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15장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 절제하며
복음과 헌금, 기도의 직분을 다하라
(찬송 31장)
2023-2-22, 수
맥락과 의미
14:1-15:13은 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이방인)가 약한 자(유대인)를 참된 사랑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14:1, 15:1). 여기 믿음이 강한 자라는 것은 깨달음이 풍성한 자를 의미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약한 자들은 주로 유대인입니다. 구약 율법에는 스스로 죽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고, 돼지 고기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음식 율법 같은 의식법을 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은 의식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더라도 경건에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대부분 우상에게 바쳤다가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것이 신앙 양심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절제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고기나 포도주를 먹어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배워 확신이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로마의 교회에 이방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15:1-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듯이, 믿음이 강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약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사랑으로 받아들여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14-33절은 바울 사도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로마를 언제 방문할지에 대한 계획을 말합니다.
1.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 위해 절제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1-6절)
2.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게 함(7-13절)
3. 바울의 사명: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치는 제사장(14-21절)
4.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 성도의 헌금과 기도로 섬기는 직분(22-33절)
1.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 위해 절제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1-6절)
1-2절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기중심성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약한 성도들 앞에서 고기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성장 단계에 맞게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고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기를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바꾸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지식과 믿음, 양심은 그대로 간직합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일상의 것을 즐기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세우기 위해서입니다(우리말 성경에 “덕을 세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그냥 ‘세운다’ 입니다.) 다른 성도를 위해 자유를 제한합니다. 이를 통해 믿음이 약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갑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일부로서 다른 지체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자유와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형제를 위해 자기를 절제하는 모범을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3절에서는 시편 89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주(당신)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비방하는 그 비방을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음식을 먹는 데 조금 절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4절에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한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인내하고 소망을 갖습니다. “인내”와 “소망”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도 나온 말씀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는 연단 부분이 빠졌습니다.
연단에 대해서는 앞서 14장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8)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 복이 있도다.”(14:22) 이렇게 볼 때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절제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는 과정입니다. 인내하고 연단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소망을 이룹니다. 이 가운데 성령의 위로를 주십니다.
5절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본받으며 우리도 생활의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6절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우리 삶의 목적은 다른 성도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나만 믿음이 성장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자유를 맘껏 누리다가 다른 성도가 믿음에서 성장하는 데 방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성도의 믿음이 자랄 때까지는 내가 일상의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조금 포기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럴 때까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대로 받아들입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한 믿음 안에서 한 마음이 됩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믿음을 온전히 고백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형제를 위한 절제는 사랑의 행동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게 함(7-13절)
7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이 말은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의 반복입니다. 7-12절은 14장-15:13의 결론입니다.
8절,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추종자”(식탁에서 섬기는 종)가 되셨습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들을 섬기는 직분자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신실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그 목적은, 9절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유대인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다른 집단을 하나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목적을 기억하고 믿음이 강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약한 유대인을 형제 자매로 기쁘게 수용하여,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그 “긍휼하심”으로 일하셨습니다(8,9절). 이 두 단어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사랑에 신실하신 것을 말합니다. “긍휼(인자)과 진실(성실)”이 짝을 이뤄 나옵니다(시편 89:1,2,24,33,49).
특히 시편 89:33,45은 언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축복을 신약 교회를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하십니다. 이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도 구원하여 그 둘이 하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서(신명기), 선지서(사무엘하, 이사야), 시편 등 구약 성경의 세 부분에서 하신 약속을 인용합니다. 9절은 사무엘하 22:50(시편 18:49), 10절은 신명기 32:43, 11절은 시편117편, 12절은 이사야 11:10을 인용합니다.
11절-시편 117편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 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인자와 진실함으로 그 언약에 신실한 것을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함께 찬양하도록 초청합니다.
12절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이방인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예수님)가 있으리니 열방(이방인들)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이사야 11:10) 이방인들과 유대인이 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한 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안에서 하나되고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기를 사도는 기도합니다. 그렇게 축복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가 기쁨과 평강을 한 믿음 안에서 넘치게 받도록 사랑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사명: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치는 제사장(14-21절)
이제 14절 이후부터 33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역을 설명합니다. 14-21절은 지금까지의 사역에 대해 말합니다. 22-33절은 앞으로의 사역 계획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은 1:8-17에서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14-15절에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복음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 복음의 한 부분(“대강”)을 다시 썼다고 합니다.
16절에서 사도 바울의 사명을 말합니다.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안에 사도적 직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유대인을 섬기는 종이 되었는데,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은 성전에서 섬기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약의 직분자인 사도와 목사는 복음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마음을 복음의 칼로 쪼갭니다(히 4:12). 죄를 회개하게 하고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해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복음 전파자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께서 피 공로로 씻어주시고 성령님이 거룩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사도나 목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동역자입니다. 직분자를 통해 계속 복음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터 위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기존 교회가 있는 곳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미 교회가 설립된 지역에서는 그 교회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또 편지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부지런히 했습니다(골로새서, 로마서).
오늘도 우리 교회가 자랄 때 다른 교회의 성도를 뺏어온다든지 하는 식으로 중복적으로 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우리 교회와 또 목사에게 주신 직분의 테두리 안에서 온전히 일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4.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 성도의 헌금과 기도로 섬기는 직분(22-33절)
1) 바울의 선교 여행 계획과 로마 방문(22-24절)
이제 22절부터 끝까지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과 로마 방문계획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주후 57년경). 그는 앞으로 고린도에서 로마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가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지방(빌립교 교회 등)과 아가야 지방(고린도 교회)의 교회들이 준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끝내고 로마 교회들에게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을 확신합니다(29절). 복음 말씀이 가장 좋은 복입니다. 그가 로마 교인들과 사귐으로 기쁨을 충만하게 얻은 다음, 그들이 자신을 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24절). 그들의 재정 후원으로 스페인 선교를 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2) 성도의 직분: 헌금으로 섬기는 직분(25-29절)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서로의 필요를 돕기 위해 헌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6절의 “연보”는 물질을 나눔(코이노니아)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헌금을 전달하는 것(25절)과 성도들이 헌금하는 것(27절)은 다 같이 “섬기는 일”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헌금으로 섬기는 일은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16절)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일한 직분입니다.
섬기는 일, 곧 직분은 구약 성전에서 제사장이 섬기는 것에 대해 쓴 말입니다. 구약 성전에서 직분자로서 섬기는 일이, 복음 전파를 통해 이제는 신약 성도들이 헌금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섬기거나 목사의 생활비를 섬기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직분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은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경제적으로 섬기는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을 공짜로 받았기 때문에 빚진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26절).
오늘 우리 성도들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직분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집사나 장로, 그리고 모든 성도가 교회를 섬깁니다. 또 생활 가운데서 땀 흘려 일해서 경제 활동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큰 직분입니다. 거기서 얻은 것으로 헌금하는 것이 가정과 교회를 위한 큰 직분입니다.
3) 기도로 섬기는 직분(30-33절)
성도가 헌금으로 섬기는 것뿐 아니라 기도로 섬기는 직분도 감당하도록 권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30절).
기도의 정의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비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섬기는 직분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죄 용서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가 기도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기도를 도우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31절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식탁에서 섬기는 종의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불신자들의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하며,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바울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성도는 직분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하여서 말씀이 충분히 주어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성령님 안에서 목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교회를 세웁시다. 또한 성도들끼리 재물을 나누고 헌금을 통해 물질을 나누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믿고 복종할 일
믿음이 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받읍시다. 다 함께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인내합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어 우리를 받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 것을 본받읍시다.
목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복음을 통해 성도를 세워갑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믿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생활을 절제하면서 성도들의 구원을 이룹니다. 또한 헌금과 기도를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면서 서로를 돕습니다.
복음을 맡은 목사들이 충만히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이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물질적 섬김을 통하여, 직분을 다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각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오늘도 기도하고 땀 흘려 일하고, 또 말씀을 잘 받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 또한 성도로서 교회와 예배를 섬기는 직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까? 헌금과 기도로 교회를 섬기는 직분을 더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축복과 복음으로 온 땅을 충만하게 함(13,19,24,29절)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축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케 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첫 사람의 범죄로 이 복된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이 땅을 충만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이 생육하고 새로운 사람 제자들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행 6:7에서 “말씀이 흥왕하고(생육하고)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니라(번성하리라).” 복음 말씀과 함께 성도와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합니다.
로마서 15장은 ”충만”이라는 단어를 네 번 말합니다(13,19,24,29절). 교회가 사도적 복음을 전하여 온 세상에서 자라는 것을 복음이 충만하고 땅이 충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3절, 사도는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믿음으로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19절, 사도는 “일루리곤(마케도니야 북쪽,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지역)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충만)하게 전하였습니다.” 즉 땅이 복음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24절,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과 만나서 교제하며 “기쁨을 가질”, 곧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29절, 사도는 로마를 방문할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그 복이 이제 사도의 복음 전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1:1,12에서 사도가 로마를 방문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복음을 전하며, 서로의 믿음에서 피차 위로를 받을 것을 희망했습니다. 24,29절은 이것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땅을 복음으로 충만케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는 계속 복음을 듣고 복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말씀 사역자도 복음을 전함으로써 충만하게 됩니다. 그 복음 안에서 교회와 성도는 믿음, 기쁨, 평화가 충만하게 됩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불신자의 인구가 증가하여 땅을 충만하게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참된 충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충만은 교회와 성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복음 말씀이 충만할 때, 그리스도와(엡 1:23), 성부 하나님과(엡 3:19), 성령님으로(엡 5:18) 충만합니다.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고 들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와 성도가 온 세상에 충만하도록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충만이 세상으로 흘러가고, 그 교회와 복음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자랍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온 땅을 충만케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립시다(엡 3:20). 오늘도 이 참된 충만을 이루는 직분자로서 예배하고, 가정을 세우고, 사회 속에서 일합시다.
<참고> 복음 전파로 영혼, 물질을 하나님께 바침은 다 동등한 제사장의 일
우리는 목사의 일은 보통 성도의 일보다 하나님 앞에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하는 일은 예배나 기도보다 천박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아니다!”고 15장에서 성령님이 말하십니다.
16절: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레이두-에르고스)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히에로-에르고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유-프로스-덱토스) 하려 하심이라”.
27절: “저희(이방인)는 그들(유대인)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유대인)의 영적인 것(복음)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물질)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레이트-에르고)이 마땅하니라.”
31절: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디아코니아)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유-프로스-덱토스)”해 주시기를 기도 부탁합니다.
1) 위를 자세히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 성도들이 물질로 구제하는 일, 사도 바울이 물질을 전달하는 일, 모두에 대해 일꾼=섬김(16,27.31절)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2) 하나님이 성도의 삶 전체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과, 성도들이 물질의 후원을 기쁘게 받는 것에 대해 같은 말 “받을 만하게”를 사용합니다(16,31절).
목사의 일과 목사 아닌 성도의 일은 동등한 가치를 가집니다. 성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보통의 삶, 둘 다 똑같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삶입니다. 성도의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 앞에서 기쁘게 받을 만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믿음과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예배는 교회당 벽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과 일상의 삶으로 퍼져나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