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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를 짚고 날아올랐다. 한 순간 몸이 깃털처럼 느껴졌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단단한 두 다리가 매트 위에 정확하게 꽂혔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만세를 불렀다. 환희로 울부짖는 코칭스태프의 얼굴이 보였다. 달려 내려가 태극기를 몸에 휘감았다. 굳이 점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어린 시절 철봉에 매달려 파란 하늘을 바라보던 달동네 소년은 그렇게 오랜 꿈을 이루고 금빛 날개를 달았다.
양학선(한체대). 만 스무 살의 이 청년은 2012년 8월 6일(한국시간) 런던 노스 그리니치 아레나에서 열린 런던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도마 결선에서 1위에 올라 한국 체조 역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체조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시작한 1960년 로마 대회 이후 52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2012런던 올림픽 체조 도마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해 금메달을 목에 건 양학선
<출처: 연합뉴스>
양학선은 광주 광천초등학교 2학년 때 형을 따라 체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체조 기술을 빨리 배우긴 했던 것 같다. 중학교 올라갈 때 쓰카하라 더블(양 손으로 뜀틀을 짚고 공중에서 옆으로 돌아 몸을 펴고 두 바퀴 비틀어 착지)을 시도해봤는데 곧바로 되더라”고 회상했다. 대한체조협회 김대원 전무이사에 따르면 “당시 쓰카하라 더블은 세계 최고 선수들이 쓰던 기술”이라고 한다. 김 전무이사는 “양학선이 어린 나이에 그 기술을 시도했다면, ‘도마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결국 양학선은 광주체중에서 오상봉 현 광주체고 감독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도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량도 본격적으로 끌어 올렸다. 오 감독은 “스피드가 좋고 턴이 돋보였다. 공중에서 비트는 동작 역시 일품이었다. 도마에 필요한 조건을 고루 갖춘 선수였다”고 설명했다.
출발선에서 25m를 달려가 스프링보드(구름판)를 밟고 높이 135cm·너비 95cm·길이 105cm인 도마(뜀틀)를 양 손으로 짚어 공중회전을 한 뒤 매트에 착지하는 종목이다.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얼마나 공중동작이 화려한지, 얼마나 정확하게 착지했는지가 채점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대한체조협회에 등록된 양학선의 키는 159cm. 그는 남들보다 작은 신장을 점프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이 뛰고 구르고 날아올라야 했다. 훈련의 성과는 급격하게 나타났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7년 전국종별대회에서 3관왕에 올라 관심을 끌어 모았고, 광주체고에 입학한 2008년 전국체전에서 개인종합·단체전·도마 3관왕에 올랐다. 고교 2학년 때는 도마로 세계를 호령했던 여홍철 경희대 교수가 만든 ‘여2(뜀틀을 짚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후 정점에서 내려오면서 다시 두 바퀴 반을 비틀어 착지하는 고난도 기술)’를 80% 가량 소화했을 정도다. 2010년 아시아주니어선수권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도마와 링 1위를 석권한 그는 그해 7월 첫 성인 국제 대회인 재팬컵 국제초청대회에서 도마 출전 선수 40명 중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국제무대에서도 충분히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그렇다고 양학선의 체조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운동에 전념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된 훈련과 가난이 싫어 방황도 많이 했다. 유년 시절을 광주의 달동네 단칸방에서 보낸 그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무작정 집을 나갔다. 힘든 운동을 안 해도 되는 다른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그냥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 발로 집에 들어왔다. 의외의 반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학선은 “어머니께서 혼을 내시기는커녕 ‘그렇게 힘들었느냐’며 오히려 저를 다독여주셨다. 그때 주름이 더 많이 생기신 것 같아 죄송하다”고 털어놨다. 펑펑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얼굴은 아들의 가슴에 새로운 의지를 심었다. “나라고 운동하면서 왜 힘든 때가 없었겠나.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우시던 어머니 모습이 생각나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양학선 선수의 부모인 양관권, 기숙향 부부가 그동안 양 선수가 딴 금메달을 들고 있는 모습 <출처: 연합뉴스>
그 후 가난은 그의 장벽이 되지 못했다. 미장일을 하던 아버지 양관권 씨는 학교 기숙사 공사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아들은 체육관으로 향하다 멀리서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면 반갑게 달려가 인사를 건넸다. 양학선은 “한 번도 가난과 부모님이 창피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왜 그걸 부끄러워해야 하나. 부모님이 얼마나 열심히 사셨는데. 가난해도 운동이든 공부든 열심히만 하면 그 대가는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부모님은 제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물려주신 분들이다”라는 게 이 젊은이의 인생철학이다. 실제로 양학선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거짓말 하지 마라.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살면 안 된다’고 반복해서 가르쳤다. 아들은 “그래서 항상 정직하게 운동해왔다. 앞으로도 그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했다.
아버지 양 씨는 2년 전 어깨를 다쳐 더 이상 고된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어머니 기숙향 씨와 함께 전북 고창으로 귀농했다. 검정색 차광막을 덮은 비닐하우스 한 쪽, 그 안에 자그맣게 마련된 단칸방. 양학선의 부모는 그 곳에서 가축을 키우고 논밭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아들은 태릉선수촌에서 받는 하루 훈련비 4만원을 꼬박꼬박 모아 매월 부모에게 80만원 가량의 용돈을 보냈다. 올림픽 금메달을 꼭 따야만 하는 이유로 “꼭 부모님께 새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희망을 꼽을 정도로 효자가 됐다.
양학선이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이름 석 자를 알린 것은 2010년 10월. 생애 처음 참가한 세계선수권에서 도마 4위에 올랐다. 그리고 한 달 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도마 1·2차시기 모두 16.400점을 받아 정상에 올랐다. 대한체조협회가 선정하는 2010년 최우수 체조선수상도 받았다. 국제 심판들 역시 화려한 양학선의 연기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학선은 만족하지 않았다. 이미 2년 후의 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는 ‘확실하게’ 1위를 보장받기 위해 신기술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난도 7.0의 ‘여2’보다 반 바퀴를 더 돌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양학선(양 손으로 도마를 짚은 뒤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고 착지하는 기술·난도 7.4)’이다.
양학선은 이 기술을 앞세워 2011년 세계선수권 도마에서 당당하게 우승했다. 그리고 지난 2월 국제체조연맹(FIG) 채점규칙에 ‘양학선’이라는 이름의 신기술이 공식 등재되는 영광을 누렸다. 현존하는 도마 기술 중 최고 난이도. 게다가 이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는 지구상에 양학선 한 명뿐이다. 당연히 그만큼 완벽하게 해내기가 힘들다. 송주호 체육과학연구원(KISS) 체조담당 박사는 “여2는 도마를 보면서 착지해 낙하지점을 감지할 수 있지만, 양학선은 반대 방향을 보고 내리기 때문에 착지하기가 더 어렵다”고 설명했다.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 것은 당연한 일. 양학선은 5만 번 이상 신기술을 시도했고, 올림픽을 앞두고서는 성공률을 70%까지 높였다. 점점 ‘착지 때 엉덩방아만 찧지 않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2012런던올림픽 체조 경기 중 도마 연기 2차 시기를 성공하고 있는 양학선
<출처: 연합뉴스>
마침내 기다리던 런던 올림픽이 시작됐다. 양학선은 종목별 개인전 예선을 겸한 단체전에서 일부러 신기술을 뛰지 않고 감춰뒀다. 혹시라도 실패했을 때 본 경기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결선에서 화려하게 선보여 심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겠다는 작전의 일부이기도 했다. 일단 난도 7.2점짜리 기술을 선보인 러시아의 데니스 아블랴진(16.366점)에게 0.033점 뒤진 2위로 결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6일 펼쳐진 결선은 양학선을 위한 무대였다.
양학선의 순서는 결선 진출자들 중 가장 마지막인 8번. 만약 앞서 경기한 7명의 점수가 그리 높지 않다면 굳이 실수에 대한 위험 부담이 큰 ‘양학선’을 시도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코칭스태프도 다른 선수들의 경기 결과를 지켜보며 전략을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1위로 올라온 아블랴진은 예선에 이어 결선에도 또다시 완벽한 연기로 1·2차시기 평균 16.399점을 얻어냈다. ‘양학선’을 무대에 올려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1차시기. 양학선은 자신의 이름을 건 회심의 기술을 자신 있게 시도했다. 화려한 공중 동작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착지 시 두 발자국을 움직인 게 옥에 티였지만, 워낙 고난도 기술인 터라 실수 없이 연기한 다른 선수들보다 더 높은 16.466점을 받았다. 무대체질로 유명한 양학선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나중에 “아블랴진이 연기를 펼칠 때, ‘제발 잘 해라. 네가 잘 해야 내가 가진 것을 다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해 다시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2차시기는 남자 도마 결선 경기의 백미였다. 난도 7.0의 ‘쓰카하라 트리플(양 손으로 뜀틀을 짚고 공중에서 옆으로 돌아 몸을 펴고 세 번 비틀어 착지)’을 시도했고, 도약부터 착지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양학선이 매트 위에 못을 박듯 단단하게 착지하자 이미 다른 나라 선수들이 금메달에 대한 축하의 박수를 보냈을 정도다. 점수는 16.600점. 양태영 체조대표팀 코치는 “양학선이 지금까지 실전에서 단 한 번도 해낸 적이 없는 완벽한 연기”이라고 칭찬했다.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올림픽 3회 연속 국제심판을 역임한 김대원 전무이사 역시 “보통 쓰카하라 트리플을 구사하는 선수들은 0.7∼0.9점 정도가 감점된다. 하지만 이날 양학선은 약 0.3점 정도만 감점 요인이 있었다. 체조 역사상 가장 완벽한 쓰카하라 트리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감격했다.
정작 양학선은 담담했다.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얻었기 때문일 터다. 그는 “신기술은 올림픽 이전에 호주 전지훈련을 가서도 제대로 한번 써본 적이 없었다. ‘두 발이든 한 발이든 착지에서 실수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나름 잘된 것 같다”고 자평했고, 2차시기의 환상적인 연기에 대해서는 “쓰카하라 트리플을 대회에서 사용한 게 세 번 정도다. 경기 때는 완벽한 착지가 잘 안 나오는 기술인데 이번에는 운 좋게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양학선의 도마 금메달은 명실상부한 한국 체조의 성과이다.<출처: 연합뉴스>
양학선의 도마 금메달은 명실상부한 한국 체조의 성과이기도 했다. 한국은 오랜 기간 도마를 주력 종목으로 삼아 선수를 육성해왔다. 여러 기술을 한꺼번에 선보여야 하는 다른 종목들보다 한 가지 기술로 승부를 걸 수 있는 도마가 한국이 힘을 모을 수 있는 종목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박종훈이 한국 체조 사상 첫 메달(동메달)을 따냈고,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도 2년 연속 세계선수권자였던 유옥렬이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 난이도 기술인 ‘여1’과 ‘여2’ 기술로 첫 금메달을 노린 여홍철이 착지에서의 결정적인 실수 때문에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금메달의 한을 양학선이 푼 것이다.
대한체조협회는 이를 위해 광저우아시안게임 이후 2년간 ‘양학선 금메달 프로젝트’에 심혈을 쏟았다. 김대원 전무이사는 “협회가 코칭스태프와 동료선수들도 모르게 양학선의 건강관리까지 책임졌다. 보양식과 체질에 맞는 한약 등을 주기적으로 제공해 양학선이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조했다”고 고백했다. 물론 대회 전까지는 다른 선수와의 형평성 문제를 고려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협회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2명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감안한 지원이었으니 양학선 스스로도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체조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양학선은 천부적으로 도마에 적합한 조건과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격부터 그렇다. 체육과학연구원에 따르면, 양학선은 평소 집중력이 뛰어 나고 경기장에서 굉장히 공격적이다. 집중력이 강한 선수는 대체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향이 있다. 또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편이다. 지도자들이 영상을 보여준 뒤 느낌을 말해 보라고 주문하면, 양학선은 정확한 의사 표현으로 교감을 시도한다. 자신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지도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고쳐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다.
몸도 물론 타고났다. 양학선의 경기 장면을 역학적으로 분석해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던 송주호 체육과학연구원 박사는 “양학선은 신체적으로는 회전축에 질량이 모여 있는 장점이 있어 ‘양학선’ 기술 등 고난도 회전을 구사할 때 유리하다. 회전관성(관성모멘트·물체가 자신의 회전운동을 유지하려는 정도)을 감각적으로 잘 이용할 줄 안다”고 설명했다. 도움닫기 후 도마를 손으로 짚은 뒤 공중으로 도약할 때는 회전관성을 작게 해 회전속도를 늘리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정점에서 떨어질 때는 회전관성을 크게 해 회전속도를 줄여야 안정적인 착지가 가능하다. 이때의 관건은 팔의 움직임. 팔을 몸에 붙이면 회전관성이 작아지고, 팔을 펴면 회전관성이 커진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트리플악셀 점프를 할 때 도약 시점에서 팔을 오므리고 착지 시점에서 팔을 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송 박사는 “양학선은 몸을 쓰는 방법이 뛰어나다. 착지를 앞두고 회전속도를 줄이기 위해 팔을 펴는 타이밍이 뛰어나다”고 분석했다.
정상의 도마 선수였던 여홍철 경희대 교수의 현역시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송 박사는 “여홍철은 타고난 체형이다. 양학선보다 하체가 튼튼하고 스피드도 좋다. 그러나 양학선은 파워가 뛰어나고 담력이나 ‘파이터 기질’에서 앞선다. 국제대회에서 통할 수 있는 조건들은 더 낫다”고 분석했다. 실수 하나에 모든 게 좌우되고 만회가 힘든 체조에서 양학선의 타고난 기질과 남다른 집중력은 가장 큰 무기다.
꿈에 그리던 금메달은 양학선과 그의 가족에게 금전적인 보상까지 안겨줬다. 대한체조협회의 금메달 포상금 1억 원이 전부는 아니다. LG 그룹 구본무 회장은 비닐하우스에 사는 부모를 극진히 모신 양학선의 효심에 감동 받아 이전에 별다른 인연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5억 원을 쾌척하기로 했다. 또 SM그룹 (주)우방은 유오현 회장의 뜻에 따라 “그룹이 보유한 아파트 한 채를 양학선 가족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광주 남구 월산동에 분양 중인 우방 아이유쉘 35평형으로, 내년 말 완공 예정이다. 또 농심은 양학선에게 ‘너구리’ 라면을 평생 무료로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양학선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돌아오면 너 좋아하는 너구리 라면 끓여줄게”라는 메시지를 전한 데서 비롯됐다. 양학선은 “라면이 이렇게 이슈가 돼서 놀랐다. 매일 밥만 먹을 수는 없으니 라면 먹고도 잘 하면 된다”며 멋쩍게 웃으면서 “실감이 안 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감사하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도와주시는 마음이 다 감사한 일”이라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이런 ‘도움들’ 역시 양학선 스스로 이끌어낸 성과일 뿐이다. 연일 험악한 사건들이 넘쳐나는 각박한 현실에서, 세상은 양학선에게 ‘체조 기술’이 아닌 ‘효심’이라는 가치의 부활을 본 것이다. “아들이 금메달로 얻은 모든 것은 다 아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대로 살면 된다. 아들이 들뜨지 말고 지금처럼 열심히 운동해주길 바랄 뿐”이라는 양학선 부모의 소감 역시 마음을 울리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만 스무 살인 청년 양학선에게 런던 올림픽은 꿈의 ‘완성’이 아닌 ‘시작’이다.
<출처: 연합뉴스>
양학선은 올림픽 2연패에 대한 희망도 숨기지 않았다. 이제 만 스무 살인 청년에게 런던 올림픽은 꿈의 ‘완성’이 아닌 ‘시작’이다. ‘양학선’이라는 기술에 만족해 안주하지도 않는다. 4년 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위해 휴식 후 다시 신기술 연마에 돌입할 계획이다. 양학선은 “체조는 4년에 한 번 정도 룰이 바뀐다. 한국으로 돌아가 잠시 쉬다가 또 신기술을 개발해 볼까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술이 탄생한다면 아마도 이름은 ‘양학선 2’가 될 것이다. 이미 구상도 시작했다. “신기술에서 반 바퀴 더 돌아볼까 생각 중이다. 지금 내 기술은 옆으로 도는데, 앞으로 두 바퀴 혹은 뒤로 두 바퀴 도는 새로운 기술도 고려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국을 뜨겁게 달군 ‘양학선 신드롬’. 비인기 종목 선수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양학선에게는 낯선 현상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 어떤 장애물에도 흔들리지 않고 운동에 전념했듯,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강조했다.
“살면서 아쉬웠던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절망한 적은 없었거든요. 어떤 분들이 ‘이렇게 큰 관심이 앞으로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시는데,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제가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부모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예의 바르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