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婦李氏旌閭閣記(曺瑛妻月城李氏) - 李慶玉
대저 난에 임하여 어버이를 지키고,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서슬이 번쩍이는 칼을 맞는 것은 천부적으로 나오는 효성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옛날에 당(唐)나라 정의종(鄭義宗)의 아내 노씨(盧氏)는 그 시어머니를 강도의 난에서 온전하게 하여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 께서 선행편<(善行編)>에 밝게 드러내셔서 지금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의 귀와 눈을 비추고 있다. 그 밖에는 매우 드물게 전한다.
나는 갑산리(甲山里)의 고(故) 효부 월성이씨(月城李氏)의 행실에서 거듭 그 행실 때문에 무릎을 손으로 치면서 몹시 칭찬하였다. 이씨는 즉 익재선생(益齋先生, 李齊賢)의 후손이자 현감(縣監) 세헌(世憲)의 딸이다. 하성『夏城: 창녕(昌寧의 옛지명)』 조공(曺公) 영(瑛)에게 시집 갔는데 조공은 충정공(忠貞公: 曺尙治) 정재선생(靜齋先生)의 현손(玄孫: 高孫)이다.
임진왜란에 적병들이 밤을 틈타서 불을 밝혀서 마을로 갑자기 쳐들어와서 칼을 시아버지에게 들이대려 하자 이씨는 몸으로 감싸면서 빠르게 "원컨데 나를 죽이고 연로하신 우리 시아버지는 해치지 마라"라고 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한탄하며, 의롭게 여겨서 둘 다 놓아주었다.
이어서 들에다 ‘효부이씨지려(孝婦李氏旌閭閣)’라는 여섯 글자를 새기고 가면서 "효부의 마을에는 삼가서 침범하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왜병들은 다시는 갑산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난이 끝난 후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가 내려졌다. 아!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저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삼강(三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타고난 천성(天性)이 있는데, 누가 임금과 부모님이 중요하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미쳐 어쩔 수 없는 위급하고 삶과 죽음이 나누어지는 때에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의 분별을 알 수 있는 자는 비록 평일에 책을 읽고, 의리를 말하던 자들도 반듯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 하기 어렵다.
이씨와 같은 사람은 적병의 칼날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갔으니 시아버지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고, 의로움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익(利益)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한몸이 죽어서 시아버지의 생존과 바꾸고자 하였다면 천부적으로 나온 지극한 정성(精誠)이 아니라면 가능하였겠는가?
그 행적이 노씨( 盧氏)와 서로 엇비슷하지만 어리석고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의 한 조각 비석은 또한 노씨가 얻지 못한 것이다. 불녕(不佞: 나)은 동향의 후배로서 동향(同鄕)의 이씨의 의로움을 칭송함이 정확하다. 효부 이씨의 7세손 경옥(慶玉)이 그 족질(族姪) 현룡(見龍)으로 하여금 불녕(不佞: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여 왔다.
"우리 선조비(先祖妣: 돌아가신 할머니) 표석(表石)이 길 옆에 홀로 외롭게 우뚝하게 서 있는데 자손들이 멀리에서 쇠락하여서 지금까지 한(一) 칸의 집도 짓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나의 나이가 이미 70세가 되었으니 아마도 하루 아침에 갑작스레 죽게 된다면 넓고 멀어서 끝이 없는 고통을 품게 될 것입니다.
자질배(子姪輩: 아들과 조카들의 무리) 들로 하여금 일을 처리하게 하였는데, 비바람을 막기 위한 계획 때문입니다. 지금 다행히 그 일이 끝났습니다. 이로써 공께 글을 구하니 어찌 한마디 말로써 그것을 기록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나는 사양 할 수 없었다. 적이 생각하건데 이씨의 효성은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서 고을사람들이 전송하는 바가 되었으니 나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의 췌언(贅言: 하지 않아도 좋은 군더더기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손들의 선조를 위한 정성은 즉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으니 도리어 나는 이로 인하여 느끼는 것이 있다.
신하가 임금에게 있어서, 며느리가 시아버지에 있어서 그 어리는 하나이다. 왜구들이 소란을 피우던 때를 당하여 무릇 신하와 자녀가 된 사람들은 임금과 부모님의 곤란을 고려하지 않고, 몰래 달아나 숨어서 구차스럽게 살려고 계획한 사람들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가령 이런 무리들로 하여금 이씨의 풍도를 듣게 한다면 아마도 얼굴에 식은 땀이 나서 땀이 뺨에 흘러내리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흥미 진진하게 이씨의 효성을 말하는 까닭이니, 장차 이로써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된 사람이 임금과 부모님을 뒤로 하는 자들을 책망(責望)하는 것이니, 어찌 다만 남의 며느리가 된 사람의 본보기가 될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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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孝婦李氏旌閭閣記(曺瑛妻月城李氏)
夫臨難衛親。決一死冒白刃。非孝之出于天。不能也。在昔鄭義宗妻盧氏。全其姑於強盜之難。朱夫子表而著之于善行編中。至今照人耳目。其他罕傳焉。余於甲山里故孝婦月城李氏之行。重爲之擊節而歎賞。李氏卽益齋先生之後。縣監世憲之女。適夏城曺公瑛。曺公是忠貞公靜齋先生之玄孫也。龍蛇之難。賊兵乘夜明火。突入村中。劍刃將及于舅。李氏以身翼蔽疾呼曰願殺我。毋害我老舅。賊徒相顧咨嗟。義而兩釋之。仍刻石書孝婦李氏之閭六字而去。曰孝婦之里。愼勿犯也。自是倭兵不復入甲山里。亂靖後事聞旌其閭。吁何其烈也。夫人之所以爲人者。以其有三綱也。人皆有秉彝。孰不知君親之爲重也。然而倉卒急遽。死生判決之際。能知先後輕重之分者。雖平日讀書談義理者。難保其必然。若李氏當賊刃之向前。知有舅而不知有身。知有義而不知有利。欲以一身之死。易舅氏之生。非至誠之出于天。能之乎。其事與盧氏相伯仲。而蠢蠢蛇豕之徒一片石。又盧氏之所未得也。不佞以同鄕後人。誦李氏之義雅矣。李氏七世孫慶玉。使其族姪見龍。致辭于不佞曰。吾先祖妣表石兀然立路傍。以子孫之零替在遠。迄未覆一間屋。今吾年已七耋。恐一朝溘然。抱無涯之痛。使子姪輩經紀。爲庇風雨計。今幸工訖。是庸徵文於公。盍一言以識之。余辭不獲。竊惟李氏之孝。載在邑誌。爲鄕人所傳誦。不待愚言之贅。若其子孫爲先之誠。則有不可以不書者。抑愚因是有感焉。臣之於君。婦之於舅。其義一也。當海寇搶攘之日。凡爲臣子。不顧君父之難。竄伏爲苟活計者何限。如使此輩聞李氏之風。得無汗顔而泚顙哉。此吾所以娓娓李氏之孝。將以媿後世爲人臣後君父者。豈特爲人婦之則也哉。<끝>
출처 > 懼庵先生文集卷之六 /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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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기록한 비석을 보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이곳 경주(慶州)도 왜군의 말바굽을 피할 수 없었다.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영(曺瑛)
이라는 사람의 아내는 몸이 아픈 시아버지를 업고, 왜군을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해 결국 붙잡히고 말았고, 시아버지를 자신의 치마속에 숨기고는 왜군에게 자신을
죽이라며 끝까지 저항했다. 이를 본 왜군이 그녀의 효행에 감동하여 죽이지 않고, 살려보내줬다는 내용
이 비석에 전한다.
그때는 그때의 삶의 방식이 있고, 지금은 또 지금의 삶의 방식이 있지만 이름도 전해지지 않고, 그저 월성
이씨(月城李氏)라는 성만 전해지는 그녀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오래도록 전해지는 것은 자신의 행복과
안정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갑산리715
▲효부월성이씨정려각(孝婦李氏旌閭閣)
출처 >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