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병원에서 편지를 받은 것이 11월 경.
년말에 병원과 의과 대학에 사표를 냈다.
자기 싫어서 이민 간다고 하면 나쁜 소문 낼까 보아 집안 문제가 복잡하여
이민 가겠다고 말 해 두었다.
주위의 친구들이나 친척들은 '너 돌았냐? 남들은 그렇게 들어 가지 못해
야단을 치는 서울 의대 조교수 자리를 왜 마다 하고 그 나이에 이민을 가냐?
네가 조금 만 참으면 너도 윗자리로 올라 가면 네 마음 대로 할수 있지 않냐?'
하며 만류들 하느라 야단이 났다.
그러나 남자가 한번 뺀 칼을 도로 칼집에 넣을 순 없었다.
더구나 서울 의대 병원이라는 곳이 수직적 관계의 밑부분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 였었고 같은 교수 라는 수평적 관계에서 바라보는
그전의 은사나 선배들 중 상당수가 표면 과는 다르게 옹졸 하고 편협 하며
사기성도 있고 비겁 하며 도저히 존경의 마음이 우러 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래 내가 우리 집 사람에게 항상 말하고 있었다.
'거대한 똥통 속에 몸이 목 까지 잠겨있으면 아무리 내가 깨끗 해지고 싶어도
그냥 뼛속 까지 똥물이 들고 말 거야. 나는 더 더러워 지기전에 얼른
이 곳에서 나가 빨리 물로 씻어야 겠다.'
사실 밑엣 사람들에게 고임 받고 에헴 하고 지나다 보면 자기가 비웃던
그 똑같은 나쁜 물이 들어 버리는 것을 많이 보아 왔었다.
당장 사표를 내니 5월에 출국 예정이라 4개월 간은 먹고 살
자리가 필요 해졌다.
마침 신설동 에 개업 하고 계시던 선배 한분이 미국 갈때 까지 와 있으라는
고마운 말씀을 하셔서 정형외과인 그 양반 병원에서 마취를 하고 있게 되었다.
이 양반은 나만 보면 여태까지 수련 받고 대학원 하고 박사 학위 까지 받았는데
미국 가는 것은 국가적 낭비요 손실이라고 여러번 말씀 하시는 바람에
매번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드디어 5월 초에 출국 했다.
San Francisco 우리집 사람 사촌 오빠댁에 머무르며
혼자 세 병원에 인터뷰를 하러 떠났다.
St.Loius Barnes 에 전화 해보니 금년 자리는 다 찾고 일년 기다리면 내년에
뽑아 주겠단다. 그러나 일년을 그냥 기다릴순 없지 않은가.
Cincinnati General Hospital 에 전화 하니 아직 자리가 있으니
빨리 인터뷰 하러 오라고 한다.
이 튿날 비행기로 날라가 레지덴트 담당인 Dr. Robins를
맞나자고 했더니 지금 막 수술실에 들어 가니 복도에서 좀 보자고 한다.
복도 에서 맞나 인사 하고 몇마디 했더니,
'Oh, You can speak English.
Good. Why don't you start on July 1?'
너무 기뻐 감사하다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미국 오기전 1월에 경북 점촌에서 외과 개업 하고 있던
이 군집에 찾아 갔었다.
수도 통합 병원 근무시 맞나 친한 친구가 된 이군은
우리가 각기 다른 의과 대학을 나왔으나 의견과 배짱이
아주 잘맞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유명한 외과 의사의 딸과 결혼을 했었으나 아주 불행한 결혼 이었기에
나와 술 만 마시면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제대후 고향에서 개업 하고 재혼 하여 아이들 까지 두고 행복 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볼겸 나의 배수진을 칠겸 맞나러 간 것이다.
우리 집 사람과 아이들 둘 다 데리고 차를 운전 하여 내려 갔다.
가니 Appendicitis 환자를 하나 붙잡아 놓고 서울에서 유명한 의대 교수님이
마취하러 온다고 허풍을 떨어 놓고 있었다.
이 친구 그 입담은 정말 알아 주어야 된다.
수술 끝나고 근처 술집에 가서 한잔 마시며 내 본심을 밝혔다.
더 이상 국내에 있을수 없어 이민을 가는데 만일 내가 미국서
자리 못잡으면 3개월만 자리 찾아 보다 도로 들어 올 터인데
내 한몸 받아주고 같이 개업 할수 있겠니?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친구의 우정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리하여 온 미국인데 처음 인터뷰에서 레지덴트 자리를 얻었으니
한 시름 펴게 되었다. 다음날 Iowa University Hospital 에 면 접 하러 갔더니
올해는 자리가 없고 House Physician 으로 일년만 일하고 있으면
내년에 뽑아 주겠단다. 그래 그냥 고맙 다고 하고 나와 버렸다.
아이오와는 씬시내티에 비하면 더 시골 이었다.
지금 생각 해도 씬시내티에 둥지를 틀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St.Louis 큰 처남 댁으로 움직여 며칠 묵기로 하였다.
이 양반이 내가 취직 못할까 보아서 자기 소유의 아파트 한채를 비워 놓고
한 일이년 먹여 살리려고 생각 하고 계셨던 같다.
고마운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표현 할수가 없었다.
레지덴트 자리 구하였다니 깜짝 놀라며 요즘 미국에서 레지덴트 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하시며 반신 반의 하신다.
이러 구러 7월 1일 부터 레지덴트 수련에 들어 갔다.
일주일 사이에 아파트 구하고 필요한 살림 장만 하고 차 사고 하느라
정말 바삐 돌아 다녔다. 마누라와 아이들은 St.Louis 에 남겨두고
나 혼자 시시내티에 와서 한 일들이었다.
나중에 비행기로 가족을 데려와 새차끌고 마중 하러 나갔었다.
한국에서 대학 병원 조교수 하던 사람 이고 나이가 37살인데
10 여년도 더 아래 새파란 의대 갖 졸업한 친구들이랑 같이 레지덴트
생활을 하려니 처음 6개월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3 개월 마다 있는 레지덴트직 수행 평가 상담때 마다 들은 주의는
일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너는 더이상 마취과 교수도 아니고 Attending 이 아니라
레지덴트니 그에 걸 맞게 행동 하라는 것이었다.
몸에 붙었던 풀기 빼는데 한 일년 이상 걸린 것같다.
아침에 출근 하면 아직 담배 피울 때라 담배 한대 물고 커피 한잔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마음속으로 수십번씩 되풀이 했다.
'나는 레지덴트다.' '나는 레지덴트다.''나는 레지덴트다.''나는 레지덴트다......'
나는 바쁘게 일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내 식구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집 사람 은 내가 등을 밀다 싶이 하여 영어도 잘 못 하는 사람을
학교에 Voluteer로 내보내기도 하였고 일부러 심부름 도 많이 시켰다.
일년 후에 레지덴트 생활이 하도 힘들어 다른 과로 바꿀까 하여 다른
도시에 있는 친구를 찾아 갔다 왔더니 우리 큰 아들이 얘기 한다.
'아빠 우린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여기 왔고 와서 보니 우리가 마치
깊은 바다밑에 앉아 있는 것 같이 남들이 입을 벙긋벙긋 하고 있으나
무슨 소린지 하나도 들리지 않다가
이제 겨우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고 친구들도 하나씩 겨우 사귀어 가고 있는데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자니 우린 못 해요!'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래 내가 잘못 했다. 내 위주로만 생각 하고 이국 타향에 말도 않통하는 곳에
내가 너희 들을 강제로 끌고 왔구나.
미안 하다. 용서 해 다오. 내가 죽기 살기로 여기서 끝장을 볼 터이니
너희들 조금만 더 참아 주겠니? 하니 그리 하겠단다.
속이 쓰리고 눈물이 나오려 하였으나 억지로 참았다.
이렇게 하여 나의 레지덴트 3년은 계속 되었고 어쨋거나
나는 살아 남았다.
(추후 계속 예정)