鑿 故顔子之學 見得此理分明 必欲約其情以合於中 剛決以克其私 私欲旣去 天理自明 故此心虛靜 隨感而應 或有所怒 因彼之可怒而己無與焉 怒自過 而此心又復寂然 何遷移之有 所謂過者 只是微有差失 張子謂之慊於己 只是略有些子不足於心 便自知之 卽隨手消除 更不復萌作 爲學工夫如此 可謂眞好學矣 曰 所謂學者 只是學此而已 伊川所謂性其情 大學所謂明明德 中庸所謂天命之謂性 皆是此理 누군가 묻기를, “안자가 배웠던 것은 대체로 사람이 생겨나면서 五常의 性이 혼연하니, 一心의 가운데가 아직 외물에 감화되지 않을 때에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만, 외물에 감화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희노애락의 칠정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이미 발현되면 방종하기 쉬우니, 그 본성이 비로소 깎여 망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안자의 학문은 이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보고서, 반드시 그 情을 요약하여 중도에 부합하게 하고 굳세게 결단하여 그 사사로움을 극복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사욕이 이미 제거되었다면 天理는 저절로 밝아지기 때문에, 이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여 느끼는 바에 따라 반응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노하는 바가 있을지라도, 이는 저것의 노할만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서 자신은 그에 관여할 바가 없으므로, 노여움은 저절로 지나갈 것이고 이 마음도 또한 다시 고요해질 것이니, 무슨 옮기는 일이 다 있겠습니까? 이른바 잘못이라는 것은 그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잘못된 일일 따름입니다. 장자는 이를 일컬어 ‘자기에게 흡족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저 조금 마음에 부족한 것이 약간이나마 있는 것으로서, 문득 이를 스스로 알게 되면, 곧바로 제거해버려서 더이상 다시 싹 트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공부가 이와 같다면, 진짜로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른바 배운다는 것은 그저 이것을 배우는 것일 따름이다. 정이천 선생이 말한 ‘性其情(자기 정을 성처럼 만든다)’과 대학에서 말한 ‘明明德(밝은 덕을 밝힌다)’과 중용에서 말한 ‘하늘이 명한 것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것은 모두 다 이 이치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論顔子之天資 則只是明與剛 論顔子之用功 則只是敬與義 惟其明且敬也 故其纔動處便覺 惟其剛且義也 故纔覺便與一刀兩斷 旣明矣又持之以敬 旣剛矣又輔之以義 天資學力兩極 則血氣豈能輕爲之動 念慮處豈能再使之差 此所以謂之不遠復也 所以謂之有不善 未嘗不知 知之未嘗復行也 不遠是覺得早 不復是斬斷得猛烈 면재황씨가 말하길, “안자의 천부적 자질을 논하자면, 그저 밝고 굳셀 뿐이고, 안자의 공부에 힘씀을 논하자면, 그저 공경하고 의로울 뿐이었다. 오직 자질이 밝고 힘씀이 공경스러웠기 때문에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곳이면 바로 깨달았고, 오직 자질이 굳세고 힘씀이 의로웠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깨달으면 곧바로 一刀兩斷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미 밝으면서도 또한 敬으로 유지하고, 이미 굳세면서도 또한 義로 보완한다면, 천부적 자질과 배움에 힘씀이 둘 다 지극하게 되니, 혈기가 어찌 능히 그로 인해 가볍게 움직이고, 염려하는 부분이 어찌 능히 재차 그를 어긋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를 일컬어 ‘멀리 가지 않아서 돌아옴’이라고 말하는 까닭이고, 이를 일컬어 ‘불선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그것을 알게 되면 일찍이 다시 행한 적이 없다.’고 말한 까닭이다. 멀리가지 않음이란 깨닫는 것이 빠르다는 것이고, 회복이란 끊어내는 것이 맹렬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顔子之不遷怒與喜怒哀樂皆中節 如何 潛室陳氏曰 當其怒時 見理而不見怒 故怒所可怒而不遷於他 此克己陽剛工夫 峻潔之甚 其要固歸於中節 但以中節言 顔子無起發人意處 누군가 묻기를, “안자의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과 ‘희노애락이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잠실진씨가 말하길, “그가 노할 때를 당해서, 이치를 볼 뿐 노여움을 보지 않기 때문에, 노할만한 것에 성을 낼 뿐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克己와 陽剛의 공부로서 준엄하고 깨끗함이 심한 것이니, 그 요체는 본래 절도에 들어맞음에 귀결되는 것이다. 다만 절도에 들어맞음으로써 말하자면, 안자에게는 사람의 뜻을 일으켜세워 발현시키는 부분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顔子不遷不貳 乃終身學力之所就 故非一旦收其放心便能如此 亦非是學者克己之事 故集註以爲克己之功 必其平日遇怒則克不使之流蕩於外以過於物 遇過則克不使之伏藏於內以爲之根 怒不過於物則久 久自然不遷 過蹙其根則久 久自然不二 경원보씨가 말하길, “안자가 옮기지 않고 반복하지 않았던 것은 곧 종신토록 배움에 힘쓴 것이 나아간 바였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 잃어버린 마음을 거둔다고 해서 곧바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것이 배우는 사람의 극기하는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집주에서는 극기의 공효로 여겼는데, 반드시 그가 평소 노여움을 당하면 극복하여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가 외물에 지나치게 하지 않도록 하고, 잘못을 만나면 극복하여 그것이 자기 안에 숨어들어가 그 뿌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노여움이 외물에 지나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있고, 오래 가면 자연히 옮기지 않게 된다. 잘못의 뿌리를 밟아서 없애버리면 오래 갈 수 있고, 오래 가면 자연히 반복하지 않게 된다.”라고 하였다. 覺軒蔡氏曰 不遷怒 朱子謂怒於甲者不移於乙 程子謂在物不在己 不貳過 朱子謂 過於前者不復於後 程子謂 只是微有差失 便能知之 才知之便更不萌作 若不同矣 然程子是就怒初發念初萌而直言之也 朱子是就怒已發念已萌而橫言之也 其理則一 必兼之方盡其義 각헌채씨가 말하길,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주자는 갑에게 노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정자는 외물에 있지 나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였으며,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주자는 이전에 잘못한 것은 이후에 반복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정자는 그저 미세하게라도 어긋남과 잘못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이를 알 수 있고,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곧바로 다시는 싹트지 않게 한다고 말하였으니, 서로 같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정자는 노여움이 처음 발동하고 생각이 처음 싹 틀 적에 나아가 직접 말한 것이고, 주자는 노여움이 이미 발동하고 생각이 이미 싹이 튼 이후에 나아가 가로질러 말한 것이지만, 그 이치는 하나이니, 반드시 둘 다 겸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不遷怒 魯濟許氏曰 是聖人境界之事也 如何便到得 且自忿思難爲始 누군가 不遷怒에 대하여 물었다. 노제허씨가 말하길, “이것은 성인의 경지에 있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만 이를 수 있는가? 또한 분할 적에는 장차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함을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