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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타락과 벌, 은혜
(찬송 210장)
2024-1-3, 수
맥락과 의미
오늘 말씀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신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너무나 유익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명한”(11,17절), “하나님이 명하여 이르시되”(2:16), “명”이라는 이 말에서 계명이라는 말이 나왔고 십계명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또 사람들끼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명령(선악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테두리 안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권한까지 가져 가려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권한까지 가져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볼 수 있고, 또한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그 악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유혹자 사단 앞에서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일까요? 죄로 인한 타락으로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히 실패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신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이어집니다.
1. 죄와 타락(1-13절)
2. 벌의 선언(14-19절)
3. 벌과 은혜: 에덴으로부터의 추방(20-24절)
1. 죄와 타락(1-13절)
1)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은 첫 사람(1-6절)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 중 뱀이 가장 간교하였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뱀 안에 사단이 들어가서 뱀이 사단에 굴복해서 사단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에서는 옛 뱀을 사단이라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여자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의문)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더냐?” 하와는 대답합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열매는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신중히 대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하와는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 잘못 말합니다. 원래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도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합니다. 없는 말을 덧붙여가면서 하나님을 가혹한 하나님으로 잘못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고 죽는다(반드시 죽는다)” 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 하면서 하나님의 벌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말씀 자체를 흐리멍텅하게 기억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사단은 대답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합니다.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5절). 그러나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때, 여자와 사람은 사단처럼 간교하고 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 열매에 어떤 독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탐욕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자기가 택한 기준으로 살기를 결정했습니다. 아담도 하와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줄친 두 곳은 다 탐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탐스럽기도”는 나중 10계명에서 “탐내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에 쓰인 단어입니다.
2) 언약의 대표인 아담의 실패와 우리의 실패(7-13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벗었다”와 “간교하다”는 원문에서 발음이 비슷합니다.
간교하게 하나님처럼 되려는 생각은 그들이 부끄럽게 벗겨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벗겨져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이후 지혜롭다 하지만 여자들이 몸을 더 노출하면서 벌거벗고 있습니다. 남자들도 부끄러운 일을 합니다.
창2:17에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그 날 당장 죽는 것이라기보다는 먹는 날에, 사람은 죽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하여 죽음이 왔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관계성이 왜곡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갔습니다(3:7-12).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8절). 스스로 수치심으로 느끼고 그것을 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변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또 여자의 책임인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책임 전가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즉, 하나님이 돕는 자로 준 이 아내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기에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겨난 괴리감은 아담과 하와 두 부부가 느꼈던 괴리감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것은 신체의 눈이 밝았다기보다는 부정적인 차원에서 정신적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여자는 사단(뱀)의 탓으로 돌립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고, 또 하나님께 돌리고, 사단에게 돌립니다.
2. 벌의 선언(14-19절)
1) 뱀에게 내려진 벌과 우리를 위한 구원의 선언 (14-15절)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리십니다.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것이다”(14절). 이것은 뱀이 이전에는 서서 다니다가 지금부터 배로 기어 다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뱀의 기는 동작을 통해 사단이 받는 저주를 말합니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는 사단의 지위가 땅의 모든 짐승들보다 더 낮아졌음을 의미합니다. 뱀은 다른 짐승들보다 더 간교하였고 최소한 지적으로 우월하였던 존재였으나(1절), 낮아집니다. 또 인간보다 높은 위치를 원했던 사단도 이제는 짐승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두 번째 벌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절). 1-7절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보다는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와는 사단을 미워하게 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 싸울 대상은 “뱀의 후손”입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15절에 의하면, 이들 간의 싸움은 지속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하나되는 일을 막으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선언인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를 말합니다. 또 메시야를 믿고 새롭게 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사단에 의해 여자의 후손(메시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죽음의 시련을 겪습니다(십자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뱀의 머리를 부숩니다.
“(그리스도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오늘날 우리는 바로 여인의 후손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귀를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사단의 머리를 발로 짓밟는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합니다. 아담 안에서 망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다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벌과 그 의미 (16-19절)
아내(여자)는 타락의 결과로 아이를 낳는 고통을 벌로 받았습니다. 또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자도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고통을 당합니다. 남편도 자기와 권력 다툼을 하려는 아내로부터 고통을 받습니다.
남편은 일을 할 때 고통을 당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자도 가사일을 할 때 고통을 당합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기쁨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아무 고통없이 노동(아니, 기쁨으로 하는 “희동”)을 했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출산하고 자녀들을 키우는 고통이 클 때마다 우리 부모들은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남자들이 직장에서 일이 힘들 때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할 때 힘들 때마다 죄에 대한 벌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로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가정과 직장/학교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 벌과 은혜: 에덴으로부터의 추방(20-24절)
그러나 3장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쫓아내시는 것입니다(22-24절). 다시는 그들의 삶이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는 즉시로 죽음에 처해지지 않았지만(2:17), 에덴에서부터의 축출은 생명나무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의 육체가 만들어진 흙으로 돌아가는 일은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추방하는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1)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심.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을 입히시면서 사람의 부끄러움을 나타내시면서도 덮어주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옷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덮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 영광의 옷이 벗겨져 버렸습니다. 가죽은 “피부”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피부에서 동물의 피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진 것을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냄새나는 동물의 피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침실처럼 포근한 에덴 동산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곳으로 쫓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 순간에 크신 자비를 주십니다. 부끄러움 가운데서 동물 가죽으로 덮어주십니다.
동물 가죽 옷은 성막을 상징합니다. 성막은 네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제일 바깥은 양의 가죽, 물개의 가죽으로 덮습니다. 그 안쪽에 염소의 털, 제일 안쪽에는 여러 색깔의 실로 짠 천을 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죽으로 성막 안의 영광을 덮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을 가죽으로 덮으시면서 그의 안에 영광을 보존하시려 했습니다.
입힌다는 것은 나중에 제사장의 옷을 입히는 데 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후손에게 제사장 옷을 입히시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짐승을 완전히 태우는 속죄제사를 통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께 나오게 하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양으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이렇게 나중에, 성막을 통해,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백성들에게 영광을 비춰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린 양으로 오셔서 당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경을 통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회복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빼앗으시면서 희생제사를 소망하게 하심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빼앗으시면서 희생제사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전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아담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이 생명을 눈으로 보여 주시기 위해 생명나무라는 성례를 주셨습니다. 그 나무 안에 특별한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에게 풍성하게 주실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담의 죄와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를 통째 삼킨다 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 생명나무 자체가 자동적으로 생명을 주기나 하듯이 생각하지도, 미신적으로 생각하지도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빼앗으심으로 아담이 새로운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아담은 이제 생명나무를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짐승의 제사로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 그리스도를 향한 은혜를 바라보도록 생명나무를 끊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지만 먹고 살 수 있는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질 때, 우리 삶의 기준을 우리 자신이 정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우리로부터 뺏아갈 것입니다. 에덴으로부터 추방할 것입니다. 절망으로 던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면서, 바로 그 순간 에덴을 열어 주시고 있습니다. 에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룹 천사들이 지키는 불칼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룹천사들을 통과해서 에덴의 복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에, 성전과 성막에는 그룹 천사가 수놓아져 있고,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룹 천사를 조각한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는 에덴을, 성전을 통해 경험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약 성도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했습니다.
에덴으로 들어가는 길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칼을 통과하셔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에베소서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다시 에덴으로 나갑니다. 에덴은 성전과 성막으로 이어지고 교회로 이어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갑니다.
계시록 21:1-5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의 강이 흘러나와 생명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 생명 나무 열매를 먹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곳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은혜를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배 때 받은 은혜로 가정을 세울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이 복을 주십니다.
믿고 복종할 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교만과 탐욕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사람끼리 서로 멀어지고 미워합니다. 일할 때에도 고통이 있습니다. 자녀를 낳고 교육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 불행한 삶에 있던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가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성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계속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